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52화
아골렛의 선택을 존중해 주겠다고 말했다. 그 발언에 악의나 비꼼은 없어서, 레시듀는 비교적 투명한 시야로 상황을 살펴볼 수 있었다.
4기사 둘에 군림자 둘. 일대일로 싸워도 만만찮은 녀석들이 넷이나 있다. 물론 이놈들이 협공을 펼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지만, 서로 간격만 잘 확보한 채로 공격을 쏟아부어도 레시듀는 위기에 처할 것이다. 상대의 어설픈 협공을 역이용하려면 최소 반왕 정도의 역량은 갖춰야 했는데, 지금의 레시듀에겐 까마득한 경지다.
…아니. 싸우는 것부터 가정하는 건 오판일지도 모르지.
레시듀는 지금 완전히 포위당한 꼴이었는데 이들은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싸울 의지가 전혀 없어 보이기도 했다. 그 이유부터 생각해야 한다.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있나?
글쎄. 과도한 신중함은 지레 겁먹은 것과 다를 바 없다. 적어도 지금 주변을 에워싼 녀석들은 비슷한 견해를 갖고 있을 테니 이건 틀린 가정이다.
…가만 있자.
─우리 얘기 좀 해요, 레시듀.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처음부터 목적을 밝혔었던가?
레시듀는 청기사를 보며 말했다.
“얘기, 좋지. 청기사. 한번 진득하게 대화해 보자고. 그런데 너는 대화 방식에 교정이 좀 필요한 듯하군.”
“무슨 말이죠?”
“‘최근 생각이 많아졌다’, ‘이 몸의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것에 동조한 게 나만은 아니다’, ‘협상가가 내게도 나타났다’… 이게 이 동굴에서 네가 일방적으로 지껄인 말인데, 저 마구잡이로 지껄인 말에 무슨 관련성이 있나? 그때그때 생각나는 대로 떠들고 있을 뿐이지.”
“흠.”
“이러면 대화가 성립되지 않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분명히 정해 둬라. 우선은 이 몸을 여기까지 끌어들인 이유가 뭐냐?”
페일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네가 한 선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했잖아요?”
“그래서 어떻게 하고 싶은 건데. 이 몸을 죽이고 시체에서 티켓을 수거할 텐가? 그게 너희가 바라는 바인가?”
“…….”
청기사는 잠깐 골몰히 생각하더니 힐끗 주변을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일리 있는 말이네요. 좋아요.”
아마도 청기사가 자신의 말에 긍정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 레시듀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루카스는 당신을 대행자로 삼았어요. 인정하기 싫고, 납득할 수도 없었지만 지금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너는 ‘루카스’가 직후엔 좀 병신 같은 짓을 많이 하면서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했죠?”
비기닝 위저드의 가면을 쓰고 헛짓거리 할 때 얘긴가?
확실히 그때의 행보는 ‘병신 같은 짓’이란 말이 가장 적절하다.
“그랬지.”
“그러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망설임이 없어졌고─ 나름대로의 성과도 거뒀죠.”
페일이 말하는 성과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골렛을 꾀어낸 것? 반왕을 설득한 것? 아니면 ‘하이드’가 된 십이허주를 모두 죽인 것일지도.
“레시듀, 나는 네가 스스로에게 너무 취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어요.”
물론 술을 좀 걸치고 오긴 했지만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닐 테고.
레시듀는 눈을 가늘게 뜨며 청기사를 보았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항상 정신이 나가 보였던 여자가, 오늘따라 유난히 정상적으로 보였다. 물론 지금 하고 있는 짓거리는 정상적인 짓과 거리가 멀긴 하지만, 그래도.
“여태껏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른 적은 없죠? 대체로 올바른 선택만을 내렸을 거예요. 그래서 이번에도 옳다고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런데 여기 있는 사람들, 나를 비롯해서 아골렛, 마왕, 뇌존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네가 마지막에 내린 판단이 위험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왕이 말했다.
