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55화
데미갓.
반신半神, 신의 혼혈, 혹은 신의 자식…….
여러 뜻을 가진 단어였지만, 루카스의 입에서 이 단어가 나왔다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백하다.
“뭐?”
반사적으로 반문이 나왔다. 물론 잘못 들어서는 아니었지만, 루카스는 특유의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데미갓이라고 말했다. 놈들은 스스로를 반신이라 자칭하고 있지만, 단순히 그렇게 생각할 존재는 아니야. 그들은 신과 다름없는 힘을 갖고 있다. 홀로 전쟁을 일으키고, 끝낼 수 있는 괴물들……. 영웅이라 칭송받는 자들이 힘을 합쳐도 그들을 상대론 승리를 장담할 수 없어. 그들은─.”
어느 순간부터 레시듀는 루카스의 차분한 설명을 대부분 흘려들었다.
데미갓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루카스 이상으로─ 한때 놈들의 권능을 주력으로 삼기 위해 수련… 까지는 아니고, 나름대로 고민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건, 하필 이 시점에서 놈들의 이름이 나왔다는 것인데.
“…….”
아니, 잠깐만.
‘설마 이건…….’
루카스의 얼굴을 보았다.
앳된 얼굴. 감정 표현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낯짝. 도무지 산전수전 다 겪은 녀석에겐 어울리지 않는… 청년의 얼굴.
이리스의 얼굴을 떠올린다.
마찬가지로 속내를 숨기는 게 능숙하지 않았던 모습. 레시듀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라서, 쓰고 있던 가면마저 벗어던질 만큼 얇았던 가면.
“…허어.”
그리고 멍청한 목소리를 한번 더 흘린 다음, 이번엔 하늘을 올려다봤다.
설마하니, 지금 이곳은…….
* * *
질의응답은 제법 오래 이어졌다. 아마도 30분은 훌쩍 넘겼을 것이다.
레시듀는 이 세상의 정세, 문화, 지리에 대해 물었고 그것들을 천천히 머릿속에서 조합했다. 그럴수록 불확실하던 모종의 무언가가 점차 확연하게 형상을 갖춰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엔 부정했고, 뒤엔 반신반의하다가, 이야기가 끝나갈 때쯤엔 떨떠름한 결론을 얻었다.
이곳은, 과거다.
그러나 레시듀의 과거는 아니었다.
이곳은 루카스 트로우맨의 고향 우주였고, 그 시점은 놈이 절대자가 되기 전─ 그러니까 우주를 떠나기 약 4,000년 전의 시점이다.
물론 시간대는 이 우주를 기준으로 삼아서.
‘어째서?’
‘바깥’으로 나갔을 터인 레시듀가 왜 이 우주의 과거로 온 거지?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사실 이곳이 ‘바깥’일지도 모른단 것이었다. 지금 보이는 것들 전부가 멸망의 연출일 수도 있다. 이만한 수고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바꿔 말하면 그런 이유가 갖춰진다면 세계 하나를 만드는 것쯤은 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니. 확실히 가능할 것이다. ‘멸망’이라 불리는 것들이 창조를 한다는 게 이상하긴 하지만, 아무튼.
…하나 이 추측이 사실이 되려면 반드시 밝혀야 될 것이 있다.
이딴 촌극을 벌이는 목적이다.
멸망의, 루카스의 목적은 레시듀를 죽이는 것일 텐데.
녀석은 일전에 이미 발언했다. 레시듀를 최대의 적으로 여기고 있다고.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진 채 전쟁을 벌일 것이라고.
“내가 할 말은 여기까진데…….”
그사이 눈앞의 루카스가 다시 말했다.
“표정을 보니 여전히 떠오르는 건 없나 보군.”
“…….”
레시듀는 다시 녀석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 루카스는 뭘까?
‘멸망’이 연기하고 있는 것일까? 스스로가 거짓된 존재라는 인식은 있을까? 진짜 루카스, 레시듀가 알던 녀석은 이 사실을 알고 있을까. 어디부터 어디까지 놈의 의도이며, 녀석이 바라는 것은 또 뭐지?
동시에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생각이 뻗쳤다.
…만약 이곳이 멸망이 준비한 무대가 아닌 정말로 과거라면.
이 몸은 지금 과거의 루카스 트로우맨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인가?
“…….”
그 사실이 주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는 않아서, 한순간 레시듀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괜찮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눈치챈 걸까. 루카스가 그리 물었다.
딱히 괜찮지는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래. 괜찮다.”
