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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36화 (763/857)

외전 536화

세디는 두 명의 군림자를 보았다. 그들은 어울리지 않게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왕성에 입장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변신인지, 군림자 특유의 단순한 변덕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저들이 순순히 인간의 모습을 취한 것만으로 평소와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속에 어떤 꿍꿍이가 있던 말이다.

“생각보다 더 황폐한 곳이군. 과연 전 우주의 쓰레기장이다.”

뇌존이 낮게 웃으며 걸어가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어느 방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네 녀석은 왜 그곳에 있나?”

시선이 향한 곳에 모여 있던 무리는, 순간적으로 뇌존이 말을 건네는 대상이 누군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곳은 허주의 대리자들이 모여 있는 장소였다.

깨달은 것은 단 한 명.

직접 지목을 받은 존재, 베니앙 아르젠토였다.

“지금은 여기가 맞아.”

베니앙이 평소와 달라진 목소리, 어조로 말했다. 단순히 목소리만이 아니라 표정 또한 가면이라도 바꿔 쓴 것처럼 달라졌다.

뇌존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 알아서 하도록.”

“뇌존.”

“뭐냐.”

“말썽 피우지 마. 오늘은 그런 자리가 아니야.”

“…….”

베니앙의 말에 뇌존은 알 수 없는 미소만을 보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움직인다.

4기사가 있는 방향으로.

‘…….’

루카는 지척까지 다가온 뇌존을 보며─ 이 존재의 체격이 예상보다 더욱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뭔가 마주 보고 있으니 원근감이 마비되는 것 같다.

저 몸뚱이가 천장에 닿을 것처럼 커다랗게 느껴지는 이유는, 단순히 실질적인 체격이 거대하기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순간 루카가 느끼고 있는 복합적인 감각 중엔 익숙함도 있었다. 어찌 됐든 눈앞의 존재가 자신을 구해 준 남자의 원류源流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럽게.”

그때 바로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루카를 안고 있는 페일이었다.

“크네. 목 아프게. 그 덩치로 어디 앉을 데는 있겠어요?”

뇌존은 입가를 비틀며 맨바닥에 털썩 앉았다. 체격이 워낙 커서 그런지, 그제야 의자에 앉은 자들과 눈높이가 맞았다.

옆에 서있던 마왕의 체격은 상대적으로 평범했는데 그자는 무관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본 뒤 그 자리에 앉았다. 뇌존처럼 바닥에 앉은 건 아니었고, 보이지 않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모양새였다.

“안 온 놈들이 많구나. 아직 안 온 것인지. 결국 안 올 것인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뇌존이 다시 말했다.

“4기사도 한 명이 없는 듯하고, 거인의 후계자인지 뭔지 하는 놈도 보이질 않고. 명성이 자자한 반왕인지 뭔지 하는 놈도 직접 보고 싶었는데, 결국 출석하지 않은 것이냐?”

“개최자도 없군.”

마왕이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시듀 말이다. 이 자리를 계획한 건 그자가 아닌가?”

“그것은 이 몸도 궁금하군.”

페일의 시선이 아골렛을 향했다. 창백한 눈동자엔 마찬가지로 의문이 일렁이고 있었다. ‘그 새끼는 어딨어?’ 그렇게 묻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그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루카도 마찬가지였고, 여태껏 가만히 있던 흑기사도 나른한 시선을 보냈다. 먼저 와 있던 십이허주나 대리자도 비슷한 눈빛을 보냈으나, 이 상황에 의문을 느끼고 있는 건 아골렛도 마찬가지다.

아예 다른 장소에서 각자 출발한 것도 아니고, 왕성 바로 앞에서 헤어졌다. 곧바로 따라간다고 덧붙였고. 그 이후로 30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까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니.

…물론 이러한 의문은 속에서만 휘몰아쳤고, 아골렛의 겉면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이들이 보이는 의문에도 딱히 대꾸해 주지 않았고.

