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24화
쏴아아-.
한동안 빗물이 내리는 소리만이 들렸다.
멱살을 잡은 손아귀 힘이 서서히 약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에 맞춰 루카스의 고개도 떨어졌다.
“…단순히 시간이 부족했을 뿐이다. 쓰러졌으면 일어설 시간이 필요하고, 다쳤으면 치료할 시간이 필요하다. 왜 기다려 주지 않았던 거지? 어째서 내게 상처를 살필 여유조차 주지 않았던 거냐. 나를 위해서라고? 정말 그게 이유인가?”
“너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 자들이 있다.”
레시듀도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 몸도 그들 중 하나였을 뿐이야.”
“그 결과 루카스가 죽게 되어도?”
레시듀는 침묵했다.
비슷한 말을 이리스가 지껄였던 게 생각났다.
“사막에서 네가 떠나고, 내겐 매 순간이 지옥이었다. 내가 전혀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는 느낌을 쭉 받았지. 거기서 파생되는 감정은 자기혐오 따위로 치부할 수 있는 게 아니었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자살이 아닌 타살로 느껴질 만큼의 위화감이었다. 아마 나는 살아가는 방식을 하나밖에 알지 못했던 거겠지.”
“…….”
“그러니까 그만둬라. 어떤 쪽을 골라도 지옥이라면 내가 고른 길로 가는 게 맞아. 그 편이 그나마 후회가 덜 남을 테니까.”
“멍청한 소리. 네놈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모르니까 그딴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다. 잊었나? 이 몸이 보여 줬던 미래의 기억을. 그건 네가 앞으로 겪을 끔찍한 미래의 체험판에 불과해. 고작 그것만으로 너는 꺾였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지. 이 자리에 있는 게 증거고.”
“…….”
“…이렇게 말해도 네가 억지를 부리면 나로선 수긍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알아둬라. 만약 이 자리에서 힘으로 나를 찍어 누르면 나는 평생 널 용서하지 않을 거야.”
“하.”
“억울한 일 아닌가? 넌 나를 구하려고 이 짓거리를 했지만 오히려 원망만 받게 되는 거다.”
빠악!
그 직후 루카스는 후두부에서 강렬한 충격을 느꼈다. 순간적으로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는 가운데, 레시듀는 자신을 깔아뭉개고 있던 루카스를 떨쳐내고 벌떡 일어났다.
“큭…….”
어떻게 공격한 거지?
발? 발을 직각을 넘어선 각도까지 세워서 발부리로 뒤통수를 때린 거라면 설명이 된다.
“얕보지 마라, 이 개자식아! 이 몸이 네놈에게 감사나 받으려고 이러는 것 같나?”
이번엔 레시듀가 멱살을 잡아챘다.
“용서하지 않아? 원망할 거라고? 빌어먹을 놈이, 지금 협박이라도 하는 거냐? 그딴 말을 들으면 이 몸이 움츠러들기라도 할 것 같나?”
뒤이어 주먹이 날아왔다. 루카스는 왠지 모르게 반격할 수가 없어 그대로 맞았다.
레시듀가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나는 나를 위해서만 움직인다! 네놈 때문이 아니야! 그 차이를 모르겠나? 모르겠냐고!”
“날 살리는 게 왜 너를 위한 일이지?”
“결국 네놈이 나를 바꿨으니까!”
루카스가 입을 닫았다.
“그리고 나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확인했다! 너와 나 둘 중 한 명이 반드시 죽어야 한다면 네놈보단 내가 죽는 게 낫다는 걸! 누굴 붙잡고 물어봐도 같은 답이 나오겠지!”
“다른 사람의 생각 따위…….”
“그딴 놈들은 알 바 아냐! 나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했단 말이다!”
그리고 이번엔 크게 외친 레시듀가 입을 닫았다.
루카스는 그 모습이 반쯤 홧김에 본심을 내뱉고 당황하는 것처럼 보였다.
“페일만이 아니다. 지금의 너는 모르겠지. 이 무대 너머엔 널 기다리는 자들이 셀 수도 없을 만큼 있다. 놈들 모두가 네게 빚을 졌어. 그걸 갚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하지만 그딴 건 내게 이유가 되지 않아. 나는 저울대에 너와 나의 목숨만을 올려놨다. 처음엔 수평으로 보였지만 차츰 생각이 한쪽으로 기울었지.”
