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607화
몸이 두 개였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근 페르안이 보낸 요 몇 달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저런 망상을 진지하게 생각할 만큼 말이다. 꼬박꼬박 문제점을 처리해 나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쌓인 일거리는 줄어들지가 않았다. 마치 바닷물을 손으로 나르는 듯한 막막함이다.
그 동안 셀 수도 없을 만큼 모의전을 치렀고, 거인에 관해선 티끌만한 정보라도 손에 넣으려 애썼다. 준비 과정이 얼마나 고됐는지 그 속에서 결국 죽고 만 이들도 많았다.
제대로 추모할 시간조차 없었으나, 페르안은 그들의 얼굴을 잊지 않으려 애썼다. 모든 게 끝나고 정식으로 예를 표하기 위해서다.
일자가 하루씩 줄어들수록 공기가 점점 뜨거워졌다.
이것 또한 단순 느낌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여태까지와 차이가 있다면 그러한 가열을 모두가 느끼고 있다는 점이었다.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으나 정확히 무엇이 달아오르는지는 아무도 답을 내리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최후의 시간은 그렇게 끝을 고했다.
“이런 경험이 있었느냐?”
마탑의 77층.
옷매무새를 다듬고 있던 페르안에게 하룬이 물었다.
페르안은 잠깐 멈칫하더니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음, 아뇨. 예의를 차려야 되는 곳엔 줄기차게 드나들었습니다만 이번은 경우가 좀 다르죠.”
“그래 보이는군.”
“아… 뭔가 어설픈 점이 있습니까?”
“옷매무새가 어설프구나.”
“그렇습니까?”
페르안이 거울을 봤지만 딱히 모난 곳은 없어보였다. 픽 웃으며 다가온 하룬이 구겨진 옷 주름을 펴주고, 사소한 곳의 볼륨을 살려 줬다.
“앞이 아니라 아래에 있는 자들의 시선에서 생각해야지.”
“아.”
“코털도 삐져나왔다.”
“……!”
“농담이다.”
황급히 확인하려 드는 순간 하룬이 말했다.
페르안은 잠깐 멈칫하더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별로 긴장하지 않았어요.”
“정말로?”
“음… 아주 조금?”
하룬도 픽 웃더니 어깨를 한번 두드려 줬다. 왠지 모르게 부드럽게 등을 밀어 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거울을 보았다.
붕대로 얼굴의 절반을 감싼 남자가 보였다. 그나마 머리카락이 벗겨진 곳은 어떻게 수습이 돼서 좀 낫다.
페르안은 거울 속의 남자가 낯설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상처를 훈장으로 삼는 것처럼 유치한 행동이었으나, 그럼에도 그 전투로 얻은 모든 것들은 페르안의 자부심이 됐다.
이런 순간에서도 떨지 않을 수 있는 지지대가 되어 줬다.
심호흡을 하고 방을 나섰다.
발코니는 이 순간을 위해 증설을 마친 상태라서 무척이나 넓었고 제법 품격 있는 연설대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페르안은 그 앞에 섰다.
은은한 조명이 몸 전체를 비췄다. 빛 너머로는 장엄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온갖 비행체와 날개 달린 생물이 하늘을 뒤덮은 채였고, 땅바닥이 보이지 않을 만큼의 군세가 지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그리고 이제야 페르안은 그 모든 자를 한눈에 담으면서도 떨지 않을 수 있었다.
“페르안 준입니다.”
자기소개를 한 다음 고개를 꾸벅 숙였다. 호흡을 서넛 정도 반복할 동안 그러고 있었는데, 그동안 딱히 갈채 소리 같은 건 울려 퍼지지 않았다. 딱히 상관없었다.
다시 고개를 들고, 페르안은 조금 오랫동안 침묵했다.
되도록 오래 이 광경을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
전쟁에 앞서 반왕이 짤막하게나마 연설을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페르안은 의외로 고민하지 않고 수락했다. 거절할 수 있는 일인데도 그랬다. 그 까닭에 대해 스스로도 알 수 없었는데, 좌중을 앞둔 지금에서야 명확해진 느낌이다.
