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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62화 (789/857)

외전 562화

아침이 밝았다.

한밤중에 느껴졌던 추위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거리는 다시 한번 뜨거운 열기로 뒤덮였다.

슈하이저는 1층 테이블에 앉은 채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사르만의 거리를 눈에 담았다. 보는 것만으로 후덥지근해지는 풍경을 보고 있자니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난 천재야.”

“갑자기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 거냐?”

투박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카사진은 물에 흠뻑 젖은 꼴로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가게 바닥에 달팽이처럼 지나온 길에 긴 족적을 남기고 있었는데, 당연히 주인장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첫날에 돈을 넉넉하게 내서 다행이지.

“넌 또 뭘 해서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됐어?”

“냉수마찰.”

카사진이 여관 공터에 있는 우물을 가리키자 슈하이저가 한숨을 내쉬었다.

“사막에서 물이 얼마나 귀한지 설명까지 해야 되나? 더우면 나나 루카스를 부르지 그랬냐.”

“너희 찾는 시간에 물 길으러 가는 게 더 빠르겠다. 그리고 대금은 이미 충분할 만큼 치렀잖아.”

“그렇긴 해도 뭐든 절약하면─.”

카사진은 슈하이저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곧 작은 체구의 종업원이 다가왔다.

“뭐 드시겠어요?”

“전부.”

“네?”

“여기 있는 메뉴 전부 달라고.”

“아, 넵.”

소년이 당황한 얼굴로 물러났고 카사진이 고개를 털었다. 슈하이저는 튀기는 물방울에 인상을 찌푸렸다.

“좀 제대로 털고 오지.”

“어차피 좀 있으면 다 말라. 여기가 좀 더워야지.”

“…말을 말자. 내가.”

“그래서 뭐가 천재란 거냐?”

카사진이 처음 질문을 다시 꺼냈다.

슈하이저는 피곤한 표정을 지우고, 다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만든 마도구를 보니 뿌듯해져서.”

“마도구?”

“이 로브 말이야. 온도보존기능이 달려 있어서 모자까지 쓰면 하나도 안 덥단 말이지. 원래는 설원 지역에서의 탐사를 가정하고 만든 거긴 한데.”

“진짜? 내 거는?”

“머리 괜찮으세요? 네가 필요 없댔잖아. 분명 두 번이나 물었어.”

물론 카사진의 기억엔 없었으나, 슈하이저가 거짓말을 할 성격도 아니니 사실일 거다. 아마 이쪽이 대충 대답하고 잊은 거겠지.

“끄응.”

카사진이 등받이에 살짝 몸을 기댔다.

슈하이저는 그 모습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체격이 체격이다 보니 의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삐걱댔다. 실은 벌써 몇 번 일어났던 일이기도 하고.

의자가 조용한 비명을 지를 때, 슈하이저의 시선이 문득 계단을 향했다.

루시드가 내려오고 있었다.

카사진과 정반대되는 느낌이다 흐트러짐이 거의 없는 모습에 차분한 기도. 같은 초연한 느낌이긴 해도 루카스와는 좀 다르다.

루카스가 어느 산봉우리에서 조용히 일출을 바라보고 있는 느낌이라면, 루시드는 왕성이나 신전 같은 곳을 배경으로 검무를 추는 듯한……. 슈하이저는 고개를 저었다. 이게 뭔 잡생각이야.

1층으로 내려온 루시드가 테이블에 앉았다.

딱히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서로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아침인사를 생략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오래 본 얼굴들이기 때문이다. 이리스의 말을 빌리자면 질긴 악연이랄까.

이윽고 식사가 나올 때쯤 루시드가 입을 뗐다.

“루카스는?”

“글쎄. 녀석이 아침 거르는 거야 특별한 일도 아니니… 일단은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기다려 보자고.”

아직 정오 때까지는 여유가 있어서 루시드도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블 위의 음식이 절반 정도 비워졌을 때 이리스가 내려왔다. 이리스는 음식으로 꽉 찬 테이블을 보고 한숨을 내쉬더니, 별개의 자리에 착석한 다음 가벼운 음식을 시켰다.

이제 다 모였나.

