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억을 위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12화 (12/247)

(EP.12)012

"아니, 시작하기 전에."

바로 말을 철회했다.

나는 마지를 꺼내 각 학생들에게 모두 전했다.

"자기가 쓸 수 있는 가장 높은 서클의, 강력한 마법 술식을 이름과 함께 그려서 제출하세요."

뭐 실력을 알아야 가르치던가 하지.

학생들이 얌전히 마지를 붙잡고 술식을 그려나갔고, 나는 잠시 의자에 앉아 휴식했다.

"죄송합니다!"

3분 정도 지났을까. 꽤 걸리네─하고 생각하던 도중 뒷문이 열리고 세 명이 들어왔다.

아까 늦는다고 한 세 명 같은데.

아니나 다를까 셋은 비어 있는 세 자리에 가서 앉았다.

'얜 뭐야?'

앨버트, 넌 어디냐?

기껏 편애해주려고 했더니만.

마침내 학생들이 다 그려서 제출했고 나는 잠시 기다려줄 것을 요청하고 하나하나 확인해보았다.

대부분이 1서클짜리 5원소 마법이었고, 드문드문 처음 보는 마법도 있었다.

아예 술식이 그려지지 않은 마법도 있긴 있었으나, 처음 보는 마법이 더 궁금했다.

'얜 뭐지.'

술식을 해독해 마나를 흘려보았다.

지지직.

'오.'

기다란 막대 형태의 아주 작은 번개가 양 손 사이에 생겼다.

손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니 번개의 형태도 바뀐다.

'신기하네. 근데 못 써먹겠네.'

저러면 양손이 다 구속되지 않는가.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술식을 그려서 내라고 했으니 이게 쟤네의 최대일 터.

최대 사출은 본인한테도 대미지가 들어온다.

이런 마법들이 대부분이었다.

나는 다시 발받침대를 딛고 섰다.

여기저기에서 풋,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애써 무시했다….

"여기 나는 베르노바까지 노리고 있다 손?"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럼 4서클은 찍고 싶다 손?"

모두가 손을 들었다.

대충 왜 저러는지 알 것 같다.

원로원을 노리고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것을 들었을 때부터 뭔가 좀 이상하다 싶었다.

얘네는 그래도 아카데미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애들이다.

달리 말해 뒷배를 서줄 가문이라는 게 있다는 것을 뜻했다.

가문 입장에서는 겨우 키워놓은 마법사가 국가에 귀속되는 걸 원하진 않겠지.

5서클부터는 징집 대상이니 4서클까지만을 목표로 하는 것 같다.

막말로, 4서클만 돼도 상위 10%에는 드니까.

'너무 속보이는데.'

마법을 연구하기 위해서 아카데미에 들어온 게 아니라, 4서클을 찍어서 내가 우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배우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라면 얘네는 내 기준에선 죄다 낙제생이고, 앨버트만이 합격이다.

'그래도 일이니까.'

애초에 나도 쟤네한테 뭐라 할 입장은 아니고.

내가 애들 가르치고 싶어서 여기 있나? 천만에.

"좋습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경험 면에서는 그 누구보다 뒤쳐지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대체 무슨 수양을 해오셨길래요?"

아, 컨셉 까먹었다.

"…스승님과 대련했습니다."

학생들이 감탄했다.

다행이다.

"여러분한테는 제 경험을 토대로, 마나를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감, 응용 방법 같은 것을 알려드릴 겁니다."

학생들에게로 다가갔다.

"예를 들면, 그렇네요. 거기 학생. 제 배를 전력으로 쳐보세요."

"네?"

눈앞의 남학생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서요."

"어, 음…."

남학생은 주저하면서도 내 배를 힘차게 후려쳤다.

당연하지만 대미지는 일절 없었다.

"이렇게 마나를 운용해 타격부위를 보호하는 방법도 있고."

푸에고, 아쿠아. 한 손에는 불의 기둥을, 다른 한 손에는 물의 기둥을 만들었다.

그리고 몸속의 마나를 집합시켜 양쪽을 오가게 하며 기둥을 키웠다가 줄였다가 했다.

"이런 식으로 마나를 일점에 모으는 방법도 있으며."

와즈를 영창했다.

등에 날개가 생겼고, 몸을 슬쩍 돌려 학생들에게 보였다.

"높은 서클의 마법을 보다 수월하게 쓸 수 있는 방법도 있습니다."

모든 마법을 꺼뜨렸다.

"다 여러분한테 알려드릴 거고, 허가만 떨어지면 훈련실에서 직접 연습시켜드릴 겁니다."

다시 단상으로 돌아갔다.

"질문 더 있으신 분?"

"저, 왜 불이 파란색인가요? 마나는 빨간색인데…."

