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억을 위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38화 (38/247)

(EP.38)038

- 많이 다쳤구나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에 눈이 퍼뜩 뜨였다.

아니, 이걸 눈을 떴다고 표현할 수 있을까.

눈꺼풀이 위로 들려진 게 아니라, 눈꺼풀 너머로 투시하는 느낌이었다.

- 너는, 이계의 아이로구나

그래, 저 말이다. 기억났다.

저게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처음으로 들은 사람의 말이었다.

맑고 청아한 여성의 목소리, 온몸을 흰색으로 도배한 여자가 나를 감싸고 했던 말이다.

사실 다치고 말고 할 것도 아니었다.

그냥, 홀에서 튀어나와 구르면서 생긴 생채기에 불과했지만, 여자는 그걸 간단하게 치료해주었다.

- 어디에서 왔니?

나는 그 물음에 지구라고 대답했다.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에서, 갑자기 시선이 암전되더니 눈에 보인 게 여기입니다, 라고 말했다.

내 말에 여자가 당혹스럽게 말했다.

- 그런 곳은 들어본 적 없어

여자는 나를 감싸던 팔을 풀어주고 일어섰다.

졸지에 부축받은 나도 함께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어쩌면 감겨 있을지도 모르는 눈꺼풀 너머로 내가 겪은 과거를 보고 있다.

'자각몽인가.'

현실에서도 여기에서도 자각몽은 처음 꿔본다.

악몽 같은 건 자주 꿔봤어도 자각몽이라니.

나랑은 평생 엮이지 않을 것만 같았던 게 갑자기 튀어나왔다.

'델라즈 집에서….'

아타나시아가 오기 전까지 피로를 조금이라도 풀겠다는 심산으로 소파에 엎어져 누웠었지.

어쩐지 골이 심하게 울리더니만, 자각몽을 꿀 것이라는 암시였나.

허무맹랑한 소리지만.

- 가자

여자의 손을 잡고 있던 나는, 눈을 한 번 깜빡이니 황량한 황무지가 아니라 빈곤하더라도 사람들이 사는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여자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내 손을 놓더니 내 머리 위에 살포시 손을 올렸다.

- 노바

여자가 영창하자 여자의 손을 통해서 내 몸 속에 무언가가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분명 멀리서, 허공을 유영하며 내려다보고 있을 터인데, 감각은 분명히 내게 전달되었다.

'노바.'

단편적으로, 다만 편린으로 남아 있던 기억이 조립되는 듯한 느낌을 들었다.

없던 일을 창조해내 보여주는 '꿈'이 아니라, 있었던 일을 꿈을 통해 보여주는 '주마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여자가 노바다.'

온몸을 흰색으로 도배했다는 인상착의와, 내가 기억하고 있는 목소리가 일치했다.

'방금 그 행위를 통해 명예를 수여한 건가.'

이론 따위 내가 알 턱이 없으니까 차치하고, 적어도 방금 그 일련의 과정이 내 몸에 무언가 변화를 일으킨 건 사실이었다.

그 반증으로, 저 밑에 있는 내가 갸웃거리며 몸 상태를 확인하고 있다.

노바가 살포시 웃었다.

- 아직은 모를 거야

아직이라.

아직은 모른다, 라.

그렇다면 때가 되면 알게 된다는 말인가.

무엇을?

- 나는 이계가 궁금하구나

노바의 말로 유추해보건데 그녀가 말하는 이계란 내가 살던 세계를 말하는 것이겠지.

이계로부터 떨어진 나를 통해 이계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갔다, 대충 그런 말인가.

- 그는 반대했어

그는 누구고 반대했다는 건 또 무얼 반대했다는 뜻인가.

그녀는 알 수 없는 지극히 추상적인 정보들만을 입으로 뱉었다.

- 지금의 위치에 만족하는 듯했지

- 나는 그 이상을 목표로 두었어

- 그렇기에 많은 아이들에게 명예를 수여했단다

- 하지만 하나같이 다들 그 아래에 귀속되었지

- 너는 다를 거라고 믿어

- 내게 미래를 보여주렴

그녀는 몸을 일으키더니, 미처 깨닫기도 전에, 부지불식간에 사라졌다.