슈하이저는 적절한 시기를 재며 물을 마시다가, 컵을 탁 내려놓고 말했다.

“그 녀석 일어났다.”

“그 녀석?”

“유적에서 주운 남자 말이야. 루카스랑 똑 닮게 생긴.”

“그렇군. 뭐라더냐?”

“몰라. 난 얘기도 못 해봤어. 아─ 어젯밤에 잠시 마주치긴 했는데, 여러 모로 별종 같아 보이긴 하더라. 무례하고 싸가지 없는 게 카사진을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카사진은 그 말에도 딱히 흥미가 없어 보였다. 모든 걸 두 눈으로 보고 판단하는 타입이기 때문이다.

“일단 당분간 같이 다니게 됐으니까 그리들 알고 있어.”

대수롭지 않게 말한 건 자연스럽게 넘어 가기 위해서였지만, 예상대로 그런 꼼수가 통하지는 않았다.

여태껏 가만히 있던 루시드의 표정이 바뀐 것이다.

“지금 같이 다닌다고 했소?”

“그래.”

“혹시 그자의 신원을 확실히 알게 됐소?”

“아니.”

“그럼 어제 본인이 명상에 빠져 있을 동안 어떤 일이 있었고, 그 사건을 통해 서로 신뢰감이 피어나기라도 했소?”

“설마.”

“그럼 신원도 불분명하고, 목적도 모르고, 최소한의 신뢰조차 형성되지 않은 자와 동행한다는 거군.”

“그렇게 됐어.”

루시드의 표정이 굳어졌다.

“슈하이저, 이것은 그리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오. 우리가 앞으로 향할 곳은 가시밭길. 예상치 못한 위험과 고난, 시련이 가득한 장소요. 그런 곳에 믿지 못할 자를 동행시키는 행위는, 미지수의 강함을 가진 적 이상으로 위험하오.”

“어느 정도는 동감한다. 그런데 번지수 잘못 짚었어. 불만이 있다면─.”

“나한테 해, 루시드.”

위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단에서 루카스가 내려오고 있었다.

“루카스, 그대가 결정한 일이오?”

“그래.”

“그자가 말한 형제란 말을 믿게 됐소? 아니면 뭔가 짚이는 게 생긴 것이오.”

“둘 다 아냐. 하지만 수상하다면 오히려 곁에 두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잠깐 침묵하던 루시드가 중얼거렸다.

“…그렇군. 그대가 직접 내린 결정이라면 불만 없소.”

루시드는 조금 시무룩해진 기색이었으나, 저 말 자체는 진실일 것이다. 애초에 비꼬는 것조차 못할 만큼 바른 사나이였으니까.

그래도 분위기가 묘하게 무거워진 건 어쩔 수 없어서, 슈하이저가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넌 또 밤새운 거 아니지?”

“눈 좀 붙였어. 그것보다 레시듀는?”

“못 봤는데. 자고 있는 거 아니야?”

“방에도 없던데.”

“…설마 도망친 건?”

루카스의 시선이 이리스에게 향했다.

일단 동행할 동안 그 남자에 대한 감시는 이리스에게 맡겼기 때문이다. 이리스는 식기를 내려놓은 채 곧게 뻗은 손가락으로 1층 입구를 가리켰다.

그와 동시에 문이 부서질 정도로 거칠게 열렸다.

“제기랄. 그놈의 문 좀 살살 열면 안 되겠소?”

주인장이 인상을 찌푸린 채 힐난하자, 레시듀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참고하지.”

“…….”

그 모습에 카사진과 루시드의 표정은 동시에 묘해졌다.

루카스와 똑 닮은 얼굴로 저런 태도를 보이는 데에 뭔가 위화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뭔가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한 심정이랄까.

그사이 시선이 자신에게 모인 걸 느낀 레시듀가 그들을 슥 둘러보며 말했다.

“왜. 뭘 봐?”

“어디 갔다 온 거지?”

“아침산책.”

짧게 대꾸한 레시듀가 카운터로 간 다음 친한 척 주인장에게 말했다.

“마실 것 좀 줘라.”

“술이면 되겠소?”

“좋지. 근데 어제 거랑은 다른 녀석이면 좋겠군.”