“…그러고 보니 가장 중요한 걸 말하지 않았군.”
“뭐냐?”
“통성명 말이다. 물론 너는 날 알고 있는 것 같은 눈치였지만…….”
루카스는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였지만, 다시 입을 닫았다.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말을 삼킨 듯한 모양새였다.
그리고 아마도 생각했던 것과 다른 말을 입에 담기 시작한다.
“나는 루카스. 마법사다. 지금은 동료들과 함께 대륙을 떠돌며 한 가지 목적에 집중하고 있어. 아까 말한 데미갓이란 존재의 정체, 목적을 확실히 밝히고 그들이 명백한 악의를 갖고 세상을 조롱하고 있다면 그것을 저지할 생각이다.”
“정의롭군.”
레시듀가 중얼거리자 루카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지도 않아.”
“…….”
“너는 어떻지?”
“뭐가 말이냐.”
“시치미는 그만 떼고. 내가 할 말은 모두 다 했다. 네 질문에도 최대한 성실히 대답해 줬지. 이 정도면 이름 정도는 말해 주는 게 예의 아니겠나.”
“아까부터 계속 예의를 들먹이는군.”
어울리지 않게. 그런 뒷말은 삼켰다.
애초에 레시듀가 알던 루카스도 그리 예의 바른 성격은 아니었지만, 글쎄. 또 모르지. 이 시절의 녀석은 또 다를지도.
“레시듀.”
“레시듀(Residue)… 그것은 가명인가?”
“진명이다. 뭐, 이 몸이 직접 짓긴 했지만.”
“직접 지었다고? 어째서?”
“그럴 만한 상황이 있었다. 재미없고 따분한 얘기지. 짧게 말하자면 내가 누군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 하고 싶은 게 정확히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직접 결정해야 될 순간이 있었다. 이름은 그때 얻은 부산물이고.”
“…….”
루카스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레시듀는 뭔가 입안이 텁텁해졌다. 지금의 이 녀석이 이해할 만한 발언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너. 진짜로 묻고 싶은 건 이 몸의 이름 같은 게 아닐 텐데?”
“무슨 뜻이지?”
“가장 궁금한 건 따로 있지 않나.”
레시듀는 자신의 얼굴을 잠깐 더듬으며 말했다.
“너와 나. 이만큼이나 비슷한 낯짝을 하고 있다. 아마 날 보고 가장 놀랐던 것도 그 부분일 텐데, 그 점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는군.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고 있는 거냐?”
“…음.”
이 루카스 입장에선 수수께끼겠지. 그러나 진실은 그리 거창할 것도 없다.
닮은 이유는, 애초에 같은 몸뚱이어서다.
물론 지금 두 사람의 인상은 완전한 동일인물이라 보기엔 힘들다. 본래 사람의 인상이란 단순 이목구비만이 아니라 자주 짓는 표정, 그로 인해 형성된 얼굴 주름, 사소한 몸짓, 습관에서 나온다. 그것들 모두가 자연스레 어울러져 전체적인 겉모습을 만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루카스는 항상 무표정했다. 자세는 올곧았고, 눈빛은 침체되어 있었다. 긴 머리카락은 성격을 대변하듯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반면 레시듀의 입가엔 거의 빈정대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껄렁한 자세를 자주 취하다 보니 어딘가 삐딱한 느낌이 나왔고, 머리카락은 정리를 하지 않아 사납게 흩어진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둘이 나란히 선다고 해도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 지경까지는 왔다. 그들이 쌓아온 세월만큼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무관계한 인물로는 생각할 수 없겠지. 당장 레시듀가 표정을 바꿔, 저 느끼한 인상을 흉내 낸다면 백이면 백, 죄다 루카스로 착각할 것이다.
그걸 이 녀석이 모를 리도 없다.
‘그런데도 이놈은 입 꾹 닫고 있었단 말이지.’
가만히 시선만으로 압박을 보냈으나 루카스는 쉽게 대꾸하기 어려운 얼굴이 됐다. 할 말을 찾지 못하는 꼴은 아니었고, 이걸 직접 입에 담아도 될지 망설이는 느낌인데.
이윽고 루카스가 말했다.
“그래. 처음부터 그 사실이 걸렸지. 하지만 그런 나를 납득시킨 것도 너였다.”
“이 몸이 뭐 더 말했나?”
“형이라고.”
레시듀가 멈칫했다.
“형이라고, 너는 그렇게 말했다.”
“…….”
