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047
델라즈는 바로 여기, 벤치에 넋을 하늘로 올려보낸 채로 앉아 있었다.
에레브가 사둔 갖가지 음식들을 기계적으로 입에 집어넣으며 그는 생각했다.
'운동회라.'
그는 운동회를 세 번째로 맞이했다.
원로원에 입단하자마자 교수직을 떠맡고 바로 운동회에 참여해 여러 고생들을 한 걸 생각하면, 델라즈는 결코 운동회에 긍정적인 생각을 품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음이 좀 편하다.
델라즈 대신 고생할 명목상의 제자가 한 명 생겼기 때문이다.
에레브를 앨버트에게 보낸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에레브는 곁에 둬봤자 심심하다면서 땡깡을 부릴 터였다.
그럴 바에는 혼자 초연히 벤치에 앉아 먹을 걸 먹는 게 나았다.
'묘하게 앨버트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지.'
델라즈가 아타나시아와 함께 에르와 메티브를 고문한 날, 에레브가 앨버트가 어디있냐며 에르에게 물었을 때, 델라즈는 눈치챘다. 그 전까지만 해도 즐겁게 총을 쏘아대던 밝은 분위기와는 다르게, 앨버트의 위치를 물을 때는 그 또한 에레브에게서 살기를 느꼈다.
마나는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도를 닦은 것처럼 마음의 평화를 깨달아 잔잔한 호수마냥 평정심을 유지하면 마나의 활용과 운용 가능의 범위가 한없이 넓어진다.
그와 반대로 감정이 오르락내리락거리면 마나도 그에 맞춰 수면에 폭포가 쏟아지는 것처럼 요동친다.
그때 에레브가 보인 마나의 흐름은 폭포 그 자체였다.
- 에레브는 만족하지 못할 거다
델라즈가 아타나시아에게 전했던 말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에레브는 에르와 노브를 괴롭히며 얻을 만족감보다, 앨버트를 구하는 것을 우선했다는 말이었다.
비록 아타나시아의 제지 하에 고문은 중단될 수밖에 없었지만, 델라즈는 에레브가 앨버트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델라즈가 이를 눈치채고 아타나시아에게 의뢰했다.
앨버트라는 학생의 뒷조사를 부탁했다.
며칠이 지나고 아타나시아가 알아온 앨버트의 정체는 델라즈에게 있어 결코 좋게 보일 수 없었다.
우선, 마법사가 되기 전까지는 노예였다.
델라즈 또한 노예였기에 태생이 더러워 차별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델라즈가 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면서 보인 행도에는 그도 눈가를 찌푸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예고 없는 무단 도주로 빅피그 다섯 마리가 축사로부터 도망쳤다.
빅피그의 크기는 생각보다 어마어마하고, 힘도 세다.
차라리 황소를 상대로 투우를 하는 게 빅피그 다섯 마리를 잡는 것보다는 쉬울 터였다.
날뛰는 빅피그에 의해 피해를 입은 노점은 총 넷.
그중에는 마타샤의 가게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타샤는 그럴만 해.'
빅피그가 도주한 것도 모자라 빅피그가 날뛰어 가게까지 엉망이 됐다.
마타샤는 피해자 그 자체였다.
그래, 여기까진 괜찮았다. 괜찮았는데, 델라즈는 나머지 하나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앨버트가 마법사가 된 과정이 이해 가능한 범주에서 벗어났던 것이다.
그가 마법사가 된 과정을 추론하자면, 생살이 불에 태워지는 고통을 겪어 마나의 운용을 터득했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앨버트가 사용하는 마법의 속성마저도 불이었다.
'우연히 불에 타죽을 위기를 넘기며 마나의 운용법을 깨우쳤단 말인가.'
이 점에서는 델라즈는 그를 불온하게 여기는 동시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6년을 노예 신분으로 살다가, 불에 타죽을 뻔한 위기를 넘기며 마나의 운용을 깨우치고, 보다 높은 경지에 이르기 위해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매우 성실했다.
그의 뒷배를 받쳐주는 가문 또한 무엇 하나 걸릴 거 없이 깨끗했다.
