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66화
지하에 펼쳐져 있는 드넓은 공간. 이곳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곳은 아니었다. 구조적으로도 그러했고, 모래에 파묻힌 건물 잔해도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슈하이저는 자신이 뛰어내린, 끊어진 계단을 바라봤다.
“와. 까마득하네…….”
잘도 저런 곳에서 뛰어내렸군. 거의 산 중턱쯤에서 몸을 던진 거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 이 공간은 넓은 것뿐만이 아니라 높기도 했다. 아니. 깊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여러 모로 수상쩍은 곳이네요. 뭐 하는 장소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 설마 신전 지하에 이런 곳을 만들었을 줄이야.”
파묻힌 건물 잔해를 눈에 담은 이리스가 그리 중얼거렸고, 주변을 둘러보던 카사진이 대꾸했다.
그리고 계단 너머, 동굴 천장을 눈에 담던 슈하이저가 말했다.
“글쎄. 조금 다른 것 같은데.”
“뭐가 말이냐?”
“사르만. 이 마을의 지리는 기억하냐?”
“아마칸 사막 초입에 있었지. 서쪽으로 열흘 정도 나아가면 사막지대가 끝나니까.”
“위치 말고 지리 말이야. 모래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잖아.”
“그게 왜?”
“그게 실은 모래언덕이 아니라면?”
카사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으나, 슈하이저는 딱히 답답함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이 굼뜬 녀석에게 풀어 설명하는 건 익숙했기 때문이다.
“여기 천장을 봐. 예쁘게 둥글잖아. 저런 완만한 선은 자연적으로 만들어지기 힘들어. 거기에 군데군데 돋아난 종유석, 우리가 뛰어내린 계단을 없다 치고… 시야를 넓혀, 전체를 바라봐라.”
슈하이저가 중얼거렸다.
“…지붕의 내부로 보이지 않냐?”
“음. 글쎄.”
“그럼 돔 형식의 커다란 건물을 생각해봐라. 사막 한가운데 방치된 건축물이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 모래에 파묻히게 된다면─.”
“자연스런 모래언덕이 만들어지겠군요.”
눈치 빠른 이리스가 그리 말했다.
그러나 여전히 카사진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모습이었다.
“뭔 말이야?”
“순서가 잘못됐단 것이오. 신전 지하에 굳이 이런 공간을 만든 게 아니라, 모래에 파묻힌 건물 위에 마을이 세워진 거지.”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글쎄…….”
루시드는 신중하긴 했지만, 역시 머리를 쓰는 일에는 약했다. 힐끗 루카스와 슈하이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잠깐 생각하던 슈하이저가 말했다.
“…이상한 점이 두 개 있어. 우선 건물 규모가 말이 안 돼. 지붕의 디자인으로 봐선, 우리가 눈에 담고 있는 곳 전체가 건물 한 채의 내부라는 건데, 커도 너무 크지 않냐?”
“다른 하나는?”
“이 위에 마을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모르겠어. 다들 봤겠지만 사르만은 결코 작은 규모의 마을이 아니야. 오히려 도시라 불려도 손색없을 만큼 크지. 최소 인구가 3만 명은 넘을 테고 건물도 많아. 제아무리 견고하게 만들어진 지붕이라고 해도 감당할 수 없을 무게인데…….”
“조사해 봐야겠군.”
루카스가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넓은 공간이지만 그래도 같이 다니는 게 좋을 것 같다. 슈하이저.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지?”
“윽. 내가 결정해야 되냐…….”
슈하이저가 투덜거리면서도 주변을 둘러봤다.
사르만의 고대 건물 양식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사방에 있는 기둥은 어딘가 눈에 익다.
골몰히 생각하던 슈하이저가 곧 두 눈을 깜박였다.
‘지상에 세워져 있던 록-녹스 중앙신전을 빼다 박았잖아?’
크기에 가려져 있었지만, 단순히 기둥의 디자인만 흡사한 게 아니었다. 전체적인 구조 또한 록-녹스 중앙신전과 빼다 박았다. 마치 지상에 세워진 신전이 이곳의 미니어쳐인 것처럼.
그렇다면 중앙신전은 이곳을 모방하여 만든 것일까?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생각할 것도 아닌 듯하다.
슈하이저가 앞을 가리켰다.
“뭔가 눈치챘나?”
“…확실하지는 않지만, 여기가 록-녹스 신전의 원본인 것 같다.”
“원본이라니?”
그리고 그림을 긋듯 손가락을 휘적거리며 설명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예배당, 쭉 가면 좌우로 복도가 있겠지. 왼쪽엔 갤러리를 지나 오벨리스크로 이어지는 길이었고, 오른쪽은 화장실과…….”
“오에스트의 집무실.”
