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630화 (857/857)

외전 630화 (完)

페르안 준은 멍하니 화산華山을 올려다봤다.

한때 그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던, 오히려 철탑과도 같았던 장소는 이제 본래 이름에 어울리는 모습을 되찾았다. 산을 잠식했던 금속은 자취를 감췄고 구름 너머에 넘실대던 기계는 그 그림자도 찾을 수 없게 됐다.

“…아름답구나.”

솔직한 감상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페르안의 목적지는 일전에 방문했을 때처럼 이 산의 봉우리였다. 그러나 당초의 계획이 조금 수정됐다. 목적지는 그대로 유지하되 진로를 바꾸기로 했다. 페르안은 날아가지 않고 천천히 걸어서 올라갔다.

오가는 사람이 많은 걸까? 등산로는 제법 번듯하게 만들어져 있었다. 심지어 올라가는 도중에 무인과 마주치기도 했다.

그들 중 몇몇은 페르안을 보더니 불쑥 다가와서 물었다.

“혹 도움이 필요하시오?”

“아뇨. 괜찮습니다.”

페르안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겉으로 보기에도 많이 불편해 보이는 몸이니 당연했다. 이후로도 페르안은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들었지만, 모두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조급해하지 않고 천천히 산을 오른다. 흐르는 땀을 바람이 식힐 수 있을 만큼 느긋하게. 그러나 너무 늦장을 부린 걸까. 어느새 하늘 저편이 주홍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페르안은 아차한 심정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무리 그래도 해가 지고 나서 도착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다다른 봉우리의 분지엔 여전히 고적한 느낌의 건축물이 세워져 있었다.

운해각.

‘뭔가 작아진 것 같은데?’

페르안은 아마 저 건축물의 주인이 축감을 요구했을 거라 예상했다.

봉우리엔 사람이 몇몇 보였다. 단련을 한 육체는 아니었다. 시중을 드는 자들일까? 페르안이 방문할 걸 미리 들었는지, 시선이 마주치자 온화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인다. 페르안도 비슷한 동작으로 답례했다.

페르안은 운해각이 아닌, 벼랑 끝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누각으로 향했다. 외벽이 없어 주변 풍경을 있는 그대로 감상할 수 있는 그 누각엔 페르안이 만나러 올 인물이 벌써 앉아 있었다.

“어르신, 저 왔습니다.”

“들어오게.”

무심코 마루 위로 올라가려던 페르안은, 잠시 후 신발을 벗은 다음 올라선 다음 앉았다. 그리고 마치 가부좌를 틀듯 앉는 방식에 조금은 적응한 자신에게 뿌듯해했다.

맞은편에 앉은 양인현의 모습이 보였다.

새하얗게 센 머리카락을, 뒤늦게 육체가 쫓아가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좀 더 직관적으로 말하면 주름이 많아졌다. 이상하게도 그 주름이 인상을 부드럽게 만들어서 이제는 무인이란 느낌이 많이 희박해진 사내가 됐다.

페르안은 웃으며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보기 좋군요.”

“자네도.”

늙어 가는 남자와 몸이 성치 않은 남자가 서로를 보며 웃었다.

양인현이 찻잔을 내밀었다. 찻잔을 받은 페르안은 살짝 움찔했다.

식은 차였다.

“이거…….”

“약속 시간에 딱 맞춰 따랐네.”

“음.”

“벌주라 생각하게.”

“하하… 죄송하다는 말씀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페르안이 쓰게 웃으며 찻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양인현은 딱히 화나지 않은 얼굴로 차분히 물었다.

“어쩌다 늦었나?”

“산을 오르다…….”

페르안이 바깥 풍경을 보며 말했다.

“…문득 눈에 담은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구경하다 늦었습니다.”

“음…….”

양인현이 불편한 듯 침음을 흘리니 페르안이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 이유를 들었다면 따뜻한 차를 줬을 걸세.”

“네? 하하하…….”

페르안이 웃음을 터뜨렸고, 그 모습을 본 양인현도 픽 웃으며 차를 새로 달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가 둘 앞에 놓인 다음, 양인현이 천천히 말했다.

