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억을 위해 아카데미 교수가 되었다-2화 (2/247)

(EP.2)002

"허억!"

갑작스레 눈이 뜨였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모르는 천장 아래의 한 침대 위.

날 눕힌 사람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이불까지 친절하게 덮여 있다.

그와 동시에 떠오르는 건 요관에 쓰러진, 그리고 마물들이 내 주위를 둘러쌌던 나의 마지막.

하지만 죽을 것임을 직감했던 그때와는 달리 내 몸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아 있다.

"노바…."

다급히 몸에 마나를 둘러 심장의 상태를 확인했다.

서클, 일곱 개. 다행히도 마나 탈진에 의한 신체능력 저하만 디버프로 주어졌을 뿐 서클이 끊기거나 하진 않았다.

명예에도 문제가 없는 듯했다.

내 안위를 확인하고 나서 그제야 여유가 생겨 주위를 둘러보았다.

척 보기에도 고급진 저택이다.

내가 덮고 있는 것도 얇고 바람이 다 새는 모포가 아니라 제대로 된 따뜻한 이불이다.

그 외에는 종이 한 장이 올려진 선반, 그리고 햇빛이 쨍하게 들어오는 창문 여러 개.

누군지는 몰라도 지위가 꽤 높은 사람이 주인인 것 같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선반 위의 종이를 확인했다.

- 이 마지를 태워라.

"…."

집 안에서 불을 지피라니, 제정신인가 생각했지만 마지가 어떤 형식인지 확인하고 나니 괜한 걱정이라는 걸 깨달았다.

불을 붙이자마자 마나를 흘리며 불타 없어지는 영창용 마지다.

새겨진 문양을 유심히 살펴봤다.

전이의 문양이 그려진 영창용 마지.

아, 영창 읊기 싫은데. 구체적으로는 쪽팔려서 싫다.

영창이라니. 21세기 현대인한테는 너무 어려운 요구다.

그래도 별 수 없나. 5년간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들은 문구를 읊었다.

"노바, 텔레포트."

문구를 읊자마자 종이는 불타 사라졌다.

내가 서 있는 바닥에 전이를 뜻하는 마법진이 그려지며 시야가 환해진다.

눈의 보호를 위해 눈을 감았다.

슈우웅.

마지 특유의 소리를 내며 몸이 흩어져 어딘가로 향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 왔나."

눈을 떠 보이는 것은 한 남자.

나를 이 저택으로 데려온 것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날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혹시 모르니까.'

효과는 좀 떨어져도 무영창 전이마법의 준비를 마치고 남자에게 다가갔다.

"해치지 않는다. 사람 보자마자 무영창 마법 발동시키지 마라."

"에?"

얼빠진 목소리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는 7서클 고위 마법사다.

달리 말해, 나보다 위계가 낮은 마법사들은 내가 어떤 마법을 펼치는지 알아볼 수 없다는 것을 뜻했다.

7, 8서클 마법사는 레블에서도 열 명을 넘지 않는다.

이 남자가 나랑 동급이라고?

"아 글쎄 안 해친다니까. 너랑 나랑 치고받고 싸우면 내 저택은 저편의 뒤안길로 안녕이야. 내가 너한테 뭔가를 할 거면 네가 잘 때 했겠지."

"…전, 얼마나 뻗어 있던 건가요?"

"일주일이다. 마나 탈진으로 쓰러졌으니 당연하지."

서클이 높을수록 마나 탈진의 부작용은 크다.

다 써버린 마나가 보충될 때까지 정신을 잃게 되니.

달리 말하면 마나 탈진으로 쓰러진 나를 이 남자가 요관에서 구해서 빠져나갔다는 소리다.

"밥이나 먹어라. 배 안 고프냐."

남자가 말하자마자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나는 괜히 얼굴이 벌개졌다.

"여자애가 그럼 쓰나. 좋아하는 음식은 있나?"

"예?"

여자애?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복부가 보이지 않는다.

동그란 무언가가 내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

"어, 어?"

다급히 목을 더듬었다.

튀어나와 있던 울대는 어디로 갔는지 만져지지 않았고, 그제야 내 목소리가 얇고 높음을 깨달았다.

이게 뭐야.

"노바, 익스플로─"

"이게 미쳤나. 베르노바, 캔슬."

저택을 날려버릴 심산으로 영창했는데 남자의 캔슬 한 번에 마법의 발동이 취소되었다.

"어?"

머리가 멍해졌다.

아니, 아니다.

멍해져서 안드로메다로 가출해버릴 뻔한 정신을 가다듬고 상황을 파악했다.

'방법은 모르겠지만 날 성전환시켰다?'

즉시 몸을 돌려 뛰었다.

'미친 놈인가?'

대체 날 성전환시켜서 뭐하려고.

아니, 애초에 그런 마법이 있었나?

깊게 생각할 겨를은 없다.

확실한 건 내가 저기 있다간 무언가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뿐이다.

