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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70화 (797/857)

외전 570화

“하지만 자네의 작전도 완벽한 건 아니야. 우선 과인이 최후의 최후까지 왕성에 머물 수는 없네.”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반왕은 퓨처릭스가 띄워 놓은 홀로그램 화면에 시선을 옮겼다.

“거인의 진격 속도는 덩치에 맞지 않게 아주 빨라.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이 왕성까지 오는 데에 1주일도 걸리지 않을 걸세. 그럼에도 우리는 거인이 왕성에 이르는 시간까지 약 170일이 걸린다고 생각했지. 어째서일 것 같나?”

“…….”

“그들이 경로상에 있는 모든 생명, 물체를 철저히 파괴하고 있기 때문이야. 꼼꼼하고 빈틈없이. 실제로 거인이 지나간 곳엔 개미 한 마리 살아남지 못했고.”

“그 말씀은…….”

“그래. 만약 자네들의 희생으로 거인의 힘을 충분히 빼놓고, 약점을 충분히 분석하여, 결국 과인이 이긴다고 해도 그것을 승리라고 할 수는 없네. 풀 한 포기 남지 않은 황야에 과인 혼자 서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페르안도 이것까지는 고려하지 못했다.

놓친 점이 있었다기보다는, 거인이 그토록 철저한 파괴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반왕이 슬며시 웃으며 말했다.

“낙심할 필요는 없네. 개선할 점이 많기는 하지만 뼈대는 좋아. 자네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자가 옆에서 조언을 해준다면 더 좋아지겠지.”

이후로도 반왕이 무슨 말을 더 말해 줬으나, 페르안의 귀엔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생각 이상으로 무거운 중책을 맡았다는 사실에 어깨가 짓눌릴 것만 같았다.

페르안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하며, 물러날 것을 명받은 다음엔 휘청휘청 왕성을 떠났다.

반왕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퓨처릭스, 자네가 저 친구를 좀 도와줘야겠는데.”

예상대로 퓨처릭스는 화들짝 놀랐다.

“그게 무슨……. 저는 전하의 옆을 지켜야 합니다.”

“당장은 그럴 이유가 없지 않나? 멸망이 오려면 한세월이니. 그리고 과인을 위협할 만큼 강한 적이라면, 애석하게도 자네가 옆에 있어도 유의미한 도움은 줄 수 없어.”

“그건… 그렇지만… 왜 하필 제가…….”

“과인이 알기로 미래도시는 허의 세계 동쪽 지역에 위치해 있지. 그리고 페르안은 이 시간부로 동남군의 사령관이 됐고. 함께할 이유가 더 필요한가?”

“…….”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대꾸할 말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반왕의 뜻이라면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퓨처릭스는 한숨이 나오려는 걸 꾹 참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것이 전하의 명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대신 왕성에 제 눈을 여럿 달아 둘 테니 불쾌하시더라도 용인해 주시길.”

“불쾌할 이유는 없지. 뜻대로 하게.”

퓨처릭스는 못마땅한 듯 페르안이 떠난 곳을 바라보다 천천히 알현실을 나섰다. 그리고 직전 반왕을 보며 말했다.

“그런데 전하, 동남군의 사령관이 저 애송이라면, 서북군의 사령관은 누구를 임명하실 생각입니까?”

“글쎄… 당장 떠오르는 인재가 한 명 있기는 한데.”

“……?”

반왕이 손을 휘저었다.

“뭐, 일이란 어떻게 될지 모르는 법이지. 나중에 확실히 정해지면 말해 주겠네.”

“…예, 전하. 부디 옥체를 보존해 주시옵소서.”

그리고 퓨처릭스도 떠났다.

반왕은 슬그머니 의자에 머리를 기대며 뻥 뚫린 천장 너머로 펼쳐진 하늘을 보았다.

굳이 바깥에 나갈 필요 없이, 옥좌에 앉은 채로 하늘을 볼 수 있단 건 매력적인 일이었다. 퓨처릭스가 수리공사하겠다는 걸 막은 이유기도 했다.

지금 상황에선 적습을 대비할 필요도 없고, 반왕은 구멍 너머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쌀쌀함을 느끼지도 않으니 사실상 실용적인 면에선 지금이 더 나은 게 맞다. 퓨처릭스는 왕의 품격과 관련된 일이라 노발대발했지만, 이제는 그러한 반응을 못 본 척하는 법도 알게 됐다.