“알고 있는가? 이제 화산은 이 부근에서 평화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네.”

“아. 그렇습니까?”

“많은 젊은이들이 풍운을 안고 이 산을 오르게 됐지.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나는 이곳에서 그들이 수련하는 걸 지켜보고, 때때로 조언을 건네거나 하는데…….”

잠깐 망설이던 양인현이 말했다.

“…행복하더군.”

“아.”

“고맙네, 페르안.”

머쓱하게 웃으려던 페르안은, 곧 양인현의 목소리가 무척 진지하단 걸 깨달았다.

“그날 나를 살려 줘서 고맙네. 오늘은 그 말을 하려고 부른 것이야.”

“하, 하하. 그렇군요. 그게…….”

페르안은 얼굴이 화끈거려서 양인현을 마주 보기가 힘들었다. 할 말을 찾아 혀를 굴리는데, 문득 매화 한 송이가 찻잔에 떨어졌다. 페르안은 감탄하며 찻잔 안을 들여다봤다가 고개를 들었다. 나뭇가지에 꽃잎이 몇 송이 피어 있었다.

“벌써 꽃이 피는군요.”

“그럴 때가 됐으니까.”

“매화가 만개한 화산은…….”

“지금보다 곱절은 아름다울 걸세.”

페르안은 아득하게 펼쳐진 화산의 정경을 보며 말했다.

“언제쯤 만개할까요?”

“봄이 오면.”

“조만간이군요.”

“그래.”

양인현과 페르안은 오랫동안 화산을 보았다.

* * *

“아무래도 난 평화의 시대와는 맞지 않나 봐.”

문득 들린 투덜거림에 퓨처릭스가 당황한 얼굴로 일을 멈췄다. 그리고 수북이 쌓인 서류 너머로 고개를 내밀어 반왕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애초에 나는 혼란의 시대에 태어났잖아? 요즘 너무 따분해. 그냥.”

“…전하, 부디 체통을 지켜 주십시오.”

“전하도 아니고, 체통 지킬 생각도 없어.”

반왕이 손을 휘저으며 대충 대꾸했다. 그 모습을 보니 퓨처릭스는 한숨이 나왔다. 얇은 옷차림에 배를 바닥으로 향한 채 다리를 까닥이며 책을 읽는 모습. 심지어 읽고 있는 책은 교양, 인문 서적도 아닌 만화책이라니.

퓨처릭스는 말과 달리 누구보다 평화를 만끽하고 있는 왕을, 불경하게도 사춘기에 맞이한 딸아이 보듯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식한 의안은 어떻습니까?”

“음. 딱 좋아. 전보다 덜 보이긴 하지만, 딱히 많이 본다고 좋은 건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과자를 집어 먹던 반왕이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릭스, 세상엔 이제 반왕이 필요하지 않아.”

익숙하지 않은 애칭에 떨떠름한 기분을 느꼈지만, 퓨처릭스는 내색하지 않고 대꾸했다.

“제겐 필요합니다.”

“왕이 필요한 건 아니잖아?”

“그럼 제가 전하를 어떻게 부르면 되겠습니까?”

그러자 반왕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건 기다려. 이름을 받고 싶은 사람이 있거든.”

“전하, 그는…….”

“알아. 얘기는 다 들었으니까. 그래도 난 그 남자가 다시 돌아올 것 같은데?”

퓨처릭스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럼 그날이 올 때까지, 이 퓨처릭스가 성심성의껏 보좌하겠습니다.”

“고마워. 그럼.”

반왕이 씩 웃으며 말했다.

“과자랑 주스 좀 더 가져와 주라.”

* * *

죽음벌레는 눈을 떴다.

조용한 군락지의 공기가 오늘따라 묘하게 가열되어 있었다. 침입자가 있다는 뜻이다. 부스스한 정신으로 둥지를 나서자, 금방 그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는…….”

곤혹스러워하는 얼굴엔 눈앞의 손님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게 아니다. 오히려 정체성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그게 문제였다. 눈앞의 존재는 너무 복합적인 정체성을 안고 있었다.

