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54화
순간 거리의 불빛이 좀 더 강해졌고, 강렬한 역광으로 루카스의 얼굴엔 짙은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그 낯짝을 좀 더 찬찬히 뜯어보려던 찰나 벌어진 일이었다.
덕분에 이 녀석이 진짜인지 가짜인지에 대한 판단은 잠시 보류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걸치고 있는 것도 예전에 자주 입었던 갈색 로브와 흡사했다.
이놈은 옷이 저것밖에 없는 건가?
잠깐 그런 멍청한 생각을 하는 동안, 루카스가 갑자기 사라졌다. 텔레포트 같은 걸 쓴 게 아니라, 몸을 빙글 돌리더니 거리의 인파 사이로 섞여 들어간 것이다.
“…….”
레시듀는 다소 멍한 얼굴로 놈이 사라진 거리를 눈에 담았다.
붙잡았어야 했나? 아니면 아는 척이라도 할 걸 그랬나.
잘 모르겠다. 이제라도 뒤쫓아 갈까 생각한 순간, 루카스가 다시 나타났다. 사라지기 전과 차이점이 있었는데, 양손에 먹을 걸 들고 있다는 게 그랬다.
꼬챙이에 고기와 야채를 교차적으로 끼운 다음 구운 음식이었다.
단순히 말하면 고기야채꼬치.
방금 사온 건지 표면엔 기름기가 좔좔 흘렀고 먹음직스런 냄새가 풍겨왔다.
“…뭐냐?”
“먹을 걸 사왔다. 나흘을 내리 기절해 있었으니 공복이 크겠지.”
“나흘……. 그렇게 오래?
설마, 라고 덧붙이려고 했는데 확실히 배가 좀 허하긴 했다.
레시듀는 불쑥 손을 내밀었고, 그 손엔 고기야채꼬치가 쥐어졌다. 입을 크게 벌린 다음, 그걸 한입에 다 넣고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루카스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도 먹는군.”
“배고팠으니까.”
“맛있나?”
“아니. 겉보기엔 먹음직스러웠는데 그렇게 별미인 것 같지는 않군. 맛이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레시듀는 꼬챙이에 묻은 기름을 핥으며 말을 이었다.
“애초에 고기와 야채를 한 번에 구운 것이라 그렇다. 둘 모두 가장 맛있게 구워지는 시간이 다른데, 왜 한꺼번에 익혔는지 모르겠군. 이런 경우 고기가 잘 익으면 야채가 조금 탄다든가, 야채가 먹을 만하면 고기가 조금 덜 익게 된다. 뭐, 따로 굽는 것보다 훨씬 편하고 이렇게 교차해서 끼우면 겉보기에도 그럴싸해지는 장점이 있지만.”
“…….”
루카스는 잠깐 말문을 잃고 레시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얻어먹은 주제에 잘도 뻔뻔스레 말하는데.”
“감상을 물은 건 네놈이잖나?”
“이럴 땐 예의상 그냥 맛있다고 해주는 거다.”
“이 몸에게 예의를 바라지 마. 그걸 아직 모르나?”
“…….”
그러자 루카스가 가라앉은 시선을 보내더니,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시시콜콜한 음식 얘기는 이쯤 하고. 배도 채웠으니 이제 내 말에 대답해 다오.”
“네가 뭘 물었더라.”
“몸은 좀 괜찮으냐고.”
“몸이라…….”
레시듀가 다시 한번 몸 상태를 점검했다.
“좋지 않아. 최악이다. 전신이 납덩이처럼 무겁고, 머릿속은 먹구름이라도 낀 것처럼 뿌옇다. 솔직히 지금도 반쯤 꿈결을 헤매고 있는 느낌이야.”
“잠을 별로 못 잔 건 아닌가?”
“이 몸이 사흘간 잤다고 말한 건 네놈 아닌가?”
“네 기준으로는 적게 잔 걸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이 몸의 수면시간은 길지 않아.”
사실 몸뚱이를 얻은 이래로는 좀 오래 자는 걸 즐기게 됐지만, 그 사실은 감추기로 했다.
루카스는 애매모호한 얼굴로 레시듀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아무튼 이렇게 움직일 정도로 호전됐으니 이제 말해 주겠나.”
“뭘?”
“네가 누군지. 그리고 놈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뒤에 덧붙인 말이 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시듀는 잠깐 침묵하다가 물었다.
“…너, 지금 이 몸이 누군지에 대해 물은 거냐?”
“그렇다. 등장한 순간부터 계속 궁금했지. 넌 누구냐. 왜 우리를 도와준 거지? 놈들에 대해선 어디까지 알고 있나. 너는…….”
루카스가 말했다.
“…믿어도 되는 남자인가?”
“…….”
음.
이 루카스도 이리스와 마찬가지로, 레시듀가 알던 루카스가 아닌 건가?
