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009
"에르와 노브라고 알아요?"
"아론 놈들?"
"뭐야 아네요?"
"알다마다. 쌍놈들도 그런 쌍놈들이 없지."
오후, 델라즈의 저택.
다행히도 델라즈는 그들에게 영향을 받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긴, 베르노바면 4서클 마법사로 영애로 둔 가문 따위 별 거 아니다.
"걔네가 뭘 했길래요?"
"날 귀찮게 만든다."
"…그러니까 뭘 하는데요?"
"간단하게는 편가르기부터 시작해서 심각하게는 성적 조작까지."
나는 아연실색해졌다.
"성적 조작을 안 막아요?"
"아카데미 자체에서도 어차피 정치질로는 원로원 못 들어갈 거 아니까 굳이 건드리지 않는 거다."
"그게 되나?"
"서클 개수는 속일 수도 없지 않냐. 내 기억으로는 그 둘 다 지금 4서클인데 맞냐?"
"그럴걸요?"
"그럼 문제없다. 내버려둬. 긁어부스럼이다."
하지만, 하고 운을 띄웠다.
"나한테도 로비가 들어왔는걸요."
"아론 밑에 들어오라더냐?"
"네."
"뭐라고 했냐."
"대답은 안 하고, 살짝 혼만 내줬어요."
델라즈가 책을 집필하다 말고 내게 시선을 돌렸다.
"혼을 내줘?"
"악력으로 나 이기려들길래 내가 이겨버렸어요."
"혹시 그 굴리고 싶다던 싸가지 없는 애들이 아론 놈들이냐?"
"네."
델라즈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눈에 띄게만 하지 마라."
"뭘 그리 조심해요? 걔네 뒤에 누구 있어요?"
"아카데미는 네가 맡고 있긴 하지만 아직은 내 관할이야. 그놈들 빡돌아서 뭔 일 저지르면 내가 수습해야 된다."
요컨대 귀찮다 그건가.
전부터 생각했지만 이 아저씨 귀찮은 걸 너무 싫어하는 것 같다.
"아저씨는 노예 싫어해요?"
"같은 사람을 계급으로 차별하는 걸 난 혐오한다. 애초에 나도 노예 태생이다."
"엥, 아저씨가요?"
"그래."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책까지 집필하고 아카데미 교수까지 될 정도면 실력이나 인격이나 모두 입증되었다는 소리 아닌가?
"난 진짜 죽도록 노력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다. 난 애초에 마법사도 아니었어."
"그럼요?"
"그저 노동으로 몸이 단련된, 마나량이 조금 많은 건실한 청년에 불과했지. 마법사가 된 건 순전히 운이다."
"…마나 운용 방법은 어떻게 알았대요?"
델라즈가 아련하게 말했다.
"마나량이 많아서 그런가, 그냥 모아서 휘두르기만 했는데도 1서클 수준의 힘을 발휘하더라. 그걸 계속 반복해서 감을 익혔다."
"와, 먼치킨이네?"
"먼치킨은 내가 아니라 너다."
"내가요?"
"원로원이 괜히 원로원(元老院)인 줄 아냐? 젊어봤자 30대, 많으면 60대 노인들이 있어서 원로원 아니냐. 20대에 7서클 단 건 네가 처음일 거…는 아니네. 너 마법사는 언제 됐댔지?"
"음, 22살이요."
"거봐라. 평생 살아도 너 같은 놈은 보기 힘들어. 옆나라 로렌스에도 그런 놈은 없을 거다."
델라즈는 헛소리 말라는 듯이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다시 돌렸다.
죽을 고비를 넘겨오면서 나도 모르게 7서클이 되어서 그런가, 막 그렇게 감흥이 오거나 하진 않는데.
노바의 위치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죽을 만큼 노력'한 게 아니라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경험을 쌓았는데 그게 마법으로 발전한' 거라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아무튼, 걔네가 대놓고 격 좀 낮은 애들 배척하고 있던데. 이거 내가 개입해도 돼요?"
"어떤 식으로?"
"아직 방법은 안 정했는데, 요는 이거에요. 아론 놈들 엿먹이고, 불쌍한 애들 구해주고."
"말했듯이 노골적이지 않게, 법에 저촉되지 않는 선에서만 해라."
뭐가 저리 복잡해.
난 이 나라 법도 잘 모르는데.
"그냥 아저씨 안 귀찮게 하면 되죠?"
"옳다."
간단명료하군. 굳이 건드리고 있지 않는다는 말은, 확실한 건수가 잡히면 건드릴 수밖에 없다는 소리다.
