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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64화 (791/857)

외전 564화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상의할 새도 없었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다부진 체격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카사진은 그 남자의 단련된 육체를 훑어보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다.’

사막에 오고 이만큼 강인한 육체를 본 적이 없었다. 빈틈없이 단련된 육체엔 무수한 상흔이 새겨져 있었는데, 눈에 담고 있자니 괜히 이쪽의 뼈마디도 뻐근해지는 기분이다.

카사진은 자신도 모르게 슬쩍 미소 짓고 말았는데, 그걸 눈치챘는지 남자도 카사진에게 시선을 보냈다.

잠깐 허공에서 시선이 얽혔고, 먼저 고개를 돌린 건 사내였다.

그가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포룸이고 록-녹스의 전사장입니다.”

“루카스입니다.”

“예.”

포룸이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판단하기에 따라 무례하게 비칠 수도 있는 동작이었으나, 행동거지가 묵직한 남자라 그런지 딱히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냥 생긴 대로 행동하는구나 싶었다.

“슬슬 신전을 안내해 드리려는데 괜찮으십니까?”

“음. 아직 일행이 오지 않아서요.”

“일행?”

그리고 곁눈질로 한 명씩 바라보더니 살짝 의아해한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루카스 일행의 총원은 5명이기 때문이다.

루카스가 대표로 말해 줬다.

“사정상 제… 형이 합류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까.”

루카스에게 형제가 있단 사실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으나, 포룸은 딱히 관심도 없는지 삭막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건조한 목소리로 말한 다음 방을 떠났다.

다시 적막함이 내려앉은 방 안, 먼저 입을 연 건 루카스였다.

“세 가지 가능성이 있어.”

“세 가지?”

“하나는 신전을 둘러싼 결계 때문에 이리스의 능력이 제한받고 있는 경우. 신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전이라면 건물의 기본 골조부터 시작해서 자재, 위치에도 숨은 의미가 있을 거야. 별개로선 별 의미도 없는 것들이 맞물려 특별한 결계가 형성되는 거지. 기본적으로 신성한 장소기 때문에 악마가 제대로 힘을 못 쓸 수도 있어.”

“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습니다만, 그럴 확률은 낮아요.”

이리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런 신성한 힘의 개입으로 연결이 끊어졌다면 전조가 있었을 겁니다. 제 쪽에서 먼저 깨닫는 게 가능했을 거예요. 하지만 직접 확인하기 전까지, 저는 악마와의 연결이 끊어졌단 사실도 알지 못했어요.”

“그런 경우는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것이오?”

루시드가 물었다.

“그대가 깨닫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연결이 끊어지는 경우 말이오.”

“…베누(Benu)를 붙였습니다.”

카사진과 루시드가 금시초문이라는 얼굴을 하자, 이리스의 설명이 이어졌다.

“아마칸 사막은 대륙에서 가장 악마가 살기 적합한 장소 중 하나예요. 보통의 경우 악마는 대륙에서 활동하다가도 시간이 되면 그들의 세계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곳은 예외죠.”

척박한 환경, 들끓는 몬스터, 한정적인 자원.

이러한 요소는 지성체가 살기에 적합하지 않지만, 악마들의 보금자리로 채택되기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베누는 아마칸 사막에 오랫동안 머문 악마종족의 이름입니다. 태양과 불꽃의 악마죠.”

“유명한 악마야. 몇몇 부족에선 신으로 떠받들기도 하지.”

슈하이저가 덧붙이자 카사진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악마를 신으로 여긴다고?”

“생긴 게 일반적인 악마와는 거리가 멀어. 모르고 보면 신수神獸로 착각할 만큼. 거기에 악마 같이 음침한 종족과는 거리가 먼 태양을 상징하는 존재니까……. 계약만 제대로 맺으면 해를 끼칠 일도 없고.”

이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누는 상급 악마입니다. 비록 새끼지만, 그들 일족을 레시듀에게 붙여 놨어요. 원래라면 해가 떠 있을 때만 활동할 수 있지만, 사막은 베누의 영역이죠. 밤낮을 가리지 않고 감시하는 게 가능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완전히 사멸한 것 같군요.”

