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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44화 (771/857)

외전 544화

“과인에게 중요한 역할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했었지.”

“그 역할이란 게 무엇인가. 한정된 인물만이 ‘바깥’에서 멸망과 싸울 수 있다면, 그 자리에 과인이 포함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이치라 생각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너는 여러모로 대체할 수 없는 전력이 맞아.”

“그럼 왜?”

레시듀는 다시 한번 반왕을 보았다. 반듯한 얼굴엔 어느새 미소가 사라져 있었으나, 왠지 모르게 이 녀석이 지금 따져 묻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납득할 만한 이유를 묻고 있는 것뿐이란 걸 알게 됐다.

어느 정도는 열이 뻗친 것 같기는 해도 일단 이성 쪽이 더 우선시되고 있는 상태랄까.

물론 싸우는 걸 싫어하는 녀석이, ‘바깥’으로 나가지 않게 된 것에 왜 화가 났는지는 모를 일이다. 오히려 기뻐해야 하지 않나? 레시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우선 준비해 뒀던 이유를 꺼냈다.

“이유는 여럿 있지만 결정적인 건 방금 전의 싸움이었다. 바깥에 있는 자들을 규합시킬 수 있는 건 너밖에 없다.”

“불가능한 일이야. 직접 겨뤄 보니 알겠더군. 분명 전투력은 과인이 우위였으나 그것뿐이지. 저들은 힘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부류가 아니었어.”

“굴복이 아니라 규합이다. 그리고 그 정도면 충분해. 용수철 같은 놈들이라 억지로 억누르려 들면 더 세게 반발할 것이다. 지금 정도의 관계가 딱 좋아.”

그럼에도 긴가민가 하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레시듀는 확실히 말해 줬다.

“모르겠는가. 반왕. 너는 군림자에게 존중받는 유일한 존재가 된 것이다.”

뇌존과 마왕은 이제 반왕의 말엔 비웃지 않을 것이다. 완전히 패배하지는 않았더라도, 싸움에 밀렸다는 사실만큼은 그들의 가슴에 상흔이 되어 새겨졌기 때문이다.

그 상흔을 완치시킬지, 악화시킬지는 그들의 역량이지만─ 아무튼 당분간은 재도전을 할 생각이 없겠지.

이쯤 말해도 이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반왕은 아직까지도 불퉁한 얼굴이었다. 이윽고 한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그렇군. 이곳에서 과인이 할 일이 있단 것이지.”

“그렇다.”

“그럼 그대는? ‘바깥’에서 나 없이 괜찮겠는가.”

“음?”

“과인은 그대가 걱정이야.”

이건 예상치 못한 발언인데.

“바깥에 나가서 헛짓거리를 하다가 아예 죽어 버리는 건 아닐까 싶군. 그대는 한번 폭주하면 스스로의 목숨은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어.”

이것엔 딱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동시에, 이 조막만 한 놈이 자신을 걱정해 준다는 사실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 몸을 걱정하기에 수억 년은 일러. 네 앞가림이나 똑바로 해라.”

그래도 왠지 모르게 장한 느낌이 들어 머리카락을 툭툭 건드렸는데, 문득 주변이 생각보다 너무 조용하단 게 느껴졌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니 대부분이 입을 툭 벌린 채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방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경악이 휩쓸고 지나간 모양새다.

뭔 반응인가 싶었는데, 양인현이 대표로 물어왔다.

“…레시듀, 반왕과 그대는 어떤 관계인가?”

그러고 보니 레시듀가 반왕과 싸웠다는 사실을 아는 건 극소수뿐이었나?

퓨처릭스는 복잡한 눈동자로 이 꼴을 보고 있었고, 아골렛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레시듀는 퓨처릭스의 영지에서 있었던 장황한 일을 설명하려니 너무 귀찮아져서, 어쩔 수 없이 간략하게 말했다.

“딸.”

“……!”

그러자 세 명이나 깜짝 놀랐다.

한 명은 루카였고, 한 명은 세디였고, 다른 한 명은 적기사였다. 앞선 두 녀석은 그렇다 처도 적기사 너는 왜? 레시듀가 묘하게 불편해져 쏘아붙이려던 순간, 앞에서도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딸……?”

“농담이니까 정신 차려.”

