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10화
무릎을 부수는 건 당초 작전대로다.
한 가지 달라진 점은 1시간이라는 제한시간 안에 또 제한시간이 생겼다는 점. 그러니까 거인이 도약하기 전까지는 달성해야 되는 임무인 것이다.
[나 혼자 양쪽 무릎을 모두 부수는 건 시간적으로 불가능하오.]
[다른 쪽은 내가 맡겠다.]
“저도 돕겠습니다.”
“나도.”
카사진과 베니앙, 세디가 차례대로 말했다.
루시드는 그들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가능하겠소?]
“어떻게든 해내야죠.”
베니앙이 세디를 보았다.
“그리고 세디는 죽음벌레를 지켜 줘요.”
“뭐? 내가 왜?”
“세디의 공격 수단은 가시잖아요. 무언가를 부수기엔 적합하지 않아요.”
“그건…….”
반박할 말이 여럿 떠올랐으나 입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세디의 가시가 찌르기만 할 수 있는 건 결코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그 강도를 조절해 채찍처럼 휘두를 수도 있고, 굵게 만들어 봉처럼 다루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찌르는 데에 특화되어 있단 사실은 부정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강대한 적을 상대로선 그런 단순한 특징이 더욱 중요하고.
세디가 불퉁하게 죽음벌레를 바라봤다.
“그렇지만… 지키라니. 저 녀석도 허주잖아. 알아서 살 수 있겠지.”
“맞는 말이다. 난 괜찮으니까 신경 쓰지 마라.”
매정한 말에도 딱히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죽음벌레가 동의했으나, 베니앙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요. 우리 지휘관의 명령을 잊었나요? 한 명도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게 이번 전쟁의 조건입니다.”
“…….”
“세디도 알잖아요. 방금 전 우린 모두 죽음벌레에게 목숨을 빚졌어요.”
“끄응.”
세디가 앓는 소리를 냈다.
일단 스스로를 베니앙 아르젠토라 자처하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세디에겐 일곱 이빨의 용이라는 존재로 더 와닿는 느낌이다. 그 때문인지 이상하게 그녀가 말하는 건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절대자라는 직책을 어느 정도 벗어던졌는데도 그렇다.
“…알았어. 저 녀석은 내가 맡지. 그런데 당신은?”
“네?”
“당신은 저놈 무릎을 분질러 줄 수 있어?”
“그럼요.”
베니앙이 흐릿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혼자가 아니거든요.”
* * *
당연하지만 죽음벌레가 만든 막은 크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면 애초부터 집채만 한 덩치를 가진 허주─ 짐승까지 지켜 주지는 못했다는 뜻이다.
[베니앙 님, 짐승의 상태는 괜찮습니까?]
“네.”
페르안의 염려에 베니앙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 아이는 이 정도로는 쓰러지지 않아요. 그건 예전에 한번 겨뤘던 제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럼 베니앙 님과 카사진 님이 힘을 합쳐서 오른쪽 무릎을 부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알겠습니다. 나머지 분들은 낙하한 거인이 곧바로 도약할 수 없게 최대한 방해해 주십시오. 사소한 공격이라도 괜찮으니까요.]
루시드는 하늘을 보았다.
아득할 만큼 높게 도약했던 거인이, 이제는 선명하게 보일 만큼 가까워져 있었다.
[저게 떨어지면 또 일대가 뒤집어지겠는데.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아도 되겠소?]
[생각보다 큰 충격이 퍼지진 않을 겁니다. 저것의 무게는 생각보다 많이 나가지 않아요.]
[그렇군.]
[…약 1분 뒤에 거인이 지면과 충돌할 겁니다. 루시드 님, 조금만 더 앞으로 가주십시오.]
루시드는 페르안의 지시를 따라 움직였다. 물론 땅바닥을 밟지 않고 하늘에서 움직였다. 비록 충돌로 발생할 충격이 예상보다 작다고 해도, 앞서 벌어진 소란 때문에 이미 지면은 너무도 불안전한 장소가 됐다.
지시한 위치로 이동했을 때 이제 거인은 지척까지 떨어져 있었다.
“…….”
몇몇 이들은 상황도 잊고 다시 그 광경에 압도됐다.
단순히 마주보는 것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걸 보는 것엔 큰 차이가 있었다.
뭐든 그렇겠지. 단순한 바위를 예로 들어도, 단지 눈앞에 있는 것과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는 건 전혀 다른 일이지 않나.
심지어 지금 낙하하고 있는 건 바위산 수백 개를 뭉친 것보다 훨씬 커다란 물체였다.
[충격에 대비하─.]
페르안의 뒷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다. 바람이 찢겨 나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세찬 광풍이 휘몰아치더니, 산이 무너지는 듯한 굉음이 사방을 울렸다.
꽈아아아아앙!
단순히 지반만이 아니라 대기까지 흔들리는 것 같다.
