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5)075
당연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델라즈는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히려 그것이 내게 안심을 주었다.
'나를 위해.'
로렌스를 짓밟아두어야 하는 건 맞다.
그래야 내가 현실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하게 되니까.
다만, 내가 그 여건을 만드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죽어나갈 것이라는 걸 나는 깨달아버렸다.
아니, 이전에도 알고 있었다.
다만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다.
막연히, 아, 사람이 죽겠구나, 다치겠구나, 이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걸 방금 거리를 다녀오며 나는 깨닫고 말았다.
내가 희생시키려는 것도 결국에는 사람이라고.
분명 나는 이기적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남을 희생시킬 각오가 되어 있다.
그럼에도 머뭇거리게 된다.
'사람.'
나는 아직도 머릿속의 취기를 날려보내지 않았다.
취기마저 사라져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하게 됐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무서웠다.
취기가 날아가기 전에, 생각을 해야 한다.
생각을.
내 생각은 아직도 바뀌지 않았다.
전쟁은 일으킨다.
대신, 피해를 최소화시킬 방법을 찾는다.
'로렌스.'
나는 로렌스와 아케즈의 전쟁을 벌이려고 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아케즈는 간판만 내걸을 뿐 속살은 타국에서 챙겨온다.
전쟁을 벌이려는 근본적인 이유가 뭔가.
아케즈를 향하는 위협을 배제하기 위해서다.
아케즈를 향하고 있는 칼날의 손잡이를 누가 쥐고 있는가.
'알폰스.'
그리고 알폰스, 황실을 지지하는 세력들.
로렌스의 수족을 잘라내는 것도 물론 위협을 배제할 수 있지만, 아예 모가지를 썰어버리는 것도 위협을 배제할 좋은 수단이 된다.
손발이 잘린 머리는 다음을 기약하며 분을 갈 수도 있지만, 머리가 잘린 손발은 자아가 있다면 각자 살길을 찾아 떠난다.
'전쟁은 최대한 빨리 끝낸다.'
알폰스를 죽이는 것을 제1의 목표로 삼는다.
베르노바를 형제라고 부르는 것을 보아, 베르노바를 죽이기 전에 어차피 죽여야만 하는 인물이다.
아케즈를 집어삼키려는 야망을 갖고 있는 놈만 죽이면, 다른 사람들은 죽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알폰스를 죽이기만 하면 된다.'
알폰스를 죽이면 로렌스는 제기능을 못하고 잠깐이라도 불구가 된다.
그렇게 만들어버린 후, 베르노바를 죽인다.
베르노바가 죽고 난 후라면 로렌스 따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지금 당장 죽일까?
'안 된다.'
죽이는 것 자체는 쉽다.
하지만, 알폰스가 시체로 발견되었을 때, 누가 알폰스를 죽였냐에 대한 색출이 이루어진다.
아케즈는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입장에만 놓여야 한다.
명분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저지른 복수는 단순한 범죄이다.
명분을 잡아서 열국을 설득해 공격할 기회를 잡는다, 라는 논리가 로렌스에게 똑같이 작용될 수도 있다.
암살은 불가능하다.
'알폰스만.'
알폰스의 목을 따고, 그럼에도 저항하는 놈들이 있으면, 그놈들을 때려잡는다.
그것이 나의 목표.
사상자를 최소화한다.
**
결국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쩐지 마음이 싱숭생숭해 취기는 날리지 않고 멍하니 달빛을 맞으며 운치를 즐기다가, 책을 읽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아침이 다 되어서야 바리에이션으로 취기를 날려버렸다.
회중시계를 갖고 마나를 계속 흘리고 있었지만, 새벽에 내 방을 찾아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이상했다. 날 죽이지 않는다니.
아직 로렌스에서 머물어야 하는 시간은 있다.
새벽이 가장 좋은 시간대이긴 하지만, 오히려 내가 잠들지 않는 것을 예측하고 아침에 시도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간밤에는 잘 주무셨습니까?"
