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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619화 (846/857)

외전 619화

레시듀는 두 눈을 깜박였다. 한 번으로는 부족해서 두세 번 정도.

눈가가 뻐근하다거나, 먼지가 낀 건 아니다. 시야가 불분명하지도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흐리멍덩하고 집중이 되지 않는 느낌이다.

뭐, 이러던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근데 난 여태까지 뭘 하고 있었더라?

“…….”

‘통합세계’의 상황을 엿보려고 했었지. 그리고 겸사겸사 지금 상황을 타개할 ‘다른 방법’이 없는지 찾으려 했고. 그래. 아골렛에게 들은 방법으로 통합세계에 접촉을 시도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정신만 엿보는 형태가 아닌 육체가 통째로 나가게 됐고…….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아골렛이 잘못된 정보를 준 건가? 아니면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진 걸까. 어쩌면 레시듀에게만 상황이 다르게 적용된 걸지도 모른다. 물론 무엇이 정답인지 증명하기는 어렵다.

레시듀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또 어디야.”

무슨 냇가 근처였다. 시냇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고, 레시듀는 급류 중간에 있는 넓적한 바위 위에 가부좌를 튼 채로 앉아 있었다.

물론 이딴 곳에서 좌선을 하고 있었던 기억은 없다.

레시듀는 자리에서 일어나 전체적인 풍경을 확인했고, 곧 이곳이 인적이 드문 산속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해가 떠 있고,

벌레가 활개를 치고 다니며,

때때로 서늘한 바람도 불었다.

투명한 냇가 아래엔 민물고기가 지느러미를 흔들고 있는 게 보였다.

지금의 통합세계에선 찾을 수가 없는 광경.

즉 이곳은 다시금 ‘바깥’이다.

정확히 말하면… 루카스 트로우맨이 동료들과 영웅적인 업적을 세웠던 시기. 그러니까 멸망이 연출했던 ‘과거’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음…….”

약간 당황스럽기는 했다.

레시듀는 이곳에 돌아온 기억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정신을 차린 직후라면 여기가 아니라 바다의 심해 속에서 눈을 떠야 하는 것 아닌가? 분명 나는 거기서 통합세계와 접촉했는데. 이 몸은 왜 이딴 곳에 한가롭게 앉아 있던 걸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자니, 희한하게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쪽 세계로 돌아온 직후, 곧장 심해를 벗어났고 이후엔 다시 대륙을 돌아다녔다. 기억 속 루카스와 비슷한 행보를 밟은 것이다.

별로 거창하진 않았다. 툭 까놓고 말하면 데미갓의 속을 대놓고 긁어댄 거였는데, 덕분에 수장이라고 할 수 있는 로드 또한 이제 루카스 트로우맨이란 존재를 확실히 인지하게 됐다.

그런데도 바로 처리하지 않고 있는 이유는, 단순히 루카스보다 더 위험한 적이 아직까지 대륙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지금 로드는 드래곤의 말살을 최우선으로 여기고 있다. 합리적인 선택이다. 이 시기의 루카스는 아직 로드에게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못한다. 내버려 두면 귀찮은 일이 생기고, 실제로 동족을 몇몇 없앴기 때문에 되도록 시급히 처리해야 될 존재이기는 하지만…….

…아무튼 로드의 그러한 인내심도 슬슬 한계에 다다랐을 것이다.

지금부터 일주일 후.

로드는 직접 루카스(레시듀)에게 모습을 드러내고, 무저갱에 가둘 것이다.

“…….”

레시듀가 턱을 쓸었다.

그 말은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시간도 불과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금이야 딱히 보는 눈이 없을 때는 멍청한 표정을 짓거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혼자 낄낄대고, 콧구멍을 후벼 파도 되지만 무저갱에 갇힌 이후부턴 허용되지 않을 행동이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저지르는 모든 행위는 곧 실재했던 과거가 돼서 현실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것이기 때문이다.

“머저리 짓을 하다간 멸망의 선택을 받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단 거지.”

무엇을 기준으로 루카스 트로우맨이 ‘최후의 멸망’이 됐는지는 아직 모른다.

루카스는 애초부터 그들, 그러니까 태초신, 초대 허왕, 신, 선대 비기닝 위저드, 그리고 자기자신까지─ 애초부터 멸망이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러나 멸망이라는 정체성조차 잊고 이곳에 섞여 살다가, 이제야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 걸지도 모른다고.