충격파도 대단했으나 충돌로 인해 발생한 열 때문에 주변 기온이 급격하게 상승했다. 강력한 에너지의 폭풍에 엎어진 지반이 섞여 들었고, 용암에서 건진 듯 시뻘겋게 가열된 암석이 광풍에 휩쓸리며 새빨간 족적을 만들었다. 그야말로 지옥 같은 광경이 일순간에 펼쳐진 것이다.
휘오오오─!
그때 세찬 바람 소리가 들렸다.
충돌로 인해 발생한 후폭풍이 아니었다. 거대한 태풍이 거인의 반대 방향에서 휘몰아치고 있었다.
인공적인 바람. 열기와 흙먼지를 거두기 위함이다.
퓨처릭스와 마법사가 힘을 합친 걸까?
확실히 이 기온과 흙먼지는 위험하다. 다음 작전을 진행하기 위해선 한시라도 빨리 없애는 편이 좋다.
[…하는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루시드 님, 속행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목소리가 끊겼으나 그 의도는 쉽게 이해됐다.
루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방이 캄캄하다. 거인의 허리에 둘러져 있던 암운이 주변을 완전히 뒤덮은 듯했다. 이럴 때 상대가 거대하다는 사실은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의 방향만 알고 있다면 길을 잃을 걱정은 없는 것이다.
루시드는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거인과의 거리를 좁혔다. 이미 한 번 죽음을 겪은 육체는 이보다 가혹한 환경에서도 무리 없이 거동이 가능하다.
이윽고 다다른 거인의 모습이 흙먼지 너머로 희미하게 보였다. 그것은 살짝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상태였는데, 엉거주춤한 자세를 보니 곧바로 뛰지는 못할 듯했다. 어떻게 잘 찾아온 집행자, 시귀가 끈덕지게 공격하고 있는 게 보였다. 찰과상을 입히는 것도 힘들어 보였으나 의미 없는 행위는 아닐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
그사이 무릎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루시드는 검을 잡은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상대를 향해 쇄도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다음, 손 뻗으면 닿을 곳에 있는 무릎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까앙!
[……!]
딱딱하다……!
흑기사가 되고서 베지 못할 건 이제 없어졌다고 여겼는데, 방금 전 느낀 강도는 그러한 오만을 단숨에 불식시켰다.
루시드는 데우키드를 칼집에 넣고 이번엔 하트나이트를 뽑았다. 그리고 칼자루를 양손으로 움켜잡은 다음 처음보다 훨씬 큰 동작으로 내려쳤다.
까앙!
그런데도 결과는 같다.
[루시드 님?]
[괜찮소.]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닙니다. 밑에 무언가가…….]
[밑?]
루시드의 시선이 아래, 지면으로 떨어졌다.
거인의 착지로 인해 부서지고, 깊게 파인 지면.
그곳에서 다수의 기척이 느껴졌다.
[저곳에 무언가가 있습니다.]
[확인이 필요하오?]
[…음, 예.]
잠깐 고민하던 페르안이 동의했다. 아직 거인이 재정비하기까지는 시간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우선은 미지의 적을 밝히는 걸 우선시해야 된다.
루시드는 곧바로 깊게 패인 구덩이로 몸을 던졌는데, 낙하하고 있다기보다는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감각을 받았다.
쿠웅!
밑바닥은 어두웠고, 많이 뜨거웠다. 당연하지만 위쪽보다 훨씬. 평범한 갑옷을 착용하고 있었다면 이곳의 온도를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렸을지도 모른다.
주변을 둘러보던 루시드는 곧 멈칫하고 말았다.
부정하고도 끔찍한 기척. 지저분한 생물체의 혓바닥이 전신을 핥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르륵…….”
가래가 끓는 듯한 목소리가 났다.
뒤이어 무언가가 어둠 속에서 무언가 꾸물대며 움직이더니, 괴성을 지르며 덮쳐왔다.
스걱!
반사적으로 하트나이트를 휘둘러 베었다. 덮쳐오던 것은 의외로 허무하게 반으로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물론 루시드는 벤 이후에도 방심하지 않았으나, 검으로 베어 버린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안심할 단계는 아니다.
사방엔 아직 적이 많다.
주변을 둘러싼 정체모를 것들이 연이어 덮쳐온다. 무언가 웅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루시드는 이번에도 검을 휘두르며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베어냈다.
[루시드 님? 무엇과 싸우고 있습니까?]
[확인 중이오.]
[적입니까?]
[…….]
루시드는 입을 닫았다.
어두운 공간에서 달려드는 존재.
당연히 적이라고 보는 편이 올바르겠지만, 이상하게 단언할 수가 없었다. 칼을 휘두를 때마다 기묘한 위화감이 느껴진 것이다.
스걱!
다시 칼을 휘둘렀을 때, 루시드는 위화감의 원인을 깨달았다.