이제는 마법사지만, 하지만 노예였던 앨버트를 거두어서 어엿한 한 명의 사람으로 대접해주었다.
앨버트 한 명에게만 그랬나? 아니었다.
그의 가문──'헤토'는 지금까지 총 여섯 명의 부모 없는 노예를 거둬들여 사람으로 취급해주었다.
마법사만 거둬준 것도 아니었다.
그 여섯 명 중 마법사는 오로지 앨버트 하나였다.
'에레브가 앨버트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또 무엇인가.'
사업 동지로서, 이것 만큼은 알아내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델라즈였건만, 대체 어떻게 운을 띄우면 좋은 것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자신을 여자로 취급하는 것에 분을 키우던 에레브다.
왜 남학생한테 집착하냐고 물으면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델라즈는 쉽게 유추해낼 수 있었다.
고민해도 소용없음을, 당사자한테 물어볼 수 없다면 오히려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델라즈는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델라즈 옆에 앉아 있는 페일리에게로.
에레브가 사온 음식들 중, 그 어느 것에도 페일리는 입을 대지 않았다.
혼자 음식을 씹던 델라즈가 괜스레 무안해져 먹기를 권해도 페일리는 요지부동했다.
그녀가 툭, 하고 내뱉은 말은 이러했다.
- 에레브 교수님 오시면 같이 먹을래요
에레브는 앨버트 일을 전부 도와주고 돌아올 텐데──하고 짐작하는 델라즈였다.
"에레브, 아마 금방 돌아오진 않을 거다."
"네."
"이거 다 먹고 에레브 오면 다시 사러 가는 게 더 나을 텐데."
"전 에레브 교수님이랑 같이 먹고 싶어요."
델라즈는 앨버트를 향한 에레브의 집착과도 비슷한 것을 페일리로부터 발견했다.
페일리 또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에레브에게 집착하고 있다고, 델라즈는 생각했다.
"에레브를 존경하나?"
"스무 살의 나이에 노바에 오르신 분인걸요. 당연하죠."
그놈 그거 사실은 스물일곱이다, 하는 산통을 깨는 뒷말을 굳이 붙이진 않았다.
따지고 보면 남자의 몸으로 노바를 찍은 것도 대단한 업적이니 말이다.
"몇 서클이지?"
"2서클이요."
마학의 수강은 2서클까지만 가능하지만, 본인 희망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페일리는 3서클로 올라가도 에레브 곁에 남아 있을 듯했다.
이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페일리는 그저 앞만을, 더욱 정확하게는 상점이 있는 본관 구석을 응시했고, 델라즈 또한 공원을 바라보았다.
- 여기로 넘겨!
- 야, 이 멍청아! 그걸 왜 쓰러뜨려!
- 깃발을 사수하지 못한 놈은 지금부터 딱밤 만이천삼백팔십칠 대다.
- 왜 그렇게 세세한데?!
- 이겨서 화락조 먹자고!
깃발을 사수하는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깃발을 사수하는 학생들과, 그를 빼앗으려는 학생들 간의 싸움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싸움은 3서클 음(音)과와 견(見)과 사이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읽는 데 특화되어 있는 아이들과, 보는 데 특화되어 있는 아이들.'
요컨대 전공과목이었다.
델라즈는 저런 분야까지 세세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에 첫 번째로 감탄했고, 두 번째로는 아이들의 저 피까지는 튀지 않는 혈투가 오로지 화락조를 맛보기 위해서라는 것에 감탄했다.
양식을 막았더니만 화락조에 대한 사람들의 광기는 나날이 거대해지고 있었다.
'평화롭네.'
그가 노예였을 적.
이런 평화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때의 델라즈에게로 가서 '너는 베르노바가 되어서 편하게 살 수 있어' 라고 말해본들 미친 놈 취급을 받으리라.
그 정도로 그때와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노델른, 노예를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상회.
'하루빨리 해체시키고 싶다만.'
아쉽게도 통령은 노예를 '필요에 의한 악'이라고 규정하며 노예제도를 폐지시키지 않았다.
