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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87화 (814/857)

외전 587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러고 나서야 이게 흔히 말하는 ‘뒷걸음질’이라는 걸 깨달았다.

턱은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반대로 목구멍은 바싹바싹 마르는 느낌이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여러 의문으로 머리가 뒤죽박죽 했지만, 그런 순간에도 라스는 자신이 겪고 있는 증상이 무엇인지 은연중에 깨닫고 있었다. 많은 존재가 자신을 앞에 두고 보여 줬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여태껏 이러한 감정을 경험한 적이 단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아니야.’

라스가 고개를 저었다.

‘이건 두려움이 아니야.’

다른 무언가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피곤한 걸지도 모른다.

방금 전 그 계집과의 전투에서 생각보다 많은 심력을 소모한 걸지도. 비록 약체화됐고, 개별로 싸우긴 했어도 마계 대공 둘을 상대했으니 당연하다.

그러니까, 이건.

“편히 있도록.”

“…….”

라스의 표정이 일순 편안해졌다가, 흠칫 놀라더니, 싸늘해졌고, 이윽고 맹렬하게 타올랐다.

찰나의 순간 연속적인 감정이 요동쳤으나, 마지막에 느낀 건 분노다.

이자의 거만한 말투 때문만은 아니다.

정말로 화가 난 이유는 방금 저자의 말에 안도감을 느낀 자신이었다.

“…재밌는 말을 지껄이는구나.”

라스의 입가가 비틀렸다.

“뭔가 특별한 재주를 한둘쯤은 갖고 있나 보군. 하지만 도가 지나쳤다. 허세란 들키지 않는 순간까지 의미를 가지니까.”

“그것은 이 몸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인데.”

“신전에서의 모욕을 되갚으러 온 것이냐? 나름대로 철두철미하게 준비를 한 다음 나를 추적했다는 뜻이군. 이거 한 방 먹었어.”

“…….”

상대는 따분한 시선을 보냈으나, 라스는 자신이 정곡을 찔렀다는 걸 확신했다.

의도만 간파하면 더는 휘둘릴 이유가 없다. 증거로 방금 전의 압박감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라스는 이제 옅은 미소까지 머금을 여유가 생겼다.

“편히 있으라고? 감히 누구에게 그딴 말을 지껄이는 것이냐. 내가 누구인지─ 아니. 알 자격도 없다. 네놈은 나의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가장 잔인하게 죽어야 해. 이곳에 온 목적인 루카스 트로우맨. 그 인간 이상으로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이럴 수가.”

“뭐가.”

“우리의 목적이 일치하는군.”

남자, 레시듀는 적당한 바위에 걸터앉았다. 슬쩍 그 시선이 혼절한 이리스를 향하고, 그 너머에 있는 슈하이저의 무덤으로 향했다. 조금 손상되어 있기는 하지만, 시신을 온전히 지켰군. 대단한 여자다.

“너의 목적도 그 인간이라는 것이냐?”

“그렇지.”

“그럼 왜 이곳에 왔나?”

“네놈이 도를 넘은 행동을 하려 해서.”

“…미친놈이.”

“근래 들어 자주 듣는 욕이군. 반박하자면 이 몸의 정신은 항상 또랑또랑하다. 그것보다… 너는 너무 일방적으로 말하는군. 이렇게 하자. 이제부터 쓸데없는 말을 할 때마다 사지를 하나씩 자르겠다.”

“개소리─.”

시야가 번뜩이는 듯했다.

뒤이어 라스의 몸이 기우뚱했다. 수천 년 동안 유지됐던 육체의 무게중심이 처음으로 흐트러진 것이다.

가까운 곳에서 타는 냄새가 났다. 익히 알고 있는 냄새다.

피와 살이 탈 때 나는 냄새.

“끄악……!”

라스가 잘린 팔뚝을 부여잡고 비명을 내질렀다.

오른팔이 풀썩 바닥에 떨어졌다. 무엇에 잘렸는지, 단면에선 핏물 한 방울도 떨어지지 않았다.

“죽일 생각은 없다. 그럴 이유도 없고. 반대로 말하면, 별거 아닌 이유만 생겨도 네놈을 죽일 수 있다는 거지. 이해가 가나?”

“파, 팔이, 내 팔이…….”

“팔을 잃은 건 처음이냐? 그랬던 것 같기도 하군. 그리고 여담인데, 왜 로드 정도의 가능성을 가진 놈이 수만 년 동안 반쪽짜리 절대자에 그쳤는지 알겠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우주의 평균 레벨이 너무 형편없다는 뜻이다. 네놈 같은 쓰레기가 적수를 찾기 힘든 만큼. 위기가 없으면 성장도 없지. 이 몸이 이런 것까지 설명해 줘야 하나.”

설명을 잘 마쳤다고 생각하는 얼굴이었으나, 라스는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레시듀는 살짝 인상을 찌푸리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조금 다른가? ‘드래곤’. 그것과 싸운 데미갓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로드가 해치웠군. 네놈 같은 얼간이는 덜 성장한 개체나 다 죽어가는 놈을 상대로 싸웠다. 전투라기보단 게임을 한 셈이야.”