“레시듀, 너의 모든 선택이 잘못된 건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 잘 풀렸고, 좋은 결과로 돌아왔지. 회담에서 들은 너의 일대기. 아주 인상적이었다. 이건 진심이야.”
“……”
“하지만 가장 마지막에 내린 판단은 어딘가 이상해. 너무 충동적이란 뜻이다. …아니. 너는 대체로 충동적이지만, 이번은 다른 경우와 다르다. 여기서부턴 내가 말해도 설득력이 없을 테니 너의 신하에게 맡기도록 하지.”
철컹.
방패와 갑옷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서 아골렛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답지 않았습니다.”
“…….”
“물론 그들을 선별한 흐름 자체는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 흐름에 편승한 선택에도 어색함이 없었지요. 언뜻 보면 그림 좋지 않습니까? 과거 한 우주를 구했던 다섯의 인간 영웅들─ 그때와 달라진 모습으로, 전혀 다른 장소로 향해서, 이제는 멀리 떠나 버린 마지막 동료를 구하기 위한 여정. 서사적인 관점에선 아주 아름답지요.”
부드럽게 이어지던 아골렛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차가워졌다.
“하지만 지금 벌어지는 일은 동화 따위가 아니잖습니까.”
“…….”
갑자기 머리가 차가워진 기분이다.
레시듀는 손바닥을 살짝 쥐었다 폈다. 조금 축축하다. 식은땀을 흘린 건 분명한데, 왜 흘렸는지 모르겠다.
지금 이 몸은 당황하고 있는 건가?
“그래. 너희들은 내가 멸망에게 세뇌를 당했다고 여기고 있는 것인가.”
“우리 정신력은 세뇌 같은 걸 당할 수준은 진작 벗어났지. 하지만 상대는 멸망, 일반적인 범주를 벗어난 일을 수도 없이 저지르는 존재다……. 알지 못한 수단으로 너의 정신을 헤쳐 놓았대도 이상할 건 없지.”
그제야 이들의 묘하게 담담한 태도나 포위를 했는데도 쉽게 손을 뻗지 않는 이유, 죽이지 않겠다고 말한 까닭까지 짐작이 갔다.
이들은 레시듀를 동굴로 유인하여, 감금하고, 티켓을 억지로 빼앗으려고 협박하고 있는 주제에.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인식이 없다.
물론 범죄란 틀로 묶을 수 있는 녀석들이 아니긴 했지만, 한때 같은 배를 탔던 아골렛도 마찬가지다. 레시듀의 시공일보를 튕겨내고, 포위망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데도 양심의 가책 같은 건 느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이상한 건 레시듀 쪽이라 여기고 있는 태도.
그러한 태도엔.
“일리가 있다.”
레시듀는 이들의 추측이 신빙성 있다고 인정했다.
이토록 순순히 받아들일 거라 예상하진 못해서, 마왕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무언가 짚이는 게 있는 것인가? 마지막에 접촉했던 협상가가 무언가 수작을 부렸다던가.”
“글쎄. 이 몸은 멸망과 제법 얽힌 적이 많아서. 오히려 짚이는 경우가 너무 많아서 문제군.”
“우리의 말에 동의를 했다는 건.”
뇌존이 입을 열었다.
“네놈의 선택이 잘못됐다는 걸 인정하겠다는 뜻인가?”
“사정상 그럴 수는 없지. 뇌존. 지금 네놈들이 꺼낸 말을 증명할 수단이 없지 않은가? 아무리 신빙성이 높아도 고작 말뿐이어서야 이 몸도 순순히 받아들일 수는 없지.”
“그럼 어쩌자는 것이냐.”
“큭큭.”
레시듀는 문득 상황이 참 재밌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근거로 내세운 것들은 그럴 듯했으나, 그것을 찾는 과정은 다소 추잡했을 것이다.
그저 레시듀의 선택과 판단을 부정하기 위해서, 오직 그런 뒤틀린 감정만으로 이유를 찾아 헤맸고─ 마침내 내세울 수 있는 근거를 손에 넣었다.