만약 그렇다면 지금 레시듀가 하려는 건 완전한 헛짓거리가 될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모를 일이지.

지금 레시듀가 하려는 건 단순한 연기가 아니다.

계속 루카스를 따라 하다가 어느 순간 진짜로 놈이 되는 것.

이것은 의도적으로 미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는데, 사실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레시듀는 정신을 망가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고 그걸 스스로에게 적용시킬 수도 있었다.

가장 먼저 이 방법을 떠올린 건 청기사였지. 멍청한 건지, 똑똑한 건지.

‘아니면 필사적인 거였나?’

레시듀가 고개를 저었다.

이야기가 잠시 딴 데로 샜는데, 아무튼 여기서 이러고 있는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냥 레시듀는 최후의 휴가를 만끽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기억이 뜨문뜨문한 이유가 좀 신경 쓰이기는 하는데, 자리에 앉아 머리를 굴린다고 깨달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그런 고민에 시간을 할애하는 게 아깝다.

레시듀는 입을 쩍 벌리며 하품했다.

이상하게 피곤한 기분이었다. 마침 좌선하고 있던 곳이 제법 넓고 평평한 데다, 햇볕 때문에 따뜻하기도 했다.

레시듀는 로브를 돌돌 말아 베개로 삼은 뒤 한숨 자기로 했다.

* * *

구루룩 구룩…….

올빼미 소리에 눈을 떴다.

“…끄응.”

레시듀는 뭉그적거리며 상체만 일으켜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다. 멍한 정신을 추스른 다음에는 손을 뻗어서 냇가의 물로 얼굴을 씻었다. 겨울물에 닿은 것처럼 차갑다.

딱히 시냇물만 차가운 게 아니다.

밤이 되자 전체적으로 기운이 많이 떨어졌고, 냇가 한가운데는 다른 곳보다 좀 더 추웠다. 그렇다고 감기에 걸릴 일은 없지만.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숲만큼 낮과 밤의 느낌이 다른 장소는 드물 것이다.

햇볕이 내리쬘 때는 싱그럽게 피어난 초목과 때때로 들리는 새의 지저귐,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와 졸졸 흐르는 시냇물의 흐름이 한데 모여 한 폭의 따뜻한 풍경화를 만든다.

그러나 주변이 어스름해질 때면 숲도 색채를 잃고 회색빛으로 물든다. 서늘한 바람과 야행성 동물의 울부짖음, 분명 낮과 다름없는 잎사귀의 바스락거림에도 화들짝 놀라게 된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기분을 느낄 수 있는 건 제법 즐거운 일이다.

만약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드느냐고 묻는다면, 레시듀는 둘 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생기가 넘실대는 낮, 고요한 밤.

그 밖에도 비가 내리는 날, 눈발이 휘날리는 날, 천둥번개가 치는 날까지, 모두 좋다.

또 뭐가 있을까?

레시듀가 좋아하는 것 말이다.

“걷는 거. 뛰는 거. 먹는 거. 구경하는 거…….”

하나둘씩 세며 냇가를 따라 쭉 걸어가기 시작했다.

혼자 있는 것도 싫지는 않지만, 역시 옆에 놀려댈 녀석이 한 명 있는 게 더 재밌기는 하다. 둘은 적고 넷은 많으니 셋이 딱 적당하겠지. 아골렛에 루카 정도면 어떨까? 반왕과 함께 다니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시시한 생각을 하며 얼마간 걷자 시냇물은 곧 호수에 다다랐다.

마침 구름에 가려져 있던 달이 자태를 드러내며 은은한 빛을 흩뿌렸다. 호수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산과 바위가 한데 어울려 제법 괜찮은 광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여긴 낮보다 밤일 때가 더 괜찮을 것 같은데?’

레시듀는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문득 출출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변에 널린 장작을 모아왔다. 호수 근처라 그런지 건조한 나뭇가지를 찾느라고 제법 멀리까지 갔다.

잠시 후 모닥불을 피운 레시듀는, 대충 옷을 벗은 다음 호수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물고기를 잡기 위해 손을 휘적거렸다. 뇌전을 쓰면 이 호수를 아예 끓는 냄비처럼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상하게 심야의 고요함을 깨고 싶지 않았다.

덕분에 시간이 좀 걸렸지만 어렵지 않게 대여섯 마리의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모닥불 근처에 옷을 널어놓고, 물고기를 꼬챙이에 꽂은 다음 익혔다. 그리고 물고기가 맛있게 구워질 동안 하늘을 구경했다.