“무슨, 말을…….”

“과잉보호도 생각해 볼 문제란 거다. 수천 년 동안 갓난아기로 지낸 기분은 어떤가?”

“네가 하는 말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아기 말이다. 아기. 아기 몰라? 응애.”

레시듀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다시 한번 무언가가 번쩍였다.

“크아악!”

라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오른팔에서 느껴졌던 고통이 이번엔 왼팔에 적용됐다.

고통과 두려움 때문에 감각이 예리해진 걸까.

라스는 이번엔 무엇이 자신의 팔을 잘랐는지 목격했다.

“버, 번개. 번개를 사용한 것이냐? 너는… 인드라처럼…….”

“감이 너무 없군. 태양을 성냥불로 착각하면 쓰나.”

대응도 못하고 양팔이 잘렸다.

그리고 여전히 레시듀는 미물을 보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라스의 인내심도 바닥이 났다. 미지에 대한 공포를 분노가 넘어선 것이다.

팔을 잃었어도 라스의 전투수단은 아직 건재하다. 지옥대공 두 명을 쓰러뜨린 열 개의 다리는 멀쩡하다는 뜻이다.

라스는 괴성을 지르며 레시듀를 향해 돌진했다. 단단한 다리가 흐물흐물해지며 전처럼 성질을 바꿨다. 가공할 만한 탄력을 가지게 된 그것은 채찍처럼 적을 향해 쇄도했다.

레시듀는 손가락을 튕겼다. 실은 그럴 필요도 없었지만─ 그리고 앞선 싸움에서 흠집도 나지 않았던 다리가 동시에 사멸했다.

“…이게 무슨.”

라스가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계속 귀찮게 구니 네놈에 대한 처우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군.”

“너, 너는 대체 뭐냐? 왜 나를 죽이려는 것이지?”

“귀찮아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놈을 죽인다고 해서 딱히 미래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 같지는 않군. 일단 4,000년 후에 너는 없었거든. 어차피 본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죽을 목숨이라는 거지.”

또다시 이해 가지 않는 말을 꺼냈다.

라스는 천천히 다가오는 레시듀를 보며 다급히 말했다.

“내, 내가 너를 모욕해서 죽이려는 것이냐? 그때의 일은─.”

“무슨 모욕?”

“뭐……? 신전에서 너의 뺨을 때렸지 않나…….”

“…아. 확실히 그런 일이 있었지.”

레시듀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걱정 마라. 네놈이 죽는 이유는 전혀 그것과 관계가 없어. 벌레한테 물린 걸 모욕으로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나.”

“벌레……? 내가…….”

으득.

라스가 이를 갈며 외쳤다.

“웃기지 마라……!”

괴성과 함께 다시 한번 돌진하는 라스.

레시듀의 시선이 향한 순간, 다시 한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그리고 사막의 오아시스엔 더 이상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 * *

죽일 생각은 없다.

처음 내뱉은 말에 거짓은 없었다.

레시듀는 시꺼먼 숯이 돼버린 라스를 보며 생각했다.

원래라면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하면, 이제부턴 되도록 이 세상에 ‘레시듀’를 드러내는 일은 지양할 생각이었는데.

그러한 결심을 어기고, 왜 모습을 드러내 이 쓰레기를 없앴나.

“…….”

혼절하여, 죽은 듯 쓰러져 있는 이 여자 때문이다.

방금 전 소란으로 깨어났나 싶어서 슬쩍 바라보니 여전히 혼절한 상태였다.

“쓸데없는 고집이나 부리고 말이야.”

상황은 대충 파악하고 있었다.

이리스 피스파인더는 그냥 라스가 떠나는 걸 지켜봤으면 됐다.

어차피 이 벌레는 루카스를 죽이지 못한다. 녀석 옆엔 청기사가 있으니까. …물론 그 사정을 이리스가 파악했을 리는 없지.

옆에 페일이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여자가 가진 괴물 같은 힘에 대해선 전혀 모를 것이다.

이해는 간다.

이해는 가는데.

“…….”

레시듀는 왠지 모르게 쓰러져 있는 이리스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괜히 깨어나면 일이 귀찮아질까 봐 관뒀다.

“쓸데없는 고집이지만… 너답기도 하군.”

레시듀가 중얼거렸다.

“푹 쉬도록 해라. 너도 앞으로 해야 될 일이 많으니까.”

슬슬 해가 저물고 있었다.

레시듀는 사르만을 바라보았다.

* * *

레시듀가 줄곧 품었던 의문이 있다.

─만약 루카스를 죽여야 한다면, 이 몸은 왜 하필 이 시점을 선택했을까?

정보를 종합해 보면, ‘통로’를 통해 어느 곳을 향할지, 그를 정할 권리는 오롯이 레시듀에게 있었다.

그리고 루카스를 죽이는 건 어떤 순간이든 가능하다.

녀석이 갓 태어난 직후, 보육원에 머물던 시절, 갓 마도학에 입문했을 때, 마음에 맞는 친우를 사귀었을 때,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을 때… 뿐만 아니라.

