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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67화 (794/857)

외전 567화

엄청나게 넓은 방이다.

방의 좌우로는 조각상이 진열되어 있었고, 그 끝에 업무용 책상과 접대용 소파가 마련되어 있었다. 과할 정도로 넓긴 하지만 일단은 집무실로 보였다.

레시듀는 양쪽에 전시된 조각상을 눈에 담으며 물었다.

“여기가 너의 방이냐?”

“정확히 말하면 오에스트 조레의 방이지요.”

아골렛은 딱히 중요하지 않아 보이는 사실을 분명하게 구분했다. 레시듀는 코웃음을 치며 소파에 털썩 앉았다. 아골렛도 천천히 맞은편에 앉았고─ 그제야 녀석의 낯짝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었다.

여전히 빛이 번쩍번쩍 나는 듯한 얼굴, 쉽게 속을 알 수 없는 표정, 차분한 기도… 입고 있는 복장이 변했다는 것 빼곤 기억 속 모습과 거의 차이가 없다.

레시듀는 이 신전이 뭘 하는 곳인지, 오에스트란 게 얼마나 대단한 위치인지 모른다. 사실 관심도 없다.

하지만 쉽고 빨리 손에 넣을 수 있는 자리 같지는 않아서 물어봤다.

“넌 여기 언제 온 거냐?”

“오래 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아골렛이 힐끗 레시듀를 보며 말을 이었다.

“…상당히 오래 전에요. 딱히 중요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럼 뭐가 중요한데?”

“폐하께선 첫 대면부터 제 정체를 눈치채셨죠. 그런데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쪽에서 먼저 접근하길 기다리시는 것 같았고, 지금 이렇게 대화를 나눌 만큼의 분위기는 형성됐습니다. 폐하. 제가 지금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긍정적으로?”

“드디어 제 충언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거나, 그것까진 아니어도 속을 터놓고 얘기할 마음 정도는 생겼다던가 말입니다. 전자면 가장 좋겠지만, 후자라도 충분히 반가운 일입니다.”

그렇군. 아무래도 이 녀석도 모르고 있나 보다.

그렇다면 얘기를 원활하게 진행시키기 위해서라도 한 가지 사실을 말해야 한다.

“우선 말해 두겠다. 이 몸은 기억을 잃었어.”

“후.”

아골렛이 실소를 흘렸다.

“재밌는 농담이군요.”

“…….”

그러나 레시듀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바라보자 금방 표정이 바뀌었다.

“…정말입니까?”

“그래, 정말이다. 익살스런 성격도 생각해 볼 일이군. 이럴 때 쓸데없이 얘기가 길어지니까.”

“어떻게? 아니, 애초에 왜… 어떤 기억을 잊어버린 겁니까?”

아골렛이 답지 않게 횡설수설 물어 왔으나, 우선 녀석의 질문들은 한 귀로 흘린 채 말한다.

“두 번째 멸망은 이미 지났다고 들었다.”

“…들었다, 라고 하심은.”

“그래, 이 몸은 그때의 기억이 없어. ‘바깥’으로 나간 직후, 무슨 섬에서 벌어졌다는 일들 말이다.”

“…….”

그 말에 아골렛의 안색이 살짝 바뀌었다.

그래도 이 녀석과도 제법 질긴 인연이기 때문일까? 이번엔 그 미세한 표정변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렴풋이 파악이 갔다.

“그렇다고 머리 굴리지는 말고.”

“무슨 말씀이신지.”

“이 몸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이용할 생각은 버리란 뜻이다. 네게 잘하는 거 있잖아. 사실을 조작하거나, 진실을 교묘히 숨기건, 아무튼 계략을 짜는 거… 그런 걸론 이 몸을 뜻대로 움직일 수 없어.”

“…물론 저는 그럴 생각이 없습니다.”

참 대단한 놈이다. 혈색 하나 안 바뀌고 뻔뻔스레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다니. 그렇기 때문에 아골렛은 시간이 얼마만큼 흘러도 편히 대할 수 없는 놈이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은 페일과의 대화를 통해 알게 되신 것 같군요.”

“그렇다.”

“이곳에 오고 제법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 페일과 마주친 적은 없었습니다. 그녀의 흔적을 발견한 적도요. 자신의 흔적을 지우며 움직일 자는 아니니, 그녀는 극히 최근에 이곳으로 떨어졌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아골렛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폐하와 페일, 둘 모두 저보다 나중에 출발했었죠.”

“나중에 출발했다는 게 무슨 뜻이지?”

“중심에 있는 ‘통로’를 이용한 순서 말입니다. 참고로 마왕이 가장 빨랐고 그 다음이 저였습니다.”

“흠.”

이것까지는 청기사에게 듣지 못했다.

레시듀가 물었다.

“그 다음 순서는?”

“제가 그것까진 알 도리가 없지요. 이미 떠났으니까. 저는 다만 남겨진 자들을 기억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

“어쨌든 폐하와 페일이 거의 비슷하게 출발한 건 확실한 것 같군요.”