루카스의 말에 슈하이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리고 거긴 출입할 수 없었지. 위치만 가르쳐 줬고, 방 내부는 확인할 수도 없게 했어.”
“…어차피 전부 둘러봐야 될 수도 있으니까, 가장 의심스러운 곳부터 가는 게 좋을 것 같군.”
루카스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오른쪽으로 가자.”
* * *
워낙 넓은 곳이었고, 흩어져서 정보를 모을 수도 없으니 되도록 빨리 움직이기는 해야 한다. 그렇다곤 해도 휙휙 지나가면 단서를 아예 다 놓칠 수도 있으니 속도 조절이 필요했고─ 결과적으로 일행은 루카스의 마법을 이용해서 움직이기로 했다.
그들은 모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며 주변을 보았다.
가장 세심하게 관찰한 건 역시 슈하이저였는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거인족.”
“응?”
“거인족의 원류가 사막에서 시작됐다는 논문이 있어. 관련 문헌이 거의 없어서 학계에선 재밌는 추론 정도로 여겼지만 말이야.”
“이 신전을 거인이 만들었다?”
“만든 것까지는 모르지. 그들은 노예를 많이 부렸으니까. 그래도 그들이 살았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리 말하면서도 슈하이저의 표정은 편하지 않았다.
전설 속의 거인보다 훨씬 위협적이고, 두려운 존재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데미갓을 언급하지 않은 건 내심 그들이 없길 바라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순히 단서가 부족했기 때문일까. 슈하이저는 현기증 속에서 고민했고, 그 고민에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거대한 문 앞에 당도하게 됐다.
“여긴가? 오에스트의 방이란 곳이.”
“…위치상으로는.”
고개를 수직으로 세워야 그 끝이 보일 만큼 커다란 문이다.
그 장관을 눈에 담으니 천하의 카사진도 멍청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이 정도라면 거인이 아니면 못 열겠는데?”
“열 수 있겠나? 카사진.”
“하.”
카사진이 주먹을 맞부딪치며 히죽 웃었다.
“이것보다 두 배 더 커도 가능하지.”
그리하여 카사진의 거문巨門 앞에 당당히 섰다.
슈하이저는 그제야 문의 크기가 정확히 실감이 났다.
이 광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코끼리를 짊어지려는 개미? 폭포를 거스를 준비를 하는 송사리? 천둥번개를 버티려고 하는 잡초…….
“…….”
슈하이저가 쓸데없는 비유를 줄줄이 늘어놓을 때, 카사진은 문에 양 손바닥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눈을 감고, 호흡을 다스린다.
지면의 모래가 옅게 떨리기 시작했다. 카사진의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며, 안 그래도 크고 단단했던 근육은 더욱 팽창했다. 핏줄이 울긋불긋 솟아오르고, 피부가 익을 때까지─ 잠시 후, 카사진의 덩치는 평소보다 두 배나 더 부풀어 올랐다.
“카아아아─!”
쩍 벌린 입에서 괴성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는 기합이라고 우기지만, 듣는 이 입장에선 짐승의 울부짖음과 다를 바 없는 포효다.
성량이 얼마나 큰지 외침이 끊길 기색이 없다.
그그극…….
그리고 문 사이의 균열이 넓어지며 모래와 먼지가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이 문은 얼마나 오랫동안 열리지 않았던 걸까? 마치 모래로 된 폭포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카사진은 그 모래더미를 직격으로 받으면서도 전혀 기세가 죽지 않았다. 모래 사이에 섞인 돌의 파편도 있었으나, 카사진의 강인한 육체엔 흠집조차 입힐 수 없었다.
목소리가 끊기기 직전.
카사진은 모든 힘을 허벅지와 발에 쏟아부었다.
우직-.
지면에 거미줄처럼 균열이 생기는 순간, ‘꽈앙’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로소 문이 활짝 열렸다. 사실 열렸다기보다는 거대한 무언가에 충돌한 것처럼 보였다. 문짝이 아예 떨어져 나간 것이다.
쿠우웅……!
거문이 쓰러지자, 그 여파로 방 내부는 물론 신전 전체가 울린 것 같다.
슈하이저가 그 모습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아주 우리 여기 있소 광고를 하는군. 그냥 루카스. 네가 마법으로 뚫는 게 낫지 않았을까?”
“글쎄. 어차피 이게 함정이라면 우리가 온 것쯤은 당연히 알고 있지 않을까.”
“듣고 보니.”
“방 안이나 둘러보자. 사실 여기가 평범한 금지일 가능성도 아직 사라지진 않았으니까.”
슈하이저가 고개를 끄덕이며, 방 내부를 보았다.
그리고 살짝 말문을 잃고 말았다.
“…….”
장엄한 풍경이었다.