반왕의 안색이 묘하게 몽롱해지기에 제정신이 들도록 어깨를 좀 흔든 다음, 다시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무튼. 방금 떠난 녀석들 이외에도, 여전히 이 몸의 선택에 불만이 있는 녀석들은 많겠지. 우선 다 들어주도록 할 테니까 한 놈씩 와라. 시간이 빠듯하겠지만.”

“그게 무슨 뜻인가?”

“음. 말하지 않았나? 이 티켓은 되도록 빨리 써야 한다. 제한시간이 있거든.”

레시듀가 티켓을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물론 제한시간이 있다는 말은 이 자리에 있는 누구도 듣지 못했다.

반왕이 물었다.

“얼마나 남았지?”

“받은 시점부터 24시간이었으니까… 이제 스무 시간 좀 덜 남았겠는데?”

“……!”

* * *

스무 시간이 적은 시간은 아니었으나 결코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우선 불만이 있는 녀석들은 마지막에 모아서 처리하기로 했고, 레시듀는 그 전에 해야 될 일을 하나씩 정리했다.

품에서 마왕에게서 받은 ‘가시’를 꺼냈다. 검은 가시의 마왕의 외력, ‘가시’를 물질화하고, 고정시킨 형태……. 이것만 해도 굉장히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으나, 레시듀는 비슷한 게 하나 더 필요했다.

일곱 이빨의 용의 외력인 터스크(Tusk)다. 이것 또한 베니앙을 설득해서 받아내야 할 텐데, 레시듀는 회담에서 베니앙이 보냈던 시선을 떠올렸다. 선별에 어느 정도 불만이 있는 것 같으니 저쪽에서 찾아오겠지. 그때 얘기해 봐야겠다.

그런 다음 레시듀는 ‘가시’와 ‘터스크’가 손에 들어온 이후를 생각했다.

어찌 됐든 그것들을 모두 사용해서, 군림자의 힘을 하나로 만들어야 하는데.

만약 쓴다면 순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빨이 먼저인가, 가시가 먼저인가. 두 개를 동시에 쓰면 이 몸이 풍선처럼 터지진 않을까.

쓸데없는 상념에 빠질 무렵, 다시 한번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레시듀가 귀찮은 얼굴로 말했다.

“열려 있다.”

그러자 레시듀만큼이나 귀찮은 얼굴의 이리스가 들어왔다. 물론 혼자 온 게 아니었다. 그 뒤로 참으로 개성 있는 녀석들이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갈색머리의 남자, 거구의 악마, 그리고 은발의 미소녀까지.

이리스가 삐딱한 얼굴로 말했다.

“일단 다 데려오기는 했는데요.”

“수고했다.”

“…….”

윗사람인 양 구는 태도에 이리스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참자. 참아. 저건 루카스다. 삐뚤어진 루카스다. 난 지금 루카스의 부탁을 들어주고 있는 거다…….

“흐음.”

레시듀는 턱을 쓸며 나란히 선 이들을 보았다.

“이렇게 보니 면면들이 아주 가관이군. 4기사에서 물러나고 그냥 시체가 된 루시드에 반쪽자리 절대자인 자칭 카사진, 범용성은 좋지만 전투력은 수준 미달인 이리스에…….”

“수, 수준 미달…….”

자기최면을 하던 이리스가 침음하더니 레시듀를 노려봤다.

레시듀는 무시하고, 그 시선을 마지막 남은 소녀에게로 보냈다. 반왕이나 세디보다 더 작고 왜소한 녀석이었다.

“그리고 이건 뭐냐.”

“…아나스타샤다.”

“이름은 알고 있다. 정체성도 그럭저럭 알고 있지. 전前 대현자인 슈하이저 스트로우. 제법 정밀하게 만든 인형에 복사된 인격을 기억을 주입해 탄생했지. 묘하게 동질감이 느껴지는데?”

“뭔 동질감?”

“이 몸 또한 복사된 인격에서 탄생한 존재라서 그렇다.”

아나스타샤가 멍한 얼굴로 올려다보다가, 이리스를 보며 말했다.

“…오기 전까지는 무슨 개소린가 싶었는데, 직접 두 눈으로 보니 믿지 않을 수 없군. 그래도 루카스 얼굴로 저따위로 구니 뭔가 신선한 것 같기도 한데?”

