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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78화 (805/857)

외전 578화

루시드는 금욕적인 남자였다.

이컬리엄의 몰락한 귀족가─ 그중에서도 사남으로 태어난 루시드는 위로는 형 셋과 누이 둘, 밑으로는 동생 넷을 뒀었다.

총 열 명.

배다른 형제자매까지 포함한 거긴 해도, 이 정도면 충분히 대가족의 범주에 든다.

형제자매가 많다는 건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명백하다. 평범한 식사 시간마저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반찬 하나 때문에 멱살을 쥐고 싸우는 경우는 흔하다.

루시드의 집안은 달랐다.

형제자매들의 우애가 남달라서, 어쩌다 작은 콩이라도 하나 구하면 이걸 어떻게 열 조각으로 나눌지 고민부터 할 정도였다.

그렇다고 집안이 평화로운 건 아니었다.

긍지는 잃었으나 과거의 영광은 잊지 못한 아비는 늘 폭력을 일삼았고.

어미는 자식의 몸에 새겨지는 상처보다 스스로의 얼굴에 느는 잔주름 하나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약자끼리 뭉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점을 제하더라도 루시드는 형제자매들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뭣하면 살아가는 이유라고 해도 좋다.

삶의 목적 또한 자연스레 이어졌는데, 루시드는 가문을 부흥시키고 싶었다. 물론 피붙이 같지도 않은 아비가 아닌, 형제자매를 부양하기 위해서.

어째서 장남도 아닌 사남四男이 이런 생각을 품게 됐냐면, 누나의 말 때문이었다.

“루시드, 넌 우리 중에서 가장 강하니까 우리를 지켜 줘야 돼.”

장녀, 메리는 엄한 목소리로 자주 말했다.

“그러니 검술 수련에만 집중해 주렴. 뒷바라지는 우리에게 맡기고.”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럼. 루시드는 내가 본 아이 중에 가장 특별한걸.”

“내가 특별해?”

“누구보다 특별하지.”

지금은 메리의 말이 자신감을 불어넣기 위해서란 걸 알고 있었지만, 당시 열 살도 안 된 꼬맹이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진실이었다.

…결과적으로 메리의 칭찬은 루시드의 자신감을 과할 정도로 촉진시켜서, 이제는 지우고 싶은 흑역사를 잔뜩 만들게 되지만─ 이 시점에서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다.

메리의 선언대로, 형제자매들은 열성적으로 루시드의 뒷바라지를 해줬다.

그래도 귀족의 피를 이어받은 여인들이 자처해서 허드렛일을 했다. 옷을 꿰매고, 감자의 싹을 벗겼고, 빵을 살 땐 조금이라도 덩이가 더 큰 걸 사기 위해 눈을 부라렸다.

사내놈들은 해가 뜨기도 전에 일어나 하루 종일 농작을 돕거나, 가게 앞을 청소하다가 캄캄한 밤이 되면 돌아왔다.

그렇게 모은 돈의 대부분을 부모란 작자들이 가져갔다. 그것들 대부분이 노름이나 술값, 유행이 끝나면 헐값이 될 장신구의 구매에 쓰였다.

참았다.

아비가 폭력을 휘두르며 돈 가져오라 소리칠 때조차 숨겨둔 은화는, 루시드가 쓸 훈련용 목도를 사는 데에 쓰였다. 그럭저럭 실력이 괜찮은 검술 선생도 구할 수 있었고 몇 년이 지났을 땐 진검까지 살 수 있었다.

루시드는 상처투성이가 된 누이의 손과, 바싹 그을린 형제들의 피부를 볼 때마다 생각했다.

내가 저들의 젊은 날을 보상해 줄 수는 없겠지만,

다가올 미래엔,

이 나라의 누구보다 평안하고, 윤택한 삶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 * *

이컬리엄에선 열다섯부터 성인으로 취급한다.

성인이 된 날, 루시드는 몇 년 전부터 결심했던 일을 망설임 없이 수행했다.

그래도 귀족이라서 수도에서 성인식을 마친 뒤, 본가로 돌아온 즉시 아버지에게 결투를 신청했다.

가주의 자리를 건 결투였다.

아비는 비웃으며 결투 자체를 무시하려고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루시드가 검술 선생을 입회인으로 세웠기 때문이다.

결과는 승리.

일격에 상대의 검을 부러뜨렸고, 이격엔 목을 베었다.

첫 살인이었다.

패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나라에선 아니었다.

“공정한 결투였음을 내가 증명하겠소.”

검술 선생의 짤막한 선언과 함께, 루시드의 승리가 확정됐다.

루시드는 가주가 됐으나, 모든 게 끝난 건 아니었다.

이 이름뿐인 직책, 낡아가는 저택과 얼마 안 되는 땅덩어리를 노리는 이들이 남아 있었다. 젊다 못해 어린 가주는 그들이 우습게 보기에 충분했고 말이다.

메리가 제안했다.

“기사수행을 가는 건 어떨까?”

귀족가의 자제.

재능이 검증된 자.

마지막으로 15살 이상, 20살 이하.

