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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51화 (778/857)

외전 551화

캄캄하다.

공기의 움직임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동굴 내부는 완전히 밀폐 공간이 되었다. 출입도 탈출도 불가능한 장소.

그 가운데 청기사가 서 있는 장소에만 흐릿하게 빛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캄캄한 연극 무대 위, 홀로 조명을 받고 있는 배우같이도 보였다.

청기사가 배우라? 그렇다면 레시듀는 관객인가?

레시듀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두자. 잡생각을 이어가는 건 좋아하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대신 청기사가 꺼낸 말을 다시 한번 떠올려 봤다.

…이야기, 대화.

지금 저 여자가 대화를 하자고 말한 것인가?

“하하.”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비웃음이라 해도 맞을 것이다.

뭐가 됐든 ‘대화’란 지금 상황과 청기사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다.

레시듀는 남은 시간을 최종적으로 확인한 다음 다시 말했다.

“대화란 서로에게 바라는 게 있을 때나 성립되는 것이지. 이 몸은 딱히 네 녀석한테 원하는 게 없는데?”

“정말 없어요? 그래도 한두 가지 정도는 있을 텐데요!”

“예를 들어?”

“네가 ‘바깥’에 나가 있을 동안 좀 얌전히 있으라거나?”

“…….”

의외였다.

이런 정상적인 판단도 가능한 여자였나?

레시듀는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청기사는… 어느 정도 스스로를 감출 줄도 아는 여자였다. 과거 허의 세계에 온 직후의 루카스를 잘도 속였지 않나?

잠깐 청기사를 눈에 담은 뒤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래. 네년이 조금만 덜 설치기를, 항상 진심으로 바라고 있긴 하지. 그런데 이 몸이 그걸 원한다고 들어줄 것도 아니잖나.”

“글쎄요.”

청기사가 빙글빙글 미소를 만들더니 숨죽여 웃었다.

킥킥킥. 동굴 전체에 듣기 싫은 목소리가 거슬리게 울려 퍼졌다.

미친년이 웃음을 터뜨릴 동안 레시듀는 다시 한번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캄캄한 어둠만이 펼쳐져 있었다. 동굴 입구를 무엇으로 막은 거지? 벽면이 솟아 오르거나, 천장이 꺼진 것 같은 느낌은 들지 않았다. 단순히 물리적으로 봉쇄한 게 아니라, 무언가 특별한 힘이 개입됐다는 것인데.

“시간 끌지 마라.”

레시듀는 다시 고개를 돌린 뒤 말했다.

“바라는 게 있다면 빨리 지껄이는 게 좋을 거다. 이 몸의 인내심은 깊지 않고, 남은 시간은 짧으니까.”

언젠가 세디 트로우맨에게 말했던 대사를 다시 입에 담았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달랐다.

청기사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했다. 여전히 미소는 남아 있었으나, 레시듀는 그 속에서 형용할 수 없는 가식을 느꼈다.

“…최근 들어 생각이 많아졌죠. 한 번도 안 그랬는데.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항상 하고 싶은 대로 살았어요. 배가 고프면 먹었고, 죽이고 싶으면 죽였고, 살리고 싶으면 살렸죠.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것 같으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얼굴부터 들이밀었고─.”

“그래서 뭐 어쩌라고.”

“레시듀. 네가 한 선택에 대해서요. 나답지 않게 깊게 생각해 봤거든요.”

“…….”

“그 정도 존중은 보여야 할 것 같아서요. 이러니저러니 해도 루카스가 널 선택한 건 사실이잖아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이제는 청기사가 존중까지 논하고 있었다.

레시듀는 가만히 청기사를 바라보았다. 헛소리를 지껄이거나, 아예 비아냥대도 좋겠지만 우선은 무슨 말을 지껄일지 더 듣고 싶었다.

“나를 뽑지 않을 건 충분히 예상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아무리 생각해도 그 떨거지를 뽑은 이유를 모르겠단 말이죠. 그러니까 내 결론은, 당신은 잘못된 선택을 했단 거예요.”