“베니앙이면 돼요.”

베니앙은 짧게 호칭에 대한 문제를 정리하고 앞까지 걸어왔다.

“…베니앙, 여긴 무슨 일로?”

“앞으로 바빠질 것 같아서 그 전에 얘기나 나눌까 해서 왔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할 얘기가 있나?”

“당신 친구에 대한 얘기라면요?”

죽음벌레가 입을 닫았다.

“세상은 차분하게 안정화되고 있어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대부분의 힘을 잃은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했는데, 해야 될 일이 엄청 많더라구요.”

“그게 뭐지?”

“합쳐진 세상을 세분화할 겁니다. 이 거대한 세상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소외된 자들이 많아요. 그들에게 알맞은 행성을 찾아 주고, 데려다주는 게 저의 목표예요.”

“어려운 일이겠군.”

“하지만 보람차겠죠.”

죽음벌레는 부정하지 않았다.

“저 말고도 사명을 가지게 된 사람은 많아요. 당분간은 바쁜 세상이 되겠죠.”

“내게 협력을 구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비꼬러 온 것인가.”

죽음벌레가 순수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쟁이 끝나고 그는 자신의 둥지에 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 목적은 처음에 밝힌 대로입니다. 얘기를 하러 온 거예요.”

베니앙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그자가 죽었을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전 살아 있을 거라 믿어요.”

“…그럼 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거지?”

“숨어 있는 게 아닐까요?”

죽음벌레가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숨어 있다고?”

“네. 말씀드렸다시피 해야 될 일이 너무 많으니까요. 지금 돌아오면 자기에게도 쉽지 않은 업무가 주어질 테니, 농땡이를 피우고 있는 거죠.”

“하하.”

죽음벌레가 웃음을 터뜨렸다.

“일리가 있군.”

“네.”

“네 말대로라면… 세상이 안정화돼야 그가 얼굴을 비치겠어.”

“그렇죠.”

“그럼 나도 언제까지 여기 박혀 있을 수는 없겠는걸.”

죽음벌레가 물었다.

“베니앙, 혹시 내가 해야 될 일이 있나?”

“많죠. 아. 그 전에… 잠깐만요.”

베니앙이 손목시계를 보더니 씩 웃었다.

“해야 될 일이 있어서 금방 갔다 올게요.”

* * *

엘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곳에 걸려 있는 태양의 존재가 아직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야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는 별빛과 달리 태양은 너무 찬란했다. 저것이 하늘에 떠 있는 동안은 그 존재를 잊거나, 보지 않거나, 심지어는 건물 안에 있을 때에도 열기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엘은 그 사실이 낯설었다. 그녀의 근본이 태양인데도 그렇다.

‘빨리 해가 졌으면.’

그런 생각을 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해가 중천에 떠 있고, 구름 한 점조차 없는 하늘에서 벌어질 일은 아니었다.

살짝 눈을 크게 뜬 엘은, 잠시 후 어렵지 않게 평정을 되찾고 말했다.

“나한테 볼일이라도?”

어느새 그녀의 앞엔 검은 개 한 마리가 서 있었다. 개는 짖지도 달려들지도 않고 가만히 서서 엘을 보더니 문득 입을 열었다.

“그냥 보러 왔다.”

“무슨 뜻이지?”

“이 세상에서 그나마 멀쩡한 건 너와 나 둘뿐인 것 같아서 말이지.”

“…….”

엘이 침묵했다. 긍정의 의미를 담은 침묵이었다.

마왕의 말대로, 군림자와 4기사 중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건 그들뿐이었다.

“거인은 진작 죽었고 뇌존은 바라던 최후를 맞이했다. 용은 대부분의 힘을 잃었지.”

“청기사는 만복했고 흑기사는 이제 죽음에 얽매이지 않아. 백기사는… 솔직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

마왕이 말했다.

“나는 적당한 행성을 찾아 떠날 생각이다. 혼란스러운 행성이면 좋을 것 같군. 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는 곳.”

“어째서?”