그래서 반왕은 요즘 즐거웠다.

멸망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시기에 가질 감상은 아니지만.

“나는 맡지 않겠소.”

갑작스러운 목소리는 기둥 뒤쪽에서 들려왔다.

매상검 양인현이 팔짱을 낀 채 그곳에 기대어 있었다. 말하면서도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다. 퓨처릭스가 있었다면 또 불경하다니 뭐니 잔소리했겠지. 그래서 양인현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무엇을 말인가?”

“서북군의 사령관.”

“그거 아쉽군. 물론 과인에겐 자네를 군의 사령관으로 임명할 생각 따윈 없었지만.”

그러자 양인현이 감았던 눈을 떴다. 미묘한 표정으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되물었다.

“그것은 왜 그렇소?”

“자네는 다른 이의 위에 설 수 있는 그릇이 아니야.”

“…….”

양인현이 잠깐 침묵한 다음 말했다.

“…본인이 십이허주의 일원이고, 화산파의 장문인데도 그렇게 말하는 것이오?”

“그러하네. 혹 반박할 말이라도 있는가?”

“없소. 오히려 정확해.”

매상검 양인현. 누군가의 위에 설 그릇은 충분하다 못해 넘친다. 하지만 소질과 성향은 다른 문제다. 기본적으로 양인현은 타인의 위에 군림하는 것을 내켜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별달리 인재가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나서겠지만.

“그런데 여기엔 무슨 일로 왔나?”

“궁금한 것이 있소.”

양인현은 천천히 반왕의 앞까지 다가왔다. 그리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갖춘 건가?

아무리 반왕이어도 양인현에게 대접받을 거란 생각은 못 해서 조금 이상한 기분이 됐다.

동시에 호기심이 생긴다.

“대답해 주겠다고 확언할 수는 없지만, 물어봐도 좋아.”

“이 전쟁은 할 만한 것이오?”

그러자 옥좌에 앉은 반왕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뜬금없는 질문이군. 무엇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었는가?”

“당신 태도에서 어느 정도 여유가 느껴졌소. 어느 정도 승산이 있는 것처럼.”

“그것은 과인이 삶이 대하는 태도가 변했기 때문이야. 이번 전쟁과는 큰 관계가 없지.”

“그랬군… 그럼 전쟁은 역시.”

“확률로 떠드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글쎄. 승산은 1푼쯤 되지 않을까 싶은데.”

양인현이 침묵한 다음 말했다.

“내 생각보다는 높군.”

“후후. 물론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생각했을 때지.”

“방금 전 젊은 청년이 말한 계획을 채택하실 생각이오?”

“그러하네. 얘기는 다 들었겠지? 과인은 겁이 많아졌어.”

양인현이 반왕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는 당신이 두 명의 적을 동시에 감당하려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그것은 과인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이야.”

“살면서 누군가를 과대평가한 적도, 과소평가한 적도 없소. 나는 언제나 스스로의 기준이 맞춰서, 만물을 편견 없이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지.”

“그러한가?”

반왕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내 태도에 여유가 느껴졌다고 물었던가? 대답해 주지. 끝이 보이기 때문이야.”

“끝이 보인다고?”

“그래. 이것은 아직 퓨처릭스에게만 가르쳐 줬는데, 두 번째 멸망은 이미 끝났다고 하더군.”

양인현의 표정이 다시 미묘해졌다.

“그게 가능한 일이오?”

“가능하지. ‘바깥’으로 직접 떠나간 이들이 있지 않나.”

양인현이 믿기 어렵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이 정말 두 번째 멸망을 쓰러뜨린 것인가. 이렇게 빨리…….”

“거짓말할 남자는 아니야. 불확실한 정보라면 섣불리 전달하지도 않았을 테고.”

“그자를 높게 평가하는군.”

반왕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그들에게서 들은 정보를 취합하면, 지금 왕성으로 진격하고 있는 두 체의 거인은 각기 세 번째 멸망, 네 번째 멸망이야. 만약 우리가 그들을 쓰러뜨린다면─ 마침내 적은 하나만 남게 되는 것이지.”

반왕이 웃었다.

“과인은 이 길고 긴 싸움의 끝이 어렴풋하게나마 보이는 게 기쁘네.”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데도?”