넓은 방 안엔 많은 석상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마치 전시라도 된 것처럼 양쪽에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물론 이 석상 또한 여태껏 봐왔던 것들처럼 아주 거대했다.
홀린 듯 석상을 관찰하던 슈하이저는, 이것들 전부가 개성적으로 생겼다는 걸 깨달았다. 인간만이 아니라 엘프, 수인도 있었고 악마와 천사처럼 생긴 것도 있었다. 갑옷을 입긴 했지만 알맹이는 몬스터인 것도 있고─.
“이건 뭘까?”
“석상이잖아요.”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뭔가 불안한데. 옛날에 읽었던 소설에선 꼭 이런 게 움직이더라고.”
“야.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일행은 우선 안쪽으로 걸었다. 예배당 복도를 거닐 때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전장 한가운데에 있는 것처럼 긴장을 유지했다. 주위를 둘러싼 석상도 수상쩍었지만, 무엇보다 방 내부의 분위기가 복도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여기 좀 추운 것 같은데?”
“난 그냥 그런데.”
“음. 그럼 내 착각인가 보군.”
“아니.”
루카스가 천천히 숨을 토해냈다.
숨은 곧 입김이 되더니 허공에서 바스러졌다.
“밤인 걸 감안해도 확실히 온도가 내려갔어. 슈하이저의 로브 때문에 깨닫는 게 늦었지만.”
“지하라서 그런 거 아니야?”
“글쎄. 그것도 아예 연관이 없는 건 아닐 테지만…….”
그 순간 어디선가 낭랑한 웃음소리가 흘렀다.
[아하하…….]
일행은 이 갑작스런 웃음소리에 태세를 완비한 채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소리의 근원지를 찾기 위해 오감을 총동원했다.
[긴장할 것 없다. 아둔한 것들아…….]
“누가 지껄이는 거지?”
“석상 중 하나일 확률이 높소. 그러나 목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서 특정하기가 힘들군.”
루시드의 말대로다.
이 웃음소리는 사방에서 들리는 것 같기도 했고, 귓전에다 대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두 눈이 성해도 시야가 낮으니 제대로 보지를 못하는구나. 나는 여기에 있다…….]
그 순간 일행은 동시에 한쪽을 바라봤다.
양쪽으로 진열되어 있는 석상의 끝─ 방의 끝자락에는 석상이 하나 더 있었다.
아니. 그것은 석상이 아니었다.
앞서 본 석상처럼 거대했고, 도무지 생물로 볼 수 없을 만큼 기괴한 생김새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엔 분명 다른 석상과 차별화되는 생기가 있었다.
워낙 커다랬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아래부터 살펴볼 수밖에 없었는데, 일단 하반신은 아름다운 여인의 것이었다. 극에 이른 미美를 최고의 장인이 섬세하게 조형한 것처럼, 발가락 끝부터 골반까지 감탄이 나오지 않을 곳이 없었다.
하지만 그런 아름다움은 정확히 허리부터 사라졌다. 백옥 같은 피부가 진녹색으로 변색되기 시작하더니, 우둘투둘한 비늘이 뒤덮였다. 그럼에도 여성 특유의 유려한 곡선은 남아 있었으나 감탄 대신 소름이 끼쳤다.
어깨 위엔 기괴할 정도로 긴 목과 납작한 얼굴이 있었다. 샛노란 눈동자와 세로로 쭉 찢어진 동공, 갈라진 혓바닥이 비열하게 날름거렸다.
─그러니 그것은 전체적으로, 상반신은 뱀이고 하반신은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 괴물이었다.
[그래… 벌레들아. 나의 집엔 무슨 일로 왔는가?]
괴물의 말에 루카스는 까득 이를 갈았다.
이 힘과 위압감.
의심할 필요도, 물어볼 이유도 없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이미 자명하다.
“…모두 준비해. 데미갓이다.”
[호오.]
간사하고 역겨운 뱀의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저것은 표정을 만들 줄 알았다. 눈가를 좁힌 채, 입꼬리를 살짝 올려 조소를 만들어냈다.
[나의 정체를 잘 알고 있구나. 너희들이 이 지하로 온 것이 우연은 아니란 뜻이렷다. 아하하……. 나를 보고도 미치지 않는다면 축복이라도 내려 줄까 했더니.]
“축복이라고? 그게 무슨 개소리냐.”
[너희들 인간은 그런 것에 열광하지 않더냐? 신에게서 축복받는 것 말이다.]
히죽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서 들려왔다.
[그러니 내가 직접 축복을 내려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오만하군. 스스로를 신이라 생각하는 것이오?”