루카스 트로우맨의 출신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출생 자체는 그럭저럭 부유한 가문이었으나, 집안 사정인지 뭔지로 보육원에 버려졌지. 보육원의 원장, 그곳에 도사리고 있던 어둠, 속 개운치 않은 반전, 그 과정에서 죽어나간, 루카스의 가족들…….
…녀석은 그러한 과거를 허의 세계의 폐기장에서 다시 경험했다. 빛바랜 기억이 다시 뚜렷해진 순간이다. 당연히 레시듀도 그 과거에 관해선 비교적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었고.
‘이곳이 정말로 과거라면…….’
지금의 루카스.
청년 루카스는 보육원 시절의 기억을 스스로 지웠겠지.
그걸 일깨워 주는 건 쉽지만, 별로 재밌는 일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내게 형제자매가 존재할 거란 생각은 한 적이 없어. 하지만 네 얼굴을 보니 믿을 수밖에 없더군. 묘한 익숙함과 거북함을 동시에 느꼈다.”
“…….”
그래서 이놈은 이 몸을 형으로 여기고 있단 말인가.
레시듀는 이 상황을 마냥 흥미롭게 느낄 수 없었다.
루카스에겐 형이라 불릴 만한 존재가 실제로 있었기 때문이다.
마크 트로우맨.
혈연적으로 그랬고, 허의 세계에선 극적인 재회까지 마쳤지. 그러고 보니 그 녀석 또한 멸망이 됐다. 마찬가지로 멸망이 된 루카스와 재회했을까?
반쯤 직감이지만, 그러진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루카스의 경우가 특수할 뿐이고, 웬만한 존재라면 ‘바깥’에서 이성을 유지하지 못할 테니까…….
…그럼 역시, 이곳이 ‘바깥’이 아닐 수도 있지 않을까? 어찌 됐든 레시듀는 이성을 유지하고 있으니까.
아니. 이미 미쳐서 헛것을 보고 있을 가능성도 있나?
“큭큭…….”
문득 든 생각은 생각보다 가능성이 높은 일이라 헛웃음이 나왔다.
좀 더 생각해 보니 여기가 ‘바깥’이 아니라면 레시듀에게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젠 정말 낭비할 시간이 없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차차 알아봐야겠지만, 사실 이 모든 게 멸망이 연출한 무대인 편이 낫겠는데.
레시듀는 그렇게 생각하다가 불쑥 중얼거렸다.
“썩을.”
“뭐라고?”
“갑자기 왜 이렇게 생각이 많아졌을까.”
미묘해진 루카스를 보며 말했다.
“이 몸답지 않게 말이야. 네놈 때문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군.”
“언제나 그렇듯 헛소리다. 대충 흘려들어라.”
생각이 많아지면 몸이 굼떠진다.
반대로 생각이 없다면 몸뚱이는 비교적 가벼워지고.
레시듀는 어느 시점부터 후자의 방식으로 삶을 대했는데, 이상하게도 이 기괴한 곳에 떨어진 이후부턴 생각이 부쩍 많아진 느낌이 들었다.
누락된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상황파악을 아직 덜했기 때문에?
…생각을 단순하게 하려면, 상황 또한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려면 억지로라도 확정 지을 요소가 필요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불명확하다고 여기면 추론에 끝이 없어지니까.
첫째로. 이곳이 ‘바깥’인지 혹은 다른 곳인지. 이 점에 관해선 모르는 걸로 친다. 멸망이 와서 직접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 이상 알 도리가 없으니.
그리고 두 번째. 상황을 바꿀 만한 정보가 들어올 때까진 머리 굴리는 건 그만둔다. 이것은 계획을 세우지 않겠다는 말과도 동일했는데, 모호하게나마 ‘누락된 기억’을 찾는 것만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어쩐지 뒤죽박죽 상황을 정리할 수 있는 실마리는 그곳에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다.
상황 정리 끝.
“됐다. 그럼 갈까.”
“가다니. 어디로?”
“뭐 좀 먹으러. 배가 아직 한참 덜 찼다. 돈이 없으니 신세 좀 지마.”
“…….”
그러고 보니 통합세계 쪽은 어떻게 됐을까?
레시듀의 말만 믿고 기다리고 있을 녀석들, 갑자기 군림자와 4기사가 사라져서 당황한 자들. 그들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세디나 루카의 얼굴도 잠시 떠올랐다.
최종적으로 그려진 건 반왕이었는데, 이상하게 그 녀석을 떠올린 순간 살짝 고개를 내밀던 걱정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뭐 알아서 하겠지.
애초에 저쪽을 걱정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도 아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