“우린 지지 않아. 내가 그렇게 만들 것이야.”

“…….”

양인현은 짧게 침묵한 다음 다시 말했다.

“…서쪽에 있는 거인은 내가 확인하고 오겠소. 나 또한 그 괴물이 얼마나 강한지 궁금하던 차였거든.”

퓨처릭스가 보낸 정찰기계로는 거인의 강함을 확실히 알 수 없다. 멀리서 확인하는 걸로는 별 의미가 없고.

직접 부딪치고, 싸워야, 그래야만 실질적으로 필요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다. 1푼밖에 안 되는 승산을 조금이라도 더 올릴 수 있다.

“죽을지도 모르는데.”

“아직은 아니오. 나는 답을 찾지 못했고, 그 전까지는 죽을 생각 없소.”

“그럼에도 과인은 명령하겠네. 살아서 돌아오도록. 매상검. 자네는 해야 될 일이 많아.”

“…….”

양인현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알현실을 떠났다.

그제야 반왕은 입가의 미소를 지웠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막지 못했나.”

* * *

레시듀는 이상하게도 바깥 상황에 대해 물어보고 싶지가 않았다. 그것은 아골렛이 쉽게 대답해 줄 것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계속 입을 닫고 있을 수는 없어서 억지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정확히 어떻게 안 좋다는 거냐.”

“그것을 알려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지만…….”

아골렛은 의도적으로 말끝을 흐렸다. 이 녀석은 직설적으로 말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걸까.

레시듀는 떨떠름한 시선을 보내다가 말했다.

“그래. 원하는 게 있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무엇을 바라지? 루카스를 죽이는 것?”

그러자 아골렛이 피식 웃었다.

“제가 그 제안을 입에 담으면 이 협상은 곧장 결렬되겠지요.”

“그럼.”

“이렇게 하지요, 폐하. 저는 현재 이 대륙에 존재하는 세력들을 몇몇 장악해 놨습니다.”

“제법 성대하게 일을 저지르고 있나 보군.”

아골렛의 미소가 날카로워졌다.

“성대하게? 그것은 이 아골렛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발언이로군요, 폐하. 이 대륙에 떨어진 이후, 그 누구도 저의 진면목에 관해선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의심을 품은 이조차 없지요. 그들은 저에 대해 모르고, 알고 있다 해도 깊이 기억하지 않을 겁니다. 굳이 말하자면 폐하가 처음이겠군요.”

“그것은 별로 유쾌하지 않은 사실인데?”

레시듀가 고개를 젓더니 말했다.

“돌출되는 행동도 하지 않고, 스스로의 진면목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도 세력을 장악했다는 것이냐?”

“우두머리의 자리에 앉는 것만이 세력의 주인이 될 방법은 아닙니다. 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 조직의 2인자, 권력가가 가장 신임하는 조언가, 이러한 자들을 몇 마디로 조종할 수 있는 자……. 그런 무지한 자들은 사지에 묶인 실의 존재를 깨닫지도 못합니다. 하나부터 열까지 조종당하고 있는 주제 스스로의 판단하에 움직이고 있다 착각하고 있지요. 중요한 것은, 폐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이 아골렛의 존재가 노출됐느냐, 노출되지 않았느냐가 아닙니다. 그들이 언제, 어떤 순간에도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거란 것이지요.”

새삼스럽지만 역시 이놈은 선인보단 악인에 가까운 존재가 맞았다. 제법 변하긴 했어도 그러한 근본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얘기를 나눌수록 시커먼 암흑이 느껴져서, 웬만한 녀석은 이놈과 말을 섞지도 못할 것이다.

과연 대우주를 음모와 계략만으로 멸망시킨 남자.

레시듀가 말했다.

“이야기가 길어지는군. 본론은?”

“말씀드린 것처럼 제가 바라는 건 루카스 트로우맨의 죽음입니다. 허나 제가 손을 쓰지는 않겠습니다. 그럼 너무 쉽고, 너무 빨리 끝날 테니까.”

레시듀는 왠지 모르게 아골렛이 무슨 말을 꺼낼지 예상이 갔다.

“저의 세력을 말로 쓰지요. 이 우주에서 나고 자란 존재들을요. 오직 그들만을 사용해 루카스 트로우맨을 죽여 보일 테니, 폐하께서도 그들의 위협을 묵인해 주십시오. 이것이 저의 제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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