“아직 모두 모이지 않았잖습니까.”

“개최자는 마지막에 등장한다. 뭐 그런 것이냐?”

“비슷하지요.”

“어떤 낯짝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었는데 아쉽군.”

“…….”

아골렛은 뇌존을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감각이 날카로워지는 느낌이다. 느긋하게 웃고 있는 얼굴, 전혀 숨기지 않는 기백, 압도적인 위용이 느껴지는 육체. 이 모든 것이 맞물려서, 터지기 직전의 화약고 같은 긴장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자리에 온 건 개최자인 폐하의 뜻에 암묵적으로 수긍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호오. 그놈의 뜻이 뭐길래.”

“그분의 진의는 제가 헤아리기에 너무나도 깊지만, 어설프게나마 짐작해 보자면 ‘멸망 대책’과 ‘화합’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화합?”

“네. 이 자리를 화합의 장으로 만드는 겁니다.”

뇌존이 얼이 빠진 얼굴로 두 눈을 깜박였다.

그리고 뒤통수를 긁적거리더니 말했다.

“네놈이 말한 폐하라는 것이, 이 몸에게서 파생된 찌꺼기 잔념. 그러니까 스스로를 레시듀라고 부르는 그 존재가 맞겠지?”

“그렇다더군요.”

“크하하…….”

뇌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여전히 조소가 묻은 눈빛으로 아골렛을 보았다.

“너, 정복의 백기사야. 네놈이 무슨 연유로 놈을 왕으로 섬기는지, 어떤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충신 흉내를 낼 거라면 좀 더 생각이란 걸 깊게 해야 되지 않겠느냐?”

“무슨 의미신지.”

“네놈은 그놈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단언하는 말투에 아골렛의 미소가 조금 흐릿해졌다.

“썩어도 이 몸에게서 파생되어 나온 녀석이다. 그런 놈이 화합을 위해 이딴 자리를 만들어? 크하하…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내가 단언하겠다. 그놈이 무슨 난리를 치고 다녔든 간에. 오늘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간단하다.”

좌중에 있는 자들 모두가 뇌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일단 이 자리에 출석하기는 했지만, 개최자─ 레시듀의 의도를 정확히 모르는 자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골렛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연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목을 끄는 첫 등장, 천장에 닿을 듯 커다란 체격, 듣기 싫을 만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목소리.

덕분에 이곳에 있는 자들 모두가 원하지 않아도 뇌존에게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멸망과의 싸움에선 얻을 게 없다. 그것은, 일단 죽일 수 있고 의지도 갖춘 것 같지만 생명체라고는 볼 수 없지. 굳이 말하자면 현상에 가깝다. 백을 죽이든, 천을 죽이든. 그것이 상대라면 얻을 건 없지.”

“편협적인 논리군요.”

뇌존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성장이 무엇인지 모른다. 태어날 때부터 최강이었다. 단련하지 않았다. 고뇌가 없었다. 방황도, 추락도, 삶에 굴곡과 곡선도 존재하지 않았다. 쭉 평행선이었지. 4기사. 네놈들에 대해서도 좀 알아봤지. 통합세계가 된 이후엔 정보를 구하는 게 어렵지 않더구나.”

“…….”

“네놈들의 삶엔 굴곡이 있더군. 군림자와 분명히 차별화되는 점이 그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우리는 대극점이다.”

뇌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르릉, 쿠릉…….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려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구름 한 점 없이 창백한 하늘이 부서진 천장 너머로 훤히 보이는데도 그랬다.

“이 자리엔 싸울 자들이 많아 보이는군. 이 몸의 관점은 이렇다. 이곳에서 네놈들 전부와 싸워서 이긴다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장이란 걸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은 답을 바란 물음이 아니었다.

