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30화
뇌류는 두르지 않고, 물리력만을 담아서 손을 뻗었다. 반왕의 내구력은 통합세계 최강일 테니 힘 조절할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내뻗은 손은 반왕의 머리카락 한 올조차 스치지 못한 채 튕겨 나갔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의 탄력에 가로막힌 것 같았는데, 진상은 반왕이 육안으로 포착하기 힘든 속도로 공격을 거둬낸 것이었다.
반왕은 적의 대신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갑자기 무슨 짓인가?”
“한 대 맞자고.”
“뭐?”
레시듀는 연이어 대꾸하지 않고, 두뇌의 모든 사고력을 반왕 공략에 할당했다. 저 철벽같은 방어를 어떻게 뚫어내고, 한 대 쥐어박을지에 대한 고민.
사고를 진행하면서도 육체는 쉬지 않았다. 다시 한번 손을 뻗는다. 이번엔 양손으로. 허와 실, 구분이 가지 않게 움직임에 변화를 줬다. 상대방의 입장에선 어떻게 공격할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절묘하게─
그러나 반왕은 그 자리에 서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은 채 레시듀의 공격을 모두 막아 냈다. 레시듀는 찰나지간 총 마흔아홉 번의 공격을 가했는데, 그 모두를 정확히 간파한 것이다.
파앙!
마지막 동작엔 제법 힘이 실려 있어서 레시듀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
손바닥으로 후려친 건가? 레시듀는 복부를 더듬었다.
명치나, 가슴 정중앙을 노릴 수도 있었는데 일부러 복부를 가격한 듯하다. 이것도 반왕의 성향에서 묻어나온 배려일까. 뭐가 됐든, 동정받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아 레시듀의 입가가 비틀렸다.
하지만 지금은 자존심을 내세울 때가 아니지.
어쩌면 장법掌法이야말로 반왕의 주력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모든 무술, 마법, 주술, 권능, 이능의 힘에 빠삭한 존재라고 해도 그것들 모두를 싸움에 완벽히 응용할 수는 없다. 억지로 죄다 쓰려고 들면 시너지가 나기는커녕 오히려 전력이 약화되겠지.
그러니 반왕은 무수한 전투를 겪으며, 자신의 적성에 가장 알맞는 공격 수단을 찾았을 것이다. 그것이 장법일 확률이 높은 것이고.
‘역시 맨손으로는 힘들군.’
그렇다고 시공일보를 써도 큰 효과를 볼 것 같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레시듀는 다시 관뢰를 꺼내들었다. 후끈, 손바닥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번졌다. 눈에 보이진 않으나, 지금 레시듀는 양손에 불길을 두르고 있었다. 그 불길은 고요히 타오르며, 손에 들린 금속무기의 형태를 크게 바꾸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 만들었던 형태, 몽둥이.
그런데 이 전투에 활용하기엔 길이가 너무 짧은 것 같아 두 배 정도를 더 늘렸다. 굵기는 좀 줄었으나 이게 더 효과적일 것이다.
레시듀는 이 형태를 진뢰곤震雷棍이라 부르기로 했다.
슬쩍 쥐어 보니 손에 단단히 감기는 느낌이 들었다. 역시 이 형태가 손맛은 가장 좋단 말이야. 공방의 밸런스도 뛰어나고, 근접전에도 알맞은 최적의 형태.
파지직!
처음 만들었을 때와 달리, 이 몽둥이엔 레시듀가 뇌류마저 흘려 넣을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웬만한 절대자들이 소울 웨폰이랍시고 들고 다니는 것보다 수십 배는 뛰어난 무구가 탄생했다.
“흡!”
다시 한번 거리를 좁힌 레시듀가 전뢰곤을 휘둘렀다.
우선은 견제.
약 세 발자국 정도의 간격을 둔 채 연속해서 찌르기. 그러나 공격을 내뻗고, 거두고, 다시 내뻗는 과정이 너무나도 신속해서 언뜻 보기엔 레시듀의 어깨에서 튀어나온 수십 마리의 뱀이, 입을 쩍 벌리며 상대를 물어뜯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렇듯 날카롭게 보이는 모습과 달리 몽둥이의 끝부분은 뭉툭하다. 혹 타격에 성공한다고 해도 치명상을 입힐 수는 없다. 상관없다. 어차피 레시듀에게 이 교전은 상대를 다치게 하거나,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
반왕도 입을 닫았다. 더 물어 봤자 대답을 들을 수 없단 걸 깨달은 걸까? 옷자락을 펄럭이며, 대화보단 교전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뒤이어 반왕은 레시듀의 연속 찌르기를 모조리 무효화시켰다. 피하고, 흘리고, 받아치고─ 이번엔 반격을 날리지도 않았는데, 공세가 끝난 시점에서 레시듀의 몸은 반보 정도 밀려나 있었다.
명백하게 기세만으로 밀렸다는 증거였기 때문에 말문이 턱 막혔다. 붙을수록 터무니없는 녀석이란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체격의 차이 때문에, 레시듀의 사정거리는 반왕보다 최소 1.5배에서 2배는 더 길다. 거기에 진뢰곤이란 무기를 꺼냄으로써 그 길이는 또 다시 2배 늘어났고.