이것은 책임감의 문제였다.
“소속이 다른 이들이 손을 잡는 경우는 자주 보았습니다.”
말한 다음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첫 마디에 대해 깊게 고심했으나 결국 입 밖으로 흘러나온 말은, 지극히 인간다웠다. 인간다운 관점에서만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떻다고.
이곳에 있는 자들, 인간이 아닌 자들이 훨씬 많다. 일일이 그들을 배려하는 건 페르안의 독선에 어긋난다.
이제부턴 어떤 순간에도 스스로를 부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페르안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국가 간의 동맹도 흔한 일이지요. 종족 간에 맺어지는 혈맹은 드물지만, 역사서를 뒤져 보면 없는 일도 아닙니다.”
…….
“시시한 얘기라고 생각하시겠지요? 저도 알고 있습니다. 여기 계신 여러분 중 저보다 못난 사람은 한 분도 없다는 걸요. 저는 아직도 여러분을 모두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에 가슴이 뛰어요. 제 평생 이렇게 다양한 분들이 한뜻 아래 협력하는 걸 또 볼 수나 있겠습니까?”
페르안은 하늘을 보았다.
“우주가 얼마나 광대한지 조금이나마 알게 됐습니다. 저 아득한 세상 너머, 제가 감히 알지도 못했던 거대한 존재, 제가 깨닫지도 못했던 미약한 존재. 평생을 싸워 왔던 자, 한 번도 싸워 보지 않았던 자… 이제는 그들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설프지만 힘을 합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것만으로 감사합니다.”
다시 아래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예, 꼭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모든 분에게요.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하고, 오늘날까지 이 못난 놈의 지휘를 따라 줘서 감사합니다. 다들 정말 잘 인내하고, 잘해 주셨습니다.”
얼굴과 목소리가 점점 뜨거워졌다.
페르안은 부디 이러한 열기를 혼자만 느끼는 게 아니길 바랐다.
“참을 만큼 참았으니 이제 터뜨려야겠지요. 그러니 보여 줍시다. 우리를 짓밟으러 오는 거인에게, ‘바깥’에서 구경만 하고 있을 개자식들에게, 우리가 호락호락하지는 않다는 것을. 쉽게 짓밟히지는 않다는 것을요.”
뜨겁다.
자신의 몸뚱이만이 아닌, 아래에 있는 자들의 시선이 뜨겁다.
페르안은 뜨거운 숨을 토해 내며,
그리고 그보다 훨씬 뜨거운 시선을 느끼며.
“전군.”
─선언했다.
“진격.”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뚝 솟은 마탑을 뒤흔들 만큼 폭발적인 고함이 사방을 거칠게 울렸다.
페르안은 전신이 감전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떨며, 잠시 그 뜨거운 함성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최후의 전쟁이 시작됐다.
* * *
충돌은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거인과의 충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아군 간의 충돌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같은 목적을 지녔어도 그들이 서로를 인정하는 건 또 다른 문제다. 존중은 다른 차원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니 전쟁에 앞서 가장 중요한 건 전력 분배였다.
힘의 균형을 맞추는 건 물론이요, 내부에서의 충돌도 최대한 적게 일어나게끔 배치에 신경 써야 한다.
헛된 노력은 아니었던 걸까?
일단 결전을 앞둔 지금까진 별다른 소란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와 당신이 같이 움직이게 된 걸지도 모르지. 그래도 전(前) 0번째 악마셨잖아?”
하얀 가지와 자줏빛 잎사귀를 지닌 거목이 빽빽하게 들어선 어느 숲속.
결전을 앞두고 세디는 그런 말을 꺼냈다가, 상대가 이 말을 도발이나 비아냥거림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렇다고 난색을 표하거나 이미 꺼낸 말을 주워 담으려 허둥대지는 않았다.
세디는 비스듬히 고개를 꺾은 채 상대를 바라봤다.
