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1)031
길드로 돌아가는 길.
"매일 해주시는 건가요?"
"음, 매일은 힘들 것 같은데요. 제가 당분간은 좀 바빠질 예정이라."
아타나시아가 의뢰한 거, 빨리 처리하면 빨리 처리할수록 좋겠지.
어려운 것도 아니긴 하고.
그냥 스윽 들어가서 찰칵 찍고 돌아와서 '이게 증거입니다!' 한 번 시전하면 된다. 회중시계 이거, 쓸모가 많네.
"그래도 게시판에 써놓긴 할게요. 여러분들 잘 하는 거 보니까 저도 의욕이 솟기도 하고."
"성장 속도, 라고 해야 되나. 저희 잘 하고 있는 건가요?"
"적어도 1서클 때의 저보단 잘 하고 있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다.
슬라임 하나 잡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게 나다.
지금이야 수십 수백 마리씩 때려잡을 수 있다지만.
1서클과 7서클의 격차가 이 정도다.
"에레브 교수님은, 델라즈 교수님이 어떻게 키워주셨나요?"
"음…."
안 키워졌는데요.
나 요관 공략했는데.
"제가 여러분한테 해주고 있는, 것처럼…? 해주셨습니다. 이론과 경험을 중시하였죠."
"저희는 교수님이 밟았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건가요?"
"…제가 어느 정도는 개조해서 해볼 생각입니다."
"예를 들면요?"
"저는 많은 마물들을 알고 있으니, 그걸 마나로 구현해서 여러분들이랑 싸우게도 할 거고, 음…."
그것 말고는 아직 고안해낸 게 없는데.
"…아, 높은 서클의 마법 체험?"
"체험이요?"
"저 맨날 날개 달고 날아다니잖아요? 그거 저한테만 쓸 수 있는 게 아니라 남한테도 쓸 수 있거든요."
"진짜요?"
학생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낸다.
"어, 네, 뭐…."
"저, 여기서 한 번 해주시면."
"아직 확인이 제대로 안 된 놈이라 안 됩니다. 위험해요."
내 마나로 작동하는 건지, 아니면 학생들의 마나로 작동하는 건지 의문이다.
그걸 앨버트에게 시험해볼 거고.
곰곰이 따져보았다.
마법을 쓰게 해주는 게 더 있나?
인카르너로 무기 만들어서 쥐여주고 숙련도 높이는 것도 괜찮으려나.
마나라는 게 꼭 공격이나 방어에만 쓰는 용도는 아니니까.
내가 와즈로 날아다니는 것처럼 별의 별 마법이 다 있다.
참고 삼아 말하자면, 과일 껍질 까는 마법도 있다.
이거 하나로 설명이 되겠지.
"어쨌든 요는 경험을 쌓으면 되니까, 여러분들끼리 대련이라도 해봐요. 제가 없더라도 정진해야죠."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갈 거다.
꼭 그때가 아니더라도 원로원에 들어가면 내가 아카데미를 신경쓸….
"…."
원로원 들어가도 짬처리로 아카데미 교수직 떠맡겨지는 거 아니냐.
'…마법을 연구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된다는 것에 감사하자.'
여차하면 앨버트를 키워서 내 후배로 만들어버리자.
간단하군.
"감사합니다, 교수님."
"…딱히 제가 감사받을 짓을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 정도는 교수라면 해주지 않아요?"
"1서클 2서클은 안 그래도 차별을 좀 받아요."
"차별이요?"
다들 지나가는 과정인데?
"1서클 2서클은 물론 다른 애들도 다 지나쳐가는 과정이 맞지만, 얼마나 빨리 통과하느냐에 따라서 취급이 달라지거든요."
요컨대, 지금 여기 따라나온 학생들은 성장이 느려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자 따라나왔다 이건가?
"스승님이 뭐 가르쳐준 건 없어요?"
"델라즈 교수님은 음…."
"아뇨, 말 안 해도 괜찮아요."
187페이지까지 풀었다며.
물론 나중에 살펴보니 거기까지가 마학의 역사로 대부분 채워져 있긴 했다.
