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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73화 (800/857)

외전 573화

예쁘긴 한데, 예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왜 그런가 싶어 곰곰이 얼굴을 뜯어보니 아무래도 눈동자 때문인 것 같다. 이상하게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였는데……. 사실 새까맣게 빛나는 눈동자란 그 표현부터 모순적인 말이었으나, 이 이상 적절한 표현은 생각나지 않았다.

아무튼 저놈의 눈동자 때문에 계속 쳐다보기 싫은 건 분명하다. 면사를 쓰고 다니는 이유도 무언가 관련이 있는 건 아닐까?

거북한 와중에도 먼저 시선을 돌리긴 싫어서 계속 마왕을 직시했다. 동시에 생각했다.

섬의 중심, 그곳에 있는 통로를 가장 먼저 이용한 게 이 녀석이라고 했던가? 그렇다면 마왕은 아골렛보다도 먼저 이 세계에 왔다는 얘기가 된다.

…또 아골렛은 이 세계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다. 물론 수십 년, 수백 년이란 시간은 관점에 따라서 긴 시간이 될 수도 있으나 백기사의 출신내력을 떠올리면 이상한 일이다.

설명할 수 없지는 않다.

아골렛은 여태껏 대부분의 삶을 홀로 보냈다. 고향 우주를 멸망시키고 허의 세계로 넘어온 뒤, 추방자와의 거래를 통해 자신의 땅을 확보한 아골렛은 그곳을 거의 벗어나지 않았다.

접점 없는 삶이란 지루함으로 시작하나, 시간의 흐름이 희박해질 때쯤엔 그러한 감상도 사라진다.

오늘 겪을 일이 어제와 동일하고 내일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그러한 삶에 매번 동일한 감상을 품고, 거기에 그 존재가 늙지도 죽지도 않는다면, 과연 그 인물에게 시간이 흐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려운 화두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동일하게 반복되는 하루란 어느 순간 감상마저 앗아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어떻지?

아골렛의 입장에서 이 세계는 모든 부분에서 밀도가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에겐 저마다의 삶이 있고, 크고 작은 관계로 맺어져 있다.

흔히 이토록 밀도가 가득 찬 공간을 세상이라 부른다.

세상과 오랫동안 동떨어져 있던 아골렛은 이곳에서의 수십 년을 길게 느껴도 이상하지 않다. 본능을 억눌렀기 때문에 체감시간은 더 길게 느껴졌을 테고…….

…쓸데없는 말이 길어졌지만, 의문점은 단순하다.

이곳에서의 시간이 아골렛에겐 변화를 선사할 수 있다.

하지만 마왕은 아니다.

이 녀석은 아주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군림자니까 당연하다. 그동안 의미 있는 유희도, 의미 없는 유희도 많이 겪었겠지.

즉 이 세상에서 겪었던 사건쯤, 마왕에게 있어선 그다지 특별한 것도 못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마주 보고 있는 마왕에게선 여러 변화가 느껴졌다……. 방금 만나기는 했지만, 애초에 연기를 하고 있었던 부분이 그렇다.

무엇이 마왕을 변하게 만들었을까? 놈에게 의미를 준 건 이 세상일까, 아니면 레시듀는 기억하지 못하는 ‘섬’에서의 일일까.

레시듀는 여러 의문을 떠올리며 말했다.

“미리 말해 둬야 될 것이 있다.”

“뭐지?”

“이 몸은 ‘섬’에서의 기억이 없어.”

“…….”

마왕이 잠깐 침묵했다.

그리고 관찰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레시듀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지, 만약 거짓말이라면 무슨 속셈인지, 뭐 그딴 걸 가늠하는 듯한 기색이다.

“증거는.”

“증거라……. 네놈에게 진실을 증명하는 건 아주 귀찮은 일이지. 어차피 증거를 내놓아 봤자 거기서 또 의문이 파생되고, 그 의문을 없애기 위해 다시 증명을 요구할 것이 너다. 그러니 이 몸은 더 할 말이 없어.”

“흠.”

마왕이 다시 한번 웃었다.

“너의 성향은 충분히 파악했다. 태평하게 거짓말을 입에 담을 때가 많지. 그러니 우선 판단은 보류하겠다.”

“알아서 해라.”

“그럼 우선 네 말을 진실로 여기도록 하고……. 섬에서의 기억을 잊었다면, 그때의 얘기부터 해야겠군.”

마왕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 난 섬에서 아주 애틋한 관계였다.”

“미안한데 너를 만나기 전에 청기사와 백기사를 전부 만났다.”

“그렇군.”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고개를 끄덕인 마왕이, 다시 말했다.

“혹시 어디까지 들었나?”

“그것은 말해 줄 수가 없지. 이러는 편이 네가 거짓말을 안 할 것 같으니.”