이러한 조건을 모두 만족하면, 이컬리엄의 누구라도 기사수행이란 정책을 써먹을 수 있다. 나라에선 이 정책에 제법 적극적이어서 제법 넉넉한 자금까지 지원해 줬다.

기사수행은 보통 이컬리엄 전역이나 대륙을 순회하게 되는데, 자연스레 본가를 비우게 되는 셈이라 주변의 인물들도 쉽사리 시비를 걸 수 없을 것이다.

명색에 귀족이란 작자들이 제대로 된 기사 한 명 없는 가문에 결투를 신청하지도 않을 테고.

물론 그렇다고 해도 루시드는 걱정이었다.

“나 없이 괜찮겠어?”

“아하. 우리 꼬맹이 많이 컸구나?”

메리는 부쩍 커진 루시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드는 이제 형제자매 중 가장 크고 다부진 체격을 가지게 됐다.

“우린 걱정 말고 다녀와. 난 네가 되도록 이컬리엄 말고 더 많은 나라를 돌아봤으면 좋겠다. 알고 있어? 대륙 중앙에 있는 제국은 마법사들의 나라인데, 산보다 높은 탑이 곳곳에 세워져 있대.”

“형, 난 바다가 얼마나 깊은지 확인 좀 해줘. 책에선 대륙에서 가장 높은 산맥도 모두 담글 수 있다던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사막에 걸어 다니는 도마뱀이 있다던데, 보고 어떤지 말해 줘!”

루시드는 형제들의 부탁을 모두 귀에 담은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이번에도 첫째 누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끝으로, 이제는 가족과 한시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조용히 다짐했다.

꾸욱.

수행을 떠나기 직전, 루시드는 손에 들린 검을 바라봤다.

검은,

루시드에게 있어 검은, 바라는 것을 쟁취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금욕적이라고 해도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었고, 지금 루시드에겐 형제자매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뚜렷한 욕망이 존재했다.

긍지나 명예, 신념.

거창하고 겉멋만 들어 보일 뿐, 지금의 루시드에겐 거리가 먼 단어다.

“그럼 당신이 진짜로 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제도帝都에서 우연히 만난 한 청년이 물었다.

루시드는 살짝 손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했지 않소. 가족의 행복이라고.”

“네. 그렇지만 인간은 홀로 설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로 중요한 순간엔 타인의 힘에 기댈 수 없기 때문이죠. 당신의 형제자매는 모두 멋진 분들이지만, 그것이 언제까지고 그들을 부양할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그걸 바라지도 않을 것 같군요.”

“…….”

“당신이 가진 검술은 놀라운 수준입니다. 이컬리엄에 관해선 잘 모르지만, 고향으로 돌아가도 거의 적수가 없겠죠. 이제 당신의 가족은 더 이상 고통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 당신도 스스로의 목표를 정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쪽은 목표가 있소?”

루시드의 말에 청년이 애매한 표정을 했다.

“찾고 있는 도중이죠.”

“…….”

그 표정을 보는 순간, 루시드는 불현듯 고향으로 돌아가야 될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기사수행은 최대 5년까지 가능하고, 올해로 딱 3년 차였으나 지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루시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떠나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좋은 문답이었소. 그러고 보니 이름을 아직 묻지 않았군.”

“루카스입니다.”

“나는 루시드요.”

그리고 잠깐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듯하니, 존칭은 됐소.”

그러자 루카스가 웃으며 말했다.

“그럼 다음 만날 땐 루시드라 부르겠습니다.”

인상 깊은 청년이었다.

다시 만날 일이 있을까? 아마도 없겠지. 루시드는 이제 이컬리엄을 벗어날 일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루시드와 루카스의 재회는 정확히 반년 만에 이뤄졌다.

곧장 고향으로 돌아간 루시드는, 거기서 믿을 수 없는 진실과 조우했기 때문이었다.

루시드를 제외한 일가족이 반년 전 행방불명이 됐다는 사실이었다.

* * *

루시드는 스스로가 대단한 인간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검의 주인이니, 검공이니, 천재이니.

만인에게 받는 평가만큼이나 뛰어난 존재가 되지 못한다. 다만 스스로가 되먹지 못한 인간이란 생각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러한 생각은 스스로를 믿고 지원해 준 가족에 대한 모욕이다.

그리고 루시드의 시각으론 대다수의 인간들 또한 되먹지 못한 인간이었다.

특히 비슷한 또래의 누군가를 보며 존경과 경의를 느낀 적이 없었고, 친해지고 싶다 생각이 든 인물도 없었다.

“이들이 너의 가족의 행방을 알고 있을 거야.”

루시드는 루카스와 재회하고 다짜고짜 자신의 사정에 대해 늘어놓았다. 이런 막무가내 태도에 당황하거나 불쾌해할 법도 한데, 루카스는 절제된 태도로 사정을 듣고, 자기 일처럼 상담해 줬다. 그리고 협조했다.

결과적으로 약 한 달 만에 가족의 행방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루시드는 반년 동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했는데.