거의 그런 것 같다. 레시듀는 그 사실에 괜히 허무해져서 루카스의 등 너머를 바라보았다. 불빛이 아련하게 펼쳐져 있는 거리, 사람이 바쁘게 오가는 그곳이 왜인지 멀고 아련하게 느껴졌다.
딱히 의미도 없이 꼬챙이를 씹어댈 동안, 루카스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레시듀는 혀에 걸린 나무 부스러기를 뱉으며 말했다.
“모른다.”
“뭐?”
“기억이 나지 않아. 전부는 아니지만, 네놈과 대화를 나눴던 기억은 없어. 내게 있어선 지금이… 초면이란 뜻이지.”
“…정말인가? 그 유적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다 잊었다고?”
지끈-.
갑자기 두통이 느껴졌다.
이야기라.
그래. 뭔가 얘기를 나눈 것 같은 느낌은 있다.
아니, 확실히 루카스와 모종의 대화를 나눴다.
하지만 그 장소는 이 녀석이 말한 것처럼 ‘폐허’였나? 그건 아닌 것 같은데. 황량한 느낌은 맞았지만, 폐허와 같이 칙칙한 곳은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뿌옇고, 흐린 장소였는데……. 이것이 레시듀의 기억이 희미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실제로 얘기를 나눴던 곳이 뿌옇기 때문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다.
여러모로 뒤죽박죽이다.
“…정말로 기억에 혼란을 겪고 있는 것 같군. 돌이켜 보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도 멀쩡해 보이지는 않았지.”
루카스의 중얼거림이 귓전에 꽂혔다.
레시듀는 다 먹고 남은 꼬챙이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말했다.
“네놈 말대로다. 제대로 떠오르는 게 없고, 생각날 것 같지도 않으니 설명은 네가 해줘야겠어. 말해라. 우리가 만나서 어떤 대화를 나눴나? 이 몸의 기억엔 없는 ‘나’는 무슨 소리를 지껄였지? 그리고… 여기는 어디냐?”
“기억을 잃은 걸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거만한 태도군.”
루카스는 어처구니없는 목소리로 이리스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딱히 대꾸할 말도 없어 침묵하자, 목소리가 이어졌다.
“별수 없나……. 그래. 여기가 어디인지 물었나? ‘사라만’이다. 아마칸 사막지대 초입부에 위치한 마을 중 하나고, 지금은 축제 기간이지. 지금부터 한 달간 달빛이 가장 밝을 때인데, 이 시기엔 사막신을 기리기 위해 마을 전체에 야시장이 열린다.”
“…….”
마을 이름이나 지리적 위치를 물은 게 아닌데.
레시듀가 물었다.
“대륙은 무슨 대륙을 말하는 거냐? 여긴 ‘바깥’이 아닌 거냐?”
“바깥이잖아. 오히려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군. 아직 머리가 어지럽나?”
이쯤 되면 비교적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는 레시듀라도 낌새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최종 확인을 위해 한번 말해 봤다.
“멸망.”
“……?”
루카스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무시하고, 레시듀는 말을 잇는다.
“‘바깥’, ‘전 우주의 추방자’, ‘허의 세계’, ‘비기닝 위저드’, ‘십이허주’……. 젠장. 그만 됐다.”
갈수록 아리송해지는 루카스의 얼굴을 보니 이젠 납득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 있는 루카스도, 방금 전에 만난 이리스도…….
레시듀가 알고 있던 녀석들이 아니다. 생김새도 사소하게 다르고, 성격에도 조금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가진바 지식의 차이가 컸다.
그가 알던 둘이라면 당연하게 알고 있던 것들을, 지금 이 녀석들은 전혀 알지 못한다.
“계속 말해 보도록.”
미친놈 바라보듯 시선을 보낸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마을의 서남쪽에 오래된 유적이 있다. 관점에 따라 폐허로도 볼 수 있는 장소인데, 그곳에 믿을 수 없는 풍경이 펼쳐져 있더군.”
“무슨 풍경.”
“유적 전체가 물에 잠겨 있었다.”
루카스가 팔짱을 낀 채 말을 이었다.
“아마칸 사막에도 물론 비는 내린다. 하지만 강수량이 많다곤 볼 수 없어. 유적 하나를 전부 잠기게 할 만큼의 빗물? 사흘밤낮 동안 폭우가 쏟아져도 절대 불가능하지. 무엇보다 그 정도의 기상이변이 일어났다면 이곳 ‘사르만’에서도 관측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마을에 있는 자들에게 물어봐도 그런 징조는 느끼지 못했다더군.”
“…….”
“둘 중 하나지. 하늘이 미쳤거나… 혹은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기적을 일으켰거나.”
레시듀는 시큰둥하게 루카스를 보았다.
태도는 그랬지만, 이 녀석이 하는 말을 아예 전부 흘리고 있는 건 아니었다.