그래도 명색이 마법사들인데.
진짜 역사만 가르쳐주고 끝냈을 줄이야.
'뭐 얼마나 귀찮은 거야?'
맨날 책만 쓰고 있더만.
애들 가르치는 것보단 책 쓰는 게 더 중요하다 이건가.
'가르치는 거에 자신이 없나?'
책이라도 더 써서 애들한테 돌리겠다 이건가.
교육열이 투철한 건가 아닌가 헷갈린다.
"다 왔네요. 아무튼 오늘 감사했습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릴게요."
"서클 빨리 올리고, 다른 놈들도 잡아봅시다."
"기대되네요."
3서클까지 올라가면 좀 무서운 놈들도 나오긴 하는데, 실드 둘러주면 문제없이 격파할 수 있겠─
"어?"
모험가 길드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나는 저 얼굴을 알고 있다. 알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저 얼굴을 증오하기까지 한다.
이름도 모르는 여자이건만 이 세계에 떨어지고 나서 내가 싫어하는 사람 탑 파이브에 들어가는 여자다.
'저 년이 왜 저기…?'
빈민가 근처 모험가 길드에서 일하고 있을 터였다.
여긴 레블인데? 출세라도 한 거야? 왜 여기 있어?
순식간에 온몸이 분노에 휩싸였다.
저 년이 죽을 짓을 한 건 아니다.
그냥 융통성이 없을 뿐이다.
요컨대, 내가 저 년 때문에 5년 가까이 고생한 것이라고 해도 별 다를 거 없다는 말이다.
'아니다. 지금 난 모습이 바뀌었다.'
서클이 달라졌을지 몰라도, 빈민가의 모험가 길드에서 모험가증을 만들 때는 서클까지 등록하진 않았다.
저 년이 나를 알아볼 가능성은 아예 없다.
'…하아.'
우려가 현실이 되었다.
이럴 거면 없길 바란다, 하고 플래그를 띄우지 말걸.
보기 싫었는데.
또, 무언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다신 만날 일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상상으로만 뚝배기를 깨던 년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와?
"교수님?"
갑자기 멈춰선 내가 이상하게 보인 것일까, 학생들이 뒤쳐진 나를 불렀다.
여자는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역시나 나를 알아보지 않고 스쳐지나갔다.
"…갑니다."
무겁게 대답하고 학생들의 곁으로 돌아갔다.
모험가 길드의 문을 열고 들어가서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아, 에레브 님."
안내원이 나를 환대해준다.
우려했던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하다.
내가 그렇게 못미덥나.
"서약서 가지고 오셨나요?"
"네. 아르체시투스."
푸른 불꽃의 서약서가 떠오른다.
"어디보자, 슬라임 몇 마리 잡으셨나요?"
"…한, 예순 마리? 예순 마리는 넘을 거에요."
"그럼 예순 마리 이상으로 하고, 마리당 1레블로 쳐서 60레블 되겠습니다."
역시나 더럽게 싸군.
하긴, 화락조 시체 하나가 30레블인 거 생각하면야 뭐….
저게 정상적인 물가이긴 하다.
마법사라는 게, 자기보다 낮은 서클의 몬스터면 무더기로 잡을 수 있다.
슬라임 같은 경우에는 3서클만 되면 열에서 스무 마리 정도는 한꺼번에 잡을 수 있다.
4서클쯤 되면 방금 잡은 것처럼 예순 마리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애초에 아카데미를 다니는 마법사의 경우는 가문이라는 게 뒷배로 받쳐주니까 말이다.
금전적인 문제도 없을 뿐더러 굳이 마물을 사냥하고 다닐 필요는 없다.
아카데미를 다니지 않는 마법사도 물론 있다.
대표적인 게 바로 나.
샤크시 같은 건 지느러미랑 이것저것 해서 엄청 비쌌는데.
이걸로 만족해야 되나.
살짝 이상한 게 있다면, 슬라임의 개체수가 불어나서 가격이 좀 달라져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
슬라임 같은 거 잡을 사람도 몇 없을 텐데.
아, 아닌가?