“시끄러워요. 잊고 있었던 주제에.”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었잖아. 그리고 너도─”

마주 쏘아붙이려던 아나스타샤는, 이리스의 안색을 보더니 말을 멈췄다.

이리스는 한숨을 내쉬며 레시듀를 보았다.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당신 말은 사실이 맞아요. 솔직히 멸망과의 싸움에서 우리 네 명이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고요. 무슨 속셈이 있다면 지금 밝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데요.”

“속셈이 아니라 본심은 어떤가?”

레시듀가 웃으며 말했으나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퍽퍽하게 굴기는.

“그래. 좋아. 아무튼 당분간의 길동무가 됐으니 목적지 정도는 밝혀야겠지. 우선 이 몸이 이 구성원으로 다섯 명을 짠 이유는.”

집중된 시선을 즐기듯 음미하다가, 살짝 웃으며 말을 마쳤다.

“딱히 없다.”

“…….”

“굳이 말하자면 충동적으로 벌인 일이지.”

충동적으로 벌인 일.

충동적으로 벌인 일…….

이리스는 그 말에 담긴 속뜻을 해석하려고 노력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레시듀의 낯짝이 그렇다고 말하고 있었다.

즉 이 남자는 정말 계획도, 근본도 없이 이따위 짓을 저질렀다는…….

빠직.

이리스의 머리에 힘줄이 돋아났다.

레시듀는 험악해진 마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설명을 보충했다.

“자자. 진정하고 끝까지 들어 봐라. 화를 내는 건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아.”

“…지껄여보시죠.”

“사실 이 몸이 원래 구성했던 멤버는 나와 이리스 피스파인더, 반왕, 루카, 마지막으로 레티프 정도였다. 구체적인 이유도 있었지. 이리스 피스파인더의 능력은 발전시키기에 따라 ‘바깥’에서 ‘안’으로 돌아오는 기술로까지 진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왕은 두말하면 입 아픈 통합세계 최강의 전력이고, 루카는 멸망 출신이지. 맹한 녀석이긴 하지만 바깥으로 나간 게 계기가 되어 뭔가 쓸 만한 구석이 생길지도 모른다.”

“레티프는요?”

“그건 누구야?”

아나스타샤의 말에 카사진이 조용히 대꾸했다.

“뇌존의 부하. 절대자다.”

아직 그 존재가 낯선 아나스타샤가 묘한 눈으로 카사진을 보았다.

“단순한 절대자가 아니지. 절대자 중에서도 한 손에 꼽을 만큼 강력한 제패자다.”

“과연… 그 정도의 전력이니 충분한 의미가 있겠군요.”

“아니. 딱히?”

레시듀가 단숨에 부정했다.

“레티프를 데려가려던 이유는 4기사와 군림자, 십이허주를 빼곤 그나마 제일 말을 잘 듣는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

아나스타샤는 멍한 얼굴로 레시듀를 바라봤다.

원래 사람이란 얘기를 나눌수록 점점 알아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이 녀석은 무슨 입을 뗄 때마다 점점 감을 잡을 수 없게 되고 있다. 생김새에서 오는 위화감에도 분명 이유가 있을 테지만…….

…그렇게 따지면, 아나스타샤에게 납득이 가지 않는 존재가 한 명 더 있었다.

이곳에 있는 자들 중 가장 거구. ‘나는 악마입니다’라고 사방팔방에 광고를 하는 듯한 생김새.

아직까지도 녀석이 적응이 되지 않아, 아나스타샤가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넌 정말 카사진이 맞기는 한 거냐?”

“그래. 내가 카사진이다.”

거구의 악마와 미소녀를 보던 레시듀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저 녀석도 우리와 같다. 아샤.”

“아샤는 또 뭔.”

“네놈 이름은 너무 길어서 줄였지. 이 몸은 다섯 글자 이상의 이름은 부르지 못해.”

“어째서.”

“귀찮으니까.”

“…….”

“설명을 이어서 하자면, 저건 한때 0번째 악마라고. 허의 세계에 존재하던 군림자 같은 녀석인데…….”

레시듀는 그 장엄하고 긴 얘기를 되도록 효율적이게 요약해서 말해 줬다.