물론 그 과정이 지저분하다고 해서 이들의 주장을 귓등으로 흘릴 생각은 없다.
이러한 경우엔 의외로 과정이 중요하지 않은 법이다. 도둑질을 마음먹은 꼬마가 서랍을 뒤지다 흉기를 발견한다면, 결과적으로 좋은 일에 조금은 보탬이 된 셈이지 않나?
아니. 이건 좀 이상한 비유인가?
레시듀는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이곳에 있는 네 명은, 마지막까지 레시듀의 선별에 납득하지 못한 자들이다. 이만한 자의식을 갖춘 자들이 한데 모여 이쪽을 비난하고 있으니 아예 헛소리로 치부하진 않을 것이다.
“인정하겠다. 지금 이 몸은 살짝 정신이 나간 상태일지도 모르겠군.”
“…정말 머리가 오락가락하는 하는 놈이군. 그래서 납득하겠단 거냐. 말겠다는 거냐?”
“시간이 얼마 없을 텐데? 지금이라도 선별을 무르도록.”
두 군림자는 잘도 떠들어댔고, 레시듀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긍정적인 면을 발견했다.
어떤 연유에서든 지금 이들은 레시듀란 존재를 두고 임시적으로나마 손을 잡았다. 공공의 적이 출현해 동맹이 체결되는 건 단순하지만, 가장 빈번히 벌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군림자는 분명 바뀌었다.
변화란 요소를 손에 넣었다. 이제부터 더 날아오를지, 혹은 추락할지는 순전히 이놈들한테 달렸지만.
“이 몸은 선택을 번복하지 않는다.”
그 전에 레시듀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분위기가 무거워졌다.
“…진심인가, 레시듀? 우리가 너를 죽이지 않는다는 말을 너무 긍정적으로 해석한 것 아닌가.”
“그딴 건 기대하지도 않아. 여기까지 왔으면 사실 옳고 그름은 관계가 없지. 나도 네놈들도 대의가 상대에게 있다고 납득할 부류는 아니잖나? 지금 이 몸이 말하고 있는 건 좀 더 원초적인 일이다.”
“원초적인 일?”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싶으면 힘을 써보시라 이 말이지.”
“…….”
쿠르릉.
어디선가 천둥소리가 들렸다.
뇌존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농담으로 끝나지 않을 발언이다, 레시듀. 우리 넷을 상대로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것인가.”
“정면으로 싸운다면 뼈도 못 추리겠지. 그러니 이 몸은 도망칠 것이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냐?”
“술래잡기 한번 해보자고. 난 어떻게든 이 축축한 동굴을 탈출해서 ‘왕성’으로 돌아가겠다. 너희 네 명이 그걸 막아 봐라. 수단은 마음껏 쓰고. 물론 그 과정에서 이 몸을 죽여도 상관없다.”
이놈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레시듀는 이 녀석들이 싫지 않았다. 뜻밖에도 여태까지 거슬렸던 청기사에 대해서도 생각이 조금 바뀌었다.
아마 지금 여기 있는 녀석들은 가진 바 힘을 떠나, 통합세계 제일가는 고집불통들일 것이다. 물론 레시듀도 포함해서.
주관이 강한 녀석은 싫지 않다. 머리가 단단히 굳은 놈들이 부리는 똥고집은 좀 더 포장하면 신념이나 소신이 되는데, 어쩌면 이런 놈들이야말로 바깥 출정에 어울리는 인재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되도록 ‘통합세계’에 남겨 두고 싶었다.
이들은 레시듀와 같다. 어떤 사건을 겪느냐에 따라 충분히 반왕 수준까지 강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다섯 명이서 ‘바깥’으로 간다면, 그야 이쪽 일은 훨씬 쉬워지겠지만 통합세계 쪽은 아주 피똥을 쌀 거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말은 내뱉은 말─ 이들이 레시듀를 잡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남은 시간은 30분 정도인가? 어디 잘해 보도록.”
레시듀의 웃음이 어두운 동굴을 크게 울렸다.
* * *
10분이 더 지났을 때, 이리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가게?”
