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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72화 (799/857)

외전 572화

식당에서 밥을 한 끼 얻어먹은 뒤 신전을 나섰다. 딱히 배웅도 없이 멍하니 거리를 걷고 있으니 얼마 안 가 금방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형성됐다. 그러자 도시에서 가장 조용한 곳이 신전인 것 같다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이만큼 소란스런 축제를 진행하고 있는 기관인데 정작 내부는 별세계인 것처럼 고요하다니. 재밌는 모순이다. 물론 떠나기 직전엔 무슨 사고라도 터진 것처럼 바삐 움직이고 있긴 했지만…….

…거리에 있는 자들은 죄다 야행성인 것처럼 들뜬 기색이다. 지치지도 않는지 어제와 비슷한 기세로 축제를 즐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 축제는 무려 한 달이나 열린다고 했나?

그렇다면 이 도시의 주민들은 축제를 여는 한 달을 위해 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1년 중 나머지 열한 달은 오롯이 축제를 준비하는, 이른바 인내의 기간인 것이다.

레시듀는 잠시 동안 소란스러운 거리를 배회했다. 목적도, 목적지도 없이 마치 유령이라도 된 것처럼 인파에 섞여들었다.

조금 걷다 보니 지금 있는 곳이 지난번 루카스와 걸었던 거리와는 조금 다른 풍경을 만들고 있단 걸 알게 됐다.

지역이 달라서 그런가? 그때는 남쪽 지구였는데, 지금은 북쪽이다.

이곳엔 먹거리가 거의 없었다. 대신 귀중해 보이는 기념품이나 장식, 무기, 심지어는 노예도 있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거리를 걷고 있는 녀석들의 얼굴에도 제법 귀티가 흘렀다. 확실히 있는 집 자식 같아 보이는 느낌.

레시듀는 문득 스스로를 내려다봤다. 때 묻은 로브를 입고 있는 게, 확실히 있는 놈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 쓸데없는 생각의 반발작용인지 갑자기 사치가 하고 싶어졌다. 뚜렷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지만, 어깨가 무거울 만큼 장신구가 주렁주렁 달린 옷을 입고 싶어졌다.

“빈털터리는 슬프군.”

물론 땡전 한 푼 없는 신세라 충동구매를 억제할 수 있었다.

레시듀가 근처 울타리에 기대서 청승을 떨고 있는데, 문득 어디선가 예리한 시선이 느껴졌다.

길거리엔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마차가 있었다. 끌고 있는 게 말이 아니라 낙타라 마차馬車라 부르는 게 맞을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마차는 언뜻 보면 무슨 작은 건물로 보일 만큼 커다래서, 야시장의 거리가 이토록 넓지 않았다면 진입하지도 못했을 거다. 이끌고 있는 낙타도 8마리나 됐다.

그리고 예리한 시선은 마차 내부에서부터 느껴졌다.

레시듀가 반쯤 멍하니 앉아 있는데, 마차 옆에 달라붙어 있던 놈 중 한 명이 걸어왔다. 참으로 더러운 인상의 사나이였는데, 박박 민 머리 밑에 가득한 흉터들을 감추기보다 드러내려는 남자였다.

“잠깐 괜찮소?”

다짜고짜 그리 묻길래 레시듀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께서 잠깐 얼굴을 보자고 하시는군.”

“주인?”

“골덴로드 상단의 주인이 되겠소.”

“황금길이라. 웃기는 이름인데.”

“…골드가 아니라 골덴이오.”

“그렇구만.”

레시듀는 다시 야시장의 거리를 눈에 담더니, 이 재미없는 사내의 낯짝을 보며 말했다.

“그럼 네놈의 주인은 이 몸의 시간을 사겠다는 것인가?”

“그게 무슨 말이오?”

“시간은 돈이란 말도 있잖나. 이 몸에게 용무가 있다면 그만한 대금을 치르라는 뜻이지.”

그러자 사내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말했다.

“당신은 딱히 할 일도 없이 멍하니 거리를 보고 있는 것 아니었소?”

“범인이 보기엔 그리 느낄 수도 있지.”

“말장난은 그만두시오.”

“이봐, 대머리 친구. 너는 부하 주제에 말이 너무 많아. 지금 네놈이 해야 될 일은 주인에게로 돌아간 다음 이 몸의 뜻을 전하는 것이다. 알겠나?”

“…….”

