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11화
이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건 내가 여전히 풋내기이기 때문일까? 페르안은 시야가 흐릿해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정신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방금 전 쏟아지는 마법을 맞다가 이마가 좀 깨졌는데, 거기서 흘러나온 핏물 때문이다.
엄살을 부릴 생각은 없다.
마법은 하늘 전역에서 빗물처럼 쏟아졌으나, 아무래도 그 위력은 거인의 중심에 가까울수록 더 강했다. 덕분에 거인과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던 페르안은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마법의 위력이 모두 일정했으면 이마가 깨진 정도가 아니라 죽었겠지.
…그딴 쓸데없는 분석을 할 때가 아니라.
페르안은 핏물을 닦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드의 말이 어렴풋이 이해는 된다. 되도록이면 존중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지는 않다. 지금 같은 상황만 아니라면 반드시 그랬을 거다.
하지만 흑기사 없이 작전을 속행하는 게 가능한 일인가? 루시드는 동남군의, 나아가서 이번 전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다. 공방은 물론이고 기동성까지, 어느 것 하나 뛰어나지 않은 부분이 없다.
생각할 가치도 없다.
전장에서 지휘관은 매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서며, 끝없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페르안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히 거인을 쓰러뜨리는 것이다. 그것이 페르안의 독선인데.
…그렇다고 루시드의 생각이나, 의무, 책임을 무시하고 강압적인 명령을 내리는 게 올바른 일인가? 이 상황에서도 페르안은 독선을 고집하고 싶은가. 이상하게도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지 않았다. 양인현 때와는 사뭇 다른 기분이다.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그때와 달리 지금 페르안은 루시드의 태도가 납득됐기 때문이다.
줄곧 자신이 흑기사가 된 이유를 찾아 헤맸던 남자. 그에게 있어 죽음을 상실한 망자의 떼는, 어떤 의미로 죽을 위기에 처한 자들을 목격한 것보다 더 발길을 이끄는 사건일지도 모른다.
또 이상한 생각이 하나 들었다.
거인이 이 상황을 의도적으로 조성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다.
여태껏 수도 없이 거인을 분석하고, 그 주위를 맴돌았으나 이런 망자 떼를 목격한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하필 결행의 순간, 짜기라도 한 듯 출현하다니. 우연이라기엔 너무 절묘하지 않나.
‘…안 돼.’
다시 생각해도 흑기사 없이는 아무것도 안 된다.
판 자체가 뒤엎어지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페르안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루시드 님.”
그런데 이건 누구 입에서 나온 개소릴까?
페르안은 그만 헛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현실을 외면하는 것도 한계가 있지. 이미 입 밖으로 꺼냈는데도 이딴 태도를 고수할 수는 없었다. 페르안은 되도록 목소리에 힘을 실으며 말했다.
“…나머지는, 우리가 알아서 해보겠습니다. 그동안 루시드 님은 흑기사로서의 책임을 완수해 주시지요.”
[…괜찮겠소?]
“힘들죠. 솔직히 지휘관으로서 해선 안 되는 판단입니다.”
[그런데 왜.]
“…글쎄요. 아무래도 저는 이 전쟁에서 단순히 지휘관으로 남고 싶지 않나 봅니다.”
[그게 무슨.]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저.”
페르안이 멋쩍은 얼굴로 말했다.
“루카스 트로우맨의 친구거든요.”
[…….]
“그러니 되도록 빨리 책임을 완수하시고 합류해 주십시오. 그때까지 어떻게든 버텨 볼 테니까요.”
잠깐 대화가 끊겼다.
그리고 루시드가 다시 말했다.
[감사를 표하겠소, 페르안.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군.]
“예.”
[…그 자리에 루카스도 있으면 더 좋을 것 같고.]
“…예.”
그리고 목소리가 끊겼다.
페르안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두 눈을 감았다.
‘저질렀군.’
감정에 치우쳐서 그릇된 판단을 한 걸지도 모른다. 솔직히 실시간으로 후회 중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예상하지 않았나?
이것은 쉽게 내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더 빨리 결정했다. 장고 끝에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것보다, 틀리더라도 빠르게 선택하는 게 차라리 나을 거라 여긴 것이다.
