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612화 (839/857)

외전 612화

사실 피부에 균열이 생기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거인의 강도를 생각하면 당연해 보였다. 애초에 이걸 피부로 불러야 할지 외각으로 불러야 할지도 애매하다. 편의상 거인이라고 부르고는 있어도, 단순히 거대한 인간으로 치부하기엔 이놈의 모든 것이 너무도 기괴했다.

그럼에도 분명한 건 지금 생긴 이 균열이 승리로 이어지는 이정표가 될 것이란 사실.

꽈앙!

주먹에 더욱 힘을 실었다. 사실 얼마나 힘을 실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두 팔에 감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카사진의 주먹은 피칠갑을 하고 있었다. 주먹을 쥐었다기보다는 이 상태로 굳힌 느낌이다. 확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미 손가락과 손목뼈가 산산조각 난 상태다. 주먹을 펴면 다시 쥐기 힘들 거다.

그러고 보니 거인 때문에 생긴 상처는 치료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던가? 이 경우엔 어떻게 되는 거지. 거인은 딱히 카사진을 공격하지 않고, 그 혼자서 자해한 거나 다름없는데.

‘…뭐. 이제 와서 신경 쓸 문제도 아닌가.’

시답잖은 사실은 무시하고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콰직!

소리가 다르다. 감촉도 달랐을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것이었다. 이 단단한 걸 부쉈을 때의 감촉을 제대로 느끼지 못한다는 것. 그거까지 바라는 건 너무 큰 욕심인가?

그렇게 마지막 공격이 끝난 순간.

콰자자작……!

균열은 더욱 격하게 번지더니 무릎이 부서져 내렸다. 피부 조각이 마치 깨진 유리 조각처럼 떨어져 내리는 광경. 카사진은 잠깐 멈칫한 채 거인의 알맹이, 그 내부를 바라봤다.

부서진 내부는 어둠으로 뒤덮여 있었다. 근골과 혈관을 어둠이 감싸고 있는 건지, 애초부터 어둠밖에 없는 건지는 잘 모르겠다. 카사진은 더 주먹을 휘두를 생각도 못 하고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이상할 정도의 불길함이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잠시간 지켜봐도 아무 일도 없었다. 카사진은 긴장을 늦추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다른 쪽 무릎, 베니앙이 있는 곳이다.

콰아아아!

장엄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두 마리의 짐승으로 보였다. 그것들이 전설 속 신수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도 다만 짐승으로 여겨진 것은, 그들이 내비치고 있는 분위기가 고매함,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커다란 용이다. 단순히 커다랗다는 형용사로는 부족할 지경이다. 그 거대한 거인의 다리를 두 번이나 둘러쌀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카사진은 저것이 일곱 이빨의 용의 본모습이란 걸 깨달았다. 용보단 뱀 같은 모습으로 온몸을 이용해 상대를 조르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짐승은 그 사이 무릎을 물어뜯고 있었다. 제법 훌륭한 협공으로 보였고, 실제로 효과도 있었다. 카사진은 이상하게 억울한 느낌을 받았으나, 둘이서 힘을 합치는 것보단 역시 혼자서 쓰러뜨리는 게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필사적인 건 카사진만이 아니다.

저들도 생명을 불태울 기세를 하고 있었다. 속사정까지는 알 수 없지만, 카사진 못지않은 고충을 극복하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일 터.

그렇게 무릎이 부서진 순간 거인의 육중한 몸뚱이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르르르르르…….

[……!]

“……!”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첫 번째 동조화.

쓰러지려던 거인의 몸이 부자연스럽게 들썩여댔다.

* * *

페르안은 거인이 다른 쪽 거인과 연결돼서 상처를 회복하거나, 동작을 재정비하는 행위를 동조화同調化라고 명명했다.

[우리는 동조화의 발동 조건을 찾는 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거인의 행동을 셀 수도 없을 만큼 돌려봤고, 다각도에서 분석했죠. 이윽고 도출된 가장 신빙성 높은 결론은…….]

페르안이 말을 이었다.

[…정상적으로 걸을 수 없을 때, 거인은 동조화를 한다.]

큰 상처를 입었을 때와 쓰러질 만큼의 충격을 받았을 때 거인이 동조화하는 걸 확인했다.