“…….”
“…네가 사는 게 맞아. 한쪽만이 살아야 한다면 네놈이 사는 게 맞다고. 이 말이 이해하기 힘든가?”
마지막 목소리에선 이제 거의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멱살을 잡았던 손아귀 힘도 그랬다.
루카스는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쪽이 격렬했을 땐 저쪽이 차분했고, 저쪽이 격렬해지니 이쪽이 차분해졌다. 마치 두 개의 몸을 영역 삼아 감정이란 놈이 들락날락거리는 기분이었다.
한동안 쏟아지는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다가 입을 열었다.
“처음에 말했던 거 기억하나? 네 얼굴을 보니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한 거.”
“그랬지.”
“그날. 나는 패배를 시인하기 전에 네게 한 가지 물어봤어야 했어.”
“반년 뒤에야 떠오르다니. 까먹은 정도가 아니군. 뭐냐?”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레시듀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후회라니?”
“앞으로 네가 할 짓은 결국 네 일이 아니야. 내 일이지. 우정이나 연민, 배려, 혹은 단순한 마음의 빚……. 여러 이유를 붙여가며 포장해도 이게 진실이다. 변하지 않는 진실.”
루카스가 말했다.
“반년 동안 깨달은 게 있다. 스스로 선택한 지옥과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지옥 중에서, 사람을 정말로 미치게 만드는 건 후자야. 전자의 경우엔 어떻게든 미치지 않고 버틸 수 있다.”
“어째서?”
“사람에겐 자존심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도망치는 건 꼴사나우니까.”
“…고작 그것만으로?”
“나에 대해 잘 안다면서. 그런데 자존심에 관한 문제를 가볍게 말할 수 있나?”
레시듀가 입을 닫았다.
루카스는 침묵을 피부로 느끼다가 말했다.
“방금 일은 사과하겠다. 아직 너에 대해 잘 몰라서 한 소리였어. 그리고 다시 묻겠다. 긴 시간 동안 나로 살면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
“…….”
“나는 잘못을 인정했어. 그러니 너도 솔직해져 다오.”
여전히 입을 닫고 있는 레시듀를 보며 루카스가 말을 이었다.
“나는… 아닐 것 같아. 내가 너라면 한 번은, 아니. 몇 번이고 날 이 지경으로 만든 녀석을 원망하고 저주를 퍼부을 것 같다. 혹시 미래에서 본 나는 어땠나? 후회와는 거리가 먼 남자가 됐나?”
“아니.”
레시듀가 비로소 대답했다.
“네 삶은 후회의 연속이었다. 너는 스스로의 운명을 저주하며, 턱밑까지 차오른 절망에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몇백 번이고 죽고 싶어 했지.”
“그럼 그 끝은 어땠나? 괴로워만 하다 최후를 자살로 장식하기라도 했나?”
“…….”
“그렇지는 않겠지. 만약 내 최후가 한심했을 뿐이라면 너 정도의 남자가 내게 경의를 표할 리 없으니까.”
“많은 걸 잃게 될 거다.”
레시듀는 이제 스스로의 목소리에서 확신이 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라진 확신은 어디로 갔는가.
레시듀는 그걸 루카스의 눈동자에서 보았다.
“그렇게 잃어버린 건 다시는 되찾을 수 없어. 그리고 최후의 순간 너는 미증유의 시련이 된다. 네가 구했던 자, 너를 구했던 자, 너를 좋아했던 자와 싫어하는 자. 그 모든 존재가 힘을 합쳐서 너를 죽이려 들겠지.”
루카스가 씁쓸하게 웃었다.
“썩 좋은 삶은 아니군. 그럼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다.”
“말해라.”
“그건 강요된 일이었나.”
이 순간 레시듀는 여태까지의 대화 중 가장 말문이 막혀 버렸다.
“누군가 억지로 위임해서, 나로선 거절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받아들이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야말로 결정타가 될 거란 사실이 느껴졌다. 여기서 잘만 대답하면 루카스는 포기하고 돌아갈 것이다.
그러나 레시듀는 쉽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할 말을 찾아 우물거리는 입술, 혀 위로 굴러다니는 단어는 쉽게 뭉쳐지지 않고 흩어졌다.
