(EP.76)076
"뭘 하시냐고 물었습니다. 다 보입니다."
"…그."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의 눈은 틀림없이 날 보고 있었다.
"이제 막, 아케즈로 복귀하려는 참인데요."
남자는 아무 말없이 나를 직시했다.
직시하다가, 갑자기.
'어?!'
내 위를 바라본다.
말없이 내 위만 바라본다.
마치 누군가와 시선을 맞추는 듯하다.
남자가 바라보는 그곳에는──
'델라즈가 있을 텐데?'
머리가 멍해졌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얼른 귀국하시지요."
제대로 대답도 못하고 등을 돌려 뛰었다.
'씨발! 8서클이야?!'
황궁을 완전히 벗어나고, 차를 주차했던 곳까지 날아갔다.
운전석에 앉고, 조수석이 덜컹거리는 것까지 확인한 후 로렌스로부터 거리를 벌렸다.
거리를 충분히 벌리고 나서, 차를 세웠다.
엉덩이의 아픔마저 느껴지지 않았다.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아재. 씨발, 저거 8서클 맞죠."
델라즈가 모습을 드러냈다.
"맞다."
"씨발."
"난 아타나시아 직통이야. 그런 날 눈치챘다."
"베르노바 직통이에요?"
"아마도."
아, 씨발 진짜.
베르노바 이 미친 새끼.
로렌스 놈한테 직접 명예를 수여해줬다고?
"내가 회중시계 들고 있는 거 알고 안 죽인 걸까요?"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혼자서는 너랑 나, 둘을 감당할 힘이 안 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과연.
"역시 격만 높으면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닌가보네요?"
"다른 요인도 한몫한다. 마나량이라던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다.
이런 걸 다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당장 로렌스 밀어버리는 거 난이도만 조금 올라갔을 뿐이다.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진정하자.
"아재랑 나, 둘이면 이길 수 있네?"
"그럴 확률이 높긴 한데, 난 아케즈 밖으로 못 나간다."
"…나 혼자서 저거 이길 수 있어요?"
"장담은 못 한다."
알폰스 모가지를 따는 데 방해되는 요소가 하나 늘어나버렸다.
내 계획은 대인전투를 내가 이긴다는 가정 하에 이루어진다.
저 남자를 못 이기면 아무것도 안 된다.
"…아."
아니, 아니다. 가능성이 하나 있다.
알폰스가 말했지. 화룡은 감당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어렵다고.
8서클임에도 불구하고 쉽지 않다고 말한 거다.
마나로 찍어누르기가 불가능하다는 뜻, 마나량이 상당히 적을 것으로 유추된다.
화룡은 잡을 수 있다는 것으로 보아 수(水) 아니면 토(土)에 적성이 있는 거 아닐까.
아니, 아니다. 고작 7서클 토룡을 못 잡았다. 같은 토속성은 아니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다.
카체보우스를 써 은신하고 알폰스 모가지를 따는 게 목적이었다마는, 그건 불가능하게 됐다.
나라는 사람이 건너편에서 버티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이상 알폰스도 그 남자를 멀리 떼어놓지 않겠지.
무엇보다, 알폰스를 먼저 죽인다고 해도 그 남자가 쉽게 떨어져나가진 않을 거다.
무려 베르노바 직통인데도 로렌스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는 거다.
나였으면 당장 아케즈 왔을 텐데.
알폰스에 대한 충성심이 하늘을 찌르겠지.
"…그냥 아저씨 몰래 나오면 안 돼요?"
"베르노바가 날 순순히 보내줄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하."
아니다, 당장 할 수 있는 걸 하자.
회중시계에 마나를 흘려넣었다.
허공에 반투명한 창이 떠오르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아론과 알폰스다.
운좋게 아론과 알폰스의 모습이 보이는 각도까지 완벽했다.
- 메티브는 죽여야만 했다. 애초에 그걸 위해서 맺은 서약이 아니었나?
- 그렇다면 에르 그 아이는….
- 아카데미의 성적을 조작한 죄는 상당히 무겁다. 내 경의 부탁을 들어 노브까지는 살려두었지. 이야기는 그걸로 끝난 게 아니었던가?
- …그렇사옵니다.
이외에도 메티브가 아론과 알폰스의 주도 하에 죽었다는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이건 됐다.'
적나라하다. 증거로 활용하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날 죽이려 드는 증거를 못 잡았어.'
이게 가장 문제인데. 그래도 일단 해봐야지.
각국에 접견을 요청하러 가는 거다.
"갑시다."
"페토라르, 오르가니아, 탁큰 방문할 때는 아타나시아 대동해라. 아타나시아 명령이다."
"굳이요?"
"혼자 보내기 무섭다던데."
반박하고 싶었으나 할 말이 없었다.
나도 내가 저지른 행적을 객관적으로 보면 정상의 범주에서 한참 벗어나 있는 걸 아니까.
"알겠어요."
날아갈까 싶었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그런 기분이 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니었다.
액셀을 밟았다.
**
"아놀드 경, 오랜만일세."
아놀드라고 불린 남자가 알현실에 들어가자마자 들은 소리가 그것이었다.
알폰스가 웃는 얼굴로 환대해주는 것을 본 아놀드는, 방 정중앙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군례를 취했다.
"상회 쪽은 잘 마무리했나?"
"피해를 최소화시켰습니다."
아놀드는 로렌스의 상회 총독에서 벌어진 일을 수습하고 이제 막 돌아오는 참이었다.
