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40화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기껏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는데, 다시 사라진 것이다.
회담장은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고 한동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레시듀는 대다수의 반응도 그렇지만, 여태껏 뭐라 떠들든 초연한 태도로 일관하던 두 명의 기사─ 흑기사와 청기사가 고개를 들어 이쪽을 봤다는 사실을 느꼈다.
페일의 입가는 살짝 비틀려 있었다. 자신을 뽑지 않는단 사실에 기분이 나빠 보였다. 불쾌해하는 낯짝을 보니, 역시 ‘바깥’으로 나갈 생각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리고 루시드는… 뭐라고 해야 할까. 쉽게 읽을 수가 없다. 살짝 굳어 있는 표정은 어떤 결의를 마친 것처럼도 보였는데 방금 레시듀의 말 어디에서 그런 태도로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그런 결론이 나왔는지 묻고 싶군.”
다만 직접적으로 의문을 말로 꺼낸 건 두 명의 기사가 아닌 마왕이었다.
이어서 뇌존이 말했다.
“네놈 또한 현재로선 십이허주 중 하나일 터. 스스로도 배제하겠다는 뜻이냐?”
“애석하게도 이 몸은 이미 선대先代가 됐다. 거기 있는 마성 출신의 마법사.”
그러자 멍한 얼굴로 사태를 관망하던 금발의 남자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예.”
“익숙한 얼굴이군. 이름은?”
“…페르안 준입니다.”
“페르안 준, 이곳에 있을 수준은 아닌데, 어째서 오게 됐나?”
페르안이 꿀꺽 침을 삼키며 대답했다.
“…현재 마성에서 기동 가능한 마법사가 저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놈들은 뭘 하고 있길래.”
“스스로의 독선을 갈고닦고 있습니다.”
“…….”
그렇겠지.
마성은 구성원 전원이 멸망에 대해 사전부터 알고 있던 유일한 장소다. 놈들의 공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현재, 수련에 매진하는 건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도 이 정도 수준의 남자를 보내다니. 최소 세븐즈 매지션 정도는 와야 얘기가 통할 텐데.
거기에 레시듀는 이 남자를 알고 있다.
페르안 준.
루카스의 고향 우주에 속한 인간…….
그게 전부다.
루카스였다면 이놈과 마주했을 때 몇 가지 상념을 더 떠올릴 테지만, 레시듀에게 있어 딱히 인상적인 인간은 아니었다.
작금의 사태에 보탬이 될 인물로 보이지도 않았고, 굳이 손을 빌린다면 남은 멸망에 관한 대책을 마련하는 쪽이 아니라, 멸망을 막아 낸 후의 뒤처리를 담당해야 될 자. 업신여기는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
하지만 레시듀는 다음 순간, 이 남자의 수준이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비교해 큰 발전을 이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성의 수련법이라도 배운 걸까? 그렇다고 해도 시간이 부족했을 텐데… 거기에 발전했다고 해도 아직까지 필멸자 수준. 세븐즈 매지션은커녕 웬만한 절대자에게도 못 미치는 정도다.
어찌 됐든 레시듀가 더 관여할 바는 아니라서, 떠올렸던 말을 이어 나갔다.
“이 몸이 없어지고 마성은 어떻게 굴러가고 있나?”
“영지 내의 업무나 멸망의 대책은, 일시적으로 스승님이 담당하고 계십니다.”
“스승?”
“예. ‘하룬’입니다.”
“처음 듣는 이름이군.”
“아. 예. 당대 비기닝 위저드께선 마주한 적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스승님은 마탑 77층의 세븐즈 매지션입니다.”
“77층. 아하.”
레시듀가 기억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놈은 죽었을 텐데?”
“그게, 스승님은 사실 죽은 게 아니라 멸망의 습격 이후 우주를 표류하다 다른 세계에 머물게 되셨고, 그 이후에 저와 만났는데…….”
