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85화
대체 어떻게 해야 이놈을 이길 수 있을까?
카사진은 정신없이 도망치면서도 머리를 굴려 작전을 짜내 봤다.
도망치기. 작전 짜기.
어울리지 않는 짓거리를 병행하고 있는 꼴이 자못 우습지만 조소를 지을 여유조차 없었다. 그러나 가만히 집중해서 짜내도 모자랄 판에 쫓기고 있기까지 하니, 좋은 계책이 떠오를 리도 없었다.
차라리 루시드에게 맡겨 볼까?
잠깐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이상하게 더 이상 스스로 할 일을 누군가에게 미루고 싶지 않았다.
그 지하의 신전에서, 루카스에게 판단을 맡기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서일까. 어쩌면 카사진 또한 줄곧 죄책감에 시달렸던 걸지도 모른다.
제길…….
짜증이 울컥울컥 치밀지만, 이렇게 도망을 치며 시간을 버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었다.
저 데미갓은 무차별적으로 주변을 파괴하고 있었는데, 이는 곧 상황을 숨길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소란은 이제 사르만의 일부 지역을 벗어나 도시 전체로 번지고 있었다.
신전의 도움 따위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카사진은 어차피 놈들도 데미갓과 한통속이라 여기고 있었다.
…루카스. 그리고 아마 이리스도 곧 이 소란을 깨닫겠지.
녀석들이라면 저 맞닿는 모든 걸 해체하는 괴물을 상대로도 좋은 작전을 세워 줄 것이다.
이렇게 되니 결국 다른 누군가에게 전가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긴 하지만.
“헙!”
갑자기 들이닥친 검은 물방울을 간발의 차로 피했다.
커다란 물방울이 아니라, 놈이 쏴댄 작은 물방울을 말하는 것이다. 저 빌어먹을 것들은 기척은커녕 소리조차 남기지 않고 움직여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가장 큰 놈은 일단 덩치가 커서 집중력만 유지하면 시야에서 놓칠 일은 없지만……. 그렇게 집채만 한 주제에 유령처럼 둥둥 떠다니니 위화감이 장난이 아니다. 표면에 아무런 무늬도 없고, 빛을 반사하는 것 같지도 않아서 거리감을 잡기도 까다롭고.
카사진은 계속 도망치며 손에 잡히는 걸 모두 던졌다. 모래나 건물조각, 항아리, 천, 어떤 전사가 흘리고 갔던 무기까지.
검은 물방울은 편식하지 않고 그것들 모두를 삼켰다.
그 과정에서 역시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고, 흡수하기 전 표면에 옅은 파문이 인 게 전부였다.
“검을 주시오.”
짤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뒤에 합류한 루시드가 한 말이었다.
“뭉쳐 있으면 안 좋아.”
“알고 있소. 하지만 우선 주변 상황을 공유하는 게 먼저요.”
“음.”
“일단 근처에 있는 자들은 모두 피난시켰소. 마음껏 싸워도 사람이 말려들 일은 없으니 힘 조절할 필요는 없소.”
“제법인데.”
“나는 별로 한 게 없소. 전사들의 힘이 컸지.”
물론 그들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쪽의 신분을 밝혀야 됐지만.
“그걸 좀 주겠소?”
루시드가 그리 말하며 카사진이 손에 쥐고 있는 걸 가리켰다. 도망치는 와중에 시간이라도 끌려고 주운 검, 그리고 창이었다.
“검은 왜?”
카사진은 검 세 자루와 창 하나를 동시에 던지며 물었다.
루시드는 요령 좋게 그것들 모두를 받은 다음 허리춤의 벨트에 대충 고정하고, 하나를 던질 자세를 취했다.
던지려고?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녀석에게 익숙한 공격은 아닐 터.
그래도 카사진의 원거리 공격 수단보단 훨씬 나을 것 같다. 지금 저 괴물에겐 칼날주먹 백 번을 날려도 생채기조차 생기지 않을 테니.