레시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다고 치고. 쓸데없는 얘기는 이쯤 하고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 네가 더 잘 알겠지만 페일의 어휘력은 형편없다.”

“예.”

“뭐라 설명해 주긴 했는데 솔직히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섬에서 있었던 일들은 지금 이 몸에게 있어 중요한 단서지. 되도록 네게서 상세한 얘기를 듣고 싶은데?”

그러자 아골렛이 미묘한 표정을 했다.

“저와 폐하는 적, 그 정도는 들으셨을 텐데요.”

“뭐, 그렇지.”

“그런데도 제게 명령하시는 겁니까?”

레시듀가 슬그머니 웃었다.

“이곳에 오기 전, 만약 네놈이나 마왕, 뇌존과 부딪치면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해 봤다. 나온 결론은 단순해. 받은 만큼 되돌려 주기로 했다.”

“그 말은…….”

“‘섬’에서 벌어졌던 일들, 어차피 지금 내 기억엔 없어. 그때의 관계는 이 몸 기준으로 초기화됐단 거지.”

“제가 먼저 적대하지 않는 이상, 폐하 쪽에서도 굳이 공격하지는 않겠다는 겁니까?”

“쓸데없는 수작만 부리지 않는다면.”

아골렛도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좋습니다. 하지만 폐하가 기억을 잃었다는 건 제게 있어서 기회기도 합니다. 거기에 ‘섬’에서 벌어진 일을 모두 잊으셨다고 했지만, 전 그때의 상처가 아직 남아 있거든요.”

“이 몸이 널 다치게라도 만들었나?”

“마음이 다쳤습니다.”

“하하하. 재밌는 농담이군.”

“…폐하께서 지난날을 잊고 진의를 보여 주셨으니, 저도 좀 솔직해지겠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이냐.”

아골렛은 만들어 낸 미소를 교활함으로 채웠다.

“지금부터 꺼내는 말 전부가 진실은 아닐 겁니다.”

거짓말 예고라.

너무나도 아골렛다운 태도여서, 레시듀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 * *

“…폐하께서 알고 있는 것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그것에 대해 틀린 점을 이 아골렛이 정정하는 형식. 기본적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진행할까 싶은데 어떠십니까?”

“좋군. 시간이 가장 절약되겠어.”

“물론 그 얘기에 앞서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아골렛이 힐끗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이 신전 지하엔 데미갓이 있습니다.”

“알고 있다.”

“알고 계셨다고요?”

레시듀는 시큰둥한 태도로 말했다.

“라미아(Lamia)를 말하는 것 아니냐.”

“…놀랍군요. 그녀의 본명도 알고 있다니. 이곳에선 녹스탄틴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실제로 대부분이 그 이름을 그녀의 본명으로 알고 있는데.”

수련 과정에서 데미갓의 힘을 모두 소화했다. 놈들의 기원이나 특성에 대해서도 머릿속에 확실히 박아 뒀고, 그 힘 또한 미카엘─ 로드의 것을 제외하면 모두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됐다.

물론 이러한 사정을 굳이 아골렛에게 얘기해 줄 이유는 없었다.

“저는 그녀가 루카스를 죽이게끔 상황을 조성했습니다.”

“데미갓에게 너의 존재를 드러낸 거냐?”

“글쎄요…….”

아골렛은 구체적인 대답을 흐리며, 레시듀를 가만히 바라봤다. 직시한다기보다는 관찰하는 듯한 태도였다.

이윽고 그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움직이지 않으시는군요.”

“이 몸이 왜.”

“루카스 트로우맨을 지키러 가야 하지 않습니까?”

“…….”

레시듀는 침묵했다.

그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아골렛의 얼굴에 약간의 활기가 감돌았다.

“확실히 ‘섬’에서와는 많이 다른 느낌이군요. 이것 참 희망이 보인다고 해야 될지. 어쩌면 폐하를 설득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아골렛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루카스의 위기 상황을 이미 알고 있으시다면 더 말할 게 없습니다. 나중에라도 시간을 끌었다는 오해를 받기 싫었거든요. 그럼 이제 폐하의 얘기를 해 주시겠습니까?”

“그럴까? 페일과는 정확히 어젯밤에 만났다. 새벽쯤, 이 마을에서. 녀석은 갑자기 나타나서─.”

레시듀가 고개를 끄덕이며 페일에게 들었던 정보를 간추려 말했다.

바깥으로 나간 직후 조우한 섬, ‘바깥’도 ‘안’도 아닌 세상, 그곳에 있던 온갖 위협들, 루카스를 ‘중심’으로 이끌고 가야 하는 임무.

그 과정에서 벌어진 갈등, 페일과의 극적인 동맹─.

“제일 믿기 힘든 게 있다면 이 부분이란 말이지.”

레시듀가 말했다.

“비록 이해관계가 일치한다 해도 그 여자와 손을 잡는 광경이 쉽게 그려지지 않아. 대답해라, 아골렛. 청기사는 내게 거짓말을 한 건가?”

“아뇨, 진실입니다.”

아골렛은 레시듀의 불신을 한마디로 종식시켰다.

벌써 거짓말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이건 당장 페일을 만나서 확인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으니까.