이 두 가지 경우를 포함한 조건이 그들이 내린 결론이다.

가령 다리가 잘린다면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테고, 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도 마찬가지다. 하체밖에 없는 거인이 혼자 힘으로, 온갖 방해를 떨치며 일어서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테니 계속 진격해야 하는 거인으로선 반드시 막아야 되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이번 전쟁에서 동조화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최소한 한 번은 반드시 동조화할 것이다. 그러니 페르안은 이 전쟁에서, 그 동조화의 순간을 이쪽이 의도할 수만 있다면 승률을 비약적으로 올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 동조화가 일어난 건 페르안으로선 충분히 대비하고 있던 순간이었다.

쿠웅……!

동조화가 끝난 순간 묵직한 소리가 울렸다.

잠깐 거인의 질량이 소실됐다가 다시 출현한 듯한 느낌이다.

페르안도 그렇게 여기기로 했다. 눈앞에 있는 거인을 동쪽의 거인이 아닌, 방금 전까지 서쪽에서 사투하던 거인으로 여기기로.

재빨리 시야를 확장해서 전 부위를 훑는다.

‘전신에 수도 없는 상처…….’

긁히고, 꿰뚫리고, 부서진 듯한 흔적이 많았다. 전체적으로 작은 상처를 셀 수도 없을 만큼 입은 꼬락서니였는데, 서쪽의 지휘관 민하린의 작전이 대충 보였다. 서쪽의 전력은 이쪽에 비해 결정력이 부족하다. 그러니 굵직한 하나의 상처보단 작은 상처를 수도 없이 입히는 쪽으로 노선을 택한 거겠지. 물론 페르안은 거인의 피부 강도를 알고 있다. 저 정도 상처를 입히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겠지.

즉… 서쪽에 있는 자들은 지금 절호의 기회를 잡은 셈이다.

반대로 이쪽의 상황은 조금 어렵다. 앞서 말했듯 결정력이 부족한 전력은 아니지만 방금 전 싸움으로 카사진의 두 주먹이 부서졌으니까.

이럴 때 루시드가 타이밍 좋게 합류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직 시간이 거의 지나지 않았다.’

페르안은 희망적인 관측을 거두고, 남은 전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했다.

[카사진 님, 더 싸울 수 있습니까?]

두 주먹이 부서진 자에게 건넬 질문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페르안은 이 전장에서의 이탈 여부를 판단하는 건 오직 스스로만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물론.]

덤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더 싸울 수 있으니 지시해 봐라.]

“예.”

페르안은 고개를 치켜드는 존경심을 억지로 삼킨 채로 말을 이었다.

“지금 출현한 건 서쪽의 거인이라 이해하시면 됩니다. 저것의 하반신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수도 없이 새겨져 있습니다.”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것의 가장 약한 부위라고 해도, 생채기조차 내는 게 얼마나 힘든지 요 몇 달간의 모의전에서 톡톡히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마 저쪽에서도 종류는 달라도 이쪽과 비슷할 만큼 힘든 싸움이 있었겠지.

“상처는 모두 파악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곳을 차례대로 파괴하시면 됩니다. 아마 무릎을 부술 때보다 많은 힘이 필요하지는 않겠지요. 가장 중요한 건 연쇄작용입니다. 흐름이 끊겨선 안 됩니다.”

[연쇄작용이라니?]

“지금 저는 거인의 육체를 하나의 거대한 구조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쪽에서의 교전으로 생긴 상처는 구조물의 타점─ 즉 약점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 약점을 쭉 이으면 길쭉한 선이 생깁니다.”

페르안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말했다.

“파괴의 선이지요.”

[그걸 한순간에 파악한 건가.]

페르안이 쓴웃음을 지었다. 카사진의 감탄 섞인 목소리에 뿌듯한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지금은 자신만만해할 때가 아니었다.

“서두르도록 하지요.”

[부탁하마.]

“예.”

페르안이 눈을 감으며 심호흡했다.

별것 아닌 것처럼 말했고, 그렇게 받아들이길 바란 것은 맞지만 사실은 달랐다. 지금부터 페르안은 이번 싸움이 시작되고 최대 집중력을 발휘해야 한다.