"어디 가냐."

남자가 쫓아올까 싶어 뒤를 보면서 달리던 몸이 무언가에 부딪혀 넘어졌다.

나는 남자에 부딪혔다.

"어떻게…?"

"쯧. 노바 정도는 별 거 아니다."

"노바가 별 거 아니라고?"

"못 들었나? 베르노바의 명예를 써서 영창했는데."

베르노바의 명예?

"원로원?"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널 해칠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밥부터 먹고 이야기 좀 들어라."

"원로원의 일좌가 왜 나를…?"

"홀을 확인하라는 명령을 받아 요관에 들어갔는데 네가 엎어져 있었다. 널 들쳐메서 바로 빠져나왔다. 정리 됐나?"

나는 어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는 음식은 있냐고 물었지만 준비한 건 스테이크밖에 없다. 그거나 먹어라."

눈이 깜빡이는 사이에 순식간에 전경이 달라져 있었다.

복도에 서서 보이던 카펫은 어디로 갔는지 온데간데 없고 나는 긴 테이블 앞의 의자에 앉아 있다.

"무영창 전이…?"

"그래."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남자는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있었다.

'침착하자.'

베르노바라는 건 진짜다.

전이를 무영창으로, 그것도 마법진 하나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발동시키는 마법사는 내가 알기론 없다.

7서클 마법사인, 노바의 명예를 수여받은 나조차 영창을 곁들여야 하는 게 전이인데.

나를 해칠 생각이 없는 건 진짜인 것 같다.

저 남자는 7서클이 아니다. 8서클 확정이다.

날 어떻게 할 생각이었으면 진작에 했겠지.

나는 나이프를 들었다. 일주일 동안 정신을 잃었다는 것이 진실인지 사실 고기를 보자마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너 나이프 다뤄본 적 없나?"

어렵사리 나이프로 고기를 썰고 있자니 남자가 그리 물었다.

있을 리가. 빵 몇 덩이로 허름한 여관을 전전긍긍하며 요관을 공략할 생각만 하던 게 나다.

고개를 끄덕이니 남자가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순간 몸이 움찔 떨렸지만 침착을 가장했다.

남자는 내게서 나이프를 빼앗고 고기를 썰기 시작했다.

대신 썰어주려는 건가. 고기를 다 썰고 나서는 내게 포크를 쥐어주며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떨떠름하게 육면체 모양으로 썰린 고기를 포크로 찍어먹었다.

처음엔 남자의 눈치를 보느라 깨작깨작 먹었으나, 고기에 아무런 이상이 없고 몇 년 만에 입안을 녹이는 고기의 맛을 깨닫고 허겁지겁 집어먹었다.

남자는 요상한 눈으로 날 보고 있으나 내 알 바 아니었다. 내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상황 파악도 덜 된 상태에서 나조차 너무 무방비하다고 생각했던 식사가 끝냈다. 마침 남자도 다 먹었는지 날 보고 있다.

나는 애써 외면하려고 했던 사실을 입에 담았다.

"…저기, 전 왜 여자가 된 거죠?"

내 말에 남자가 미친 놈, 아니, 미친 년을 보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본다.

"왜, 왜요? 그쪽이 나 여자로 만든 거 아니었어요?"

"남정네를 여자로 만드는 취미는 없다. 젠장. 홀이 어디로 갔나 했더만 네가 먹어치웠군."

홀을 먹어치워?

"뭘 그런 눈으로 보나. 여섯 번째 요관에 들어가서 홀을 노린 게 너 아니냐. 홀을 잘못 다뤄서 그런 모습이 된 거 아냐."

"홀이라는 건 전이의 능력만 담고 있는 거 아니었어요?"

"그건 첫 번째 요관이고."

"…요관에 순번이 있어요?"

남자가 허공에 화염으로 글씨를 썼다.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적혀 있다.

남자가 숫자 1을 강조했다.

"정확하게는 단계가 있는 거지. 첫 번째 요관은 전이."

남자가 숫자 2부터 6까지를 강조했다.

"나머지는 랜덤."

남자가 혀를 찼다.

"너, 노바는 대체 어떻게 된 거냐? 요관의 위치는 공략이 될 때마다 바뀐다는 기초도 몰라?"

"…아?"

그러고보니 확실히 위치가 미묘하게 달라지긴 했는데…?

"대체 정체가 뭐야? 이름이 뭔데?"

"유민, 아, 아니. 에레브."

현실에서의 이름을 불렀다가 급하게 말을 바꿨다.

다행히 남자는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는 듯했다.

"노바 중 그런 이름은 들어본 적 없다. 대체 뭐하고 산 거야?"

"…그, 요관의 공략을."

"얼마나?"

"5년 동안 계속…"

"혼자서? 용케 안 죽었군."