자리에 남은 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라 멍하니 현실을 부정하는 나밖에 없었다.

저 아래의 나는 방금 일어난 일이 생시인지 꿈인지도 분간하지 못해 비틀거렸다.

간신히 저 멀리에서 뛰놀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다가가 날짜를 물었지만, 제대로 씻지도 못한 듯한 아이가 날짜가 무엇이냐고 반문하는 것에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 오빠, 마법사야?

- 마, 법사?

- 응

- 그게 뭔데?

- 마법사가 아닌데 그렇게 깔끔한 옷을 입고 있을 리 없는걸

현실을 부정한 내 멍청한 반문에 아이가 내 옷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내가 입고 있는 츄리닝과 아이가 입고 있는 누더기는 같은 옷이라고 하기에 민망할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그제서야 실감이 좀 됐던 것 같다.

마법이라는 게, 존재한다고.

현실에 그런 게 존재할 리 없으니, 이것은 꿈이거나 다른 세계라고.

그리고 꿈이었다면, 바닥을 구르는 고통으로 이미 깨어나야만 했다는 것 또한 깨달았다.

내가 정신없이 내달린다.

이곳의 사람, 건물, 이 장소 자체를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부정하며 마을 바깥으로 달렸다.

어떻게든 떨어졌던 구멍으로 다시 들어가면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10분을 달리고 포기했다.

- 허억, 허어억, 쓰읍

10분을 내달려도 동굴은 커녕, 끝없는 황무지밖에 나오지 않았다.

해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보고 목숨에 위협을 느껴 마을로 다급히 복귀했다.

몇 날 며칠을 그렇게 노숙했다.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사람들과 대화가 통했다.

언어가 같은 것인지, 모종의 방법을 통해 번역이 되는 것인지는 몰라도, 말이 통한다는 것은 꽤 중요했다.

나는 현실에서의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하고 이 세계에 떨어졌다.

그나마 현실의 잔재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건 내가 입고 온 옷.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자 다 해져 버렸지만.

- 모험가 등록하러, 왔는데요

길드의 존재를 깨닫고 처음 들어갔을 때는 많은 이들의 시선으로 이루어진 질타를 받았다.

당연했다. 나는 체격이 결코 좋은 편에 속하지 않았다.

웬 멸치 새끼가 들어와서는 '나 모험자 하겠습니다' 하고 의사를 밝히는데 좋게 볼 리가 없었지.

하지만 그들에게 나를 만류할 권리 또한 없었다.

나는 성공적으로 모험가증을 받아들고 의뢰─잡일을 해결했다.

다만 굶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죽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120억을 버리고 어딘지도 모를 곳에서 죽을까보냐, 그게 내 생각이었다.

온갖 잡일을 도왔다.

심지어는 산모의 수발을 든 적도 있다. 농담이 아니다.

아기라는 게 틈만 나면 개복치처럼 울어재끼는 생명체라는 걸 그때 깨달았다.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마법을 깨우쳤다.

말 그대로 문득이다.

5원소마법을 전부 쓸 수 있는 나였기에 적재적소에 활용해가며 밥을 빌어먹었다.

그러다가 쥐 떼를 쫓는─

"에레브."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눈이 퍼뜩 뜨였다. 느낌이 새로웠다.

이미 나는 눈을 통해 무언가를 보고 있었건만, 또 다시 눈을 뜨다니.

나를 깨운 범인은 델라즈였다.

그 역시 내 건너편 소파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깨워요."

"벌써 한 시간이나 지났다. 슬슬 일어나라."

"…벌써?"

기껏해야 10분 남짓 된 줄 알았는데.

나는 엎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아타나시아는요?"

"아직은 소식이 없다."

길게 기지개를 켰다.

눈물이 찔끔 흘러나오는 걸 닦아냈다.

"화락조 사올까요? 배고픈데."

"아타나시아가 언제 올지 모른다."