“이미 엎어진 물.”
페르안이 중얼거렸다.
“…날아간 화살, 지나간 밤, 떨어진 꽃잎. 또 뭐가 있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한숨을 쉬고, 다시 전황을 보았다.
흑기사 없이, 거인을.
헛웃음이 나올 것 같지만 어쩌겠나.
애초에 억지와 무리로 점철된 작전이었다.
이제 와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게 오히려 더 올바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남은 방법은 단순하다.
끝까지 지금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다.
* * *
거인이 부순 지면의 상공.
이제는 열기가 식고, 흙먼지가 좀 거둬진 곳에서 카사진이 베니앙을 보았다.
[들었나? 아무래도 우리 둘이서 해야 할 것 같은데.]
“…….”
[우선 미리 말해 두지. 나는 자신 있다. 혼자서 충분히 저놈의 무릎을 부술 수 있다는 뜻이다.]
“루시드 님이 앞서 두 번 공격했지만 무릎엔 흠집조차 나지 않았어요. 그걸 알고서도 하시는 말씀인가요?”
[그래. 왜냐하면, 나는 이번 전쟁에서 전보다 더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지.]
베니앙은 자신의 성장을 예견하는 듯 떠드는 남자를 처음 보았기 때문에 잠깐 멈칫하고 말았다. 오래 그럴 수는 없었다.
너는? 카사진이 시선으로 물어왔다.
“…물론 가능해요. 전 혼자가 아니거든요.”
카사진은 가타부타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네가 왼쪽을 맡아라.]
“네.”
카사진이 떠났고, 베니앙은 잠깐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지상으로 천천히 낙하했다. 그리고 난장판이 되어 버린 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던 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짐승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불안정한 대지에 우뚝 서 있었다. 베니앙이 다가오자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뜨며 이쪽을 보았다.
“미안.”
그르릉, 소리가 새어나온 순간 베니앙은 반사적으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피투성이가 된 짐승의 앞발을 천천히 감싸 안으며 말했다.
“많이 힘든 거 알아. 잘 버텨 줘서 고마워.”
[…….]
“하지만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힘내 줄 수 있을까? 네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그르륵.]
짐승이 두 눈을 뜨고 하늘을 보았다.
목을 곧게 뻗고, 거인을 노려보며 포효를 터뜨렸다.
* * *
이것은 기회다.
루시드라는 최대 전력이 이탈한 시점에서, 카사진은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상정하지 못한 일인 건 맞다. 전황이 최악이란 의견에도 동의한다.
[큭큭…….]
그런데도 웃음이 나왔다.
심장이 옥죄어지는 듯한 위기감은 오히려 환희를 불렀다.
상투적인 표현이지만 카사진은 지금 이 순간 삶을 실감하고 있었다.
[하하하─!]
광소를 터뜨리며 거인을 마주봤다. 이 덩치만 큰 녀석은 무슨 생각인지 아직 움직이지 않고 어정쩡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다. 꼭 볼일을 보려다 엉거주춤하게 일어난 듯한 꼬락서니라 아주 우습다.
아직도 귀찮게 날아다니는 암석을 부수며, 카사진은 파괴적인 기세로 거인의 무릎 앞까지 도착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주먹부터 휘둘렀다.
까앙!
아주 단단하다. 주먹이 찌르르 울릴 정도. 확실히 루시드 놈이 쩔쩔맬 만하다.
하지만 그게 뭐?
카사진은 오히려 루시드보다 스스로가 이걸 부술 확률이 더 높다고 확신했다.
철없던 시절 바위를 맨손으로 부술 거라 떠들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왜소한 팔뚝, 단련되지 않았던 주먹으로 암석의 단단함을 실감했던 순간의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그때 아마 뼈가 골절돼서 몇 주는 훈련도 제대로 못 했을 거다.
지금 비슷한 기분이다.
몇 번 더 때리면 부서지는 건 무릎이 아니라 내 손이라는 확신.
하지만 결국 카사진은 어떻게 행동했지?
까앙!
다시 한번 휘두른 주먹. 이번엔 왼손이다. 마찬가지로 유효타는 아니었다. 상관없었다.