이 시점에서 레시듀는 슬그머니 몸을 긴장시켰다.

상대가 언제 돌발 행동을 벌이더라도 늦지 않게 대응하게끔, 그리고 언제든 시공일보를 사용해 왕성으로 복귀할 수 있게.

그러한 생각이 교차하는 가운데, 청기사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이는 게 보였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한 사람이 나만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 다음 일은 너무나도 순식간에 벌어졌다.

레시듀는 좌우에서 가공할 만한 힘을 품은 투사체가 날아오는 걸 느꼈다. 몸을 긴장시키고 있었으므로 대응이 늦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격이 날아오기 전까지는 아무런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고, 그 때문에 대부분의 집중을 청기사에게 쏟아붓고 있던 참이라 완벽하게 막아 내지는 못했다.

왼쪽 공격은 피했는데 오른쪽 공격은 허용하고 말았다.

푹!

날카로운 무언가가 어깨에 박힌 순간, 고통은 둘째 치고 갑자기 의식이 흐려졌다. 순간적으로 다리가 휘청거려 꼴사납게 주저앉을 뻔했다. 레시듀는 눈을 번쩍 뜨며 의식을 억지로 각성시킨 다음, 어깨를 꿰뚫은 무언가를 붙잡으려고 했다.

스르륵…….

그 직전에 날카로운 무언가는 어둠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그래도 흐릿한 의식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몸뚱이까지 무거워졌다. 독이라도 발라 둔 건가? 웬만한 건 이 몸뚱이에 통하지 않을 텐데.

거기에 사방을 둘러싼 어둠 때문인지, 공격한 놈의 낯짝은커녕 어깨를 쑤신 투사체가 정확히 어떻게 생겨 먹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한숨을 내쉬며 무기를 꺼냈다.

츠즈즛!

뇌전의 번쩍임이 가라앉은 순간, 레시듀의 오른손엔 진뢰곤이 들려 있었다. 번개로 제련한 봉을 몇 번 휘두른 다음 다시 전방을 보았다.

청기사는 아까 전과 비슷한 얼굴로 그곳에 가만히 서 있었다. 손에 들린 칼, 팔에 감긴 쇠사슬도 그대로다. 손에 든 진뢰곤을 던지고 싶을 만큼 무방비한 모습이었는데, 그 모습이 방금 전의 공격은 자신과 무관하다 주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거 알아요? 나한테도 협상가가 나타났어요.”

“뭐라고?”

따져 물을 새도 없었다.

레시듀는 다시 한번 덮쳐드는 공격을 느꼈다. 빌어먹을. 일부러 하나씩 던지듯 말하는 건가?

카캉!

이번엔 공격을 허용치 않고 튕겨 냈다. 그러나 진뢰곤으로 쳐낸 순간 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 공격. 뭔가 익숙한데.

카카캉!

공격을 연이어 받아 냈다. 진뢰곤을 휘두를수록 몸에 열이 오르며, 동작의 연계가 부드러워지고 있지만 솔직히 상황을 낙관적으로 볼 수가 없었다.

‘이거 몸 상태가 생각보다 더 엉망인데?’

육체와 정신의 피로가 상당하다.

이곳에 오기 전 적기사와 어울렸고, 그 이후엔 레티프와 독한 술까지 마셨다. 특히 술이 문제였는데, 아직까지도 정신이 다소 멍하고 알딸딸한 상태였다.

상대는 청기사, 그리고 정체불명의 적이 한 명 이상. 적은 최소 십이허주급으로 보이니, 이 상태로 싸웠다간 시간이 너무 끌린다.

그렇다면 굳이 어울려 줄 이유가 없다.

파지직.

판단을 마친 레시듀는 발에 에너지를 끌어모았다. 가공할 만한 뇌류가 전신을 휘감았다. 먹구름이 낀듯 시야가 어두워졌고, 귓전에선 천둥소리가 끊임없이 내려쳤다.

─시공일보의 시전 속도가 보다 빨라졌다. 적기사와의 짧은 겨룸, 긍정적인 영향으로 기술을 진화시킨 것이다.

