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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90화 (817/857)

외전 590화

의외로 폭력만으로 인간을 완전히 망가뜨리는 건 힘들다. 연이은 고문에 미치는 사람이 있어도, 시간을 갖고 꾸준히 재활한다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이는 레시듀가 경험으로 습득한 지식이다.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식으로 고통을 주더라도, 부서지지 않을 녀석은 부서지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인간을 가장 확실하게 비정상으로 만드는가?

그것은 사건이다.

견고하게 형성된 자아에 균열이 날 만큼 아주 커다란 사건─ 단지 고통만으로는 루카스를 부술 수 없다. 포기하게 만들 수도 없다.

그러니 아골렛은 아주 예전부터 루카스의 견고한 자아에 조금씩 흠집을 냈을 것이다. 언젠가 커다란 파도가 들이닥쳤을 때, 그러한 흠집에서부터 균열이 시작되도록…….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이러한 작업은 잘못하면 성장의 양분이 되기도 한다. 비바람을 겪은 초목이 더 굳게 자라듯, 상처를 딛고 일어선다면 전보다 더 강인해진 정신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핵심은 ‘쌓는 것’이다. 불만이나 짜증 같은 부정적인 감정을 해결하지 않고, 그 자신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히 쌓아두다가 어떤 사건으로 폭발시킨다.

슈하이저의 죽음은 계기에 지나지 않는다.

“…….”

레시듀는 피투성이가 된 루카스를 내려다봤다.

문득 이따위 일을 대체 누가 예측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엔 이런 일을 애타게 바라기도 했지. 예상을 벗어난 일 말이다. 무슨 짓거리를 하든 다 상정 내의 사건들뿐이라 따분함만을 느꼈다.

그럼 바라던 대로 된 지금은 어떤가?

루카스 트로우맨에게 단순 폭력을 가하는 일에 어떤 짜릿함을 느끼고 있나. 예상 밖의 사태라 즐거운가.

레시듀는 허리를 굽혀 상처투성이가 된 루카스의 낯짝을 들여다봤다. 반쯤 감긴 눈동자는 깊게 침잠되어 있었다. 이상하게 오래 바라볼 수가 없어서 살짝 눈을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굉장히 오랫동안 이 구역질 나는 작업을 한 것 같은데 여전히 하늘은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새벽이 올 낌새조차 없는 걸 보니 거의 흐르지 않은 것 같다.

불평불만을 속을 곱씹다가, 이 또한 도피란 걸 깨달았다.

해야 될 일은 남아서 한숨과 함께 다시 한번 놈의 머리채를 잡아들었다.

“──.”

그러던 순간 루카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희미하고, 끊기기 직전의 목소리지만, 확실히 들었다.

“…그, 만.”

레시듀는 갑자기 허탈해졌다.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에도 힘이 쭉 빠졌다. 자연스레 루카스의 몸뚱이는 그대로 허물어졌는데, 등을 보이고 쓰러진 녀석의 뒤통수에 짧게 시선을 보냈다.

오래 보지는 못했다.

괜히 옷매무새를 점검하거나, 소매 쪽을 툭툭 털고, 심호흡을 한번 한 다음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진작 그랬어야지.”

이미 기절한 모양인지 반응은 없었다.

다시 한번 그 꼴을 바라보다가 놈의 상반신만 일으켜 세워서 벽에 기대게 했다. 그리고 걸치고 있던 로브를 벗긴 뒤, 자신이 입고 있던 걸 놈에게 대충 둘러매 줬다.

반대로 루카스의 허름한 로브는 레시듀가 입게 됐다.

“…….”

무슨 말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데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거기에 루카스는 벌써 정신을 잃은 상태기도 하고. 뒷수습은 청기사가 알아서 해줄 것이다.

이게 마지막일까?

그럴 수도 있다.

레시듀가 다섯 번째 멸망이 된다면 재회가 이뤄지기는 하겠지만 그게 어떤 형태일지는 도무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그때의 레시듀가 제정신이리란 보장은 없고, 루카스 또한 어떤 꼴을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니, 사실상 모르는 것투성이다.

루카스를 뒤로하고 고요한 도시를 한동안 걸었다.

인기척이 거의 사라졌는데, 도시 주민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어딘가로 대피라도 했나. 마침 조용한 분위기를 원했던 참이라 마음에 들긴 했다.

저벅.

그렇게 거리를 거닐다 보니 이 도시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상하게 이 순간 떠오른 건 뒷골목에서, 고기야채꼬치를 내밀던 루카스의 모습이었다. 그때도 이미 피폐해질 만큼 피폐해진 상태였다는 거지, 녀석은.