“음. 그건 그만 말해도 된다.”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 낌새가 보여서, 레시듀는 적절히 끼어들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마성으로 돌아갔고, 어찌저찌 네놈도 함께 복귀했다는 거군. 그렇다면 지금 3대째 비기닝 위저드는 그 하룬이라는 놈이라 여겨도 되겠지?”
페르안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하룬은 분명 엄청난 마법사였으나, 아직까지도 본래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음. 그것은 제가 확정드릴 부분이 아닌 듯한데요.”
그 사실을 이런 공개적인 자리에서 밝힐 수는 없어서, 결국 애매하게 대꾸했다.
“그럼 이 몸이 확정하지, 뭐. 여기서 3대 비기닝 위저드를 발표하겠다. 방금 저 녀석이 말한 하룬이라는 남자다. 그렇게 알도록.”
“…….”
레시듀가 갑자기 비기닝 위저드의 직책을 승계시켰다.
가만히 지켜보던 마왕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주의 시스템에 관해선 잘 모르지만, 그렇게 일방적으로 벗어던질 수 있는 자리였나?”
“군림자와는 다르지.”
마왕이 턱을 괸 채로 말했다.
“…군림자와 4기사, 십이허주. 그것은 지금 이 회담장에 모인 강자 대부분이다. 레시듀, 뇌존의 잔념이여. 그들 중 한 명도 뽑지 않고 두 번째 멸망과 맞서겠다는 생각은 어떻게 갖게 됐나?”
“이번에도 헛소리하면 재미없을걸요.”
페일이 장난기가 쏙 빠진 목소리로 덧붙였다.
레시듀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럴 거라 생각했다. 웬만한 핑곗거리로는 넘어갈 수 없겠지. 그러나 이 건에 관해선 레시듀도 진지했다. 절반 정도는 말이다.
“협상가가 내게 제안했다. 두 번째 멸망과 싸울 다섯 명을 자신이 고르게 해 달라더군.”
“그것은 이상한 말이군. 티켓은 애초부터 협상가가 갖고 있지 않았나?”
“그렇다. 하지만 놈이 갖고 있는 건 단순 입장권에 불과하다. 그걸 최종적으로 누가 쓸지는 우리가 결정할 수밖에 없지. 가령 협상가가 이 자리에 나타나서, 두 번째 멸망과 싸울 5명을 발표하면 네놈들이 순순히 따르겠나?”
“그건 그렇군.”
“협상가는 자신이 다섯 명을 선별했단 사실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꼭두각시 삼아 이용하려고 했지.”
아골렛의 눈매가 가늘게 좁혀졌다.
“그 사실을 밝힌다는 것은, 폐하께선 협상가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군요.”
“맞아. 사실 고민을 좀 오래하긴 했지. 놈이 내놓은 조건이 제법 매력적이었거든.”
“조건?”
“앞으로 있을 멸망. 세 번째, 네 번째 그리고 다섯 번째 멸망의 정보를 준다고 했다. 놈들의 강점, 약점 같은 거 말이다.”
“그걸 거절했다는 것인가?”
이번에 물은 건 양인현이었다.
레시듀도 그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렇다.”
“이유가 무엇인가? 협상가가 제시한 다섯 명이 그토록 터무니없는 인재였나. 도저히 두 번째 멸망을 막을 수 없을 만큼?”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이참에 놈이 고른 다섯이 누군지 말해 줄까?”
뚜렷한 대답은 없었으나 모두 흥미를 느끼고 있는지 시선이 모였다.
레시듀가 손가락을 하나씩 펴며 말했다.
“우선은 나. 그리고 이 자리에 없는 우리의 반왕 전하, 저기에 띠꺼운 표정으로 있는 청기사와 그 무릎에 인형처럼 앉은 루카. 마지막으로 검은 가시의 마왕까지. 이렇게 다섯이다.”
“…….”
여기서 또 침묵.