…4,000년 후 프레이 블레이크의 육체를 통해 눈을 떴을 때. 그 육체로 데미갓과 싸우기 위한 준비를 할 때. 마침내 로드를 쓰러뜨리고 신과 조우했을 때…….

…절대자가 되었을 때, 스스로 인간들의 신임을 선언했을 때, 처음 꼭대기 우주에 이르렀을 때, 희망을 갖고 우주를 구할 때, 그러한 행위에 지치고 지쳐서, 점차적으로 마모되어 가던 때…….

…우여곡절 끝에 고향우주로 귀환했을 때, 그러다 허의 세계에 끌려갔을 때, 그곳에서도 방황하기만 했을 때…….

그 모든 순간에서, 레시듀는 루카스를 죽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섬에서, 레시듀는 굳이 이 시점을 택했다.

무저갱에 봉인되기 직전의 때를 골랐다.

이제는 그 이유를 안다.

이때의 루카스의 정신은 연마되기 전이니까.

…곧 루카스는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 그 부재의 시간은 이 시점의 누구도 깨닫지 못했으나, 실은 성장의 기간이었다.

루카스는 그곳에서 4,000년의 세월 동안 정신을 담금질한다. 이윽고 프레이 블레이크의 몸뚱이로 눈을 떴을 때, 놈은 이미 부러지지 않는 강인한 의지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그때부터 루카스는 완전무결에 가까운 영웅이 된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시련, 위기에 고통 받아도, 결코 포기는 하지 않게 된다.

지금은 아니다.

이때의 루카스는 여러모로 부족하고, 어설프며, 연약하다.

아골렛이 세운 계략의 극히 일부분에도 정신이 무너져 망가질 정도다.

그러니 지금밖에 없는 것이다.

루카스 트로우맨에게 포기를 종용시킬 수 있는 때는.

레시듀는 문득 걸음을 멈춘 채 말했다.

“이러길 바랐던 거였지? 청기사.”

“…….”

나무 그늘 아래 기대고 있던 페일이 빙긋 웃었다.

“나는 레시듀가 참 좋아요.”

“…….”

“루카스 다음으로 좋아요. 왜냐면, 세상에서 오직 레시듀만이 루카스의 짐을 덜 수 있는걸요.”

“…….”

“단순히 포기만 하게 만든다면 그건 아무 의미가 없죠. 그것만으로는 통합세계의 ‘다섯 번째 멸망’은 사라지지 않아요. 여전히 ‘루카스’는 ‘다섯 번째 멸망’인 채일 테죠. 하지만─.”

“이 시점에서 포기한 루카스 대신, 이 몸이 대마도사가 된다면.”

페일의 미소가 짙어졌다.

“루카스 대신 레시듀가 무저갱에 갇히고, 4,000년의 세월을 버티고, 그 이후에 프레이 블레이크로서 눈을 뜨고,”

“…….”

“…데미갓을 모두 없애고, 신을 만나고, 인간들의 신 행세를 하며 우주를 구하고─ 그렇게, ‘루카스 트로우맨’을 완벽히 연기할 수 있죠? 레시듀.”

“있지. 왜냐면 이 몸은, 놈이 걸어왔던 모든 행적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지금,

레시듀는 이미 루카스와 같은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잖아요, 레시듀. 루카스는 할 만큼 했어요. 많이 힘들어했고, 많이 고통 받았어요. 그런데 그 끝이 멸망으로서의 죽음이라니, 난 납득 못 해요.”

“…….”

“그러니까, 레시듀가 대신해 줘요. 네? 루카스로서 살다가, 다섯 번째 멸망으로서 죽어 줘요.”

레시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페일은 만족스런 답을 들은 사람처럼 살짝 미소를 지은 뒤 떠났다.

…어려울 것 없는 일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조금 재미없거나, 도중에 질릴 수는 있어도, 어려운 건 무엇 하나 없었다.

그냥 루카스가 걸었던 길을 똑같이 따라가면 되니까.

“그러니 세상 그 누구도 모르겠지만, 이 시점에서 진짜 루카스는 사라지는 것이다. 어때. 그야말로 ‘루카스 트로우맨’의 죽음이 아닌가?”

레시듀는 홀로 중얼거린 다음 고개를 털었다.

“속여야 될 게 많겠어. 루카스의 인연만이 아니라, 이 몸 자신, 그리고 세상까지 속여야 하니.”

통합세계의 인물이 관측하기론 찰나일 것이다.

눈 깜박할 사이 다섯 번째 멸망이 ‘루카스’에게서 ‘레시듀’로 바뀌는 것뿐이지.

하지만 레시듀가 걸어가야 할 길은, 길다.

아득히도 길다.

긴 삶을 살아온 레시듀조차 그 종착지가 안 보일 만큼.

그리고 그 여정이 끝날 때쯤엔, 레시듀는 아마 루카스와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될 테고…….

…나를, 다섯 번째 멸망을 없애려는 자들에게, 기꺼이 목을 내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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