“…여차저차해서 마도무왕 카사진의 기억과 인격을 탈취해 지금의 모습이 됐다.”

“설명이 되지 않잖아.”

“그것만 알아두면 돼. 더 이상은 알 필요 없는 문제다.”

“귀찮아서 그러는 거 아니냐.”

“알면 그만 따지도록.”

“이씨. 이거 진짜 미친놈이잖아.”

아나스타샤가 황당한 목소리로 레시듀를 올려다봤다.

이리스는 갑자기 두통이 온 듯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아무튼 이 구성원에 변동은 없다는 거죠?”

“일단 최후 면접이 남아 있기는 한데, 웬만하면 이대로 갈 생각이다.”

“후우. 당신들과 함께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이 아픈데요.”

“너 혼자 정상적이란 태도는 집어치우지 그래.”

아나스타샤가 딴죽을 걸었으나, 이리스는 기가 차다는 얼굴로 말했다.

“진실이 그런데요? 아샤, 당신도 눈이 있으면 나 이외의 꼴을 한번 보라고요.”

“아샤라 부르지 마. 이년아.”

“루시드는 반시체 꼴이 됐고요. 카사진은 뭔 악마랑 융합이라도 했는지 겉모습부터 가관이고. 당신은 아예 성별까지 바뀌었죠. 그리고 저거는 겉모습은 루카스인데 속은 저따위고.”

말투가 제법 매서웠던지라, 레시듀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리스는 아니꼬운 눈으로 한번 쏘아보고는, 허리에 손을 척 얹으며 말했다.

“그에 비해 저는 겉도 속도, 완전히 이리스 피스파인더입니다. 4,000년 전과 똑같은.”

“그래. 나이 많아서 좋─겠다. 할머니라 불러 줘?”

“닥쳐. 꼬맹이.”

“꼬맹…….”

그래도 이 두 녀석은 말을 많아 다행이군.

레시듀는 과묵하기 짝이 없는 두 남정네를 눈에 담았다가 픽 웃었다.

“아닌데. 이리스 피스파인더. 너 또한 온연한 이리스라고는 할 수 없다.”

“네?”

“고향 우주에서 이뤄졌던 최후의 일전에서 너는 한 번 죽었다. 루카스 트로우맨을 위해 죽었고, 영혼은 산산이 부서졌지. 그 이후 루카스의 바람에 따라 재구성됐지만, 그것은 완전한 부활이라고 할 수 없다. 어딘가 누락된 점이 있을지도 모른단 것이다.”

“…….”

이리스가 흠칫하더니 안색이 조금 창백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이리스로서 행동하고 있는 자신이 사실 이리스가 아닐지도 모른단 뜻이었다.

레시듀가 히죽 웃었다.

물론 이 여자가 혼자 너무 당당하게 나가는 것 같아 반쯤 지어낸 말이었다.

“뭔 고민을 하는지 알겠군. 겁먹지 마라. 네가 이리스가 아니더라도 딱히 변하는 건 없어. 중요한 건 주체성이다. 스스로 ‘나’라고 인식할 수만 있다면, 정체성 따위는 정하기 마련이지.”

“…그렇게 속 편히 납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요.”

“아무튼.”

레시듀가 말했다.

“아까 하던 말을 다시 이어서 하자면, 세 번째 인물을 호명하려던 순간 루시드가 나섰지. 다섯 중에 세 명이면 과반수나 다름없고, 그 순간 지금 이 그림이 그려졌다. 어쨌든 이 몸도 루카스 트로우맨을 계승하고 있는 존재니까. 과거 세상을 구했다는 다섯 영웅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고나 할까.”

“…포장은 잘하는데. 결론은 충동적으로 저질렀다는 거 아니야?”

레시듀의 어조가 조금 진지해졌다.

“흐름이란 건 무시해선 안 돼. 억지로 거역하려 들다간 본전도 못 찾는다고. 때로는 시류에 탑승해서 편히 살아가는 법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

잠깐 곰곰이 생각해 보던 아나스타샤가 인상을 찌푸린 채 다시 따졌다.

“그러니까. 결국 충동적으로 저질렀다는 말이잖아.”

레시듀는 대충 넘어가기에 실패했단 걸 깨닫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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