지금 상황에서 좌중이 침묵하는 것은 방조가 아니라 회피이다.
아예 회피조차 불가능하게, 당장 직면해야만 하는 문제로 만들어버리면 된다.
예를 들자면, 베르노바의 제자인 노바에게 성적 조작을 의뢰한다던지?
거 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군.
솔직히 말해서 마물 때려잡으면서 스트레스 풀 때보다 그 두 년들 괴롭힐 생각하는 게 더 재미있다.
나는 건전한 사디스트다. 음.
"볼일은 끝이냐?"
"아, 그거 말고 저 술식지 더 줘요."
"벌써 다 썼다고?"
"아뇨. 아직 와즈밖에 안 풀었는데 재미있어서."
"…와즈를 풀었다고?"
이번엔 델라즈의 몸 전체가 내게로 돌려졌다.
"해봐라."
"영창? 무영창?"
"…무영창. 노바 떼고."
와즈.
나는 몸을 돌려 내 어깻죽지에서 튀어나온 날개를 보였다.
델라즈가 말없이 다가와 날개를 두 손으로 잡고 관찰하기 시작했다.
음, 이제야 깨달은 건데 몸에서 솟은 게 아니라 위에 붙은 느낌이다.
생각해보니 옷이 안 뚫렸네.
"뭐 이런…."
외알안경까지 써가며 내 날개를 뜯어보길래 그냥 아예 뒤돌아줬다.
델라즈는 의자까지 끌어와 앉았다.
"뭘 그렇게 구경해요?"
"이거 푸는 데 얼마나 걸렸냐?"
으음, 곰곰히 떠올렸다.
"마나로 사고가속 돌리고 30분?"
"언제?"
"어제."
"어제 푼 걸 무영창으로, 노바도 안 붙이고 쓴다고? 너 방금은 사고가속 안 쓴 거지?"
"네."
델라즈의 손이 멈췄다.
대체 왜 그러나 싶어 와즈를 해제하고 뒤로 돌았다.
델라즈는 마치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요?"
델라즈는 말없이 일어나 서랍을 뒤지더니 내게 술식지를 건넸다.
"훈련실이나 수련실 가서 풀어라."
"나 뭐 하면 안 되는 거 했어요?"
"그런 거 아니다. 대체 어떻게 푼 건지 이해가 안 돼서 그런다. 와즈보다 더 어려운 것들 준 거니까 꼭 풀어봐라. 실외 아니면 넓은 실내에서."
델라즈는 다시 의자를 움직여 책상에 앉았다.
"뭘 그렇게 써요?"
"「마학(魔學), 어렵지 않다!」 2권."
"…나 아직 1권 시작도 안 했는데?"
"말하는 걸 깜빡했군. 그 교재 쓰기 전의 교재도 한 번 봐둬라."
"당장 내일이 개교인데요?"
"내일 말 안 한 게 어디냐."
델라즈가 역정을 냈다.
어이가 없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 참…."
"근데, 너 왜 아직도 치마냐?"
델라즈가 갑자기 내 옷차림을 지적했다.
"이거 입으라면서요."
"난 네가 당장 바지 사입을 줄 알았다."
"그럴까 생각도 해봤는데, 묘하게 편해서."
"사내놈이 치마라니. 변태 새끼."
"…노바, 익스플─"
"캔슬. 미안하다."
델라즈가 빠르게 사과했다.
저러면 화낼 수도 없잖아. 짜증나네.
"나 갑니다."
"술식지 중 끝부분이 접힌 게 있을 거다. 그것부터 우선 해독해봐라."
"네. 아, 그리고 하늘 날아도 딱히 문제는 없죠?"
"없다."
나이스. 나는 창틀로 다가갔다.
"문으로 나가라."
"와즈 써서 날려고 했는데."
"창문에도 메이즈 걸려 있다."
시험삼아 창문 밖으로 손을 쭉 뻗어보니 굴절이 이상했다. 신기하네.
"아, 근데 마나량 측정할 방법은 없어요?"
"아카데미에 있다. 학생들 신체정보 읽을 때 쓰는 건데, 평소에는 못 쓰니까 너도 그때 써라."
"네."
나는 정문으로 나와 날개를 펼쳤다.
저택으로 올 때는 아직 법적으로 괜찮은지 몰라 걸어왔다.
그 걸어온 길을 날아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시내가 훤히 보인다.
"오."
날아서 가던 도중, 한 음식점이 보였다.