종을 하나 만들어 나와 연결시키고 델라즈에게 건넸다.

일회용으로밖에 쓰지 못하겠지만.

"세 번 울려요."

"오는 데 시간 좀 걸리잖냐."

"커버쳐준다면서요? 텔레포트 쓰면 되지."

델라즈가 미간을 짚었다.

"솔직히 아저씨도 몸 움직여서 배고프잖아요. 그치?"

"…빨리 사와라."

델라즈의 허락이 떨어졌다.

"다녀올게요."

**

"아카데미에 무슨 일 있나요?"

화락조를 포장하며 마타샤가 말했다.

"플룻래빗이라고, 사람만 보면 도망가는 토끼 있거든요? 걔가 미쳐서 학생들 공격했어요."

"허어, 그럴 수가 있는 건가요."

"저는 잘 몰라요. 스승님이라면 모를까."

세간에는 그대로 제자 컨셉을 유지하고, 원로원한테만 뻗대기로 했다.

"다친 학생은 있습니까?"

"한 명 있었는데, 치료해줘서 괜찮아요."

마타샤가 건넨 박스를 받아들었다.

먹음직스럽게 요리된 화락조 다리 두 쌍이 안에 들어 있다.

"앨버트는, 괜찮아요?"

잠시 마타샤의 기색을 살폈다.

무슨 다른 뜻이 있어 묻는 건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진심으로 걱정을 한 듯하다.

둘의 관계가 보다 완만해졌군.

"앨버트한테는 문제없어요."

"다행이네요."

"걱정돼요?"

"물론이죠."

저들끼리 잘 풀었다면, 뭐 그런 거겠지.

더 이상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잘 먹을게요."

"저, 에레브 양."

"네?"

마타샤가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오늘 화락조가 들어오지 않았는데, 무슨 일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일은 잘 처리되고 있는 모양인데.

나중 가면 어차피 숨기지 못한다.

무려 상회 총독의 범죄 행각인 것이다. 그를 고발한 게 나고.

중요한 참고인으로서 작용할 것이기에 사건이 일단락됐을 때 알려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당분간은 물량 없을 수도 있어요."

"예?"

마타샤가 목소리를 순간 높였다. 주변 손님들이 이쪽을 쳐다보고, 마타샤는 소리를 죽였다.

간신히 시선들이 모두 떨어져나가자 마타샤는 다시 입을 열었다.

"왜인가요?"

"상회 총독이 화락조를 불법으로 양식하고 있었어요. 그걸 때려잡았습니다."

마타샤가 대경실색했다.

그녀는 잠시 큰 충격에 넋을 잃는 듯했으나 곧 정신을 차렸다.

"에레브 양.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마십시오."

"네? 왜요?"

"여기 상권은 모두 화락조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저야 빅피그로 충당이 된다지만 아닌 가게들도 많습니다. 갑자기 화락조의 유통이 끊기고, 그 발원지가 에레브 양이라고 해보세요. 분명히 들고 일어날 겁니다."

"…에이, 설마요?"

설마 사람들이 거기까지 생각이 없을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마타샤는 굳힌 표정을 풀지 않았다.

"아무쪼록 조심하세요."

저기까지 말하는데 호의를 받들어 감사를 표하고 가게를 나섰다.

- 띠링

- 띠링

- 띠링

타이밍 좋게 머릿속에서 종이 세 번 울렸다.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텔레포트를 영창했다.

"사왔냐?"

"네. 타이밍 참 좋네요. 아타나시아는요?"

"5분 내로 온댄다."

델라즈는 아타나시아를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지 화락조의 포장을 뜯었다.

나 또한 냄새에 못이겨 포장을 뜯고 다리를 입에 물었다.

육두문자가 자연스레 입에서 튀어나올 정도로 황홀한 맛이 퍼진다.

우리는 한동안 말없이 다리를 뜯었다.

5분이 슬슬 지나갈 때쯤이었다.

"나 몰래 화락조 뜯어요?"

"기다려주려고 했는데, 에레브가 먼저 먹지 뭐냐."