한 평생 살면서 그만한 개소리를 두 번 듣기란 어렵다고 생각하는 델라즈였다.
노예 생활은 어둡고 험난했다.
인권이 보장되지 않았다.
노예는 인간으로 취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예들은 주인에게 귀속되었다.
주인의 명령에는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하며, 주인이 죽을 시에는 똑같이 목숨이 끊어진다.
노예에게 있어 주인이란 자신의 명줄을 잡고 있는 신과도 같은 존재였다.
델라즈는 신을 믿지 않았다.
구절로 전승되어온 세 명의 여신.
그녀들은 그저 한 줌의 이야깃거리에 불과할 뿐, 실존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했다.
다만, 실존한다는 증거가 아직은 남──
"델라즈 교수님."
"응?"
한참 상념에 빠져 있던 델라즈가 부름에 뒤늦게 대답했다.
한참을 상점 쪽을 응시하던 페일리가 델라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러냐?"
"에레브 교수님은, 언제 오실까요?"
'이 아이는 에레브에 진심이다.'
물론, 아이들에게 있어서 에레브는 선망의 대상이다.
스무 살이라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노바이고, 베르노바의 제자이며, 외모까지 출중했다.
남학생이라면 그 미모에, 여학생이라면 그 지력에, 혹은 어느 쪽이든 그 두 가지 모두에 혹할 가능성이 다대했다.
"앨버트와 같이 올 거다."
페일리는 마치 델라즈의 방금 말이 들리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에레브 교수님의 로브, 델라즈 교수님이 골라주신 건가요?"
뜬금없는 물음에 델라즈가 답했다.
"그래."
"에레브 교수님한테는 안 어울려요."
과거 학과 제자였던 아이에게 미적 감각에 대한 신랄한 평가를 받으니 정신이 아뜩해지는 델라즈였다.
"에레브한테는 무슨 색이 어울리냐?"
"검붉은 색이요."
"왜냐?"
"악마 같고 멋지잖아요."
이 세계에 악마는 실존한다.
말 그대로 악(惡), 그 자체를 대표하는 마인(魔人)이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피한다.
악마를 멋에 빗대어 표현하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거니와, 그것을 검붉은 색으로 표현한다는 발상 자체도 불순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검붉은 색 로브들이 악마 취급을 받아 팔 수 없게 되면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 불쌍해지지 않는가.
"하얀색 로브, 앨버트가 선물한 거에요."
남학생이라더만 앨버트였나.
델라즈가 에레브의 말을 상기했다.
"제가 검붉은 로브를 선물해드려도 괜찮은 걸까요?"
이 아이도 악마를 색에 빗대어선 안 된다는 걸 인지는 하고 있는 듯했다.
"괜찮지 않을까. 검붉은 색은 애초에 인기가 많은 색이다. 무엇을 걱정하는지는 알겠다만, 그걸 억세게 신봉하는 사람은 적다."
"에레브 교수님이 그런 사람이진 않겠죠?"
"그런 사람이었으면 내가 제자로 삼지도 않았을 거다. 마법은 결국 마(魔)를 기원으로 두고 있으니 말이다."
페일리가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로 얼마나 더 시간이 흘렀을까, 음식이 전부 동날 때쯤 에레브가 저 멀리서 걸어오는 게 델라즈의 눈에 띄었다.
"저기 오는구나."
델라즈의 말에도 페일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에레브가 걸어오는 것을 직시할 뿐이었다.
"미안해요. 좀 늦었죠?"
에레브가 당도해 바구니를 뒤지며 말했다.
"…왜 아무것도 없죠?"
"페일리랑 다시 사러 갔다 와라."
"설마 그걸 다 드셨어요?"
"네가 음식 보는 안목은 있구나."
에레브가 투덜거리며 바구니를 들었다.
"페일리, 앨버트, 갑시다."
"저까지요?"
"너도 일하느라 못 먹었을 거 아니에요."
에레브가 둘을 대동하고 멀어지는 것을 보고, 델라즈는 생각에 잠겼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저놈은 도대체 어디로 가려는 것이지?'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도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