[…….]
딱히 반응이 없었다.
저걸 카사진이라고 불러야 할지, 또 다른 ‘마왕’으로 불러야 할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악마왕으로 불러야 할지는 아직 모르겠다. 얘기라도 나누면 감이 올 것 같은데 저쪽은 대화할 생각이 없어 보이고.
세디가 코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주변에 있는 다른 녀석들보단 나아 보여서 말을 걸었는데, 저쪽은 딱히 그렇지도 않은 듯하다.
쿠우우웅─.
지면을 떨게 만드는 발걸음 소리.
숲새라도 있었다면 저 소리, 심상치 않은 울림에 겁먹고 일제히 비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저 멀리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는 거인이란 놈은 주변에 있는 존재를 미치게 만드는 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세디로서도 저놈의 압박감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정찰이나 모의전으로 몇 번인가 멀리서 바라본 적이 있는데 왠지 모르게 볼 때마다 더 커지고, 강해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페르안 준이 떠든 내용이 맞는다면 딱히 세디의 착각은 아닐 테지.
웬만큼 실력에 자신 있는 녀석들도 저 앞에선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을 거다. 꼬리 말고 도망치거나, 불나방처럼 달려들거나 둘 중 하나이지 않을까.
세디는 둘 다 아니었다.
저 신화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거인을 보고 있자니 가슴 깊숙한 곳에서 뭔가가 끓어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삶의 대부분을 쓰레기처럼 지냈다. 따분함에 짓눌려 죽을 것 같다가 뒤늦게 사는 이유를 찾게 됐는데, 막상 그걸 일깨워 준 장본인은 술래잡기라도 하듯 세디의 눈앞에서 달아나기 바빴다.
물론 진짜로 이쪽을 피한 게 아닌 건 안다. 그러한 사정에 엄청난 이유가 있다는 것도, 당시 세디의 머리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에 휘말렸다는 것도. 그렇다고 그 사실을 선뜻 받아들일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라서 그렇지.
아무튼 더럽게 꼬였던 상황은 최후의 순간이 오니 그제야 간단해졌다.
그냥 저 거인이 모든 것의 원흉이었다. 흑막 뒤의 흑막 뒤의 흑막이랄까. 저놈만 없애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온다. 정확히 무엇이 제자리에 돌아오는지, 거기에 자신의 자리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디는 이제 머리 굴리는 건 그만두기로 했다. 지쳤기 때문이다.
쿠우우우웅─.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나.
세디는 대답 없는 카사진 대신, 그 뒤에 서 있는 남자를 보며 물었다.
“그런데 저쪽은 괜찮은가?”
페르안이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눈치 빠른 남자라 그런지 자신에게 묻는다는 걸 금방 깨달은 것 같다,
제법 곱상한 얼굴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무슨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이 따로 없다. 그래도 보기 꺼림칙한 부분을 붕대로 가리니, 여전히 봐줄 만한 낯짝이긴 하다.
페르안 준이 대꾸했다.
“저쪽이라니요?”
“서북군 말이야. 뭔가 전력이 이쪽으로 쏠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단순히 기분 탓은 아니었다.
실제로 동남군엔 살아남은 십이허주와 흑기사, 전 군림자인 베니앙 아르젠토까지 있다. 그에 반해 저쪽은 적기사를 빼면 딱히 핵심이라 할 전력이 없다.
“저쪽엔 절대자가 많이 있습니다만.”
“그 녀석들로는 부족할 것 같으니까 하는 말이지.”
절대자의 수준이라면 여기 있는 얼뜨기들보다 세디가 훨씬 잘 안다.
이번 싸움에서 도움이 될 만한 녀석들은 뇌존의 십삼운十三雲과 거인의 아홉 손가락 같은 정예 몇몇뿐. 대다수 녀석들이 큰 쓸모가 없다. 듣기로 레티프나 에이테이주즈 같은 제패자가 합세한 것 같기는 하지만… 글쎄.