"이 미친 아저씨가. 아타나시아 씨, 저거 다 구라에요."

"알아요."

아타나시아가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처리는 얼추 끝났어요."

"어떻게 됐냐?"

"상회 총장에게 직접 처벌을 가할 거에요. 아빠가 화가 좀 많이 났더라고요."

"다른 건?"

"플룻래빗의 양식은 엄격히 금지합니다. 국가 차원에서도 양식하지 않아요."

델라즈가 혀를 쯧, 하고 찼다.

"애꿎은 상권들만 다 죽어나가겠군."

"애초에 그게 정상이에요. 너무 마물 하나에 의존한 게 잘못이지."

"그것도 그렇다마는. 그럼, 에레브에 대한 처벌은 없냐?"

"처벌… 이라고 해야 되나, 그 대신이라고 할 만한 게 있는데."

처벌을 대신하는 무언가?

나는 귀를 쫑긋 세웠다.

"무기를 개발하라는 명이에요. 에레브 양."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가 튀어나왔다.

"무기요?"

"총장실에서 에레브 양이 썼던 무기, 기억하죠? 그걸 보고했더니 아빠가 큰 관심을 보였어요. 양산이 가능하냐고 묻던데요."

"…인카르너로는 쉽게 되는데, 물리적인 제조공정은 잘 모르겠는데요."

"원리만 알려주면 대장장이들이 알아서 할 거에요. 그 무기, 이름이 뭐라고요?"

"총이요."

"그래요, 총. 총 말고도 다른 구상된 무기들이 있으면 생각나는 대로 개발에 착수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명이에요."

내 눈이 아주 얇아졌다. 군사 강국이라도 만들려는 건가.

벌이라니 달게 받아야지.

찔리는 구석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사실 벌이라고 할 것도 아니다.

뭣보다 실적을 쌓는 건 내게도 도움이 되고.

"길드에 포획 의뢰했던 상회는 어떻게 됐나요?"

"하펜즈 상회의 데인, 그자는 로렌스로 도주했어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냥 가서 잡아오면 안 돼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짚었다.

베르노바, 또 너야?

도대체가 제대로 굴러가는 게 단 하나도 없군.

"그럼, 다 끝이냐?"

"하나 더요. 격 대조는 당장에는 이루어질 수 없대요. 어디 무슨 파견 근무 나갔다는데. 돌아오자마자 할 거에요."

"그, 저기요."

나는 한 손을 들어올려 발언권을 얻어냈다.

"굳이 격 대조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왜요?"

"저 노바한테 이어받은 거 맞아요."

두 사람이 어처구니가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본다.

"음, 노바를 만났을 때의 기억이 되돌아왔어요."

"언제요?"

"방금요. 아타나시아 씨 오기 전에 잠깐 잤는데, 꿈 속에서 다 기억했어요."

꿈이라는 말에 아타나시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확신해요?"

"확신은 해요. 뭐, 못미더우면 격 대조 하면 되는 문제니까요. 일단은 그렇게 알아두면 될 것 같아요."

"알았어요."

아타나시아가 화락조 다리를 하나 집어들더니 씹는다.

한동안 우리 셋은 말없이 다리만 씹었다.

참고로, 다리는 총 네 개인데 사람은 셋이라 다리를 사수하기 위한 작은 공방전이 일기도 했다.

노바와 베르노바 셋이 음식을 가지고 혈투를 벌인다라, 극장에 상영되면 볼 만하겠군.

닭다리는 금방 동났다.

아타나시아는 마지막 살점을 뜯자마자 '텔레포트는 내가 쓰라고 했다고 해요.' 하는 말과 함께 사라져버렸다.

델라즈 또한 상황이 일단락된 것에 안심했는지 깃펜을 들고 나를 내쫓았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하늘에서, 나는 보다 높은 허공을 배영하듯이 누워서 바라보았다.

"노바."

이계가 궁금하댔지.

이계가 궁금해서 이계에서 온 나를 노바로 만들었지.

내가 현실로 돌아가는 데 노바가 도움을 줄 수 있길 빈다.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