파괴의 선을 하나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거인의 크기를 고려하면 당연히 그랬다. 하지만 지금 전장에 있는 건 카사진만이 아니다. 베니앙, 집행자, 세디 등 남은 인력도 있다.

페르안은 지금부터, 그들에게 각각 별개의 루트를 동시에 제시해야 된다.

할 수 있을까?

얼마 전의 페르안이라면 그런 걱정부터 들었겠지. 지금은 다르다.

해낼 것이다.

* * *

펼쳐 있던 지도를 거칠게 뒤엎었다. 체스 말이 요란하게 바닥으로 떨어졌으나 페르안의 의식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지도의 뒤, 여백의 공간을 바라보며 바삐 펜을 움직였다.

빠르게 거인의 전신을 그려냈고, 한 번 보았던 주요 상처 부위를 체크한다.

최적의 루트를 만들고, 지우고, 만들고, 지운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낙점된 네 개의 루트는 우선 초반부였다. 발바닥부터 무릎까지. 머리 빠지게 관찰해서 그린 루트였으나 완벽하지는 않다. 잘못 본 게 있어서 파괴의 흐름이 끊겼다간 ‘큰일 났다’라는 말로는 끝나지 않는다.

수정하면서도 다음 지점을 관찰해야 하고, 거기에 거인의 움직임이나 전장의 상황까지 더하니 정말로 죽을 맛이었다.

‘이건…….’

진짜 뇌가 타 버릴 것 같다.

잠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가, 이딴 생각을 할 여유가 있으면 좀 더 머리를 굴려야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콰가가각……!

그사이 페르안의 지시를 받은 자들이 위로 치솟고 있었다. 이쪽이 미리 말해 둔 약점을 정확히 부수면서.

괜찮다. 순조롭다. 그리고 앞으로도 순조로울 것이다. 그래야 한다.

…….

…….

얼마나 오랫동안 집중했을까?

충혈된 눈동자를 하고 있던 페르안의 입이 툭 벌어졌다.

“…안 돼.”

어긋났다.

방금 전 세디에게 제시한 루트에서 오류가 났다.

어째서? 어떤 부분에서 실수가 있었던 거지? 분명 몇 번이고 확인했을 텐데. 사과할 여유도, 자책할 시간도 없었다. 세디도 그걸 바라지 않았다. 페르안은 다시 루트를 제시했다.

그리고.

카앙!

이번엔 집행자가 튕겨져 나갔다.

그것에 당황하기도 전에 카사진의 공격이 실패했고─.

‘…….’

페르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 순간 그가 느끼고 있는 묘한 위화감이었다.

새하얗게 물들었던 머리가 원래의 색을 되찾으며 분산됐던 정신이 한곳으로 모였다.

…오차는 확실히 없었다.

이 정도를 연산할 능력도 없었다면 지휘관의 자리에 앉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안은 다시 거인의 전신을 훑어봤다. 그리고 이번엔 자신이 그려 놓은 거인의 그림을 본다. 두 명의 거인을 번갈아 보던 페르안은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상처의 위치가 다르다.

아니. 그게 아니라.

“상처가… 재생하고 있다…….”

어째서? 아직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페르안이 까득 이를 갈았다. 당장 떠오른 가능성은 하나다. 한 시간을 주기로 행해지는 재생. 설마 이것마저 거인의 함정이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페르안에게 남은 수단은 뭐가 있지?

남은 자들로 어떻게 거인을 쓰러뜨려야 하지?

“…….”

페르안의 손가락이 툭 떨어졌다.

더 이상의 방법이 없어서,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맹렬하게 회전시키던 두뇌를 멈췄다.

설마 이렇게 될 줄이야.

뺨이 축축해졌다.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울보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페르안은 자신이 의미 없는 눈물을 흘린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여겼다.

“…예상하신 대로, 예상 밖의 상황이 됐습니다.”

거인과 멀리 떨어진 곳.

그러나 페르안과는 또 다른 장소에 있는 허주에게 말했다.

“부탁합니다, 퓨처릭스.”

[알겠다.]

쿠쿠쿠쿵…….

먼 곳에서 커다란 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페르안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득한 상공에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유성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물론 저것은 유성우가 아니었다.

결코 쓰이지 않길 바랐던 전력, 감히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대기인원─.

마성에 머물렀던, 통합세계의 병력이 거인을 향해 낙하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