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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623화 (850/857)

외전 623화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마나를 죄다 쏟아부으면서 날았고, 더 이상 마법을 전개할 마나가 없어진 이후엔 무식하게 달렸다. 우스운 일이다. 명색이 대마법사란 작자가 좀 날았다고 마나가 동나 버리다니. 반년간 보냈던 나태한 삶이 뼈아프게 돌아온 셈이다.

육체도 마찬가지다. 몇 시간 달린 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듯 뛰었고 호흡을 가다듬는 게 힘들었다. 카사진이 보면 낄낄대며 비웃을 일.

곰곰이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긴 하다. 이게 반년 동안 가능한 퇴보일까?

루카스는 알 수 없었다. 마도학의 길에 들어선 이후, 반년 동안 마나를 다루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약화는 스스로가 바랐던 일일지도 모른다.

루카스는 이 자리에 드러눕고 싶다는 충동을 억눌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쇠하지 않은 게 하나쯤은 있단 걸 증명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끈기였다.

…하늘이 주홍빛으로 물들 시점부터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느새 주변이 캄캄해졌다. 수많은 풍경을 지나쳐 루카스는 다시금 숲에 들어서 있었다.

쏴아아-.

언제부턴가 쏟아지는 굵은 빛줄기는 나뭇잎 사이를 뚫고 기어이 머리카락을 두드렸다. 차가운 물방울이 체온을 앗아가며 차츰 의식이 흐릿해졌다. 몸은 불덩이처럼 뜨거운데 역설적으로 추위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생사를 오가는 중인지, 혹은 현실과 꿈속을 헤매는 중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가운데, 캄캄한 숲에서 불쑥 솟은 듯한 희끄무레한 무언가를 보았다.

─…….

루카스는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육체의 혹사와는 다른 의미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고, 턱 선을 타고 흐르는 빗물에 식은땀이 섞여들었다.

어둠 속에서 본 건 분명 슈하이저였다. 좀 더 거리낌 없이 말하면, 슈하이저의 시체였다. 스쳐 봤을 뿐인데도 그 모습이 지나치게 선명하다. 창백한 얼굴, 입가에 흐르던 핏줄기와 생채기, 무엇보다 가슴에 뚫린 구멍.

“-욱.”

구역질이 치밀었으나 억지로 눌러 삼켰다. 여기서 속을 게워냈다간 체력 소모와 탈수의 여파로 더 이상 뛸 수 없게 될 테니까.

달빛마저 거부하는 한밤중의 숲속에선 초목의 형상은커녕 방향도 정확히 분간되지 않았다. 질척거리는 지면과, 축축함, 나의 것인지 다른 이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후끈한 숨결.

루카스는 깨닫지 못했다면 좋았을 걸 깨달았다.

지금 이 장소가 지하에 있던 데미갓의 위장과 흡사하다는 사실 말이다.

그러던 도중 다시 한번 무언가가 보였다. 이리스 피스파인더였다.

다만 그 얼굴엔 입만이 있었다.

눈도, 코도, 귀도 없이 하얀 얼굴.

─뭘 하고 있어요?

어제 불현듯 방문한 그녀가 남겼던 질문.

루카스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저때 이리스가 어떤 표정을 지었지? 딱히 시선을 피한 건 아닌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루카스의 머리는 곧 방금 보았던 하얀 얼굴에 여러 표정을 그려 나갔다. 분노와 혐오, 실망, 증오,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였다.

이리스가 남긴 목소리는 아주 오랫동안 귓가에 남았다.

뭘 하고 있냐고.

이리스가 그리 물었을 때 말문이 턱 막힌 것, 그건 기억이 난다. 정리되지 않고 난잡한 생각들 또한 머릿속에 떠올랐는데 그중 어떤 것도 입 밖에 꺼낼 수는 없었다. 뭐라 지껄이든 핑계에 불과하단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꼴사나운 남자가 마지막 일선만은 밟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고 그간의 병신 같은 짓거리가 사라지지는 않지만.

‘병신 같은 짓거리……!’

까득 이를 갈며 한번 더 자학했다.

그렇다고 자기혐오가 사라지지는 않았다.

대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걸까? 루카스가 보낸 반년의 시간은 그에게 있어 순전히 낭비의 시간이었다. 함께 했던 이에겐 잔인한 말이겠으나 그게 진실이다.

왜냐면, 루카스는 그 긴 시간 동안 이도 저도 아닌 심정으로 보냈기 때문이다.

─…그, 만.

다시 한번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얼굴이고 입술이고 퉁퉁 부은 남자가 패배를 시인하고 있는 광경이었다. 참패한 자신의 모습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기분은 낯설었다.

이상하게 다른 스쳐 지나간 모든 환영과 달리, 이 환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눈동자 안쪽에 새겨진 자문처럼 계속 그 자리에 있었다.