레시듀의 뒤에 펼쳐진 건 여전히 어둠뿐이었으나 상관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방향성까지 잃은 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유일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청기사, 녀석의 존재가 레시듀의 이정표가 되고 있다.

향할 곳은 청기사의 반대 방향.

캄캄한 어둠을 가로지르고, 청기사는 물론 어둠에 몸을 감춘 적의 손길을 뿌리친 채.

레시듀는 단숨에 동굴을 벗어났다.

─까앙!

그랬어야 했는데.

레시듀의 몸뚱이가 튕겨져 나갔다. 지면에 긴 족적을 남기고 다시 처음의 장소로 돌아왔다.

청기사의 맞은편.

시공일보를 썼던 그 시작 장소로.

“…음.”

문득 상황이 생각보다 더 심각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이야. 다시 봐도 굉장한데요. 그 기술. 나는 못 막을 것 같아요.”

청기사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비아냥댔으나,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눈살을 찌푸린 채 상황을 분석했고, 곧 인정해야만 했다.

시공일보가 가로막혔다.

상상도 못할 만큼 단단한 무언가에 안면을 처박은 기분이었는데, 사실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가로막혔다고?

이동 경로에 무엇이 있던, 세상에 가장 단단한 금속이 버티고 있어도 불가능한 일이다. 가령 ‘꼭대기 우주’란 장소를 성립시켰던 우주 최강의 금속 안티 메탈이 산처럼 쌓여 있어도, 지금의 레시듀라면 과자처럼 부술 수 있다.

그렇다면 방금 레시듀를 가로막은 것은…….

“…얘기라.”

레시듀는 한숨 비슷한 걸 토해 내고는 페일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두 발자국 정도의 간격을 두고 멈췄다.

검은 물론이고 뻗은 팔도 쉽게 닿을 수 있는 거리였다.

“…….”

돌연 가까이 다가오자 페일은 문득 시선을 살짝 아래로 내렸다. 약간 당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레시듀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한 번 더듬은 다음 말했다.

“일이 너무 쉽게 풀린다 싶었지. 그래. 네놈들이 그렇게 얌전히 돌아갈 위인이 아닌데, 그렇게 쉽게 변할 녀석들이 아닌데 말이야.”

“…….”

“상황이 잘 마무리됐다고 생각했다. 반왕을 눈앞에 뒀으니 변화할 거라 기대했지. 이 몸이 그랬던 것처럼. 결론적으로 이 몸의 주관이 잔뜩 들어간 해석이었군.”

“크하하하…….”

동굴 어딘가에서 쩌렁쩌렁한 광소가 터져 나왔다.

개인적으로 페일의 숨죽인 웃음보다 이쪽이 더 거슬렸다. 단순히 소리가 크기 때문은 아니었다.

쿠르릉.

어두운 동굴 곳곳에서 번개가 내려치더니, 그 사이에서 거대한 몸집을 가진 존재가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거침없이 발을 찧을 때마다 동굴 전체가 쿵쿵 울려 댔다.

레시듀는 그 존재를 보며 중얼거렸다.

“딱히 반갑지는 않군, 뇌존.”

“그런가? 이 몸은 무척 반가운데. 한 몇 만 년 만에 재회한 기분이다.”

뇌존이 히죽 웃었다.

레시듀는 그 낯짝을 스치듯 지나치고, 다시 주변을 살펴봤다.

한 녀석이 더 있을 것이다. 뇌존의 권능이라면 모두 알고 있는데, 동굴을 뒤덮은 어둠과 아까 어깨를 관통했던 투사체는 놈의 힘이 아니었다.

모른 척 주변을 두리번거리긴 했지만, 사실 뇌존과 함께 작당할 녀석이라면 뻔하다.

“네놈도 슬슬 모습을 드러내지 그러나?”

“…흠.”

스륵.

바닥의 어둠이 치솟고, 뭉친 다음 한 남자의 형상을 만들었다.