“폐허를 둘러보는데, 물속에서 괴물이 나왔다. 우리가 찾던 존재는 아니었지만 상당히 막강했어. 무엇보다 수가 너무 많았다. 쓰러뜨려도, 쓰러뜨려도 계속 기어 나오더군. 정신력으로나, 체력적으로나 한계에 달했을 때 갑자기 번개가 쳤다.”
“번개?”
“그래. 먹구름조차 없던 밤하늘을 절반으로 쪼개듯, 낙뢰 한 줄기가 지상으로 꽂히더군. 그 낙뢰는 실명할 정도로 밝았고, 고막이 찢어질 만큼 우렁찼다. 수면 밑에 숨어서 우리를 괴롭혔던 괴물들은 그 낙뢰에 꿰뚫리더니 그을린 문어 꼴이 되더군.”
“…음. 그 낙뢰가 이 몸이었나?”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사람이 번개가 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너는 그 번개와 같이 떨어진 것뿐이다.”
“…….”
“등장 직후. 정신이 어딘가 빠진 것처럼 멍청한 얼굴이었는데, 널 보는 순간 우리 모두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지.”
레시듀가 살짝 스스로의 얼굴을 더듬었다.
“이 몸이 네놈과 닮은꼴이었기 때문에?”
“그래.”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엔 너 또한 그들의 수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렇다면 괴물을 죽인 이유가 설명되지 않지만, 무작정 믿을 수는 없었지. 등장부터 생김새까지, 전체적으로 너는 너무 수상했어.”
그야 자신과 똑 닮은 남자가 번개와 함께 나타나면 의심부터 하겠지.
레시듀는 루카스의 반응이 타당하다 생각해서 고개를 계속 끄덕였다.
“…여기까지 들었는데도 기억나는 게 없나?”
“그래.”
솔직히 얘기를 들으면 뭔가 떠오를까 싶었는데, 그럴 기미조차 없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너는 홀딱 젖은 생쥐 꼴을 하고 있었는데, 그 추레한 모습으로도 잘도 거들먹대며 얘기하더군.”
“뭐라고.”
“‘너를 지켜보겠다’고.”
“…….”
레시듀는 혹시나 싶어서 물었다.
“‘너’라는 건?”
“정확히 지칭하지는 않았지만, 그때 네 시선은 나를 향하고 있었다. 아무튼 넌 그 말만을 남긴 채 이상한 헛소리를 혼자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기절했다.”
…애매한데.
이 몸이 그런 말을 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당장 떠오르는 가능성은 셋 정도.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었거나,
의식하고 내뱉었지만 어떠한 사유로 잊었거나,
혹은 어떤 다른 존재가 이 몸을 지배하고 있었을 수도.
‘…태양거인?’
아니.
지금 녀석에게 이 몸을 통제할 만큼의 힘은 남아 있지 않을 텐데. 시험 삼아 속으로 몇 번 둘러봐도 대답이 없고.
레시듀는 다시 루카스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 하더냐?”
“음?”
“이 몸이 헛소리를 지껄였다며. 정확히 어떤 헛소리였지?”
어쩌면 그것에 단서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러자 루카스가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글쎄… 워낙 웅얼대는 목소리여서 자세히 듣지 못했어.”
“단편적으로도 좋으니 뭐든 말해라.”
“음…….”
잠깐 고민하던 루카스가 단어의 파편을 내뱉었다.
“…‘변화’, ‘교환’, ‘승부’, ‘내기’, ‘조건’, ‘하고 싶은 것’, ‘해야 되는 것’, ‘죽을 순간’…….”
무슨 수수께끼도 아니고.
레시듀의 눈가의 주름이 깊어졌다.
“아. 그리고 노래도 불렀다.”
“노래?”
“그래. 이건 가사도, 가락도 단순해서 확실히 기억이 나.”
루카스가 잠깐 망설이더니, 목을 풀며 말했다.
“천둥이 치는 날… 닻을 올려라… 전사의 항로… 용기의 여정…….”
레시듀가 그 노래를 이어받았다.
“…태풍과 해일은 나를 보아라. 갑판이 무너지고 돛대가 부러져도 전사의 항해는 멈추지 않으리…….”
“…기억이 떠올랐나?”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이것은 왕성의 지붕에서 레티프에게서 들었던 뱃노래. 이걸 흥얼거린 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레시듀는 눈살을 찌푸리며 루카스를 보았다.
생각에 앞서 먼저 말해야 될 말이 있었다.
“음치 놈.”
“…….”
“마지막 질문이다. 네가 아까부터 말했던 ‘그들’이 누구냐?”
오래된 폐허를 수면에 잠기게 만들고.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쏟아지는 괴물을 만들 수 있는 존재.
레시듀는 ‘멸망’을 떠올리며 그리 물어봤고, 루카스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우리의 주적이다. 아직까지 그것들의 진면목을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놈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는지는 알아.”
약간의 간격을 두고,
루카스는 수많은 감정을 응축한 단어를 내뱉었다.
“데미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