나를 식당으로 안내하며 다나가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내 애매한 대답에 다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당에 도착하니 알폰스가 먼저 앉아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의자는 알폰스가 앉고 있는 것을 포함해 세 개밖에 없었다.
나는 말없이 알폰스의 건너편에 있는 의자에 가 앉았다.
"왔군. 앉아서 들게나."
"감사합니다."
다나도 마찬가지로 남은 자리에 앉고, 나는 멍하니 음식을 씹었다.
밤새 생각을 정리하긴 했는데, 전부 정리되진 않은 느낌이다.
어쩐지 의식이 붕 떴다.
"밤에 황궁 밖을 다녀왔다지?"
"네."
"어떻던가?"
뭘 묻는 거지.
"아케즈와는, 레블과는 다른 매력을 갖고 있었어요."
"진심인가?"
"적어도 이쪽이 제 취향에는 맞네요."
알폰스는 예상 외의 말을 들었다는 눈치다.
식기를 멈추고 눈을 껌뻑인다.
"좋아해주니 고맙군."
"폐하께선 안 좋아하세요?"
"짐도 물론 좋아한다. 다만 황궁 밖으로 나갈 일이 그리 많이 없으니 체감하지 못할 뿐이다."
알폰스는 또 나름대로 그만의 고충이 있는 것일까.
잘 알지 못하겠다.
"괜찮다면 식사 이후에 바로 연구동으로 향해도 되겠는가?"
"네."
"고맙네."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각자 접시를 비운 다음, 연구동으로 향했다.
"비가 내렸군."
알폰스가 중얼거렸다.
확실히 비가 들어쳐 바닥이 미끄러웠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히 걸으며 이슬을 담고 있는 나뭇잎들을 구경했다.
"생각해보니, 어제 나갔을 때 비를 맞지는 않았는가?"
"우산을 만들어 썼습니다."
"아아, 인카르너를 말하는 것이군."
연구동 앞에 도착했다. 어제와는 다르게 사람들이 건물 안을 돌아다니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며 알폰스가 말했다.
"6층부터는 접근을 금지시켰다. 혹시 모르니 말이지."
오룡이 진짜 다시 살아나기라도 했으면 1층부터 5층까지 있는 사람들 전부가 위험한데요, 하고 말해버릴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내었다.
진짜 왜 그랬대. 그러다 큰일 나요.
연구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5층에서 6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올라왔다.
"짐이 같이 가야 하나?"
"같이 확인하시는 편이 좋죠."
"과연,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대가 날 지켜주겠군."
6층에는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빠르게 치고 올라갔다. 7층, 8층, 9층, 모두 어제와 똑같았다.
다만 연구동 전체에 고여 있었을 물이 빠진 것이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10층에 다다랐다.
"그대로군."
알폰스의 말대로였다.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언가 느껴지는 게 없냐는 그의 말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답해주었다.
"금강도 확인해주겠나?"
와즈로 날아올라 금강의 상태를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어제와 다를 게 없다.
"문제가 없는 것인가?"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다행이군. 감사를 표한다."
다시 계단을 통해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4층을 쓱 흝어보니 아직도 내 인카르너가 플룻래빗들을 감싸고 있었다.
"폐하. 저것 좀 해결할게요."
"음?"
알폰스에게 플룻래빗 쪽을 가리켰다.
그는 흔쾌히 허락하고 먼저 내려갔다.
연구원들에게 다가가니 안 그래도 내 막 때문에 곤란해하고 있던 참이었다. 해제해주었다.
"…."
플룻래빗은 두 마리밖에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것만 해도 스무 마리는 가뿐히 넘었는데.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내 잘못인 것 같아서 사과했다.
"아닙니다. 원래 이러는 게 정상이에요."
하지만 연구원들은 웃으며 손사래쳤다.
하긴, 이들도 플룻래빗으로 연구를 했으니 좁은 곳에 가두어두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는 있겠지.
그럼에도 그냥 저대로 방치해둔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고 연구동 밖으로 나왔다.
알폰스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는 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할 거 다 했으니까 돌아가야지.