왼손이 튕겨 나갈 때면 오른손을, 그리하여 오른손이 튕겨 나가면 왼손을 휘둘렀다.
까가가강……!
시끄러운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아직 몰입이 부족하다는 증거였다.
좀 더 빠르게. 좀 더 강하게.
이 순간 카사진은 이상하게 육체와 정신이 분리되는 듯한 감각을 맛봤다. 육체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한 채로 계속 움직였다. 무릎을 끝없이 때려 나갔다.
반면 정신은 딴생각을 하고 있었다. 몇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가라앉는 게 반복됐는데, 그중에도 점차 선명해지는 기억이 있었다.
─처음으로 바위를 부쉈을 때.
고작해야 10살의 아이가 맨손으로 바위를 부술 수 있을 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그때 느꼈던 감각,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었을 때의 성취감, 쾌감. 어느 순간 쭉 잊고 살았던 것.
왜 잊었던 거지? 안심했기 때문이다.
왜 안심했나?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생겼으니까.
딱히 그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루카스를 비롯한 친구와의 만남은 카사진의 세계관을 크게 바꿔 놨으니까. 그것에 휩쓸리지만 않았다면 됐겠지.
그러나 휩쓸려 버렸다. 그만 놈들에게 물들어 버렸다. 그래선 안 됐는데. 녀석들과 친구가 되더라도, 힘든 일이 생길 땐 털어놓을 수 있고, 때때로 엿 같은 일이 생겼을 때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더라도.
그런데도 투쟁은 온전히 카사진의 것이어야 했는데.
…카사진의 최초의 시작점은 어땠나.
무엇이 꼬맹이 카사진을 마도무왕 카사진으로 만들었는가.
처음엔 카사진과 바위. 오직 둘만이 있었을 뿐이다.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도 없었고, 친구도 없었다.
그리고 승부가 시작됐다.
먼저 부서지는 쪽이 패배하는 지극히 단순한 규칙이었다.
처음엔 카사진이 졌다. 두 번째도, 세 번째도 그랬을 것이다.
처음부터 패배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카사진의 경우엔 좀 더 심했다. 애초에 돌덩이와 겨루기를 시작한 시점부터 제정신이 아니기는 했지만.
까가가강……!
그러니까 카사진의 출발점은 멍청한 승부욕이었다.
고통과 인내의 시간.
바위를 때릴 때도, 때리지 않을 때도 오직 그것을 부수기 위한 것만을 생각했다. 수련도, 휴식도, 치료도 모두 그를 위한 것이었다. 카사진은 천성적으로 생각하는 게 단순해서 복잡하거나, 두 개 이상의 목표를 정해 두지 못했다.
다만 어려운 목표는 좋았다. 남들이 무리라고 비웃는 목표라면 더할 나위 없다. 그 끝에 있을 승리가 그만큼 달콤하기 때문이다.
결국 카사진은 어떤 승부든 끝까지 가면 자신이 이길 걸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승부의 세계에선, 나와 적밖에 없다.’
지론이라고 할 만한 건 아니었으나, 카사진이 어렸을 적부터 본능적으로 깨우쳤던 진실이다.
그러한 생각이 동료가 생기면서 옅어졌고,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데…….
‘왜?’
이 순간 갑자기 그때의 기억이 갑자기 떠오르는 걸까.
지끈-.
─휘두를 수 있지.
─이보다 더 가혹한 환경에서도 주먹을 휘두를 수 있게끔 수련했다. 항상.
이건 어떤 과거일까.
허의 세계에 흩뿌려져 있던, 수많은 카사진 중 하나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과거일까?
난적을 앞에 두고 미소를 짓는 카사진.
지금처럼 격동하는 심장과 들뜬 기분으로 임했던 싸움.
─…뭐야. 우리끼리도 할 수 있었잖아.
그리고 끝내 거둔 승리.
오른팔이 사라졌지만, 그럼에도 웃을 수 있는 남자.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미소…….
이 갑자기 떠오른 기억의 정체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카사진에겐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부순다.
반드시 부순다.
내가 부서지서라도 부순다.
오직 그 일념으로 주먹을 휘두른다.
그리고 그때처럼, 다시 한번.
콰직……!
바위에는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