“흡!”
루시드의 눈에서 안광이 번뜩였다. 천천히 내쉰 숨결에 오싹오싹할 만큼의 기가 섞여 있었다. 검을 쥐고 있는 팔 근육이 부풀어 오른 순간이다.
꽈앙!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와 함께 검이 날아갔다. 직전 내리찍은 발 구르기는 주변 도로를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이 녀석. 언제 이렇게…….’
신체능력을 높인 거지? 수련을 게을리 하는 녀석은 아니었지만, 이 파괴력은 경이로울 정도다.
카사진의 감탄과 함께 호쾌하게 날아간 검은 그대로 물방울에 꽂혔다.
“오!”
그래. 꽂힌 것이다!
호수에 던진 돌멩이처럼 순식간에 모습을 감춘 게 아니라, 늪에 떨어진 바위처럼 천천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
그것만이 아니다. 물방울 표면에서 파문이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에 미세한 균열 같은 게 생겨났다.
“효과가 있는 건가?”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여태까지와 다른 반응이 나온 것만으로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카사진이 반색하는 순간 균열은 즉시 사라졌다.
[…재밌는 짓거리를 하는군.]
그 대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고목을 손톱으로 긁는 듯 꺼림칙한 목소리였으나, 그 속에 불쾌감이 실려 있다는 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이 위력… 확실히. 우리 동족을 죽일 정도의 힘은 가졌다는 것인가.]
아직도 여유롭잖아. 빌어먹을 새끼. 위기에 처한 듯한 기색은 털끝만큼도 없다.
‘괴물이…….’
카사진이 루시드를 보며 말했다.
“방금 전 공격 말인데. 몇 번까지 되냐?”
“…다섯 번. 이제 네 번 남았소.”
생각보다 더 무리가 많이 가는 공격인가 보군.
루시드는 검은 물방울을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방금 것보다 위력을 세 배 정도 더 높일 수 있소.”
“어떻게. 내가 시간이라도 끌어 봐?”
“그것도 필요하지만, 내 검을 쓰겠소.”
데우키드를?
카사진이 잠깐 말문을 잊고 말았다.
“그 검은…….”
“집안의 가보이자, 나의 보물이지.”
루시드가 처음으로 싱긋 웃었다.
“하지만 목숨보다 소중하진 않소. 그렇지?”
“…….”
카사진이 입을 꾹 닫았다.
나만이 아니었다. 루시드의 내면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야 당연하지. 무던해 보이는 녀석이라도 친우 한 명이 죽고, 한 명은 맛이 갔고, 한 명은 자기 멋대로 움직이고 있는 상황에선, 평소와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 게 정상이다.
변하지 않았으면 했던 그들의 관계도 이제 바뀌기 시작했고, 그 흐름은 막을 수가 없다.
이것이 긍정적인지, 아닌지. 아직은 알 수 없어도, 그래도.
카사진은 루시드의 태도에서 망설임을 덜어냈다.
“데우키드는 마지막에 던져라.”
“카사진?”
“검이라면 세 자루 더 있잖아. 한 자루는 창이지만… 아무튼 간격을 두고 던져다오. 동일한 위력으로 말이지.”
“어디를 노리면 되겠소?”
“물방울의 가장 위쪽, 중간, 밑.”
“따르겠소.”
카사진의 목소리엔 사실 확신 같은 건 담겨 있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감이 잡힐 듯 말 듯 한 애매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드는 이 남자가 일행 중 가장 전투감각이 예리하다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카사진은 무인에 앞서 전사다.
싸움에 있어선 전문가이니, 그의 견해를 존중하기로 했다.
달리 말하면 카사진에게 목숨을 맡긴 것이다.
탓!
카사진이 지면을 박차며 검은 물방울과의 거리를 좁혔다. 돌발행동이었으나, 루시드는 의중을 묻는 대신 검을 던졌다.
“흡!”