이제 알폰스의 바지에 매달아두었던 회중시계만 회수하면 된다.
같은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아 지금 달고 있을 것 같긴 한데, 지금 당장 회수하기는 무리군.
돌아가는 척하고 은신해서 가져가야겠다.
"아쉽군."
알폰스가 저 멀리를 내다보았다.
"짐은 그대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네."
"예?"
"로렌스로 넘어오지 않겠는가? 그대를 등용하고자 한다. 제안이지."
알폰스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적어도 메티브와 같은 시선은 느껴지지 않는다.
음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소리다.
이성으로써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제 어느 부분이 말인가요?"
"그대의 강함에 반했다."
"저보다 강한 분들은 많아요."
"하지만 모두 원로원 소속이지. 아케즈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지고 보면 나도 7서클이라 징집 대상에 포함되긴 한다마는, 원로원이 아닌 걸로 교묘하게 빠져나갈 뿐이다.
"제 목표는 원로원입니다."
"그대를 위해 충고를 하나 하지."
알폰스가 씨익 웃었다.
소름이 돋았다.
"어차피 그렇게 되더라도 그대는 짐의 것이 된다. 시기를 앞당길 뿐이다."
내심.
내심,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알폰스가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은, 그래도, 내가 예상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아케즈를 적극적으로 집어삼키려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날 죽이려 들지 않는 것을 보고 계획을 수정해야 하나,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방금 저 말을 듣고 생각이 바뀌었다.
'협박이다.'
거절하면 죽이겠다는.
그리고, 그건 내가 지금 원하는 상황이기도 하지.
"사양하겠습니다."
알폰스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수 초가 지나고, 알폰스가 손을 거뒀다.
"별 수 없군."
"예?"
"아쉽다는 뜻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등용할 수 있길 바라지."
뭐야.
나 안 죽여?
"짐이 일이 밀려 문까지 배웅은 못 해준다. 성대히 보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군. 부디 몸 성히 귀국하게나."
"자, 잠시만요."
나도 모르게 등을 돌리려는 알폰스의 옷을 잡았다.
다나가 그런 내 모습을 보자마자 손을 잡아떼었다.
살짝 고통이 일었다.
"다나, 진정하게."
"…."
"에레브 양, 아직 일이 남았나?"
말문이 막혔다.
막혔지만, 간신히 대답했다.
"제가 머물던 방에, 놓고 온 게 있습니다."
"그런가? 그럼 같이 가지."
알폰스가 다시 등을 돌려 앞장서고, 그 뒤를 얌전히 따랐다.
'시발, 뭐지? 뭐 하자는 거야?'
델라즈의 파견을 요청했던 건, 진심으로 오룡을 때려잡기 위함이었던 건가?
잘 판단이 되지 않았다.
내 방에 뭘 두고 왔다는 건 진심이었다.
미처 백을 챙겨오지 못했다.
다나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와 백을 챙긴 후, 황궁을 나오는 척하고 은신했다.
"노바, 카체보우스."
알폰스는 집무실에 있는 듯했다.
황궁 내부를 뒤진 결과 알 수 있었다.
문을 직접 열고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날아서 건물 밖에서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다행히도 알폰스는 앉아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편한 옷을 입는 듯, 내가 회중시계를 붙여놓았던 바지는 저 멀리 걸려 있었다.
회중시계를 떼어내서 챙기고, 다시 창문으로 날아올랐다.
'된 건가.'
여기 뭐라도 찍혀 있어야 뭐가 좀 될 텐데.
이거 잘못하면 다 꼬이게 생겼다.
날 죽이려 드는 증거도 잡지 못했으니 여기에 메티브와 에르를 아론, 로렌스에서 죽였다는 증거가 찍혀 있어야 한다.
황궁의 길을 따라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를 죽이려 들었다는 증거를 잡지 못하는 이상, 계획은 진행시키지 못한다.
'씨발.'
좆된 것 같은데.
그때.
"뭐 하십니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와 눈이 맞닿았다. 시선이 맞닿았다.
'어?'
나 아직 은신 안 풀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