또 아골렛이 거짓말을 예고하기는 했지만, 이야기 대부분을 거짓으로 만들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 9할의 진실에 1할의 거짓을 섞는 것이 가장 그럴 듯하다는 말이 있지만, 이 남자는 그 이상이다. 99퍼센트의 진실과 1퍼센트의 거짓말… 그리고 그 1퍼센트의 거짓말로 상대를 자신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는 두뇌를 갖춘 남자였다.

“그 섬에서 폐하, 그리고 페일은 손을 잡았습니다. 제 입장에선 일이 귀찮아진 셈이지요.”

“…….”

“떨떠름한 얼굴이군요. 페일이 알면 섭섭하겠습니다.”

“하. 그건 또 뭔 개소리냐.”

“그녀는 폐하와의 우정에 깊은 감명을 받은 눈치였거든요.”

레시듀가 입을 닫았다.

“폐하께서 그녀에게 중요한 존재가 됐다고 여겼습니다. 루카스와는 다른 의미로요. 아시다시피 페일의 삶엔 동료란 존재가 없었습니다. 루카스 트로우맨도 소중한 존재긴 하지만, 열애의 대상일 뿐, 동료라고 볼 수는 없죠.”

“…….”

“그러니 폐하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뜻을 함께한 동지는요.”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워라, 아골렛.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야. 두 번째 멸망의 차례는 이미 끝났다고 들었다. 그러니 정말로 중요한 건 이 시점이지. 여기가 정말 과거라면, 아골렛. 왜 너는 루카스를 죽이려는 것이냐?”

“…….”

“이 시점에서 녀석을 죽이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나? 놈을 죽인다고 미래가 바뀌기라도 하나? 다섯 번째 멸망의 탄생이 억제되기라도 하는가.”

“그것에 대한 얘기는 듣지 못했나 보군요. 가장 중요한 부분일 텐데도.”

“청기사가 이해하기엔 어려운 말들이었을 테니까.”

그러자 아골렛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제 생각엔 그녀가 의도적으로 정보를 통제한 것 같습니다만.”

“거짓말을 했다? 방금 네 입으로 동료 어쩌고 말하지 않았나.”

“동료, 친구 사이인 게 거짓말 못 할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까. 폐하, 페일은 영리하다고는 볼 수 없지만, 목적을 위해서라면 스스로를 감추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는 자입니다.”

“…….”

그럴지도 모른다.

과거 청기사로서의 신분을 숨긴 채 루카스 앞에서 보여 줬던 면면을 떠올리면 말이다.

“우리가 왜 루카스를 죽이려고 하는가?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폐하가 가장 납득할 만한 이유부터 말씀드리지요. 그걸 루카스 트로우맨이 원했기 때문입니다.”

“…놈이 스스로 죽길 원했다고? 네가 떠들었던 말 중 가장 믿기 힘든 얘긴데.”

거기에 당위성도 어긋난다.

그렇다면 ‘섬’에서 만난 루카스는 왜 레시듀와 페일에게 수호를 요청했나? 만약 그렇지 않더라도, 정말 스스로 죽길 원했다면 목숨을 끊는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의아해하시는 이유는 짐작이 갑니다. 다시 한번 대답해 드리지요. 지금의 루카스 트로우맨에겐 두 가지 정체성이 있습니다.”

“두 가지 정체성?”

“예, 죽길 바라는 것은 인간 루카스 트로우맨─ 폐하께서 기억하고 있는 그 남자의 인격이지요.”

“…그럼 죽음을 거부하는 건.”

“물론 다섯 번째 멸망─ 멸망의 지휘관으로서의 루카스 트로우맨입니다.”

“…….”

레시듀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이상하게 힘이 쭉 빠지는 느낌을 받으며, 아골렛을 바라보던 시선도 천천히 떨어뜨리고 말았다.

“루카스 트로우맨을 죽이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요? 차고 넘칩니다. 오히려 그를 죽이지 않는 게 억지가 될 정도로요. 이곳은 확실히 과거이고, 여기서 일어난 변화는 이윽고 미래에도 확실한 영향을 끼칩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극히 제한적이지요. 물론─ 우리에겐 좋은 의미로.”

“무슨 뜻이냐.”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던, 미래까지 그 영향이 닿는 건 루카스 트로우맨 하나뿐입니다.”

레시듀가 멈칫했다.

선뜻 이해하기 힘든 말.

아골렛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령 지금 신전 어딘가에 있는 흑기사─ 실례. 검호제 루시드를 죽인다고 해서 흑기사의 탄생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닙니다. 통합세계에 있는 그가 갑자기 소멸할 일도 없지요.”

“…….”

“슈하이저를 죽여도 아나스타샤는 존재할 겁니다. 이리스 피스파인더, 카사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곳에서 그들의 죽음, 변화는 미래에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루카스는 다릅니다, 폐하.”

아골렛이 투명한 눈동자로 레시듀를 보았다.

“그를 죽이면 미래─ 즉 우리가 있던 세상의 ‘다섯 번째 멸망’은 확실히 소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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