루카스는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직 풍경이 보여 주고 싶은 게 남아 있는 모양이다.

─…….

자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가 ‘루카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카스는 남자가 짓고 있는 표정을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가슴 깊숙한 곳에서 뜨거운 게 차올랐다.

“으아아아─!”

비명 같은 포효를 내질렀다. 그런데도 분노의 불길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거친 바람을 받은 것처럼 더욱 격렬히 타올랐다. 순전히 스스로가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루카스, 루카스!’

이 멍청한 새끼!

대체 네놈은 뭘 하고 싶었던 거냐?

그 승부는 공정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놈은 힘을 숨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결과만큼은 부정해선 안 된다. 그 결과란 단순히 싸움의 승패를 말하는 게 아니다.

‘그만’이라고 말한 건 나였다. 끝까지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결국 고통에 굴복하여 패배를 시인했다.

너무 힘들어서, 그 이상으로 두려워서.

친우의 죽음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내가, 놈이 말한 고통뿐인 미래를 버틸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시에 비열한 생각도 들었다.

이때까지 한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나는 세상사에 그럭저럭 기여했다. 올바르게 살았고, 슬픈 일도 겪었다. 그리고 이 남자 또한 나를 대신하는 걸 바라고 있으니, 모두가 원하던 결과를 얻은 셈이 아닌가.

‘그럼 그 비열한 생각을 끝까지 관철하기라도 했어야지!’

한번 겁쟁이가 되기로 했으면 끝까지 겁쟁이로 남았어야 했다. 그게 바로 결과에 승복하는 것 아니겠나?

루카스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가 없었다.

그 직후 페일이 다가왔을 때도, 그녀가 치료해 줬을 때도, 이후 둘이서 잠깐 세상을 떠돌 때도, 한적한 마을에 있는 오두막을 집으로 삼았을 때도, 루카스의 마음은 계속 다른 곳에 있었다.

나는,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건─.

…….

…….

마침내 루카스는 어둠 속에서 빠져나왔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보였다. 그 너머는 잘 보이지 않았다. 쏟아지는 빗줄기와 지평선 너머에 있는 먹구름, 낭떠러지 밑의 어둠이 한데 섞여서, 폭풍우가 치는 밤바다를 앞두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그 끝에 ‘루카스’가 서 있었다.

“허억, 허억…….”

루카스는 숨을 몰아쉬며 벼랑 끝에 걸쳐 있듯 서 있는 ‘루카스’를 보았다.

쏴아아아-.

그러나 쏟아지는 빗줄기는 그 자신만이 아닌 저 환영까지 적시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건 환영이 아니었다.

비틀거리며 다가갈수록 그 생각이 강해졌다.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손대중은 하지 않았는데.”

“무슨, 손대중.”

루카스가 숨을 몰아쉬며 대꾸하자, 레시듀의 시선이 슬쩍 절벽으로 향했다.

“이 몸은 최선을 다해서 네놈을 부숴 놨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묘하기도 하군. 네놈의 정신이 박살 났다는 확신과는 별개로, 나는 네놈이 오늘 이 자리에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확률은 많이 낮다고 생각했지만. 궁금한데? 무엇이 계기가 된 거냐?”

루카스가 신경질적으로 후드를 벗었다. 빗물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썼던 거지만, 지금은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이리스가 찾아왔다.”

레시듀가 인상을 썼다.

“이리스 피스파인더… 이 몸이 얕본 게 하나 있다면 그 여자의 정신력이었겠군. 여우 같은 계집 같으니라고. 하나─.”

레시듀의 말이 끊겼다.

직후 달려간 루카스가 주먹을 휘둘렀기 때문이다. 레시듀는 고개만 살짝 비틀어 그 주먹을 피했다.

“화풀이라도 하러 온 거냐?”

“달라─!”

루카스가 폭발하는 심정을 목소리로 바꾼 다음 할 말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 들끓는 감정을 논리적인 언어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다르지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어떤 게?”

“네놈의 그 낯짝이!”

이해 못 할 대꾸와 함께 다시 한번 루카스가 달려들었다. 레시듀는 미친놈 보듯 루카스를 쳐다봤다. 그래도 한때 같은 정신을 공유하며, 이놈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무슨 정신머리를 하고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애초에 이놈은 왜 여기에 온 거지? 예상을 했어도 놀라운 건 놀라운 거다. 동시에 짜증도 났다.

이 개자식은, 이 몸이 무슨 결심으로 이 자리에 서 있는 건지 모르는 건가?

빠악!

주먹이 꽂혔다.

루카스의 주먹이 아니라, 레시듀의 주먹이. 복부에 일격을 맞은 루카스의 몸이 기우뚱 꺾였다.

“진흙탕 싸움을 원하나? 좋지. 아직 시간도 있으니까. 그날의 연장전을 여기서─.”