"좋은 질문이에요. 빨간색은 저 개인의 마나색이고, 푸른색 불꽃은 노바의 명예를 가리킵니다."

마나색은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많긴 많은데 마치 RGB 헥스값의 모든 경우의 수가 1600만 언저리인 것처럼 겹치는 사람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조금 탁한 적색이다.

푸른색 불꽃은 노바를 상징한다.

나는 노바의 명예를 그분께 수여받음과 동시에 불꽃만은 푸르게 변했다.

참고로 베르노바가 아마 보라색인가 그럴 거다.

서클의 명예 또한 쓸 수도 있고, 끌 수도 있다.

나는 그냥 푸른색이 멋있어서 달아놓는 거다.

델라즈가 쓰는 건 못 봐서 확증은 못하겠다만.

"교수님만 따라가면 4서클 달 수 있나요?"

"마학이 2서클까지만 맡는 거 아니었나요?"

"본인 희망으로 더 남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컨대 지금까지는 없었다는 소리이군.

델라즈가 그래도 베르노바인데, 베르노바 교수를 미련없이 떠나보낼 정도면 델라즈가 얼마나 열심히 하지 않은 건지 알 수 있는 말이다.

"…뭐, 제가 1년에서 2년 정도는 여기 계속 있을 거라. 되는 데까지는 해드릴게요."

더 이상의 질문은 없었다.

나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고 책을 폈다.

"우리 뭐부터 할까요? 사람 가르쳐보는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네요."

"마지막으로 187페이지까지 했었습니다."

"그럼 간단하게 188페이지부터 합시다."

188페이지.

「명예를 수여받는 방법 : 명예란 즉 특정 분야의 정점을 맡고 있는 마법사의 고유 특성을 말한다.」

"…."

뭐지 이게.

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

"그래서 어떻게 말했냐?"

나는 기억을 되짚어보았다.

'그럼, 저희한테도 수여해줄 수 있는 건가요?'

'그…건 안 되겠네요. 함부로 줄 수 없는 거라."

"이렇게 말했어요."

"잘 했다. 아무한테나 주면 안 되는 거야."

델라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건 그렇고,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명예가, 특정 분야라는 게, 어떤 분야에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 수여받은 네가 알지."

엥.

"아저씨 베르노바잖아요. 노바 거쳐서 간 거 아니었어요?"

"노바라는 게, 다 같은 노바가 아니다. 노바는 엄밀히 말하자면 7서클의 주인이다. 사람 이름이야. 서클이 높아질수록 강해지는 건 사실이지만, 서클마다 전문가는 따로 있다. 노바는 7서클의 전문가다. 노바가 자신의 특징을 명예라는 수단으로 남긴 거야."

명예라는 수단?

"그럼 나 노바한테 이어받은 거에요?"

"아니다."

"그럼 뭔데요?"

"노바도 원로원의 일좌였어. 지금이야 노바 여섯에 베르노바 셋 해서 아홉 명이라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노바 장본인 합쳐서 열 명이었다. 노바는 모든 7서클 중 가장 뛰어났고, 다른 7서클들에게 자신의 명예를 수여해서 특성을 남겼다. 너는 아마 그놈들로부터 이어받았겠지. 기억은 안 나냐?"

기억을 되짚어봤다.

음…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냥 수여받았다, 라는 것만 기억난다.

"네. 잘 안 나는데. 그럼 베르노바는 누구에요?"

"이 나라의 통령. 8서클의 주인이지. 세계 최초로 8서클 단 사람이다. 모든 8서클은 이 나라 통령한테 직접 명예를 수여받았다."

세상에나. 감탄했으나 살짝 침울해졌다.

난 아무리 못해도 10서클은 돼야 하는데, 세계 최강이 8서클이라니.

희망이 있긴 한 걸까?

"근데 왜 노바 아래로는 명예가 없어요?"

"7서클만 되면 노바가 되는데, 굳이 6서클의 주인을 할 이유가 있냐?"

그것도 그러네. 굳이 낮은 서클에서 사람들 가르칠 이유는 없으니까.

근데, 저 말대로면 정점을 찍기 위해서는 결국 그 위의 서클에 가까워야 한다는 말이잖아?

노바는 8서클에 가까웠고, 베르노바는 9서클에 가깝다는 건가.

세계 최강이라고 보면 될 듯하다.

아니다, 다른 나라는 좀 다르려나?

"그럼 내가 명예 만들어서 뿌려도 돼요?"

델라즈가 날 흘겨봤다.

"무슨 수로?"

"그냥 내 마나 특징만 남기면 되는 거 아니에요?"

델라즈가 코웃음쳤다.

"그런 걸로 될 리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거에요?"

"너 아직 6서클 마스터도 못했잖아. 정점 찍고 오면 알려주마."