“후후. 정확한데……. 그럼 나의 목적부터 우선 밝혀야 하나?”

“루카스를 죽이는 거잖나.”

섬에서 이놈은 분명 백기사, 뇌존과 손을 잡고 루카스를 죽이려고 했다.

레시듀가 그 점을 짚자 마왕이 나른하게 눈을 감았다.

“…뭐. 그것도 목적 중 하나가 될 수 있지.”

애매모호한 말과 함께 마왕이 웃더니, 다시 한번 종을 흔들었다. 자세히 보니 아까 것과는 생김새도, 소리도 달랐다.

짤랑-.

그 순간 깨달았는데, 마왕의 뒤쪽엔 작고 네모난 통로가 있었다. 네모난 나무로 막혀 있기는 했는데, 종소리가 들리자 그곳이 살짝 열리는 구조였다.

“예, 주인님.”

“되도록 천천히 마차를 몰아라. 손님과의 대화가 즐겁구나.”

“알겠습니다요.”

“마을 전체를 한 바퀴 돌도록.”

“예.”

다시 통로가 닫히고 마차가 움직이는 느낌이 들었다.

마차는 그다지 승차감이 좋지 않은 탑승물이었으나, 앉은 곳이 푹신해서 그런지 딱히 불편함은 없었다.

조용히 움직이는 마차 내부에서 마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재밌는 세상이야. 이곳은.”

“음.”

“왜 그러나?”

“네놈이 그런 감상을 품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정도 세상쯤 몇 번이고 보았을 텐데.”

“그래. 셀 수도 없을 만큼 겪었지. 그럼에도 내가 이 세상에 흥미를 느끼는 것은… 나의 마음가짐이 달라졌기 때문은 아닐까?”

“무슨 소리냐.”

“임의의 존재를 만든 다음, 그 역할에 몰입하여 우주를 누비는 건 제법 괜찮은 시간 때우기지.”

딱히 부정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레시듀도 비슷한 유희를 몇 번 해 본 적이 있었다. 당시엔 하찮게만 여기던 필멸자의 모습을 굳이 가장하며, 스스로에게 부여한 배역에 몰입했다. 어떤 때는 아예 벌레로 수백 년을 지낸 적도 있었다. 아마 마왕도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몰입할 수는 없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감출 수 없었기 때문이야. 웬만한 우주의 용량으론 군림자라는 존재를 감당하지 못했고, 감당할 만큼의 대우주여도 스스로의 존재를 완벽히 지울 수는 없었다. 남은 방법은 인형을 만들거나 화신化身을 내세우는 것뿐. 하지만 그건 진정한 의미의 자신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나? 그것들이 본 풍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도 말이야.”

“그렇긴 하지. 실감할 수가 없으니.”

“그렇다.”

마왕이 스스로의 가슴에 손을 얹으며, 다시 말했다.

“그런데 지금은 달라. 지금 비록 모습을 감추고 있긴 해도 지금 네 앞에 있는 건 검은 가시의 마왕이다. 그것만으로도 많은 게 달라지더군.”

그런가?

여태까지의 얘기와는 달리, 지금 마왕의 말엔 순순히 공감할 수가 없었다. 레시듀도 겪은 적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때는 잔념으로 존재했고, 추후엔 친우의 몸을 계승받은 이후에야 존재를 확립한 레시듀와는 경우가 다를 것이다.

무엇보다 상대가 마왕이었기 때문에 이 말도 거짓말일 수가 있었다.

레시듀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이며 물었다.

“축하하마. 축하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후후. 그리고 여기서부턴 나의 목적인데……. 물론 너는 믿지 않겠지만, 지금의 내겐 뚜렷한 목적이랄 게 없다.”

“…….”

정말 믿기 힘든 얘기였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바라봤지만, 마왕은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까는 루카스를 죽이는 것도 목적 중 하나가 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부연설명을 잊었군. 지금 내가 원하는 건 결말이다.”

“결말?”

“다섯 번째 멸망을 없애려면 루카스 트로우맨을 죽여야 하지.”

“…….”

“표정을 보니 이미 알고 있는 모양이군. 청기사는 아니겠고……. 그런가. 백기사도 이미 만났는가.”

이토록 쉽게 탄로 난 게 아쉽기는 했지만, 반드시 숨겨야 될 얘기도 아니어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넌 루카스가 죽는 걸 좌시하지 않을 거야. 섬에서의 기억이 없다고 해도, 그 전제가 변하진 않겠지.”

“루카스는 지금 이 마을에 있다.”

“알고 있어.”

“놈을 죽일 것인가?”