“베누가 사멸하는 건 어떤 경우가 있소?”

“글쎄요……. 베누는 불사조의 갈래이기도 해요. 주변 환경과 진화 과정에서 나뉘었지만, 종족적인 의미로 먼 친척이라고나 할까. 당연하게도 아주 강인한 생명력을 가졌습니다. 특히 아마칸 사막에선 불사조 이상으로 끈질겨요. 강대한 힘으로 일순간에 죽일 수 있다면 저도 깨닫지 못하겠지만… 그런 건 데미갓이나 가능할걸요.”

이리스는 단순히 비유를 위해 데미갓을 언급한 것이었으나, 말해 놓고 아차했다. 주변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실제로 이리스 본인을 포함한 모두가 그자를 데미갓, 혹은 그 끄나풀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었다.

이리스는 살짝 루카스의 안색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그것 외에는, 추위에 좀 약하다는 것 정도?”

“사막의 밤은 제법 춥던데? 그것 때문에 죽은 것 아닌가?”

카사진이 묻자 이리스가 관자놀이를 누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소리 좀 하지 마요. 애초에 아마칸 사막은 베누의 영역이라고 했잖아요. 이 지역의 밤도 못 버티면서 영역으로 삼았겠어요?”

“…음.”

“베누가 얼어 죽을 일은 없어요. 저 대륙 최북단에 있는 설원에라도 가지 않는 이상에야.”

대륙 최북단이란 말에 슈하이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간 목소리가 있었다.

─하늘 너머에 들렀고, 바다의 깊이를 보았다. 가장 높은 산맥 끝에 오른 다음엔 설원을 구경하다가 돌아왔지. 역시 이 몸은 사막이 제일 별로더군.

…아니.

당연히 헛소리지. 저건.

그래도 일단 말하는 게 좋을까?

슈하이저가 고민하는 동안 루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방금 이리스가 말한 게 두 번째 가능성이다. 레시듀가 데미갓이거나, 그 하수인이라면 굳이 우리와 계속 다닐 이유가 없으니.”

“흥. 여기로 끌어들이는 게 놈의 목적이었다는 건가.”

“글쎄……. 레시듀는 신전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어.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오려는 기색도 없었고.”

애초에 신전에 방문해야 한다고 먼저 말을 꺼낸 건 루카스였다.

“마지막 가능성은?”

“이곳이 데미갓의 거처이며, 그 데미갓이 레시듀를 죽였을 가능성.”

“…….”

“우리에겐 가장 좋지 않은 경우지만, 확률은 가장 높군.”

루시드의 말에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고, 카사진은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녀석이었지만, 죽었다니까 기분이 묘하군. 그래. 그런 놈이라도 원수는 갚아 줘야겠지.”

카사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이리스와 슈하이저는 힐끗 루카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직 확정된 건 무엇 하나 없으나 스스로를 루카스의 형이라 자처했던 남자다. 루카스 본인은 그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으나 반대로 완전히 부정하지도 못했다. 그 정도로 닮은 얼굴인데 어쩔 수 없지.

물론 그 성격은 루카스의 정반대편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형제가 아니라는 근거가 될 수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루카스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조금이라도 혈육을 잃었다고 여기고 있을까? 물론 그 정도에 흔들릴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

그러나 시선을 받는 루카스는 의외로 차분했다. 레시듀의 배신, 혹은 죽음이 아무런 감흥도 부르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자에게 아무런 정도 붙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왜인지 모르게 배신당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죽었을 거란 생각도 마찬가지다.

아무런 논리도, 근거도 없지만 무사할 것 같다.

그리 생각하는 건 너무 희망적인가?

시선이 느껴졌다. 나머지 이들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결정을 기다리는 그들의 얼굴에 살짝 한숨이 나올 뻔했다.

그래. 언제가 됐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건 나지.

…의지와 의존을 착각해선 안 된다. 루카스는 미세하게 고개를 털어내며 말했다.