이들은 루시드를 공격하는 게 아니었다. 칼날을 향해 뛰어들듯 몸을 던지고 있었다. 마치 자살을 하듯─.
그 순간 하늘에서 무언가 빛이 번뜩이더니 굉음과 함께 불길에 둘러싸인 바위가 떨어졌다. 꽈앙! 캄캄한 구덩이 내부가 확 밝아지며, 그제야 루시드는 상대의 진면목을 볼 수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었다.
조금 죽어가고 있는 것 이외엔 이상한 게 없는─.
가장 앞에 있던 여자가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들었다. 어깨 관절이 빠진 듯 부자연스럽게 덜렁거렸고, 손톱은 빠져 있었다. 산발로 헤진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고 왼쪽 눈동자가 있어야 될 곳엔 새까만 구멍이 자리 잡고 있다.
루시드는 이번엔 베지 못하고 왼손으로 그 어깨를 붙잡고 말았다. 카윽, 카으윽. 괴성을 내지르던 여인이 문득 이쪽을 보더니 말했다.
“주.”
부서진 이빨 사이로 불분명한 발음이 새어나왔다.
“주, 겨, 줘.”
[……!]
“제, 바…….”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의 줄이 탁 풀렸다. 루시드는 전신을 뒤덮은 탈력감 때문에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크아아─!”
잠깐 빛이 돌아왔던 여자의 눈동자가 다시 까뒤집히더니 이빨을 내보였다. 그마저도 멀쩡하지는 않았다. 루시드는 어깨를 밀어냈다. 허무할 정도로 쉽게 떼어진 여자가 바닥을 뒹굴었다.
그사이 다른 자들이 차례대로 덮쳐왔다.
“죽여 줘요…….”
“너무 아파.”
“부탁, 해요. 제발.”
[…….]
루시드는 죽이러 오는 게 아니라, 죽으러 오는 자들을 보며 몸이 굳고 말았다. 거인을 앞에 두고도 잠잠했던 가슴이 거세게 요동치는 것 같았다. 물론 착각일 것이다. 루시드의 심장은 이미 멈췄으니까.
하지만… 심장이 뛰지 않는다고 감정마저 상실한 건 아니었다.
턱! 가까이 온 남자가 루시드의 몸을 붙잡았다.
“죽여 달라고─!”
애원인지 비명인지 분노인지 알 수 없는 목소리가 지하공간을 울렸다. 루시드는 홀린 듯 검을 휘둘러서.
─남자를 베었다.
“…….”
루시드는 마지막 순간, 남자가 보인 눈동자에서 오랫동안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단지 체감만이 그랬다. 실제로는 거의 간격 없이, 루시드는 몰려오는 망자亡者들을 베어 나갔다.
그 이후에는 좀 더 수월해졌다.
짐승 같이 달려들던 자들은 죽기 직전에서야 평온함을 되찾았다.
[루시드 님?]
페르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상황입니까? 그곳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
[서둘러야 합니다. 곧 거인이 다시 재도약을 할 수도─.]
[…나는 갈 수 없소.]
[예?]
[이곳에 나의 역할이 있소.]
[무슨 소립니까?]
루시드는 숨을 천천히 내뱉었다. 갑자기 답답해서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됐다. 거의 벗지 않았던 투구가 갑갑해서 벗어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이 더위 때문은 아니었다.
“…페르안, 그대가 말했지? 거인이 밟고 온 지대는 ‘보류상태’가 된다고. 그렇게 된 게 거인에게로 흘러들어가, 거인 그 자체를 구성하는 걸지도 모른다고.”
페르안이 입을 닫았다.
“…하지만 그대가 마지막으로 거인을 목격했을 때와 지금, 거인의 크기는 같소. 골반을 중심으로 뚝 끊어지지. 거기서 더 성장하지 않았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은 건지 잘…….]
“거인의 파괴는 아직 끝나지 않았소. 짓밟아 파괴한 것은 물론이고, 죽인 것도 마찬가지. 그 모든 것이 보류상태란 뜻이오.”
루시드가 앞을 보았다.
“지금 내 앞에 그들이 있소.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자들이.”
[…세상에.]
페르안은 말문이 막힌 기색이었으나 루시드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소. 하지만 죽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는 잘 알고 있지.”
[…….]
“오랫동안, 아주 오랫동안 나의 책무에 대해 고민했소. 왜 내가 죽음의 흑기사로 선택받았는지에 대해서 말이오.”
한때는 이것이 나의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이에게 이어질 역할을 잠시 떠맡고 있는 것뿐이라고.
하지만.
“지금, 이러한 순간에. 불현듯 어떤 생각이 드는군.”
루시드가 망자들을 눈에 담으며 말했다.
“…죽었다고도 살았다고 할 수 없는 자들에게 안식을 주는 것. 그것이 나의 역할일지도 모른단 생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