그러자 사내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탐색하는 눈으로 레시듀를 눈에 담았다. 오만한 태도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혹시 귀족가의 자제인가? 차림새를 보면 별로 돈이 많아 보이지는 않지만… 신분을 감추려는 것일 수도 있다.

대머리 사내가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침묵하는데, 그사이 마차에서 또 다른 전사가 다가왔다.

“그쯤 해둬라. 주인님의 손님에게 멋대로 상처라도 입힐 셈이냐?”

“…그건 아니지만.”

새로 등장한 전사가 레시듀를 보더니, 앞선 놈보단 살짝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대화는 모두 들었소. 그쪽의 뜻은 내가 전하고 오리다.”

전사는 그리 말하고 마차 쪽으로 갔다. 자세히 보니 전사보단 돈으로 고용한 용병들 같았는데, 고용주를 정말 주인처럼 대하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직접 하수인을 자처하고 있는 느낌이랄까.

아무튼 전사는 마차 너머의 인물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더니, 이쪽으로 다시 와서 말했다.

“얼마까지 원하느냐고 물으시는군.”

그리 물으면서도, 주인의 태도를 납득하지 못하는 낯짝이었다.

레시듀는 대충 대답했다.

“금화 백 개.”

“그게 얼마인지는 알고 말하는 것이오?”

“물론 알고 있다. 금화 백 개엔 자그마치 금화 백 개의 가치가 있지 않나.”

“…주인이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 내가 관여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앞선 사내와 달리 이 전사는 주제를 알았다. 얼마 안 가 주인이란 작자에게 뜻을 전하고, 놀랍게도 레시듀의 요구는 수락됐다.

그리하여 레시듀는 골덴로드 상단의 주인이란 작자와 만나게 됐다.

저쪽이 오는 게 아니라, 이쪽이 마차 안까지 들어가는 형식으로.

마차 내부의 모습을 처음 보며 느낀 점은, 지극히 공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감상이었다. 길고 푹신한 의자나 탁자, 서랍 빼고는 별달리 물품이 없어서 무척 넉넉했고, 심지어 한 사람밖에 없었다.

레시듀는 이토록 넓은 공간을 건방지게 혼자 쓰고 있는 자를 보았다. 정황상 저 녀석이 돈을 내서까지 만남을 원하던 ‘주인’ 같았기 때문이다. 면사 같은 걸로 얼굴을 가린 여자였다. 호위도 없이 덩그러니 앉은 채, 무슨 서류 같은 걸 읽고 있었는데, 레시듀가 들어오자 슬쩍 이쪽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예. 안녕하세요.”

레시듀는 대충 대답하며 주인 앞에 앉았다. 마차 내부가 조금 후덥지근해서 로브를 헐겁게 풀었다.

그사이 주인은 침착한 태도로 서류를 모두 정리하더니, 레시듀 쪽을 보며 말했다.

“골덴로드 상단의 루빌입니다.”

“레시듀다. 우리 어디서 봤지?”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구면이 아니라면 고작 얘기나 하는데 금화 백 개를 내놓을 리가 없지 않나.”

물론 배후에 누군가가 있고, 이 여자는 단순 꼭두각시에 불과한 가능성도 있긴 했다.

“제겐 별로 많은 돈이 아니에요. 골덴로드 상단의 주인인걸요.”

“네가 어떤 상단의 주인이든 알 바 아니다.”

“…과연. 세상물정에 굉장히 어두우신가 보군요.”

루빌이 애매한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당신에게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꼈습니다. 강자의 기운이랄까요? 아시다시피 상단 일은 항상 위험과 모험이 동반되죠. 호위를 맡길 만한 인재는 항상 부족하답니다.”

“그래서?”

“이쯤 말하면 슬슬 알아들어야죠. 당신을 호위로 고용하고 싶어요.”

생각보다 더 따분한 목적이었다.

레시듀는 하품이 나올 뻔한 걸 억지로 참으려다가, 생각해 보니 굳이 참을 이유가 없어 입을 쩍 벌렸다.

“…….”

“어제 잠을 좀 설쳐서. 그것보다 우선 금화 좀 줄 수 있나? 급하게 쓸 데가 있는데.”

“…뭐 그러죠.”

루빌은 옆에 있는 서랍을 열고, 그곳에 있는 금화를 쓸어 담아 주머니에 넣고 레시듀에게 건넸다. 레시듀는 딱히 금화를 세어 보지도 않고 챙겼다.

“좋은 곳에 쓰겠다.”