뇌존은 말을 마침과 동시에 기백을 드러냈고, 갈무리되지 않은 투기는 사방을 향해 야생마처럼 내달렸다. 누군가 제지하거나, 한 마디 붙일 틈도 없었다. 뇌존은 자신의 의도를 짤막하게 밝혔고, 그 의도대로 행동했다.

폭사된 투기가 하얗게 물들더니, 곧 그 성질이 바뀌었다.

꽈르릉!

군림자 뇌존의 고유의 외력인 ‘우레’였다. 힘 조절 따위는 하지 않았다. 뇌전은 상대를 갈기갈기 찢을 기세로 쏘아져 나갔고, 그 공격은 피아를 구분하지 않았다.

십이허주와 그 대리자는 물론이고 4기사, 심지어 옆에 서 있던 마왕과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레티프에게도 향했다. 레티프는 익숙하다는 쓰게 웃으며, 자신의 소울 웨폰을 꺼내 그 습격에 대응했다.

우레는 사방팔방으로 펼쳐졌지만, 그 줄기 줄기에 담긴 힘은 균등했다. 이곳에 있던 자들은 피하거나, 막거나, 혹은 비슷한 힘이 담긴 공격을 휘둘러 상쇄시켰다. 몇몇은 가볍게, 몇몇은 어렵게, 몇몇은 간신히.

“호오…….”

그러나 뇌존은, 어찌 됐든 힘 조절을 하지 않은 우레를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방금 공격으로 쓰러진 자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정신이 나간 것인가!”

누군가 거친 목소리로 뇌존을 힐난했다.

들은 적 있는 목소리다. 뇌존은 미소를 짙게 만들며 그쪽을 보았다.

“페루스, 이렇게 직접 마주하게 되니 감개가 깊구나. 왜 꼭대기 우주에 처박혀 있지 않고 여기까지 기어 나왔느냐?”

“…대답할 의무는 없다.”

“그럼 죽을 테냐.”

이 또한 물어보는 듯한 말투였으나, 레시듀의 손가락에서 응축된 우레가 섬광처럼 쏘아져 나갔다. 방금 전 넓게 퍼뜨린 공격보다 몇 배는 강력했고, 수십 배는 빨랐다. 페루스는 반응하지 못하고 가슴이 꿰뚫렸다.

“…헉!”

스스로 그렇게 느꼈음에도 몸뚱이는 무사했다.

직전 끼어든 남자가 그 공격을 쳐냈다.

뇌존이 그 남자를 보고 반가워했다.

“매상검 양인현. 예전에 이 몸이 신세를 좀 졌었지. 허의 세계에 대한 정보를 모을 때 말이다. 이제 그럴 필요는 없어졌지만, 이 몸이 매개체로 써먹었던 그 인간은 잘 지내는가?”

“네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크하하……. 그건 그렇지. 사실 관심도 없다. 오히려 네놈한테 관심이 가는군. 검술이 보다 정교해진 것 같은데, 한층 더 강해진 건가? 어떻게? 무엇이 네놈에게 영향을 끼쳤는가.”

뇌존은 자신보다는 약하지만, 평범한 절대자보단 훨씬 강한 남자가 어떻게 한 단계 더 수준을 높였는지 궁금한 기색이었다.

물론 양인현에게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마주하고 있는데도 이상한 거북함과 불쾌감이 차올랐다. 정말 이 존재가 그 남자가 같은 존재였었나? 확실히 말투도, 분위기도 비슷하다.

하지만 뭔가, 결정적인 게 다른 듯한─

생각을 잇기도 전에 미친 사람이 터뜨리는 듯한 광소狂笑소리가 들렸다. 뇌존이 양손을 펼치며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양인현은 호흡을 정돈하고, 칼자루를 잡은 손아귀 힘을 더했다. 상대는 맨손으로 보였으나 기초적인 체격이 압도적으로 크다. 거인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다. 팔만 휘둘러도 검을 쥔 양인현과 사정거리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몸뚱이의 강도도 보통이 아닐 테니, 맨몸이라고 이쪽에 이점이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꽈과광!