“괜찮습니다. 민하린 님에게 들었는데 그쪽엔 비장의 전력이 있다더군요.”
“비장의 전력? 지금 와서 그런 게 남아 있어?”
“글쎄요.”
“…뭐야 그 말은. 설마 너도 그 비장의 전력이 누구인지 모르는 거야?”
“그렇습니다.”
“…….”
비록 자신의 군이 아니라고 해도 지휘관이지 않나? 그런 건 파악해야 될 것 같은데. 세디가 식은 눈으로 페르안을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전으로 파고들었다.
“저쪽까지 신경 쓸 여유가 있겠습니까? 이건 협동전이지만 각각의 전장은 독립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쪽 전장의 계획을 짜는 것만으로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에요.”
“…….”
신기한 녀석이긴 하다.
반왕이 막무가내로 지휘관으로 임명한 남자는, 거인을 한번 보고 오겠다고 떠났고, 돌아온 이후엔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릇이 좀 커진 느낌이라고 할까.
세디는 이젠 자신도 페르안을 어느 정도는 조심스레 대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에게 어느 정도는 경의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세디가 보기에 지난 몇 달간 전쟁에 대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인 건 두말할 것도 없이 페르안이었으니.
쿠우우우우웅─.
다시 한번 발소리가 울렸다.
멍하니 서 있던 자들이 동시에 거인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딱 한 발자국 더 다가온 것뿐인데 압박감이 몇 배는 커진 것 같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느낌.
의미하는 건 간단했다.
“시작이군요.”
저마다의 방법으로 집중력을 고조시키던 자들이 그 말에 동시에 반응했다.
“모두 위치로 가 주십시오.”
페르안의 지시에 모두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페르안은 그들의 전체적인 모습을 시야에 담으며 말했다.
“몇 번이고 당부 드린 말씀을 한 번만 더 꺼내겠습니다. 죽지 않는 게 첫 번째입니다. 윤리적인 관점에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이제 이곳이 있는 분들 중 누구라도 빠진다면 승리를 장담할 수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번 토벌전이 마지막인 것처럼 싸워야 하지만, 정말로 마지막은 아닙니다. 기회는 아직 더 있어요. 그러니 모두 살아 주십시오.”
* * *
페르안은 홀로 남은 숲속에서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 앉았다. 허름한 탁자 위엔 지도가 펼쳐져 있었고 그 위엔 체스의 말이 어지럽혀져 있었다. 페르안은 손을 대지 않고 그것들을 움직여서 있어야 할 장소로 배치했다.
전쟁에 앞서 가장 중요한 건 떨어진 자들 간의 의사소통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전황, 승기를 단숨에 잡을 만한 정보를 손에 넣었을 때 순식간에 공유할 수 있는 체계.
당장 가장 처음 거인과 조우할 때도, 양인현과 페르안은 아무런 의사소통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난항을 겪었다.
이것은 거인과의 전쟁에 앞서 일차적으로 해결해야 될 문제였다.
페르안은 그런 생각과 함께 다방면으로 고민하고, 시도했다.
거인의 영향력이 끼치는 곳에선 외부와의 소통이 차단된다. 몇몇 이들이 가진 공간의 권능, 그와 같은 편법을 제외하면 대부분 그렇다. 그래서 생각을 바꿨다. 그렇다면 거인의 영향권 안으로 직접 발을 디딘 다음, 그곳 환경에 걸맞은 통신망을 구축하면 되지 않을까?
…어려운 일이었으나 결국 성공했다.
지금 마성에 있는 수천 명의 마법사가 이렇게 형성된 네트워크를 지원해 주고 있다.
“후우우…….”
페르안은 한쪽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아래에선 곧 수십 개의 화면이 동시에 펼쳐졌다.
감각의 공유.
빗발치는 마법 포격 아래 직접 발을 디딘 자들의 시야를 엿보며, 페르안이 입을 열었다.
“…흑기사, 앞으로.”
동남군 최강 전력, 죽음의 흑기사.
루시드가 크게 한 발자국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