그러한 추적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루시드는 일종의 존경심을 느끼게 됐다.

자신과는 생각하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 독창적이고 생각이 깊으면서도, 결코 날카로움을 잃지 않았다.

이런 남자가 자신보다 어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이자라면 믿을 수 있다.

스스로 나서서 찾아야 될 가족의 행방이지만, 완전히 믿고 맡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과적으로 다시 한 달이 흘렀을 때, 루시드는 가족을 찾았다.

정확히 말하면 가족의 시신을 찾은 거지만.

“…….”

루카스의 말로는, 그들은 어떤 끔찍한 실험에 휘말렸다는 듯하다. 어떤 끔찍한 기억일지라도 세월이 더해지면 그럭저럭 희석되는 법이지만, 루시드는 아직까지도 이때의 일만큼은 깊게 회상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됐든 가족의 최후를 알게 된 이후엔 데미갓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강력한 적이다.

추적과 조사를 통해 알게 된 사실 중 9할이 허풍이라고 해도, 인간의 힘으론 그들과 맞서 싸우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복수심마저 생기지 않을 만큼 강대한 적을 앞에 두고도 루카스는 말했다.

“이들에 대해 더 알아봐야 돼.”

루카스는 길잡이였다.

루시드가 해야 될 일을 그 자신보다 먼저 깨닫고, 이정표가 되어 줬다. 그와 함께하는 순간엔 매 순간, 가슴속에선 끝없는 확신이 들었다. 스스로가 올바른 길을 걷고 있다는 확신 말이다.

여정이 끝나기 전까지는 계속 그럴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 * *

새벽.

여관 1층의 식당에 나란히 뻗은 두 남자는 말이 없었다. 얘기를 모두 들은 레시듀는 어딘가로 떠나 버렸고, 이리스도 비틀거리며 여관을 나섰다.

만신창이가 된 두 사내.

먼저 입을 연 것은 카사진이었다.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군. 몸 상태만 괜찮았어도 이런 꼴이 되진 않았을 텐데.”

“글쎄. 우리 둘이 만전이었어도 승리를 장담하기 힘들었을 듯한데.”

“흥.”

카사진은 코웃음을 쳤으나 반박하지 않았다.

억지로 몸을 일으키더니 목 관절을 뚜둑 풀었다.

“그보다 루시드, 신전에서의 일은 어떻게 됐지? 놈들이 뭐라던가.”

“오에스트를 비롯한 신전 대부분이 데미갓에 관해 아는 게 없어 보였소. 그날 우리를 지하로 안내했던 수상한 남자는 찾을 수 없었고.”

“음.”

“…우선 그렇게 주장하는 듯 보였지만 사실인지는 모르겠더군. 알다시피 본인은 참과 거짓을 가릴 만큼 눈썰미가 있는 편이 아니라서.”

그렇겠지. 카사진도 이에 관해선 비슷한 입장이어서 더 할 말이 없다.

이러한 정보 수집, 적진의 염탐, 상대방을 떠보기 등은 원래라면 이리스의 역할이다.

“…지금은,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군.”

“…….”

루시드의 낮은 읊조림에 카사진도 침묵했다.

둘의 성격과 전투 스타일은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으나 공통점도 있었다. 사태를 대함에 있어 은근히 수동적인 자세라는 점이다.

지금 같은 커다란 위기 상황에선 더욱 그렇다. 무엇이 올바른지 잘 알기가 힘들다.

선천적으로 이랬던가? 아니면 일행과 여행을 하며 변한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건 있소.”

“뭔데.”

“이대로는 위험하오. 곧 또 다른 데미갓이 올 테니까.”

카사진은 그 말을 들으며 녹스탄틴 최후의 비명을 떠올렸다.

─인간, 인간……! 네놈들은, 우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하하…….

─우리 동족은 훨씬 많이 있다. 그들이 나의 복수를 해줄 것이다…….

─똑똑히 기억해 둬라. ‘로드’가 반드시 네놈들을 찾아내서, 가장 처절한 죽음을 선사할 테니까……. 이제 편히 잘 밤은 없을 것이야. 아하하. 아하하하……!

동족이 훨씬 많이 있다.

루카스는 과거에 지나가듯 한번 말했다.

만약 데미갓의 숫자가 열을 넘어가면, 인류의 희망은 절망적일 만큼 희박해질 것이라고.

게다가 로드라니?

어투로 봐선 데미갓의 상급자인 존재 같은데, 그런 존재는 들어 본 적도 없다.

만약 놈이 일반 데미갓보다 훨씬 강한 존재라면…….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희망이란 존재할 수 있는가?

“끝장이군.”

카사진은 스스로가 내뱉고 흠칫 떨고 말았다.

줄곧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결코 내뱉지 않았던 말을 처음으로 입에 담은 것이다.

“…젠장.”

뒤늦게 자책감 때문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리고 무심코 계단을 보았다.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돌파구만 있다면.

그래. 루카스.

녀석이 저 계단을 통해 아무렇지도 않게 내려온다면…….

“…….”

“…….”

그러나 얼마나 시간이 지나도 계단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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