…거짓말조차 할 수 없었다.
바깥으로 떠나던 루카스 트로우맨의 모습, 그걸 지켜보던 뇌존의 찌꺼기. 모든 상황이 최악을 가리키는 가운데에, 루카스에겐 여전히 선택지가 있었다. 외면해도 됐고 도망쳤어도 됐다. 아예 목숨을 끊을 수도 있었다.
루카스는 그러지 않았다.
“…빌어먹을.”
뭉치지 못한 단어는 결국 한숨, 그리고 욕지거리가 되어 흘러나왔다.
그 순간 웃음소리가 들렸다. 빗물을 맞으며 루카스가 미친 사람처럼 웃고 있었다.
“뭘 처웃어. 이 미치광이가. 너는 두렵지 않은 거냐?”
“두렵다.”
“후회는?”
“하겠지.”
“죽고 싶다는 생각은─.”
“매일 할지도 몰라.”
“그런데도.”
“그래. 그럼에도.”
루카스가 절벽을 보았다.
“다른 누군가가 짊어지는 꼴을 볼 바에 내가 하겠다.”
* * *
혼자 남은 레시듀는 먹구름밖에 없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폭우가 얼굴을 사납게 두드리는데도 눈을 감을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 세상에 오고 나서 이상하게 계속 마음이 무거웠다. 루카스를 대신하는 건 레시듀에게 분명 만족스런 일이 분명했는데도 그렇다. 만족감과는 별개로 끝까지 내키지가 않았다. 시간이 아슬아슬할 때까지 절벽을 내려가지 않았던 이유기도 했는데.
…어째서일까?
잘난 척 으스댔던 것과 달리 본심은 겁을 먹었던 건가? 루카스가 걸었던 길을 알고 있으니까, 이제 그게 나의 진로가 됐다는 사실에 막막함을 느꼈나.
아니었다.
레시듀는 단순히 실망하고 싶지가 않았다.
루카스가 책임을 저버리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건 마지막 순간까지 레시듀가 이기심을 버리지 못했다는 증거기도 했다.
“…아야야. 쓰려 죽겠군. 빌어먹을.”
찢겨져 볼 안쪽을 혀로 툭툭 건드리다가 레시듀는 웃음을 터뜨렸다.
큭큭큭…….
단순하게만 보면 순 악마가 따로 없다.
가시밭길에, 온갖 고통이 도사리고 있는 데다, 수십, 수백 번 죽고 싶어 할 만큼 힘들어 할 걸 알고 있는데도 그 삶을 반복하길 바라다니.
게다가 그 사실이 기꺼움까지 느끼다니.
“약한 주제에.”
데미갓 로드 따위도 어쩌지 못할 만큼 연약한 주제에.
그런데도 놈은 여전히 레시듀가 알고 있는 루카스란 게 놀라워서, 또 기뻐서.
레시듀는 먹구름과 쏟아지는 빗물, 그 너머에서 때때로 번뜩이는 뇌광雷光을 눈에 담으며 흥얼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천둥이 치는 날, 닻을 올려라.
전사의 항로, 용기의 여정.
언젠가 들었던 가락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으나 이상하게 위태로운 느낌을 줬다. 노래는 태풍을 만난 범선처럼,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듯 위태롭게 이어졌다.
태풍과 해일은 나를 보아라.
갑판이 무너지고, 돛대가 부서져도.
노래가 이어질수록 레시듀의 표정이 차츰 미묘해졌다.
레시듀는 문득 다시 하늘을 보았다. 이상하게 암운 너머에서 누군가 자신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
잠시 후 커다랗게 떠진 눈동자엔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고,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전사의 항해는… 멈추지 않으리…….
노래가 끝났을 때 레시듀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아주 잠시간 그랬다.
“큭큭…….”
꽉 다물어져 있던 입술이 벌어지더니 미약한 웃음이 새어나왔다.
“하하, 하하하……!”
작은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한 광소로 변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하하하하!”
꽈르릉!
급작스럽게 터져 나온 광소에 호응하듯, 암운 속에서 고요히 울렸던 뇌전이 하늘 전역에 가지처럼 뻗어 나갔다.
한참 낄낄대며 웃던 레시듀의 시선이 절벽에 닿았다.
그리고 잠시 후.
레시듀는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