물론 검은 가시의 마왕이었다.

레시듀는 모습을 드러낸 두 군림자를 보고 픽 웃고 말았다.

“귀중한 광경을 보여 주는군. 그래. 변화를 맞이하긴 했구나. 과거의 네놈들이었다면 쥐새끼처럼 동굴에 숨은 채 공모하진 않았을 테니까.”

“레시듀, 그렇게 모욕해도 별 효과는 없다.”

“그런가?”

그럼 성질 긁는 말을 지껄여도 시간 낭비란 거군.

레시듀는 자신을 둘러싼 자들 전부를 눈에 담으며 말했다.

“그래. 군림자 나리들. 우선 이 몸이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묻고 싶군. 군림자 두 명과 4기사 한 명이 이 몸을 죽이기 위해 손을 잡았다…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 것이냐?”

“두 가지 틀렸다.”

“두 가지씩이나?”

다소 놀란 레시듀를 보며 뇌존이 비죽 웃었다.

“첫째로 우린 딱히 네놈을 죽일 생각이 없다, 레시듀. 목적이 있다면 네 녀석이 품 안에 고이 숨겨 둔 것이겠지.”

“…‘바깥’으로 향하는 티켓인가. 설마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집착할 줄은.”

레시듀가 투덜거리며 뇌존을 보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랬군. 레티프도 뇌존, 네놈이 보낸 것이었어.”

“무슨 말이냐.”

“시치미 떼지 마라. 녀석이 등장한 타이밍, 넌지시 청기사에 대해 언급한 것, 같이 가져온 술. 아무리 생각해도 그 술은 너무 독했단 말이야. 이 몸의 신체 능력을 저하시킬 만큼.”

“큭큭큭. 확실히 머리 회전은 빠르군.”

레시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사실 이놈들을 비아냥댈 처지가 아니었다. 언젠가부터 스스로도 마음을 헐겁게 잡고 있었다. 일이 너무 잘 풀려서 방심한 건가? 그럴지도 모르지. 적절한 긴장감, 적절한 느긋함. 뭐든지 중간이 좋은 법인데.

“두 가지라고 했지. 그럼 나머지 한 개는 뭐냐?”

“군림자 두 명과 4기사 한 명이 손을 잡은 것이냐고 말했죠?”

페일이 빙긋 웃었다.

“아쉽게도 틀렸어요! 우리의 비즈니스 파트너는 한 명 더 있으니까.”

철컹.

금속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린 순간, 레시듀는 보지 않아도 마지막 인물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하마터면 아까보다 훨씬 더 깊은 한숨을 내쉴 뻔했다.

마왕과 뇌존.

두 녀석 모두 강하지만, 저 두 녀석이라고 해도 레시듀의 시공일보를 완벽히 튕겨 내는 건 불가능하다.

그 정도의 방어력을 선보일 수 있는 건 통합세계에서 오직 두 명뿐.

한 명은 압도적인 신체 능력을 가진 반왕.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오직 수비태세로 전투에 임한다면, 다수의 4기사와 군림자를 상대로도 철옹성처럼 버틸 수 있는 기사.

…아무래도 술잔을 나누며, 레티프가 말해 줬던 내용 자체엔 거짓이 없었던 모양이다.

청기사가 북쪽으로 향했다는 것과.

“─폐하.”

아골렛과 같이 움직였다는 것까지, 모두.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아골렛은 흐릿한 미소를 지은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폐하가 해 주신 말씀에 대해 오래 생각하였고, 얼마 가지 않아 결론이 나왔습니다. 폐하께선 이 아골렛의 선택을 존중해 주시겠지요?”

“존중은 하겠다만, 그것과 별개로 상황이 지랄 맞긴 하군.”

앞에는 청기사. 뒤에는 백기사.

그리고 양옆에는 군림자라.

레시듀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하늘이라도 보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보이는 건 동굴 천장도 아닌 캄캄한 어둠뿐이었다.

선을 넘은 상황에 절로 모르게 중얼거림이 나왔다.

“…이러면 완전 나가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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