딱히 추억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일인데도, 묘하게 이곳에서의 기억은 오래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쓰러진 루카스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쯤엔 알 수 없는 피로가 몰려왔다. 좀 쉴까? 이제부턴 진짜 한숨 돌릴 시간이 1초도 없을 텐데.

그러나 이미 휴식할 시간은 끝난 모양이다.

조금 앞에 한 여자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마침 그녀도 레시듀를 보고 있었다.

“다 끝났어요?”

“…….”

청기사도 멀쩡한 꼴이 아니었다.

모래사막을 수십 바퀴는 구른 듯했고, 여기저기 작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어깨엔 확연한 핏자국이 있었는데, 저게 청기사가 흘린 피라면 제법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얼추. 아골렛은?”

그러자 페일이 미묘한 얼굴을 하더니 무언가를 내밀었다.

눈치채는 게 늦었는데, 페일의 등엔 방패가 걸려 있었다. 물론 페일의 것이 아니다.

백색의 방패. 아골렛의 방패.

부서지지는 않았고, 흠집조차 없었으나 항상 내뿜던 광휘는 자취를 감춘 채였다.

레시듀는 무의식적으로 방패를 받으며 물었다.

“죽였나?”

“그럴 리가. 알다시피 방어에만 집중하면 뚫어낼 존재가 없거든요. 그래도 오늘은 시간 끌수록 유리한 게 내 쪽이라 다행이었지. 봐요. 꽤 아파 보이죠? 열 배로 되갚아 주기는 했지만요.”

페일이 핏자국이 남은 어깨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미 출혈은 멎은 듯하다.

“당분간은 아무것도 못 할걸요? 멀쩡해질 때쯤엔 할 수 있는 게 없을 테고.”

“글쎄…….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게 되어도 여전히 위험한 녀석이다. 과거엔 그 꼴로 대우주 하나를 멸망시키기도 했고.”

“우주 하나 없앤 게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청기사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괜한 충고였을까?

애초에 이 녀석은 아골렛과 같은 4기사다. 그 녀석에 대해서, 어떤 면에선 레시듀보다 더 잘 파악하고 있겠지.

“녀석이 크게 다쳤다면, 물론 할 수 있는 일엔 많은 제약이 생길 것이다. 진짜 치명상을 입었을 때의 얘기지만.”

“…아골렛이 날 속였단 말이에요?”

“애초에 속이는 게 특기인 녀석인데 새삼스레. 네가 거짓말을 잘 간파하는 것도 아니고.”

“…….”

청기사는 레시듀의 힐난에도 크게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겠네요. 그래도 바뀌는 건 없겠지만.”

“넌 이제 어떡할 거냐.”

그러자 페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젊은이처럼, 그러한 표정엔 수줍음마저 느껴졌다.

“글쎄요? 같이 생각해 보죠, 뭐.”

“루카스의 얼굴은 웬만해선 가리도록 해. 이 몸과 행적이 겹쳤다간 곤란해지니까.”

“네에. 그럼 레시듀. 고생해요.”

고생하라니.

레시듀는 참지 못하고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이 시점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것도 어떤 의미에선 대단하다.

청기사가 손을 흔들며 등을 돌렸다. 레시듀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문득 말했다.

“페일.”

“…네?”

한발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청기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의로 이름을 부른 건 이번이 처음인가? ‘섬’에서의 일을 빼면 말이다.

레시듀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잘 먹고 잘 살도록 해라.”

* * *

완전히 루카스의 행적을 따라갈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 이미 이 세상은 기존의 역사와는 많은 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레시듀는 수습할 수 있는 것부터 수습하기로 했다.

우선 신전으로 향해서 카사진과 루시드를 만났다. 놈들이 머물던 여관이 이미 박살 난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친 상처를 치료하고, 안정하고 있던 녀석들은 놀란 눈으로 레시듀를 보았다. 아무래도 ‘레시듀’의 존재를 알다 보니 정체를 확신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미안하다.”

레시듀가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자 그들에게서 의심의 기색이 눈에 띄게 완화됐다.

단 한 마디로 레시듀를 ‘루카스’로 여기게 된 것인데, 실은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아니었다.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건 말투만이 아니다. 미묘한 표정의 변화나 무의식적으로 취하는 자세, 꺼림칙할 때의 태도, 습관……. 이외에도 많은 부분이 합쳐져서 전체적인 인상을 결정한다.