델라즈가 손을 설래설래 저었다.

아무래도 말해줄 생각은 없는 듯해서 화제를 바꾸었다.

"칫, 알겠어요. 그럼 나 조언 좀 해줘요. 뭘 가르쳐야 될지 모르겠어요."

"너 잘 하는 거 해. 전투. 애들 대련이나 좀 시켜주면 되잖냐. 총장이 그러더만. 네가 대련 담당 요청했다고."

"벌써 그걸 들었어요? 빠르네. 그건 맞는데 이것만으로는 좀 재미없잖아요."

"배움은 원래 재미가 없어."

델라즈의 말에는 공감하지만, 그건 학생들 입장이지 내 입장이 아니다.

나는 경력을 조금이라도 더 쌓아야 한다.

"에이, 알려줘요. 응? 나 경력 만들어야 된단 말이야."

델라즈가 입을 아예 다물어버리자 나는 델라즈의 옷가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수십 초 그렇게 찡찡대니까 델라즈가 짜증난 목소리로 대답을 툭 던졌다.

"네 경험을 전파하던지."

"어떻게요?"

"애들끼리 대련시켜. 어차피 시험도 치르게 만들어야 된다. 상대평가로 등수라도 매겨라. 네가 상대해줘도 되고."

"그리고?"

"인카르너 쓸 줄 알지? 요관의 마물 구현시켜서 애들 상대시켜라. 좋은 경험이 될 거다."

"또?"

"…길드 의뢰나 같이 해결하던지."

델라즈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짜증이 한계치까지 치닿은 듯해 나는 순순히 꼬리를 말았다.

"고마워요."

"근데 너 안 피곤하냐?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온 거 아냐?"

"재미있어서 버틸 만한 것 같은데."

그의 말마따나 나는 이론으로 수업시간을 뻐팅기고 세 시간을 겨우 채우자마자 총장실로 향했다.

'마침 잘 왔습니다, 에레브 양. 이분이 대련 담당하시던 분이십니다.'

'…이 분이요?'

툭 건드리면 쓰러져 뇌출혈로 죽을 것만 같은 수염이 지긋한 삐쩍 마른 노인이 거기 있었다.

총장이 내 시선을 읽은 것인지 멋쩍게 답했다.

'은퇴를 생각하시던 분이셨거든요. 마침 에레브 양이 나서주셔서 잘 됐죠.'

'그럼, 저 당장 내일부터라도 해도 되는 건가요?'

'문제없습니다. 대항전 때 말고는 훈련실도 쓸 일 없으니 마음껏 써주세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델라즈에게 바로 향했다.

지금은 슬슬 점심 먹을 때다.

3시간 수업 때리고 인수인계까지 받고 왔는데 피곤하지 않냐는 말도 어떻게 보면 그가 당연하게 지적했다.

하지만 뭐….

재미가 없는 건 아니니까.

버틸 만하다.

"그럼 가봐라. 나도 내 일 좀 하자."

"그리고, 나한테 할 말 없어요?"

"무슨?"

"마학, 2서클까지만 듣는다던데?"

델라즈가 멀뚱하게 눈을 떴다.

"아론 놈들 말하는 거냐?"

"네."

델라즈가 말없이 공중에 뭔가를 띄웠다.

서약서였다.

"읽어봐라."

"델라즈는 에레브가 원로원에 들어올 수 있게끔 돕는다."

"아론 놈들에 대한 말은 안 했다."

머리가 띵했다.

"그만 가봐라."

"…아오, 시발."

"욕하지 말고. 네가 착각한 거잖아."

"나 스스로한테 욕박은 거니까 신경 꺼요…"

델라즈가 손을 휘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곱게 계단을 내려와 저택을 나왔다.

"앨버트 얘는 뭐지."

결국 앨버트 얘가 왜 나오지 않은 건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음에 나오면 교수의 직위를 활용해 괘씸죄를 명목으로 쌍욕을 한 사발 부어줄 것임을 다짐하며 아카데미로 복귀했다.

"아, 맞다."

상점으로 향했다.

"그런 건 안 판다."

"왜요?"

"너무 비싸. 이런 데에서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야."

"그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상점 주인이 꼴똘히 생각에 잠겼다.

"…수도 레블에는 주기적으로 시장이 들어온다. 여러가지 아티팩트를 취급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언제 들어오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가장 최근에 열린 게 닷새 전이니, 이틀 안에는 열리지 않을까."

"감사합니다."

상점 주인에게 감사를 표하고 기숙사로 복귀했다.

아쉽네.

바로바로 구할 수 있었음 좋을 텐데.

그래도 이틀이면 적당히 참을 수 있다.

나는 시장이 들어올 날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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