충돌한 직후, 뇌존의 주먹이 세 번 연이어 꽂혔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양인현이 받은 충격의 수는 그것의 열한 배였다. 도합 서른세 번의 공격을 받은 듯 검신이 삐걱댔는데, 한 번의 공격이 맞닿을 때마다 뇌존의 육체를 감싼 우레가 한 걸음 늦게 공격해 왔기 때문이었다.

우레는 마치 의지를 가진 그물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고, 신축伸縮하며 덮쳐왔는데 그 움직임엔 일정한 법칙이랄 게 없어서 막는 것이 대단히 힘들었다.

“…….”

고작 세 번의 교전에도 상대와의 격차가 실감났다. 이것이 삼천세계의 절대강자 군림자. 양인현의 입가도 차갑게 비틀렸다. 이러한 상황에도 절망보단 오기가 치솟았다. 확실히 4기사보다 군림자 쪽이 더 적의가 치솟는다.

시련이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면, 최근 양인현은 강해질 수 있는 기회를 연속해서 손에 넣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머리와 심장, 이윽고 육체 전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직하게 싸워선 승산이 없다. 다른 수단이 필요하다. 비겁한 방법을 택하라는 것이 아니다. 변수를 창출해야 하고, 우회하는 방식이 필요하다. 우직함만으로는 뇌존에게 제대로 된 상처 하나 입힐 수도 없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죽음벌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주의 대리자들도 뇌존을 둘러쌌다.

그리고 퓨처릭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 갑작스런 전투에서, 자신이 직접적으로 도울 수 있는 건 없었다. 애초에 전투는 퓨처릭스의 소관이 아니었다. 그래도 분석과 지휘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저들이 쉽게 따를 것 같지는 않지만.

“십이허주 셋과 떨거지들이라……. 오프닝으로 적절하군.”

뇌존이 웃음을 터뜨리며 싸움 속으로 몸을 던졌다. 상처를 도외시한 육탄공격이었는데,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감히 정면으로 받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뇌존이 착지하자,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바닥이 부서졌고 성 전체가 떨렸다.

세디는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향한 곳은 뇌존이 있는 격전지가 아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홀로 음울하게 서 있는 또 다른 군림자, 마왕의 앞이었다.

“당신의 목적도 뇌존과 같습니까?”

“…….”

“당신도 이곳에 있는 자들과 싸우고, 성장을 도모하는 게 목적이라면.”

“목적이라면?”

“제가 상대하겠습니다.”

마왕의 눈동자에 흥미로운 빛이 감돌았다.

“내게서 힘을 받은 네가, 나와 싸우겠다는 것인가.”

“그 사실이 꺼림칙하다면 그 힘, 거둬 가십시오. 이제 나의 힘은 외력만이 아닙니다.”

“그렇겠지. 0번째 악마. 십이허주 세디 트로우맨.”

마왕이 낮은 목소리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다.”

그리고 느긋하게, 보이지 않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문 밖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누구를?

더 올 인물이 남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들 중 마왕이 기다릴 만한 상대는 누가 있을까. 개최자인 레시듀,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반왕…….

그때였다.

활짝 열린 문 바깥,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에서 누군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육안으로 간신히 확인될 만큼 흐릿한 형상이었는데, 시선에 들어온 직후부턴 쉽게 외면할 수 없는 존재감이 드러나 누구도 고개를 돌리지 못했다.

“왔군.”

검은 가시의 마왕이 중얼거렸고, 한창 싸우던 뇌존도 힐끗 시선을 보냈다. 여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그 존재는 복도를 지나쳐, 회담실 안아 첫 발자국을 내디뎠다.

타박타박, 검붉은 갑옷에 넝마처럼 펄럭이는 망토. 기이한 형태의 검을 쥔 기사.

마지막 4기사, 전쟁의 적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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