꽈앙!
다시 한번 검이 쏘아져 나갔고, 물방울의 윗부분에 꽂혔다. 그 사이 카사진은 물방울과 두 발자국까지 거리를 좁혔다.
지근거리에서 두 눈을 부릅뜬 채 물방울의 표면, 칼이 꽂힌 부위를 관찰했다.
‘역시 균열이 생겼다.’
…1초, 2초, 3초.
꿀꺽 삼키듯 검이 빨려 들어가고, 균열도 사라진다.
[하등 소용없는 짓거리를 하는구나. 하지만… 그래. 조금은 재미있군. 무언가 감이 오기 시작했다……. 어쩌면 나도 스스로의 권능에 대한 이해도가 낮았을지도 모르겠군.]
목소리가 다시 들려오며, 작은 물방울이 무수히 카사진을 덮쳤다.
카사진은 등에 걸쳐뒀던 창을 휘두르며 물방울을 쳐냈으나, 모두 막지는 못했다.
치이익!
“카사진!”
루시드가 다급하게 불렀으나 카사진은 덤덤히 고개를 털어냈다. 나름대로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행동이었으나,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강력한 산酸에 피부가 녹아내린 것처럼, 물방울이 닿은 피부에 구멍이 뚫렸다. 사실 적의 능력이 분해, 혹은 해체라면 크게 틀린 표현도 아닐 것이다.
“속행해!”
카사진이 외쳤다.
굉장한 집중력이다. 피부가 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고통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물방울을 직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루시드도 응해야 한다. 카사진의 결심에 따라야 한다.
다시 한번 검을 던졌다.
꽈앙!
…울컥.
목구멍에서 솟아오른 핏물을 삼켰다.
네 번 던질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다만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 육체에 부담이 가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두 번째부터 이미 한계였다. 이제부턴 한 번씩 던질 때마다 속이 뒤집힌다. 이것은 육체의 영구적인 손상을 의미했지만, 상관없다.
상대는 데미갓이다.
다치지 않고 이길 거라는 오만한 생각은 품지도 않았다.
팍!
쐐액 날아온 검은 이번엔 물방울의 정중앙에 꽂혔다.
마찬가지로 균열이 생겼다.
…1초. 2초.
[소용없다고 말했을 텐데? 인간이란 이토록 이해력이 부족한 동물이었는가.]
“다음!”
또다시 날아온 검이 이번엔 물방울의 밑 부분에 틀어박혔다.
카사진의 눈이 번뜩였다.
1초, 2초, 3초, 4초…… 5초!
무려 5초가 지난 뒤에야 균열이 사라졌고, 틀어박힌 검도 사라졌다.
‘차이가 있다!’
놈이 해체하는 속도에 분명 차이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검, 인간, 모래, 도자기, 혹은 그 밖의 쓰레기들……. 해체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에 제각각 차이가 있었다. 루시드가 던진 검 또한 그렇다. 그곳에 실린 힘 때문인지는 몰라도, 물방울은 날아온 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고 약간의 지연이 생겼다.
이것을 토대로 저 물방울에도 비교적 허약한 장소가 있을 거라 생각했고─ 방금 전 답을 얻었다.
물방울의 정중앙에 가까울수록 해체속도가 빠르다!
다른 장소는 중앙에 비해 그 속도가 느리고, 위보단 아래가 좀 더 느리다.
그렇다면 이놈에게 가장 취약한 부위─ 다시 말해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장소는 밑쪽이다.
결론을 내린 카사진은 물방울을 향해 달려갔다.
[이제야 포기하는 것이냐, 미련한 것.]
비웃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무시한다. 반색하듯 짓쳐들어오는 물방울, 캄캄한 낭떠러지 밑으로 뛰어드는 기분이다. 거리감은 물론이고 방향감마저 상실되는 듯한 느낌─ 의지할 건 오직 육체의 감각뿐이다.
─바라던 바다!