노점상까지는 아니지만, 길거리 먹거리 같은데.
뷔페음식은 많이 먹어봐서 저런 것도 궁금하다.
나 진짜 5년 동안 한 거 없구나.
천천히 날아 가게 앞에 착지했다.
"우악?!"
"힉?!"
누군가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고, 그에 덩달아 나도 놀라버렸다.
놀란 눈으로 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니 가게 주인이다.
"왜, 왜요?"
가게 주인이 내 행색을 훑더니 갑자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네? 어?"
"놀래켜서 죄송합니다."
나는 그제야 내 옷차림을 깨달았다.
맞다, 나 마녀룩이지.
나는 빠르게 변명했다.
"저 마녀 아니에요."
가게 주인은 미심쩍은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하긴, 생긴 게 영락없이 마녀인데 마녀가 아니라고 하면 누가 믿겠냐.
이럴 때 쓰는 게 스승님 찬스.
나는 빠르게 꼬치구이 하나를 주문하고 신분증을 건넸다.
"…노바?"
"신분증 확인해보시면 델라즈… 님이랑 연결되어 있어요."
"베르노바 말입니까?"
"네. 제가 그분 제자라."
제자라는 말의 남자의 표정이 신기한 것을 보는 눈으로 바뀌었다.
공포에 찌든 눈보단 그래, 차라리 저게 낫지.
"…정말이군요."
가게 주인이 꼬치를 계산해 넘겨주면서 말했다.
나는 꼬치구이와 신분증 둘 다 받아들고선 꼬치구이를 입에 물었다.
"그래도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크게 소리를 지른 것 같네요."
"으읍."
꼬치구이를 뺐다.
"걸어서 올걸 그랬네요."
"…설마 텔레포트입니까?"
가게 주인이 마화기(魔話機)를 집었다.
나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날았어요."
"날아요?"
"이거 봐요."
등을 돌려 날개를 내보였다.
그제야 가게 주인은 마화기에서 손을 뗐다.
"마법 실력이 상당하신가보네요."
"음, 그런 것 같아요."
"하하, 맛있게 드세요."
나도 모르게 자뻑을 해버린 모양새가 되어 멋쩍게 웃고 발걸음을 돌렸다.
다시 날아서 기숙사로 복귀하려 하는데, 유난히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한 가게에서 실랑이가 일고 있었고, 나는 그를 향해 천천히, 낮게 날았다.
"내가 미안하다고 했잖아요!"
"미안하다면 다야? 마법사면 다냐?! 쯧, 1년 전만 해도 축사나 청소하던 놈이. 내가 너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한 남자아이와 중년의 여성이 설전을 벌이고 있었다.
"쟤 저기서 뭐한대."
남자아이는 앨버트였다.
대체 무슨 상황인지 둘은 시끄럽게 소리질러가며 싸우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이 그를 지나치며 눈을 흘겼다.
"방금 뭐라고요?!"
"왜, 내가 틀린 말 했냐? 빅피그 축사 똥이나 치우던 게 너 아냐. 네깟 놈이 서클 달았다고 내 가게에 밥을 먹으러 와? 지금 나 엿 멕이냐?"
"그 말 취소─"
"아, 거 참."
슬슬 귀가 아파질려고 하길래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의 말이 끊겼고, 중년의 여성이 나를 흘겼다.
"넌 또 뭐… 마녀?"
중년 여성 또한 아까 가게 주인과 마찬가지로 내 행색을 훑더니 한 발 물러섰다.
아까는 마녀인 걸 숨겼는데 지금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지?
딱 보니까 앨버트가 불쌍해보인다.
"뭐 문제 있나요?"
"아니, 아닙니다."
"무슨 일이에요?"
내 말에 중년 여성이 입을 닫았다.
말할지 말지 고민하는 눈초리다.
나는 앨버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앨버트 학생. 무슨 일이에요?"
앨버트는 화를 가라앉히고 있었다.
적당히 분이 가라앉았는지 입을 열었다.
"…옛날에, 일하던 곳이 생각나 밥을 먹으러 왔는데, 가게 주인이─"
"마녀님, 저거 저놈 노예 출신입니다."
중년 여성이 앨버트의 말을 끊었다.
순식간에 앨버트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가 내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노예 출신 남성 마법사가 베르노바의 제자 20살 노바 여교수에게 들러붙었던 건 << 이라는 라노벨식 제목이 자연스레 머릿속에 적혔다.
"괜히 옥체 더럽히지 마시지요."
옥체를 더럽힌다라.
나는 미소를 지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