또다시 말이 끊겼다.

이후에 드러난 장면은 처음보다 훨씬 극적이었다. 한 대 맞고 벌떡 일어난 루카스가 레시듀의 얼굴을 후려친 것이다. 레시듀는 불의의 일격을 허용한 사람처럼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네놈이…….”

말을 잇지 못하고 이격, 삼격째가 이어졌다.

루카스의 주먹은 엉망진창이었다. 합리적인 동작만으로 구성된 무술이 아닌, 감정이 앞설 때나 나올 수 있는 막무가내식 때리기에 가까웠다. 그 멍청한 공격을 몇 대 맞은 레시듀는, 멍청함이 전염이라도 됐는지 머리가 둔해지는 걸 깨달았다.

“이 새끼가.”

레시듀가 마주 주먹을 휘둘렀다. 그리고 폭우 아래, 천 길 낭떠러지를 등 뒤에 두고서 갑작스레 초라한 개싸움이 벌어졌다. 쏟아지는 빗물로도 가릴 수 없는 졸전이었다. 두 사람은 주먹을 휘두르고, 발로 찼고, 머리를 쥐어뜯기까지 했다. 바닥이 미끄러워 질퍽한 땅바닥에 얼굴을 처박기도 했다.

루카스가 주먹을 휘두르며 외쳤다.

“왜 그랬나!”

레시듀는 빗물 때문에 이놈이 눈물을 흘리는지 안 흘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뭐가?”

“왜 내게 그딴 말을 했느냐고 묻고 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을 말하는 것이냐?”

“너 때문에, 너 때문이다!”

얼뜨기의 칭얼거림, 혹은 꼬맹이의 우기기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 담긴 비통함은 레시듀의 입을 잠시 닫게 만들었다.

그사이 달려든 루카스가 레시듀를 깔아뭉갰다.

“네가 괜한 말을 지껄이지만 않았다면 난 포기하지 않았어!”

“……!”

레시듀의 눈이 커지는 순간, 철썩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루카스가 휘두른 주먹이었다. 이상하게 이번 주먹은 상당히 아팠다. 레시듀는 입안이 찢어지는 불쾌한 감각을 느꼈다.

상처? 지금 이놈이 강한 건지, 약한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빌어먹을… 네놈도 원하던 일이었잖아!”

“당시엔 그랬지! 그런데 너, 한 가지만 묻자. 나를 위한다고, 내 앞길이 지옥길이라서, 그 짓눌릴 것 같은 일을 나 대신한다고 했지!”

“그렇다!”

“그럼 어째서냐? 나를 위한다는 놈이 왜 내 입장에선 생각해 주지 않은 거지?”

“뭐?”

루카스가 레시듀의 멱살을 잡은 채로 외쳤다.

“나에 대해 그렇게 잘 알면서, 내가 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왜 알려고 하지 않았나?”

“그게 무슨 소리냐? 이 몸은…….”

“언젠가 내게 물었었지! 사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차라리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든 적은 없냐고. 부정할 수 없었지! 그건 내 숨겨둔 본심 중 하나였으니까. 하지만… 하지만……!”

빠악!

휘두른 주먹이 이번에는 턱에 꽂혔다.

“죽고 싶었다면 진작 죽었어! 난 그러지 않았다! 그래도 사는 게 더 나았으니까! 해야 될 일이 있으니까!”

“너…….”

“그러던 도중에 네가 나타났다! 그 이후엔 믿을 수 없는 일밖에 없었지. 내 빌어먹을 실수로 친구가 죽었고, 정신이 반쯤 나간 나는 남은 녀석들한테 유치한 화풀이나 해댔다! 이후엔 데미갓이 나타나 도시를 공격하다가, 갑자기 네놈이 나타나서 내가 겪을 미래를 알려 주고, 폭력을 가했지! 이 모든 일이 불과 하루간에 일어났단 말이다!”

레시듀가 입을 닫았다.

“거기서 무너지지 않았어야 했나? 슈하이저의 죽음을 순식간에 극복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모습으로 남은 동료를 보듬고, 이끌어서, 습격하던 데미갓을 완벽하게 몰아낸 다음! 네가 보여 준 기억을 받아들이고, 네놈과의 싸움에서도 승리를 차지해야 했나? 그게 네가 기억하던, 그리고 기대하던 ‘루카스 트로우맨’인가?”

루카스가 외쳤다.

“아니잖아! 나는 인간이다! 그딴 일들을 한 번에 겪었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단 말이다!”

“…….”

“너도 알고 있었을 텐데? 나의 미래가 만약 지옥길이라면, 매순간이 고통이라면, 여전히 고통을 느끼고 있다면, 그건─.”

루카스가 피를 토하듯 외쳤다.

“미래에서도, 내가 여전히 인간이기 때문이잖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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