우선 몇몇 이들은 의아해했다. 협상가가 제시한 자들의 면면이 그렇게 터무니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멸망이 얼마나 강할지는 모르지만, 최강 전력인 반왕이 포함되어 있고 군림자와 4기사가 하나씩 포함되어 있다. 얼마나 강하든 쉽게 질 명단은 아니었다.
조금 더 머리를 잘 굴리는 이들은 선별된 이들 간에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찾았으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어째서 거절했습니까? 협상가가 속일 거라 생각한 겁니까?”
익숙한 목소리로 물어 온 건 레티프였다. 이 녀석은 회담장의 가장 구석진 곳에서 벽에 기댄 채로 서 있었는데, 덩치도 큰 주제에 여태껏 스스로를 잘도 감추고 있었다.
레시듀가 히죽 웃어 주며 말했다.
“그것도 이유 중 하나지. 그러나 놈에게 상대를 속이겠다는 생각은 없을 것이다. 총 다섯 번으로 나뉜 멸망의 습격은, 그대로 놈들을 다섯 부류로 나눌 수 있기도 한데 각각의 멸망은 딱히 협력 관계가 아니다. 실제로 이 몸은 첫 번째 멸망과 두 번째 멸망이 싸우는 모습을 보기도 했지. 즉 이후에 들이닥칠 멸망에 대한 약점을 읊는 것은 두 번째 멸망, 협상가의 입장에선 배신이라고 할 만한 게 못 된다.”
하지만.
레시듀가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협상가가 거짓을 말하지 않아도, 놈이 말한 게 모두 사실이란 법도 없지.”
레티프의 고개가 살짝 기울었다. 무슨 말인지 제대로 깨닫지 못한 얼굴이었다.
반면 아골렛은 단숨에 숨겨진 속뜻을 눈치챘다.
“애초부터 협상가가 잘못된 정보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단 말씀입니까?”
“그렇다. 혹은 정보를 말해 줄 당시엔 사실이었는데, 그 이후에 바뀔 수도 있지. 애초에 멸망이란 놈들을 우리 식으로 이해하려 들면 안 돼.”
이때의 어조는 제법 무겁고 진지했기 때문에, 회담장에 앉은 이들도 잠깐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어떠한 결론을 내리기 전에 레시듀가 다시 말했다.
“그러니 확실한 사실만을 모아서 추측해 봤다. 우선 각 멸망이 동맹 관계가 아니고, 나아가 적대 관계인 건 분명하다. 이것은 이미 증명된 습성이야. 그리고 협상가는 통합세계의 인물 몇몇을 ‘바깥’으로 빼돌리려고 하고 있다. 무슨 의도로 그러는 걸까. 네가 대답해 봐라, 마왕.”
레시듀가 마왕을 보며 말하자, 그가 오래 생각하지 않고 대답했다.
“…습격이 동시에 발생하는 것.”
“……!”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소란의 파문이 조용히 번지는 가운데, 마왕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별한 다섯이 이곳을 떠나, ‘바깥’에서 두 번째 멸망과 싸울 때. 세 번째 멸망이 통합세계를 덮치는 것. 우리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이지만, 때문에 적에겐 최고의 전법이 되겠지.”
“그렇다. 참고로 이 몸은 그럴 확률이 최소 9할은 넘을 거라 보고 있지.”
레시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멸망은 동시에 들이닥치지 않는다… 애초에 그걸 위해 루카스가 저 너머로 넘어갔지만, 글쎄. 이젠 확신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금의 루카스가 제정신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으니까.”
“…….”
“만약 놈이 멸망의 총사령관으로서 통합세계의 멸망을 위해 진력을 짜내고 있다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할 것이다. 종류가 다른 멸망을 보냈을 때 우려되는 점이 상잔뿐이라면, 각기 다른 장소로 따로 보내면 끝나는 일. 즉 우리가 정말로 주목해야 될 건 두 번째 멸망이 아니다. 그 이후 통합세계에 들이닥칠 세 번째 멸망이지.”
긴 말을 끝내고, 레시듀가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회담장에 모인 이들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러니 되도록 전력을 온존해야 한다. 4기사나 군림자 같은 강자를 데려갈 수는 없다.”