남자가 식기를 치우며 말했다.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 일단 머릿속에서 상황을 파악할 시간을 주지. 네가 누워 있던 방으로 돌아가라. 저택에 메이즈를 걸어놨으니 마음대로 나갈 생각은 말고."

"절, 어떻게 할 생각인 것…?"

"몇 년 만에 등장한 노바다. 심문을 진행할 거다. 내가 어떤 식으로 보고하느냐에 따라 너의 처우도 달라지지. 잘 알아들었으면 가서 쉬어라. 그리고 존대를 할 거면 확실히 하던가. 반말해도 별 상관은 없다만."

남자는 손을 휘저어 축객령을 내렸다.

묻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정보를 정리하기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과연 8서클의 메이즈라 그런지 길이 이리저리 꼬여 있었는데, 화염으로 표시된 길을 따라가니 방이 금새 나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일단 베르노바인 건 확실하고.'

7서클 노바의 마법을 캔슬 한 마디로 취소시킬 수 있는 건 보통 요행이 아니다.

8서클 정도의 마법사가 베르노바, 원로원에 속해 있지 않을 리 만무하며, 뭣보다 베르노바의 명예를 안고 읊을 수 있는 영창을 하지 않았던가.

'왜 나를 살린 거지?'

저 남자가 나를 살리지 않았다면 나는 그대로 마물들에게 물어뜯겨 죽었을 것임이 분명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날 살릴 이유는 없을 텐데.

노바를 운운하는 걸 보니 내가 기절했을 때 서클 개수를 확인한 건가? 그럴 듯한 추론이다.

'심문을 버틸 수 있나?'

사실 캥기는 건 없다. 유일하게 걱정되는 건 내가 홀을 먹어치운 당사자라는 것.

베르노바가 왜 때문에 요관에 홀에 대한 확인을 위해 탐색했는지는 몰라도, 베르노바가 직접 온 만큼 사태가 위중함은 분명했다.

'…통령이 원로원을 동원했을 때 마물 토벌 수가 수천이었지.'

웬만한 일에는 절대로 발을 떼지 않는 원로원이다.

그런 베르노바를 동원해?

'…죽이기야 하겠어?'

어차피 도망갈 수도 없는 몸.

최대한 나의 무죄를 입증시키는 게 나을 것 같다.

몇 년 만의 등장한 노바라는 것을 보아하니, 나의 쓸모를 입증할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럼 마지막인데….'

난 왜 여자로 바뀌었는가.

솔직히,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화관의 창녀들이 몸을 팔아 돈을 버는 걸 보고 '여자가 된다면 저리 편하게 살 수 있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한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에서 멈췄을 뿐이지, 행동으로 옮기고 싶은 건 아니었다.

서클로 사람들을 두드려패서 무전으로 이용한다는 한 선택지도 있겠다만, 그랬다가는 7서클 노바가 여기 있음을 알리는 꼴이니 그럴 수 없었다. 최대한 쥐죽은 듯이 살아야만 했다.

'길드 의뢰도 받지 못했고.'

이 세계에 떨어진지 얼마 안 됐을 때, 어떻게든 돈을 벌려고 의뢰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결과는 의뢰 해결 13건 중 1건. 그나마 1건도 쥐 떼를 쫓는 일이었다.

내가 블랙리스트에 올라간 건 당연지사.

내가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방법은 마물의 시체를 매도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홀이라도 있다는 것인가.'

소원이라고 하기에도 뭣하지만, 내가 여자로 변한 것과 연관지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다.

'뭐야, 그럼 남자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고 다시 홀 찾으면 되는 거네.'

명쾌한 해답이 나왔다.

문제없군.

나는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이 꼬라지가 된 걸 보니 길드 등록도 다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7서클이라는 건 숨겨야 하겠지만. 그 정도는 쉽다.

'…하. 지금까지 삽질을 하고 있었다니.'

첫 번째 요관만이 전이 능력을 갖고 있다고 했지.

대화의 맥락을 보건데 첫 번째 요관의 난이도가 가장 어려운 것 같다.

'어쩐지 뭔가 들쑥날쑥하더라니.'

마물의 종류가 바뀐다거나, 그런 일이 왕왕 있었다.

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는데, 이런 사실이 있을 줄이야.

'…그럼 첫 번째 요관 난이도는 대체 얼마나 높은 거야?'

난 고작 여섯 번째 요관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며 헤맸는데? 미쳐돌아버리겠군.

8서클 베르노바 수준은 되어야 첫 번째 요관을 돌파할 수 있는 거 아닐까.

아니, 8서클 베르노바 수준을 뛰어넘어야 할지도 모른다.

'마법을 연구해야 해.'

그거 하나가 내 목표가 됐다.

어떻게든 서클을 높여서, 첫 번째 요관을 돌파한다.

그것만이 목표다.

그걸 위한 초석이 심문에서 내가 무해한 존재임을 어필하는 것이다.

심문 전에 조금이라도 긴장을 풀기 위해 몸에 실드를 두르고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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