[나는 다만 너희들이 바라는 것을 들어줬을 뿐이다.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지. 너희들 인간이 지금보다 훨씬 열등할 때, 감히 무리를 이뤄 살아갈 생각을 하지 못했을 시기부터… 나는 너희들의 소망을 엿들었다. 처음엔 하나였고, 이후엔 둘이 됐지. 넷, 여덟……. 나를 찾는 이들은 벌레처럼 불어났고, 어느 순간 하등한 것들은 나를 신으로 추앙했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너희들이 나를 부르길─.]
데미갓은 극적인 장면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양팔을 펼쳤다.
[“위대하고 아름다운 밤의 여신, 사막의 창세신 녹스탄틴이시여!”]
“……!”
루카스의 눈이 커졌고, 주먹은 꽉 쥐어졌다.
지상에서 보았던 녹스탄틴의 신상─ 상반신은 여인이고, 하반신은 뱀이었던 존재. 그러나 진실은 반대였다.
신보단 악마라 불려야 될 존재가, 뱀의 얼굴에 인간의 다리를 가진 채 성지 아래에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끔찍하고 충격적인 일을 지상의 인간들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4대 종교의 절대신이 데미갓이었다고?”
“…하.”
슈하이저는 넋이 나갔고, 이리스는 숨을 토해냈다. 그래. 나를 마녀 취급하던 놈들이, 실은 악마보다 더한 존재를 숭배하고 있었단 거지. 조소를 하고 싶지만, 이상하게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
[인간들아. 이곳에서 나를 목격한 너희들에겐 특별한 지옥을 선사해 줘야겠지.]
쩌저적…….
균열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주변에 있던 석상의 겉이 부서져 내렸다. 마치 알을 깨고 부화하는 괴물들 같았다. 루카스는 저 석상 중 만만하게 볼 존재는 단 한 명도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이럴 줄 알았어.”
슈하이저가 욕지거리를 내뱉은 순간, 녹스탄틴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의 유희가 되어라. 아하하…….]
* * *
─루카스가 신전의 지하에서 녹스탄틴과 조우하기 전.
화장실을 향하고 있던 레시듀는 목적지에 도착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신전 전체에 쓸데없이 돈을 처바른 느낌이 나더니, 여기도 다른 곳 못지않게 참으로 화려했다.
욕조로 쓸 것도 아니고 단순히 배변활동만 하는 화장실에 분수대가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지만, 쓸데없는 걸 싫어하지 않는 성격이라 그런지 나쁘게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막의 화장실에 분수대라. 이건 사치의 끝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다음 변소 앞으로 갔다. 역시 피와 살이 존재하는 육체란 역시 불편하다는 생각을 하며 바지춤을 내렸다.
주기적으로 노폐물을 배출해야 하는 몸뚱이는 정말 비효율적이고, 귀찮기 짝이 없다. 심지어 이러한 배변활동을 하루에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한다니…….
…그때 화장실에 누군가 들어왔다.
사막의 열기에도 아랑곳 않고, 두꺼운 천으로 전신을 꽁꽁 싸맨 남자였는데, 레시듀는 이자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바로 방금 전 그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말해 준 자였다.
“…….”
오에스트 조레는 입구에 우두커니 선 채 레시듀를 보고 있었다.
화장실을 방문할 목적이라면 단 하나일 텐데, 이 녀석에게선 그 하나뿐인 목적을 수행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부담스러울 만큼 뚫어져라 이쪽을 쳐다봤다.
레시듀는 조레를 보며 픽 웃었다.
“잘 어울리는데?”
“…….”
“언제부터 그 웃긴 연기를 하고 있었나.”
그러자 싱긋 웃으며.
“역시 알고 계셨군요.”
오에스트 조레가 아닌, 백기사 아골렛은 얼굴을 가린 후드를 벗었다.
“…….”
레시듀는 아골렛에게서 시선을 뗀 채 천장을 바라봤다.
청기사는 이 주변이 왠지 모르게 찝찝하다고 했었지. 그건 아골렛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느꼈기 때문일까? 그렇단 건 뇌존과 마왕이 근처에 있을 확률도 배제할 수가 없다.
놀라운 일이다.
이런 좁아터진 마을에 절대자 여섯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은.
그사이 아골렛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폐하.”
“음…….”
백기사과 마왕, 뇌존은 적.
페일의 말이 연이어 떠올랐다. 그 말을 듣지 않았어도, 레시듀는 이놈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의심했을 것이다. 저런 기사의 표본 같은 자세를 취하면서도 속은 음흉한 생각이 가득하단 걸 안다.
하지만 그럼에도 레시듀는 언젠가 아골렛을 만나야 했고, 결국 만났다.
그리고 아골렛은 응당 그래야 된다고 주장하듯 복종을 표했다. 일단 겉으로나마 충성을 나타내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딱히 꺼림칙한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음…….”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며 벌어질 일은 아니어서, 레시듀는 침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