“그 말엔 어폐가 있군.”
마왕이 말했다.
“세 번째 멸망만큼이나 두 번째 멸망도 만만찮은 적일 터. 심지어 그들의 영역인 ‘바깥’에서 싸우는 것이다. 오히려 위험부담은 세 번째 멸망 이상일지도 모르지. 두 번째 멸망 또한 막지 못하면 통합세계를 무너뜨릴 건 분명하다. 이러한 상황에 힘을 비축하는 게 과연 올바른 선택인가? 네가 말한 건 결국 모두 추측의 영역. 우선은 전력을 다해 두 번째 멸망부터 이겨 낸 다음 고민해야 하지 않겠나.”
“…….”
레시듀가 묘한 얼굴로 마왕을 보았다.
예상도 못 했다. 회담장에 있는 자들 중 가장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뱉는 게 검은 가시의 마왕일 줄이야. 단순히 레시듀의 말에 반박만 하고 있는 게 아니다. 마왕의 목소리에 담긴 건 악의가 아닌 근거였으니.
“모두 맞는 말이다. 때문에 바깥으로 나가는 멤버엔 각별히 신경을 기울여야겠지. 단순 무력만으로 뽑을 생각도 없고.”
“이제 슬슬 그들에 대해 밝혀야 되지 않겠나.”
“그러지. 우선 첫 번째 인물부터 발표할까?”
레시듀가 당당히 스스로를 가리켰다.
“물론 이 몸이다.”
이것은 비기닝 위저드의 자리를 내려놓을 때부터 모두 예상했던 일이므로, 소란은 없었다.
레시듀가 이어서 말했다.
“두 번째는… 저기 있군.”
대놓고 삿대질을 하자, 그 손가락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가 쭉 돌아갔다.
한순간에 좌중의 시선을 독차지하게 된 여인은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
“저요?”
“그래. 이리스 피스파인더, 네가 두 번째다.”
“…….”
이리스는 목소리만큼이나 당황한 얼굴을 했는데, 뒤이어 기쁜지 슬프지 알 수 없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의 내면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이리 와라, 검은 마녀.”
“그렇게 부르지 마요.”
“그럼 이리스?”
“루카스처럼 부르지도 말고요.”
“그래, 미스 피스파인더. 빨리 좀 와라. 사람들 기다리잖아.”
“…….”
이리스가 벌레 씹은 얼굴로 한숨을 쉬더니, 타박타박 걸어왔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가축 같은 모습이었다.
나란히 선 이리스가 힐끗 시선을 보냈다.
“왜 나예요?”
“네 능력은 아주 귀중하니까.”
“그건 대답이 될 수 없는데요.”
“설명은 좀 있다 할 테니 얌전히 있어라.”
이리스가 관자놀이를 꾹 누르더니 결국 침묵했다.
레시듀는 옆에 나란히 선 이리스를 보며 흡족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세 번째 인물부턴…….”
“잠시.”
묵직한 목소리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레시듀는 자신의 말이 잘렸으나 딱히 기분 나쁜 표정을 짓지 않았다. 오히려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그 전에 한마디 해도 되겠소?”
“죽음의 흑기사, 반왕의 명으로 억지로 회담에 참가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의견을 낼 거라면 환영이지.”
“고맙소.”
흑기사 루시드가 덤덤하게 감사를 표한 다음, 레시듀를 똑바로 보며 말했다.
“레시듀라고 했나. 그대가 선별할 다섯에 나를 포함시켜 주시오.”
“음. 방금 전 말은 취소하지. 네놈, 회담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군?”
“다 듣고 있었소. 4기사를 넣지 않겠단 말 또한 들었고.”
“그런데도 넣어 달라?”
루시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 레시듀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이 김에 확실히 말하겠다. 규칙에 예외는 없다.”
“예외가 아닐 것이오.”
“무슨 뜻이냐?”
루시드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흑기사 자리를 사임하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