반대로 말하면 한 부분이라도 맞물리지 않고 따로 놀면, 상대는 무의식적으로 위화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레시듀는 연기 따위를 하고 있지 않았다. 내면에 있는 ‘루카스’로서의 일면을 드러내는 것이라, 거짓으로 꾸미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당연히 이들로선 간파하는 게 불가능하다. 이들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렇겠지. 레시듀가 ‘루카스’가 되려고 한다면 루카스 놈 이외엔 누구도 의심을 갖지 못한다.

약 30분 정도.

그간의 근황을 공유하면서 얘기를 계속 나눴다.

반쯤 폐인처럼 굴다가 정신 차리게 된 계기는 데미갓과의 전투로 해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한심한 꼴을 자각하고, 슈하이저의 죽음을 극복했다는 식으로. 어차피 헬라는 ‘레시듀’에 관한 건 기억하지 못할 테니까.

얘기가 끝나갈 때쯤엔 그들에게 있던 한 줌 의심마저 사라졌다. 녀석들은 몇 가지 저들끼리만 아는 사실을 은근슬쩍 질문에 섞기도 했는데, 레시듀가 모르는 건 없었다. 이쪽도 별반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놈들은 이제 완전히 레시듀를 루카스로 여기게 됐다.

하품이 나올 만큼 허무하게 루카스의 자리를 꿰찬 것이다.

이제 진짜 루카스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그들이 레시듀의 정체에 의구심을 품을 일은 없을 것이다.

…카사진은 팔 한쪽을 잃은 채였다. 데미갓과 치른 전투의 여파인 듯하다. 루시드는 사지는 멀쩡했으나 내상을 심하게 입은 상태로 보였다. 둘 모두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상처를 입은 상태다.

전투에서의 활약은 기대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지만, 태도를 보니 아니었다. 비록 육체의 포텐셜은 떨어졌으나 정신이 견고해졌다. 때문에 당장은 레시듀도 이들에 대한 판단을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엔 이리스가 돌아왔다.

그녀는 루카스를 보고 흠칫 놀란 기색이었으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눈 이후엔 경계의 기색이 눈에 띄게 줄었다. 물론 이리스는 앞선 두 남자보다 훨씬 예민하고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 당장 신뢰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의심을 거두도록 만드는 수밖에.

이후엔 일행과 함께 ‘사르만’에 있었던 일을 수습했다. 수습엔 신전과의 협력이 불가피했는데 그들에게 데미갓에 관한 모든 걸 밝힐 수는 없었다. 이 도시를 위해서도 그렇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사막엔 해마다 새로운 몬스터가 쏟아져 나왔고 그러한 재앙이 도시까지 번질 때도 종종 있었다.

최종적으로 이번 사건은 신종 몬스터의 도시 침입이라는 형태로 마무리됐다.

“…오에스트께선 행방불명되셨습니다.”

신전의 성직자 중 한 명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몬스터의 침공을 막기 위해 나섰고, 이후엔 돌아오지 않았다고. 다른 자들도 급히 신전을 나서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한다.

문득 아골렛이 상정한 ‘오에스트 조레’의 마무리가 원래 이런 형식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형태는 다를지언정 끝맺음은 비슷하지 않았을까.

레시듀는 로브 아래에 숨겨 둔 방패에 잠깐 주의가 갔으나, 그게 전부였다.

사르만을 나선 뒤 북쪽의 오아시스로 향했다.

아직까지 슈하이저의 애도를 끝마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행은 약 하루 동안 오아시스에 머물며 먼저 간 친우에 대한 묵념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그들은 아마칸 사막을 떠났다.

* * *

아골렛은 루카스에게 남은 시간이 반년 정도라고 했다. 사르만에서 2주 정도의 시간을 낭비했으니, 이제 남은 건 5개월 하고도 보름 정도다.

남은 기간에 비해 아직 해야 될 일이 많아서 레시듀는 쉴 틈 없이 대륙을 돌아다녔다. 이것도 아골렛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이 시점의 루카스가 쌓은 업적이 실제 역사에 비해서 부족한 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도중에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카사진과 루시드, 그리고 이리스와 이별한 것이다.

완전한 이별은 아니었다. 레시듀는 녀석들의 의도가 보였다. 그들은 다만 루카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너와 함께 있으면 또 비겁한 생각을 하게 될 것 같다.”

대표해서 말한 건 카사진이었는데,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할 일은 동일하니 함께 있는 것보단 나뉘어서 일을 처리하는 게 효율적이기도 했고.

그럼에도 가장 바쁜 건 역시 레시듀였다.

…그리고 일행과 헤어지고 보름이 흘렀을 때,

대륙 전역엔 전쟁의 불씨가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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