“허어…….”

이 만들어진 세상에 가장 감탄한 부분이 있다면 그건 바로 재현도일 것이다.

멸망 이놈들의 정체가 ‘할 일 더럽게 없는 절대신’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기껏해야 무대에 불과한 세상을 이렇게나 정밀하게 만들다니.

아골렛은 이 행성 바깥으로 진출할 수 없다고 말했지만, 그렇다고 지금 밤하늘에 펼쳐진 별이 거짓이라는 건 아니다. 오히려 저것은 실존하고 있다. 태양과 달은 물론이고, 보석처럼 흩뿌려져 있는 별무리도 그렇다.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별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 모두 실존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물론 우주 하나를 만드는 것쯤 군림자에게도 가능한 일이긴 하지.

하지만 이곳은 과거이지 않나?

과거, 즉 한 번 존재했던 시간대. 그렇다면 단순히 사물을 창조하는 것보단 그때 그 상황을 그대로 ‘재현’하는 게 훨씬 어렵다. 불가능하다 해도 좋다. 단순히 그 시절의 주요인물을 연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가령 이 숲만 해도 그렇다.

크게는 호수의 깊이, 초목의 높이부터 시작해서 부리나 짐승에 긁힌 나무껍질, 빗방울에 깎인 바위, 그 바위 밑에 있을 벌레, 때때로 부는 바람의 풍향과 세기까지… 추측대로라면, 이 모든 게 과거의 한때와 한 치의 오차도 없을 것이다.

즉 앞서 언급한 ‘할 일 더럽게 없는 절대신’ 정도가 아니라면 굳이 이렇게까지 세상을 충실히 구현할 필요가 없다는 뜻.

“아차차.”

별 영양가 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물고기의 한쪽 면이 살짝 탔다.

레시듀는 급히 꼬챙이를 회전시키고, 밤하늘을 눈에 담고, 다시 물고기를 굽고, 냇가를 바라보고, 다시 밤하늘을 구경하다가 결국 물고기 한 마리를 태워먹기도 했다.

구운 물고기는 맛이 없었다.

겉만 타고 속은 덜 익은 데다, 생각해 보니 손질하는 걸 깜박했던 것이다. 덕분에 의도치 않게 물고기의 내장을 씹게 됐다.

“큭큭큭.”

예상치 못한 일은 실패마저 즐겁다.

레시듀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과거 뜻밖의 일이 벌어져야 기꺼움을 느꼈던 군림자로서의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실패를 즐거워하는 놈은 보통 없다.

루카스도 마찬가지다. 놈은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정신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실패 그 자체에 기쁨을 느끼지는 않았다. 어지간히 맛이 간 놈이 아니라면 대개 그렇다.

즉.

이러한 성향마저 일주일 뒤면 없애야 된다는 뜻이었다.

“음?”

모닥불에 이끌린 걸까. 짐승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놀랍게도 늑대였다. 짐승치고 이상하게 차분한 눈빛을 가진 놈이었는데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놈은 늙은 늑대였다. 애초에 웬만하면 따로 다니지 않는 짐승이긴 하지. 아마 나이가 들면서 무리에서 추방당했거나, 혹은 제 발로 나온 놈일 거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무리에서 이탈한 늑대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몇 달 정도?

“이 몸보단 오래 살겠구만.”

“…….”

레시듀는 남은 물고기를 그냥 던져 주려다, 변덕이 생겨 뼈까지 세심하게 바른 다음 던져 줬다.

“옛다.”

“…….”

“사양 말고 먹도록. 뭐랄까. 같은 시한부끼리의 정이다.”

늑대는 던져진 물고기의 냄새를 킁킁 맡더니 곧 그 자리에 털썩 앉아서 느긋하게 먹기 시작했다.

잔뜩 늙었고, 이곳저곳에 상처의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이상하게 측은하다기보다 도도한 느낌이 드는 녀석이었다.

레시듀의 마음에 들었다는 뜻이다.

물고기 두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운 늑대는 느릿하게 몸을 돌리더니 숲으로 떠났다.

“잘 가라.”

레시듀가 작별인사까지 했으나, 늑대는 못 들은 듯 어깨를 흔들며 숲의 암흑 너머로 사라졌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다시 호수를 눈에 담았다.

“좋군.”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면, 느지막이 흐르는 구름, 벌레 소리, 태워먹은 물고기, 모닥불, 예상치 못한 만남.

“좋구나.”

삶이란.

역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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