“그런 곳이 가장 재밌었다. 찾는 데 오래 걸릴 것 같으면 내가 하나 만들어도 괜찮을 것 같고.”

엘은 약간 이해가 가지 않아서 마왕을 보았다.

마왕이 다시 말했다.

“일단 나의 목적은 그런데, 솔직히 급조한 목적이지. 그러니 널 만나러 온 이유엔 호기심도 있었다. 나와 동등한 힘을 가진 넌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더군. 적기사, 넌 뭘 하고 있었나?”

잠깐 생각하던 엘이 대꾸했다.

“…다른 기사들처럼 돼야겠지. 나도 전쟁을 극복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그게 어떻게 하는 건지 도통 감이 오지 않지만. 그러니 일단 당분간은 수단을 찾는 여정이 되겠군.”

“그런가.”

마왕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작별도 남기지 않고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깐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엘은, 진로를 바꿔 그 뒤를 따랐다.

“군림자 검은 가시의 마왕.”

“뭐지?”

“아이 가지는 것엔 흥미가 없나?”

“무슨 소리지?”

“아이를 가지게 되면 평화를 느끼게 된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거기에 군림자와 4기사의 아이가 어떨지 호기심도 있고.”

“…미안하지만 난 여자다.”

“이런.”

* * *

따사로운 햇살이 부드럽게 눈가를 어루만졌다.

“으으윽…….”

푹신한 침대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끈적하게 달라붙었지만, 민하린은 가공할 만한 정신력으로 떨쳐 냈다. 그리고 기지개를 크게 켜며 한 줌 남은 노곤함도 날려 버렸다.

그럼에도 완전히 정신이 각성하기까지는 아직 딜레이가 있어서, 잠시 멍하니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잠이 달달한 날이다. 이럴 때는 하루 종일 이불 위에서 뒹굴뒹굴해야 되는데…….

물론 그럴 수는 없다. 오늘은 민하린에게 아주 중요한 날이기 때문이다. 스승님의 첫째가는 제자로서 결코 게으름을 피울 수 없는 날.

바로 스승님이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민하린은 첫 번째 제자로서 스승님의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짐을 챙겨 드리고, 여유가 된다면 간단한 아침식사를 나눌 예정이었다.

간단한 세안을 마치고 나왔을 때, 민하린은 탁자 위에 있는 쪽지를 발견했다.

“응?”

무심코 쪽지를 집어 든 민하린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탁자 위에 있는 시계를 덥석 잡았다.

“…아.”

툭.

손에 들린 시계가 푹신한 카펫 위로 힘없이 떨어졌다.

[많이 피곤해 보여서 깨우지 않았습니다. 푹 쉬세요ㅎ

-Venian Argento

추신. 수면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좀 더 기르시는 게 어떨까요?]

* * *

세디는 부엌에서 요리한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광경을 목격하며 영 떨쳐 내기 힘든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고기를 손질하고, 스튜를 끓이고, 야채를 씻는 페일의 모습에 아직도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적응할 수 있는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지금은 페일이 요리하는 걸 구경하러 온 게 아니라서 물어봤다.

“용케 안 따라갔네?”

불퉁한 목소리를 내뱉으니 페일이 고개를 돌렸다.

“떼를 써서라도 같이 가겠다고 할 줄 알았어.”

“흐흥. 엄마는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이지 않아요.”

“누가 엄마야.”

세디가 관자놀이를 꾹 누른 다음 다시 말했다.

“불안하진 않아? 그 여자도 같이 갔잖아.”

“그건 단단히 약속해서 괜찮아요.”

“무슨 약속?”

“그런 게 있어요. 흐흐……. 자. 다 됐다!”

페일이 손에 묻은 물기를 털고 식탁에 음식을 날랐다. 세디는 그 냄새가 꽤 식욕을 자극한다는 사실도 낯설었다.

식탁 위에 착착 놓이는 음식을 구경하고 있는데 갑자기 덜컥 누군가가 덮쳐 왔다.

“윽, 무거워.”

“아침 식사 준비에 대한 대가!”