초조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아나스타샤였다.
“뻔하잖아요. 그 남자를 찾아야죠.”
“어디 있을지 알고.”
“…몰라요. 일단 왕성 안에서 수소문하고 단서부터 찾은 다음에 탐색해 봐야─”
“그럴 필요는 없다.”
새로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회담에 있던 자의 목소리가 아니었는데, 문 근처엔 어느새 반왕이 서 있었다. 그 존재를 깨닫지 못한 게 실책은 아니지만, 이리스는 살짝 굳은 얼굴로 반왕을 보았다.
“무슨 뜻이죠?”
“…레시듀는 이미 떠났다.”
묘하게 풀이 죽은 목소리였으나, 그 사실을 깨달은 자는 이 자리에 없었다.
카사진이 물었다.
“떠났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네. 카사진. 이미 ‘바깥’으로 갔단 말이지.”
“혼자서 말인가?”
“아니. 다른 이들과 함께.”
이번엔 루시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른 이들이라면…….”
반왕이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청기사와 백기사, 마왕과 뇌존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통합세계에서 그들을 관측할 수 없게 됐지.”
“…….”
갑작스런 선언에 회담에 얼빠진 침묵이 내려앉았다.
갑자기? 아니. 그것보단 어째서?
결국 그 멤버로 바깥으로 갈 거라면 우린 여기 왜 부른 거지?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야.”
“뭐가 더 있는 건가요?”
“통합세계에 멸망이 출현했다. 레시듀가 사라지기를 기다린 것처럼. 아니, 마치 서로 위치를 바뀐 모양새라고 해야 할까.”
“네……?”
이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떠졌으나, 반왕의 충격적인 선언은 끝난 게 아니었다.
“출현한 멸망은 두 종류. 왕성을 기준으로 서쪽과 동쪽 끝에서, 각각 하늘에 닿을 만큼 거대한 존재들이 동시에 진격하기 시작했네. 퓨처릭스가 본 자료만 봤지만 아마도, 아니 확실하게.”
반왕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개체 모두 과인보다 강해.”
* * *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
뺨이 조금 축축해졌을 때 레시듀는 지금 듣고 있는 소리가 착각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밀려오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바닷물이 입술 사이로 조금 새어 들어왔는지 짭조름한 맛이 났다.
어딘지 모를 장소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도 시야가 불명확했다. 처음엔 바닷물이 눈 안에 들어가서 그런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그저 안개가 너무 짙을 뿐이다.
축축한 모래를 짚으며 어떻게든 비틀비틀 일어났다.
…기분 탓인가? 머리만 무거운 게 아니라 몸뚱이도 무거웠다. 일어서는 것도 쉽지 않을 정도다.
어떤 모래사장이었다. 물론 와본 적 없는 장소였는데 레시듀는 이곳이 ‘바깥’인지, 통합세계인지, 아니면 아예 다른 장소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새벽녘, 뿌연 안개 너머로 빛을 흩뿌리는 등대. 어느 먼 곳에서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레시듀는 우선 등대를 향해 걸어갔다. 자고 있는 동안 몸뚱이가 바닷물이라도 빨아들였는지, 발이 더럽게도 무거웠다.
“…….”
겨우 도착한 등대 아래엔 누군가 먼눈을 하며 앉아 있었다. 그래 봤자 안개가 짙게 깔린 곳이라 해안선 같은 건 보이지도 않을 텐데. 이 녀석은 대체 뭘 보고 있는 걸까.
그걸 알고 싶어서 잠깐 그 옆에 선 채 시선을 함께했다. 안개는 걷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장소가 아닌 건 분명했다. 시간의 흐름 같은 게 완전히 멈춘 것 같은 장소였다.
“이 몸을 ‘바깥’으로 끌어들이고 싶었나?”
레시듀의 말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감이 잘 오지 않는군. 지금 너는 어떤 상태인가? 멸망의 지휘관인가. 아니면 여전히 루카스 트로우맨인가.”
“…….”
루카스 트로우맨이 슬며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