카사진은 물방울과 닿기 직전 묘기라도 부리듯 허리를 꺾었다.
저 바위 같은 몸뚱이로 저런 유연한 동작이 가능할 것이라고는 데미갓조차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거의 뒤로 넘어가기 직전까지 허리를 젖혔기 때문에, 카사진의 거대한 체격이 일순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
유연성도 유연성이지만 단련된 하체가 없다면 불가능한 기예다.
허리와 하체 근육이 뻐근할 만큼 수축되는 게 느껴졌다. 척추는 부서지기 직전까지 꺾인 채였다.
이 정도 자세를 취하지 못했다면, 물방울 밑에 몸을 욱여넣는 건 불가능했겠지.
“너 이 새끼, 약간이지만 떠 있는 채로 있더란 말이지. 아무래도 공격하기 쉬운 위쪽보단 바닥으로 가린 쪽이 약점일 확률이 더 높겠지?”
[우습지도 않은 짓거리를 하는구나……! 그 자세에서 주먹을 휘두를 수나 있나?]
“휘두를 수 있지.”
카사진이 덤덤하게 대꾸했다.
“이보다 더 가혹한 환경에서도 주먹을 휘두를 수 있게끔 수련했다. 항상.”
이를 테면 발가락 하나로 전신을 지탱하며─.
혹은 전신의 근육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손목만으로─.
그리고 슈하이저에게 특별한 약물을 부탁해서 오감을 전부 차단한 채로 휘두른 적도 있었다.
그런 평소의 훈련에 비하면, 지금 취하고 있는 자세는 별로 힘들 것도 없다.
데미갓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련한 놈! 팔을 버릴 셈이냐!]
“큭큭. 목숨을 버릴 셈이냐고 하지는 않는구만. 역시 제대로 짚었어.”
[이, 필멸자가……!]
“필멸자가 아니라 필살기다, 이 개자식아.”
사실 단순한 정권 지르기지만, 전신에 있는 힘을 모조리 쏟아부으면 그것만으로 필살의 위력을 가지게 된다.
하늘을 부술 기세로, 위를 향해 내지르는 주먹이니까.
무왕권 오의. 파천破天.
───콰직!
처음으로 물방울에서 소리가 났다. 투둑, 툭. 여태까지처럼 작은 물방울이 비산하는 게 아니라, 딱딱한 파편들이 부서진 유리처럼 떨어져 내렸다. 균열은 순식간에 물방울 전체로 퍼져 나갔다.
파칭! 거대한 물방울이 부서지고, 안쪽에 있던 늙고 추레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물방울이 순식간에 부서지며, 그 안에 자리잡고 있던 늙고 추레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고맙소, 카사진.”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루시드는 목숨을 걸고 기회를 마련해 준 친우에게 우선 예의를 표했다. 물론 그 또한 멀쩡하지는 않았다. 눈, 코, 입에서 핏물이 줄줄 새고 있었다.
현기증 때문에 양손으로 움켜쥔 검, 데우키드. 가문의 명검이 햇볕을 받아 번뜩였다.
데미갓─ 델라탄은 그 광경을 아연하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 안 돼…….”
루시드의 검이 노인을 두 동강 냈다.
정수리부터 사타구니까지─ 정확히 반으로 갈라진 델라탄은 그때까지도 피눈물을 흘리며 목소리를 토해냈다.
“이럴… 수가… 내가…….”
불신 어린 눈동자가 두 인간을 향했다.
그게 마지막이다.
델라탄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 두 개의 커다란 고깃덩이가 되어 땅바닥에 철퍽 떨어졌다.
“쿨럭…….”
거의 동시에 루시드도 핏물을 내뱉으며 쓰러졌다.
“…루시드?”
“…….”
“살아 있냐?”
“…….”
“그래. 다행이군.”
카사진이 피로에 절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뭐야. 우리끼리도 할 수 있었잖아.”
히죽.
사라진 오른팔을 보며, 카사진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