마법사가 아니라 무인이라면 인기가 좀 있으려나.
결국 마물을 잡아서 돈을 번다는 건, 조금 잘 나가는 놈들을 잡아서 시체를 매도하는 것 말고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짤짤이 용돈 벌기로 한다거나, 싸움 자체의 경력을 쌓기 위해서 한다거나.
경우는 많지만 돈이 안 되는 건 사실이다.
생각해보니 이것도 마물이 양식되는 데 한몫을 한 것 같은데.
암만 생각해도 아케즈는 정상이 아니다.
하지만 학생들은 눈에 띄게 실망한 눈치였다.
얘들아, 두 시간도 안 돼서 6만 원 번 거면 대한민국 최저시급의 거의 여덟 배에요.
8명이서 잡은 거니 최저시급보다 살짝 못한 정도군.
"자, 그럼 여기까지. 돈은 나누기도 뭣하니 그냥 플룻래빗 축사 짓는 데 쓰겠습니다. 모두 고생했고, 이젠 복귀해서 좀 쉽시다. 날아서 아카데미까지 바래다줄게요."
반론은 받지 않았다.
바로 학생들을 들고 날아서 아카데미를 향했다.
"감사합니다!"
감사인사를 하는 학생들을 뒤로 하고 풀밭 게시판에 글을 한 번 더 쓴 다음 델라즈의 저택으로 향했다.
"아재!"
델라즈는 날 보자마자 마화기로 전화를 때렸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허공에 아타나시아가 나타났다. 저거 참 부럽구만.
"모험가증 가져오셨나요?"
"네."
나는 모험가증을 내밀었다.
아타나시아는 그걸 확인해보더니 내게 다시 돌려주었다.
"확실하네요. 서약합시다. 아르체시투스."
종이가 한 장 떠올랐고, 우리는 서약을 맺었다.
"양식의 뿌리를 뽑는 데 실패 시, 딱밤 열다섯 대를 때린다."
"다섯 대 아니었나요?"
"너무 적다 싶어서요."
지 맘대로군.
성공하면 되는 문제이니까 뭐.
"잘 부탁드립니다."
종이가 회전하며 자색의 화염에 휩싸여 재가 되었다.
나는 아타나시아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델라즈는 어째 그런 우리를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고개를 젓고 있지만.
아재, 불만 있소?
"지금 당장 갈 건가요?"
"네. 아직 점심이니까요."
"필요한 거 있으세요?"
"딱히?"
나는 델라즈의 방 구석에 있는 회중시계를 집어들었다.
"야, 그거 내 거잖냐."
"내가 아저씨 준 거잖아요. 그럼 내 거지."
"말을 말자. …근데 그 흰색 로브는 뭐냐?"
"아, 이거?"
사실대로 말해도 되나?
"선물받았어요."
"선물? 누구한테?"
"아카데미 학생한테."
"남자냐?"
델라즈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맞긴 한데, 괜한 지랄 맙시다."
"난 아무 말 안 했다."
"시선 강간이라고 아세요?"
"생사람 잡는군."
퍽이나.
나는 아타나시아에게 인사한 후 창문을 깨 날아올랐다.
메이즈 따위, 창문 자체를 부숴버리면 해결되는 문제인 것.
**
"화락조는 얼마나 불어났어?"
"알을 보니까 백 마리는 되지 않을까 싶은데."
"많이도 늘어났군. 오늘치 토끼는?"
"넉넉해."
케트가 바구니를 열어 플룻래빗들을 확인하며 말했다.
"근데, 오늘도 먹이만 주고 끝낼 셈이야?"
"그럼 어떡해. 마법사가 없잖아."
"조금 큰 놈은 잡아가야 하는데."
화락조를 양식하는 입장이더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나면 곤란했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적당한 개체수를 유지하면서 아케즈의 상회 총독에 납품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상황은 상당히 불편했다.
그들과 협업하는 마법사는 아케즈 소속이었다.
하지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지, 마법사는 이틀 연속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케트가 단단히 뿔이 난 것은 당연지사.