“이곳엔 데미갓이 있고, 신전은 놈의 소굴이다. 우리는 지금 적지에 제 발로 들어온 상태. 그렇게 생각하고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

“음.”

“언제나 그렇듯 놈들과의 싸움에서 대책이랄 건 딱히 없어. 두 가지만 명심하면 돼. 첫째. 무슨 일이 있어도 흩어지지 않는다. 둘째. 승산이 없을 것 같으면 도망친다.”

“텔레포트는 내 스태프에 저장해 뒀어. 신호만 주면 언제든 발동할 수 있지.”

“도주 판단은 네가 내려, 슈하이저.”

“…알겠다.”

카사진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도망치는 건 최후의 수단이겠지?”

“그래. 우리가 도망치면 이 마을 사람들의 목숨은 보장할 수 없으니까. 되도록이면 여기서.”

루카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데미갓을 토벌한다.”

* * *

잠시 후 포룸이 돌아왔다.

무표정한 얼굴에도 설핏 난감한 기색이 스치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일행분은 조금 늦으실 것 같습니다.”

루카스는 무슨 핑계를 댈까 싶어 그 얼굴을 가만히 직시했다.

“용무를 마치시고 돌아오는 길에 ‘테루산’을 만나셨는데, 그분과 얘기가 통하는 듯하여 잠깐 말동무를 하신다고…….”

카사진이 중얼거렸다.

“테루산은 또 뭐야.”

물론 이번에도 슈하이저가 대꾸해줬다.

“녹스탄틴의 교도 중에서 30년 이상 활동하고 명예롭게 은퇴한 자들을 그렇게 불러. 사막에서의 수렵은 매번 목숨을 걸어야 하니, 오래 살아남은 이들은 그 자체만으로 경의를 받을 가치가 있다는 거지. 녹스탄틴이 직접 보살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종교적 관점도 있고.”

그 말에 포룸이 슈하이저를 힐끗 봤다. 외부인인데도 교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슈하이저에게 놀란 듯하다.

슈하이저도 포룸을 보았다.

이 남자는 어느 쪽일까?

데미갓의 하수인일까. 아니면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하고 있는 무지한 전사일까. 그리고 방금 꺼낸 말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벌써 놈들과의 수 싸움은 시작됐다고 봐야 한다. 전투능력이 거의 없는 슈하이저로선 이들의 속셈을 하나라도 더 밝히는 게 돕는 것이었다.

한편 카사진은 포룸이 뻔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대놓고 픽 웃었다. 비웃음을 깨달은 포룸의 표정도 굳었으나, 굳이 그 사실을 물고 늘어지지는 않았다.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그럼 우리가 먼저 안내를 받아도 되겠습니까?”

“예. 따라오십시오.”

포룸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가장 먼저 이끌고 간 곳은 신전 앞쪽에 마련되어 있는 거대한 신상이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에도 보았고, 도시의 조금 높은 층에서도 그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척이나 커다란 건축물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단순 높이로는 신전 다음이지 않을까.

“녹스탄틴 신상입니다. 신전에 머무르는 교도는 해가 뜰 때, 해가 질 때. 두 번 이곳에 모여서 기도를 올리지요.”

녹스탄틴의 상반신은 아름다운 여인이었고, 하반신은 뱀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인반수의 모습은 여신이 아닌 몬스터로 여겨질 수도 있으나, 무척이나 자애로운 표정과 몸짓 덕분에 아름다움을 넘어 거룩하기까지 했다.

포룸의 무뚝뚝한 얼굴에도 존경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딱히 기도할 시간도 아닌데 양손을 공손히 모은 다음 기도를 올렸다.

“…신전을 소개할 때 가장 처음 들르는 곳입니다.”

포룸이 그리 말하며 살짝 고개를 들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한 반응.

자세히 보니 포룸의 근처에 있던 신전의 교도들도 비슷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눈치를 못 이긴 슈하이저가 기도하는 시늉이라도 하려는 걸 루카스가 막았다.

“죄송합니다.”

그리고 포룸을 보며 말했다.

“무신론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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