그리고 주인장에게서 받은 와인의 코르크를 따며 병째 입에 퍼부었다.

“계산은 저 친구가 할 거야.”

레시듀가 그리 말하며 루카스를 가리켰다.

그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던 카사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하이저, 너도 잠이 덜 깼나 본데.”

“뭔 소리야?”

“저런 새끼와 나를 같이 취급하다니.”

카사진이 주먹을 쥐며 레시듀에게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보고 슈하이저가 말했다.

“멈춰. 여관이다.”

“알아. 배상하면 될 거 아니야.”

“네 돈도 아니잖아.”

“벌어 오마. 그러니까 참견 마라.”

가게 분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구석에서 아침식사를 하던 손님들도 슬금슬금 눈치를 볼 만큼 노골적이었는데, 막상 그 표적이 된 레시듀는 여전히 와인병을 든 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슈하이저가 한숨을 내쉬며 누군가를 보았다. 머리에 열이 오른 카사진을 막을 수 있는 건 한 명밖에 없었다.

“카사진.”

루카스가 부르자 카사진이 걸음을 멈췄다.

“할 거면 나중에 해라. 오늘은 신전에 가기로 했잖아. 최대한 힘은 아껴 둬야지.”

“이 녀석이 내 컨디션에 영향을 끼칠 만큼 강할까 봐? 마법을 배운 것도 아니고, 무술을 단련한 몸뚱이도 아닌데?”

“세상에 존재하는 힘이 마법과 무술, 두 개만은 아니잖아.”

“…….”

“나중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까 그때 해결 봐. 오늘은 아니야.”

카사진이 레시듀를 보더니 코웃음을 쳤다.

“운이 좋군.”

“그러게. 막 고른 술치고는 제법 맛있구나.”

카사진은 곱지 않은 눈으로 레시듀를 노려보더니, 휙 뒤를 돌며 말했다.

“…신전에 입장하는 건 정오라고 했나? 그때까지는 가겠다.”

그리고는 특유의 거친 걸음걸이로 여관을 떠났다.

슈하이저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성질 하고는. 그리고… 거기 레시듀라고 했나?”

“그게 이 몸의 이름이지.”

“잠깐 이리 와 봐.”

“할 말이 있다면 네놈이 와라.”

“…….”

저걸 확.

슈하이저는 불만을 꾹 눌러 참으면서도 레시듀가 있는 카운터로 갔다.

가까이 다가가자 레시듀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네놈은 여자인가?”

“풉!”

물을 마시던 이리스가 뿜어대며, 사레가 들린 듯 콜록거렸다.

슈하이저는 살면서 이런 재미없는 오해를 단 한 번도 받은 적 없었기 때문에 멍청한 표정이 됐다.

내가 지금 뭔 소리를 들은 거지?

“뭐, 뭔 말이야. 내가 여자로 보여?”

“그럴 리 있겠냐? 거울이나 보도록.”

“…….”

“확실히 네놈이 제일 다르긴 하구나.”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고는 병을 들이켰다.

과연 대화하기 수월한 상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난다면 이 녀석의 정체는 더욱 수수께끼에 싸이겠지. 슈하이저는 모종의 사명감을 느끼며, 입가에 억지로 미소를 만들었다.

“그, 그래. 루카스의 형이라고 했지? 확실히 아주 개성 있으시네. 이참에 나도 레시듀 형님이라고 불러 버릴까?”

“미친놈. 누가 네 형이냐.”

“…….”

참자.

“…그, 럼 레시듀 씨라 부르지 뭐.”

슈하이저가 억지로 웃는 낯을 하며 말했다.

“아침산책하고 왔다면서? 뭐 보고 왔는데? 제법 큰 도시여도 밤에 열리는 야시장이나 신전 말고는 볼 게 없는데. 게다가 신전은 지금 출입이 제한되어 있고.”

“듣기만 한 곳이라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우선 이 대륙의 크기나 특색을 실감하고 싶었지. 하늘 너머에 들렀고, 바다의 깊이를 보았다. 가장 높은 산맥 끝에 오른 다음엔 설원을 구경하다가 돌아왔지. 역시 이 몸은 사막이 제일 별로더군.”

“…….”

젠장.

진짜 미친놈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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