총독 내부에서 불온한 말이 오가는 것을 들었던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실패했다, 라고.
아케즈에서의 화락조 사업을 주도하던 자가 아놀드였다.
화락조 사업이 실패하고 마무리 작업을 할 때쯤, 그는 한 상인에게서 정보를 얻었다.
에레브.
"그래서, 갑자기 이리 찾아온 이유가 뭔가?"
"사업을 방해한 자가 누구인지 알아냈습니다."
알폰스의 눈빛에 흥미가 돋았다.
"누구지?"
"아케즈, 레블의 아카데미 교수 노바 에레브입니다."
알폰스가 멈칫했다.
"…에레브라고?"
"그렇습니다."
"확실한가?"
"화락조 사업을 직접 발로 뛰던 상인으로부터 얻은 정보입니다."
알폰스가 이마를 쓸었다.
"…뭐, 됐다. 이미 끝난 일."
"그것 말고도, 한 가지 보고드릴 게 더 있습니다."
"뭔가?"
"그 여자, 아마도 폐하의 집무실을 들어갔다 나온 것 같습니다."
에레브가 은신한 상태로 날아온 방향은 확실히 집무실 쪽이었다.
애초에, 은신까지 해가면서 몰래 오가야 할 곳이 어디 있겠는가.
에레브가 빠져나온 곳 근처에는 알폰스의 집무실 외에는 굳이 '몰래' 드나들어야 할 곳이 없었다.
"무슨…."
알폰스가 기억을 헤집었다.
에레브가 집무실에 굳이 몰래 들어와야만 하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할 말이 있다면 문으로 들어와 직접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지 않은 이유가 뭔가.
무언가를 들고 나오기 위해 몰래 잠입했다.
그런 이야기밖에 되지 않았다.
알폰스의 기억으로는, 에레브가 몰래 가져갈 물건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나마 중요한 게 있었다면 처리하던 서류였을까.
하지만 그 서류들은 모두 알폰스의 근처에 있었다.
서류를 가져갔더라면 자신이 눈치챘을 터였다.
서류를 가져가려고 들어왔다가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냥 나간 것인가?
'아니다.'
알폰스는 에레브를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적어도 수행능력의 면에서는 그러했다.
확실치 않은 모험 따위, 에레브가 강행할 리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무언가 확실한 것을 가지고 나갔다?'
알폰스 자신도 모르는 확실한 무언가가 대체 무엇이 있는가.
그렇게 생각하니 떠오르는 게 하나 있었다.
'뭔가를 설치했던 거다. 집무실에 직접 들어온 적은 없으니, 아마도 나에게 무언가를 붙여놓았을 터. 집무실을 포함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내가 갖고 다닌 건 옷밖에 없다.'
옷에 무언가를 붙여둘 기회가 도대체 언제 있었는가, 그렇게 따지면 기회는 분명 많았다.
'…무방비했군.'
몰래 가지고 나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알폰스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는 것.
당사자에게 들키면 안 되고, 몰래 붙였다가 가지고 나가야만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하면, 한 가지밖에 없었다.
"…회중시계다."
"예?"
"내 옷에 회중시계를 붙여놓았어. 그걸 가지고 나간 것일 터다."
알폰스의 표정은 썩어 있었다.
"문제가 될 만한 이야기를 하신 게 있으십니까?"
"…아론 경과 메티브, 에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
"죽인 것까지 말입니까?"
"그렇다."
알폰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반면에 아놀드는, 알폰스의 말을 듣고 곧바로 계산을 때렸다.
'이쪽에서 죽인 증거를 갖고 있더라도, 그것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다.'
그것만은 확실했다.
여차하면 범죄자를 자체적으로 처단했다는 명분으로 삼으면 되었다.
"괜찮습니다. 그것만으로 할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베르노바와의 신뢰가 깨질 수 있다."
"어차피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알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문제가 될 여지를 남기지 않겠다고 했건만, 그 약속이 깨지게 되었다."
알폰스와 베르노바가 맺은 약속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알폰스가 아케즈를 천천히 집어삼키기 위한 여러가지의 장치들을 문제가 되지 않게 들키지 않는 것, 그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알폰스가 이마를 짚었다.
"…차라리 죽여버리지 그랬나."
"그럴 수 없었습니다."
"왜지? 에레브는 기껏해야 7서클이다. 아놀드 경, 그대는 베르노바에게 명예를 직접 이어받은 8서클이지 않는가."
아놀드가 더더욱 고개를 숙였다.
"델라즈 교수가 함께 있었습니다."
"함께…?"
"카체보우스, 은신을 한 채로 에레브의 곁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점입가경이었다.
알폰스는 입에서 육두문자가 나오려는 것을 최대한 참고 말했다.
"둘 다 죽여버리면 되는 문제 아닌가? 이럴 때를 대비해서 메티브 대신 경을 베르노바로 만들어준 것 아닌가. 델라즈 교수 정도는 쉽게 처리할 수 있을 터."
"일 대 일로는 분명 이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격이 높다고 해서 무조건적인 승리를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그럼, 아니라는 건가?"
"여러가지 요인이 간섭할 수 있습니다."
알폰스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알겠다. 잘 주시하게. 그대가 아케즈로 은신해 파고들어 둘을 암살할 수는 없는가?"
"저쪽에는 아타나시아가 있습니다."
"쯧, 별 수 없군. 잘 주시하게."
아놀드가 경건히 답했다.
"알폰스를 위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