마왕이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딱히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너의 의지도, 청기사의 의지도, 백기사의 의지도, 그리고 뇌존의 의지도 존중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지금으로선 그렇지. 다만 언제, 어느 순간에 개입하게 될지는 나도 잘 모르겠는걸. 나머지 이들의 소재도 대부분 파악하고 있고, 직접 움직이지 않을 때를 대비해 나름대로의 세력도 쌓았지.”

레시듀가 마차 벽을 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상단인가 뭔가 하는 거?”

“그래. 내 입으로 말하기엔 뭐하지만, 지금 난 대륙에서 가장 부자다. 일국의 왕이라도 내게 함부로 대할 수 없을 만큼의 부를 쌓았지.”

“…….”

이러한 비유를 들으니, 확실히 마왕이 변했다는 것에 실감이 났다. ‘일국의 왕’을 무슨 대단한 존재처럼 말하는 모습이 낯설었기 때문이다. 과거 놈에겐 길가의 벌레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존재였을 텐데.

“거기에 이 우주는 제법 재밌는 구조더군.”

“무슨 뜻이지?”

“이웃 우주가 있었다. 규모 자체는 이곳보다 작지만, 우선 분리되어 있는 세상이더군.”

레시듀는 마왕이 말하는 ‘이웃 우주’가 어딘지 알 것 같았다.

“마계인가.”

“급이 좀 떨어지고 야만적이긴 해도, 대륙보단 내 성향에 맞더군. 지금 난 그곳을 반쯤 장악해 두는 데에 성공했어.”

“…….”

‘반쯤 장악’이란 게 겸양 떤 표현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놈이 저렇게 말할 정도면, 실질적으로 마계는 놈의 수중에 떨어진 걸로 봐도 무방하다.

누가 아골렛 닮은 꼴 아니랄까 봐, 하는 짓도 아주 흡사하다.

마왕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지만, 지금 난 루카스에게 해를 입힐 생각이 없다.”

“놈을 죽이지 않으면 다섯 번째 멸망이 사라지지 않는데도?”

“그로 인해 벌어질 일이 무엇이든, 결말이 어떻든 개의치 않아. 관여할 생각도 없이, 그저 끝을 기다리는 심정이다.”

레시듀는 이런 초연한 듯한 말투가 어떤 배경에서 나오는지 알고 있었다.

죽음을 앞둔 늙은이다. 세상과의 연결점을 하나둘씩 스스로 끊어내며, 직접 이별을 준비하는 태세. 시야에 삶의 끝이 보이는 자의 행동.

레시듀로선 이해 가지 않고, 이해할 수도 없는 태도였다.

끝이 보인다면 더욱 해야 될 일이 많을 것이다. 끝을 미루기 위해, 좀 더 찬란해지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이 그의 적성에는 맞다.

그걸 이해하니 갑자기 마왕에 대한 흥미도 사라졌다. 왠지 모르지만, 지금 이 녀석은 백기사는커녕 청기사보다도 덜 위해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 말은 그게 전부인가 보군.”

“그렇긴 한데, 어떤가? 좀 더 얘기를 나누는 건.”

“무슨 얘기.”

“시시콜콜한 얘기? 이제야 말하는 거지만 나는 너와의 만남이 제법 즐거워. 레시듀. 네가 한때 군림자였다는 것만으로 내겐 이 세상 둘도 없는 대화상대가 될 수 있으니까.”

그리고 고혹적이게 웃으며 무언가를 흔들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그럼 돈 좀 떨어지면 다시 오마.”

레시듀가 대충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왕도 더는 들러붙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이런. 타이밍이 좋지 않았나? 급한 일이 있다면 어쩔 수 없지.”

“그래. 이만 가보겠다.”

레시듁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차의 문을 열고 막 나서려던 찰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참. 섬에서의 기억을 잃었다니까 하나 말해 주고 싶은 게 있다.”

“뭐지?”

“무언가 잊은 건 없나?”

“…….”

레시듀가 이상한 놈 보듯 시선을 보내자 마왕이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경황이 워낙 없어서 깨닫지 못한 건가. 네가 갖고 있었던 것들을.”

“갖고 있던 거? 뭐, 이 로브?”

“…글쎄. 겉보단 알맹이지. 후후.”

마왕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만 떠나라는 태도다. 레시듀는 불편한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마차에서 내렸다.

마왕을 실은 마차가 떠나고, 레시듀는 잠깐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금화주머니를 던지고 받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마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시점─ 문득 금화던지기를 멈췄다.

“…알맹이?”

레시듀는 로브 속을 더듬었다.

물론 품속에 든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데.

─바깥으로 출발하기 전, 레시듀는 두 개의 물건을 받았다.

검은 가시의 마왕에게선 ‘가시’를.

일곱 이빨의 용에게선 ‘이빨’을.

군림자의 외력이 담긴 물건, 다음 경지로 발돋움하기 위한 열쇠.

그것들이 사라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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