그가 하도 씩씩대는 게 보기 안쓰러웠는지 상대방이 아이디어를 냈다.
"저번의 그 아가씨한테 부탁해보는 건 어때?"
"하펜즈 소속의?"
"어차피 화락조 한 마리를 죽인 값은 받아야 할 거 아냐."
케트가 고민에 빠졌다.
"이건 우리 일이라고. 아케즈가 싫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을 버릴 수는 없지. 안 그래?"
"…맞는 말이군."
"하펜즈 상회 구역은 마침 멀지 않아. 내가 다녀오지."
케트가 막 일어나려던 상대방을 제지했다.
"내가 다녀올게."
"…웬일인가?"
"계속 피하면 안 될 것 같아서."
"뭐, 그렇다면 고맙지. 잘 다녀오게."
케트는 남자를 지나쳐 마차에 올랐다.
근방의 지역은 지도를 통해 이미 외워뒀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남자의 배웅을 받으며 케트는 말을 몰았다.
"잡긴 잡아야 되니까."
화락조가 이 이상으로 늘어나면 곤란했다.
관리하기도 어렵고, 무엇보다 플룻래빗을 충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들이 화락조를 빠른 속도로 키울 수 있는 것은 플룻래빗을 먹이로 주기 때문이었다.
플룻래빗을 잡아먹는 마물이 빠른 속도로 성장한다는 건 최근에야 밝혀진 일이었다.
그것도 아케즈의 상회 총독과 거래하는 마물을 양식하는 업자들 사이에서만 말이다.
하도 플룻래빗이 도망을 잘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그 마물들은 전혀 공격적이지 않지만, 도망가는 것 하나쯤은 빨랐다.
마법사를 고용해 플룻래빗을 잡아들이고 있다지만, 오늘 가져온 플룻래빗이 그 마지막이었다.
내일도 마법사가 출근하지 않으면 다른 마법사를 다시 고용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케트는 마차를 몰았다.
"최근에야 밝혀진 게 신기하단 말이지."
아무리 플룻래빗이 마법사가 아니면 잡기 어렵다고는 해도, 그게 이제와서 밝혀진 게 참 의문스러웠다.
어쩌면 누군가가 미리 알아놓고 독점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긴, 누가 마물을 잡아서 마물한테 먹이겠는가.
그것도 길들이기 위해서 말이다.
하펜즈 상회의 구역에 도착하고 케트는 사람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아니나 다를까, 십수 분 정도가 지나자 사람이 다가왔다.
"거기, 누구냐?"
"마법사를 빌리러 왔어."
케트가 마차에서 내리며 말했다.
"마법사를 빌려?"
"여기 상회에서 우리 쪽 화락조를 한 마리 죽였거든. 그 벌충으로 말이야."
"무슨 일이라도 있나?"
"우리 쪽 마법사가 출근을 하지 않아서 말이야. 대신 화락조를 잡아줬음 하는데."
남자가 턱을 쓰다듬었다.
"좋지. 대신 화락조 세 마리를 더 넘겨."
"그 정도야 뭐."
"좋아. 그 마법사의 이름은 아나?"
"토코라고 하던데."
남자가 명단을 꺼내 확인했다.
"그런 이름은 없는데?"
"그럴 리가. 5서클 마법사라고 소개하던데."
"인상착의는 모르나?"
"아, 황토색 로브를 매고 있긴 했어."
그 말을 듣자마자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황토색, 로브?"
"그래."
"…다른 마법사를 빌려주지. 화락조를 줄 필요도 없어.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를 따라온 마법사를 한 명 붙여주었다.
케트는 구역으로 돌아가면서도 마법사의 안색이 왜 그렇게 새파랗게 질려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이봐. 무슨 일 있어? 왜 그렇게 질려 있어."
"…아무 일도 아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남자는 함구할 뿐이었다.
케트 역시 함구하고 마차를 몰았다.
마법사는 30분도 안 되어 많은 화락조를 잡았다.
"고마워."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무엇이 그리도 급한 것일까, 마법사는 마차에도 오르지 않고 다리를 마나로 강화해 뛰어서 돌아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