“제 손을 떠난 돈이 어떻게 되든 관심 없습니다. 그보다 다시 일 얘기로 넘어갈까요?”

“이 몸에게 호위 일을 제안하는 건가? 흥미 없다. 누군가를 지키는 건 적성에 맞지도 않고 할 이유도 없어. 물론… 네가 좀 더 솔직히 나온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지만.”

“솔직하게요?”

“이 몸에게 말을 건 이유 말이다.”

“…….”

그러자 루빌이 침묵했다.

왠지 모르게 거북한 침묵이 잠시 흐르고, 잠시 후 면사 너머에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첫눈에 반했어요.”

“음.”

이건 또 예상하지 못한 말인데.

“여기 오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에요. 사르만 마을의 축제를 한 번쯤 겪어 보고 싶었고, 북쪽에 형성된 장터거리엔 간혹 진귀한 물건이 헐값에 나온단 소문이 있었거든요.”

그리 말하고, 루빌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종鐘이었는데, 그걸 살짝 흔들자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짤랑-.

그러자 마차 벽면에 작은 빛이 새어 나오더니, 곧 거리 바깥의 풍경을 비춰 주기 시작했다. 마차에 차창이 없었던 이유가 있었다.

“이런 식으로 거리의 물건들을 훑어봤죠. 수확이 없어서 상심하던 찰나에, 당신을 발견했답니다.”

수줍은 목소리가 이어서 나왔다.

“…솔직히 첫눈에 이렇게 호감을 느낀 적은 없어서,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더라고요. 살면서 돈을 버는 것 이외엔 관심도, 흥미도 없었던 터라……. 그래도 이대로 헤어지긴 싫어서 일단 불러 본 거예요. 많이 실례였나요?”

“딱히? 돈을 받았으니까.”

“아하. 돈을 좋아하시나 보군요.”

루빌의 목소리에 즐거움이 묻어나왔다.

“평생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저승길로 가실 현인들께선 금욕金慾으로 맞이할 결말이 파멸뿐이라 단정 짓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달라요. 전 돈을 좋아하는 사람일수록 솔직하다 여깁니다. 레시듀. 당신은 아주 솔직한 사람이군요. 그것도 마음에 들어요.”

“…….”

“돈을 아주 좋아하는 레시듀와, 돈을 아주 많이 갖고 있는 루빌. 전 우리의 이해가 맞물릴 수 있다고 보는데, 어떤가요?”

레시듀는 이쯤에서 입을 열었다.

“청기사가 근처에 있다.”

“──.”

갑작스런 선언에 루빌의 면사가 살짝 흔들렸고, 레시듀는 그 너머의 낯짝을 처음으로 눈에 담았다.

사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레시듀가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법 괜찮은 시도였는데, 마지막에 제대로 초를 쳤군. 이봐, 이 몸이 대단하고 멋진 존재임은 분명하지만, 낯짝만큼은 그저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진실이지. 첫눈에 반했다라? 그딴 말은 씨도 먹히지 않아. 즉 너의 우스꽝스러운 연기는 마지막 부분에서 최악을 찍었다는 것이지.”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반신반의 정도였지. 그래도 네놈 기준으로 큰 시도를 여럿 감행한 거 아닌가? 우선 이 몸은 네가 여성체를 선호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러한 선입관도 이용할 수 있겠다 생각했는데, 결과적으로 쓸데없는 짓이었군.”

루빌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시 묘하게 눈치가 빠르단 말이지.”

“그것도 그렇고. 네놈의 모략도 많이 어설퍼진 것 같은데? 아골렛 이하였다고 말하면 좀 상처가 될 것 같으냐?”

“후후. 글쎄……. 언제가 됐든 백기사와 겨루고 싶다는 생각은 몇 번 하긴 했지.”

그것 참 특등석에서 관람하고 싶은 대결이군.

레시듀는 눈앞의 존재를 바라보며, 페일의 말을 떠올렸다.

왠지 모르게 찝찝하다고 했었나? 확실히 무시 못 할 감을 가진 여자다. 설마 이 마을에 다 모여 있을 줄은 몰랐지.

레시듀는 이제 순수하게 궁금해져서 물었다.

“그런데 방금 전의 촌극은 무슨 의도가 있었던 거냐?”

“글쎄…….”

검은 가시의 마왕은 우선 거추장스럽던 면사부터 벗으며 말했다.

“그저 관계를 처음부터 다시 쌓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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