“누가 해 달랬냐!”

소리는 쳤지만 세게 밀어내진 못했다. 차라리 청기사였을 때가 덜 까다로웠던 것 같기도 했다.

페일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난 여기서 세디나 꼬시려구요! 원래 아빠는 딸이 좋다는 쪽을 고른대요.”

“누가?”

“검은 가시의 마왕이.”

“그분… 아니, 그자가? 아니. 그것보다 너, 4기사인 주제에 누구한테 조언을 듣는 거야?”

“에이. 요즘 시대에 군림자니 4기사니, 그런 게 무슨 상관이에요?”

페일이 실실 웃으며 뺨을 문질렀다. 세디는 질린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일단 음식부터 먹으면 안 될까? 다 식겠다.”

“네! 그리고 알죠? 식사는.”

“알아. 몇 번을 말하게 하는 거야?”

그래도 페일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직접 말하길 기대하는 듯 바라봐서, 세디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되도록 길게 천천히 먹을 것. 됐지?”

“네! 잘 먹겠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그들은 길고, 느리고, 즐거운 식사를 가졌다.

* * *

언덕을 넘은 시점에서, 루카스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여태껏 걸어온 길, 지나온 장소가 한눈에 보였다. 왠지 모르게 넋이 나간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는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왜 네가 오게 됐냐?”

“무슨 뜻이지?”

“악마왕이 올 수도 있었던 거 아니야?”

“아니, 뭐. 그렇긴 한데.”

카사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그놈이 저번엔 내가 활약했으니까, 이번엔 형이 가라고 하던데.”

“음. 혀, 형이라…….”

아나스타샤─ 아니, 이번 여정에서만큼은 슈하이저라는 이름을 잠시 쓰기로 한 소녀가 침음을 흘렸다.

“그 악마왕이, 진짜 너를 그렇게 부르는 거냐?”

“물론이지. 나름 귀엽다.”

“미친 거야?”

“이건 농담이고… 근본은 그리 나쁜 녀석이 아니라고.”

“네가 말하니 더럽게 설득력 없군. 자뻑 하는 것도 아니고.”

“내 일은 됐고. 루카스, 너는?”

그제야 루카스도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나?”

“그 청기사가 가만히 있더냐? 비록 우리가 다 같이 떠나는 여행이어도, 저 여우랑 함께하는 걸 두 눈 뜨고 납득했다는 게 신기하군.”

“누가 여우예요? 이 비실이가.”

“페일도 변하는 중이란 거겠지.”

“…아니, 저 떠나기 전에 협박받았는데요.”

이리스가 떨떠름한 얼굴로 말했다.

“무슨 협박?”

“루카스의 ‘그걸’ 깨면 죽이겠대요.”

카사진이 사뭇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그거’라면…….”

“네. ‘그거’죠.”

“와… 너 설마 아직도…….”

“…이 화제는 정말 평생을 따라오는군.”

루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얘기는 끝났소?”

그사이 돌아온 루시드가 말했다.

“둘러보고 왔는데 서쪽에 불안전지대가 있는 걸 확인했소. 쭉 걸으면 해가 지기 전에는 도착할 것 같으니, 식사는 거기서 하는 게 어떨까 싶소만.”

“그래. 그러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장서서 걸었다.

하지만 몇 발자국 걷지 못하고 다시 뒤를 돌아봤다.

“뒤에 뭐 있냐? 왜 자꾸 봐?”

“감사해서.”

“누구한테?”

“…그냥, 다.”

“싱거운 놈.”

카사잔이 웃었고, 루카스 트로우맨의 입가에도 미소가 피어났다.

그리고 앞을 보았다.

이 수많은 가능성을 내포한 우주의 깨어진 균형을 맞추기 위해서,

─대마도사는 친우들과 함께 여정의 첫발을 내디뎠다.

후기

안녕하세요, 낙하산입니다.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잘 지내셨죠? 부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긴 이야기가 이렇게 끝났습니다. 우선 마지막 순간까지 따라온 모든 분들께 가장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우선 외전에 들어와서 특히 잦았던 휴재나 지연에 대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다시 한번 드리고 싶었습니다.

글을 읽으신 독자 여러분들은 당연히 느꼈겠지만, 외전에선 글을 이끌어야 할 작가가 글에 휘둘리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못된 핑계지만 장편 이야기가 가지는 힘은 대단해서 작가인 제가 원활히 이끌어 가지 못하고 반대로 휩쓸렸습니다. 글이 중구난방이 돼 버리는 구간이 있었는데 대부분 제가 이야기의 흐름 조절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전개가 꼬임에 따라 원래 구상했던 이야기의 흐름이 계속 뒤틀리고, 기존에 생각해 뒀던 엔딩으로는 도무지 끝을 낼 수가 없어서, 다시 쓰고, 수정하고, 덧붙이고, 빼고, 하여간 그러다 보니 누더기 꼴이지만 그제야 이야기의 형태가 조금은 잡혔습니다. 그러니 사실 오늘 독자님들께서 읽으신 엔딩은 몇 번이고 바뀐 끝에 결정된 형태입니다.

그러는 중에도 저로선 반드시 지키고 싶은 조건이 있었는데, 어떤 형태로 엔딩이 나든 루카스의 손으로는 마무리가 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본편에서도, 외전에서도 처절하게 고생한 만큼 마지막 이야기만큼은 루카스에게 고통과 희생이 강요되지 않았으면 했습니다. 레시듀라는 캐릭터가 탄생하게 된 계기였죠.

외전 최후반부에 들어서 루카스의 비중이 낮아지고, 다른 주조연의 서사에 많이 신경을 쓴 것도 이러한 이유였습니다. 많이 고민했던 부분이고, 솔직히 생각했던 모든 캐릭터의 서사를 풀어내지는 못했습니다만 현 웹 소설의 특징이나 호흡을 생각했을 때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해서 개인적으로는 만족합니다.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소설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허투루 쓴 편은 단 한 편도 없었다는 점입니다. 독자님들은 그게 뭐? 당연한 거 아니냐? 라고 말씀하실 테지만, 저는 그 당연한 걸 지키기 힘들 만큼 지쳤었던 모양이에요. 좀 엄살 부리는 말이 됐는데… 후기에서만큼은 이해해 주시겠죠?

그래서 완결까지 읽어 주신 독자님들께는 정말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사만귀의 외전은 제게 있어서 특히 더 이기적인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작가의 만족과 독자님들의 만족 중 하나를 택일해야 되는 상황이 많이 생겼는데, 전 루카스처럼 된 놈이 아니라 제3의 선택지를 도무지 못 찾겠더라구요.

이런 제멋대로인 이야기의 끝까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어울려 주셨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모두 감사드립니다. 물론 1부까지만 보신 분들도, 도중에 그만 읽으신 분들도요.

본 소설의 첫 편을 올린 날이 17년 8월 5일, 오늘이 21년 9월 3일이니 약 4년을 한 소설을 쓴 게 됐네요. 사만귀는 제게 있어서 정말 큰 의미를 가지는 소설이 될 것 같습니다.

후기를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서 과거 본편 때의 완결 후기를 읽어 봤습니다. 4년 전의 제가 이렇게 말하고 있더군요. 열정도 닳는다고. 그 말대로입니다.

글쓰기를 참 좋아하고, 제 능력이 닿는 한 계속 집필을 이어 가고 싶지만 장기 연재를 하다 보니 소유하고 있던 열정이 많이 소모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그러니 우선 소모된 열정부터 충분히 보충하고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이번 글을 쓰며 많이 배웠지만, 동시에 부족한 점도 많이 느꼈습니다. 더 공부하면서, 집필 기간 동안 외면했던 건강이나 가족, 인간관계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요. 최소 1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으니, 혹 나중에 우연히 발견하셨을 때 낙하산이란 필명을 기억하고 계시면 대단히 기쁠 것 같습니다.

읽어 주신 모든 독자님들께 감사드리고, 더 재밌는 글로 만나 뵐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럼 모두 행복하세요!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