그러나 반왕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턱없이 짧은 팔다리로, 무기를 든 레시듀보다 더 긴 사정거리를 소유한 것처럼 싸웠다. 이것은 반왕의 전체적인 신체능력이 레시듀보다 최소 세 배는 위라는 것을 의미했다.
저 철벽의 방어태세를 어떻게 뚫을 수 있을까? 무기의 형태를 다른 형식으로 바꿔 볼까. 아니면 정말로 죽일 기세로 달려들어야 할까.
신기하게도 공격에 살기를 섞는다고 반왕을 뚫어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살기를 섞는 편이 공격력은 훨씬 배가 될 텐데도 그렇다. 물론 근거 없는 추측이기 때문에 실제론 다를 수도 있지만……. 레시듀는 우선 이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그렇다면…….’
머리가 뜨겁게 과열되기 시작했다. 스스로의 호흡이 뜨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야가 뿌옇게 물들더니, 뇌류를 둘렀을 때면 귓전을 울려대던 천둥소리가 툭 끊겼다. 이명 같은 게 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반대로 한없이 고요한 호수 위에 서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반왕의 움직임이 느릿하게 보였다. 돌연 극소시간대에 진입하기라도 한 건가? 그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인데.
긴가민가한 감각 속, 문득 시선은 진뢰곤으로 향했다.
‘길군.’
레시듀는 충동적으로 진뢰곤의 길이를 줄이기 시작했다. 정확히 뚝 쪼갠 것처럼 절반으로, 거기서 또 절반을 나눈 다음, 또다시 반으로…….
그러자 봉처럼 길쭉했던 진뢰곤은 아주 짧은 몽둥이, 그보단 회초리에 어울릴 만한 크기가 되었다.
“아직 긴가?”
그러자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아직 길군.”
“…….”
반왕이었다.
이 녀석도 반쯤 넋이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레시듀는 왠지 모르게 반왕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가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더 줄였다간 다루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지금 나의 수준이니까.”
“…….”
“새삼스럽지만 이 몸의 목적을 다시 말하겠다. 나는 네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군.”
“이유는?”
“때린 다음에 말해 주지.”
“그럼 때린 다음에 말해야 하는 이유는 들려줄 수 있는가.”
“지금 말하면 멋이 없거든.”
반왕은 의아한 얼굴이었으나, 더는 묻지 않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반왕.”
“뭐지.”
“살의와 적의는 숨긴 채 한번 겨뤄 보지 않겠나?”
이 말에 반왕은 잠깐 멈칫했으나,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교전이 시작됐다.
레시듀는 성큼 반왕과의 거리를 좁혔다. 반왕이 일수一手를 뻗었다. 교전이 시작하고 처음으로 보인 공세였다.
그 사실만으로 레시듀는 세 발자국을 물러나고 말았고, 반왕이 맹추적했다. 어깨, 허벅지, 옆구리, 간신히 급소를 빗겨난 공격이 육체에 적중하며 둔탁한 통증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레시듀는 이곳에 도착한 뒤, 반왕과 아골렛의 공방을 조금이나마 지켜본 게 올바른 선택이었음을 깨달았다.
그 공방을 눈에 담지 않았다면 지금 쏟아지는 반왕의 공격을 두 배는 더 허용했을 것이다.
한동안 그렇게 두들겨 맞다 보니 반왕의 공경에 좀 익숙해졌다.
레시듀는 짧아진 진뢰곤으로, 반왕이 그랬던 것처럼 공격을 부드럽게 흘린다. 그러면서도 틈틈이 다리를 놀려 나아가니, 세 걸음 벌어졌던 거리는 한 걸음까지 좁혀져 있었다.
그러나 그때부턴 훨씬 힘들어졌다.
반왕의 공세는 변함이 없었는데 여태까지와 달리 흘리거나 피할 수도 없었다. 태풍은 중심부에 가까울수록 고요하다던데, 반왕은 그 반대였다. 여태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묵직한 공격이 노도처럼 쏟아진다.
한 걸음.
이 간격, 이곳이 반왕의 영역이군.
깨달음과 함께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어 피하려 했으나, 레시듀는 반왕의 공격 중 1할도 제대로 피하지 못했다. 나머지 9할의 공격이 전신을 세차게 두드렸는데, 살의가 없다고 해도 위력마저 없는 건 아니었다.
레시듀의 몸뚱이는 얼마가지 않아 피투성이가 됐고, 한번 손을 뻗을 때마다 목숨이 깎여 나갔다.
그 속에서.
불현듯 반왕이 기습적으로 펼친 시공일보를 완벽히 피할 수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한 걸음, 주변 한 걸음 이내의 영역은 반왕의 소유였다. 반왕은 그곳을 지나는 모든 공격에 대응하는 게 가능했다.
이것은 단순히 속도의 문제가 아니었다. 설령 시공일보의 속력이 몇 배는 더 빨라진다고 해도 반왕에겐 통하지 않을 것이다.
일격필살 같은 공격은 눈앞의 존재에게 통하지 않는다. 반왕은 공격을 인식하기만 한다면, 어떤 것이든 대응하는 게 가능하다……. 때문에 십이허주의 배신엔 큰 타격을 입은 것이다. 그들이 공격할 것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즉 반왕에게 있어 상대의 공격은 속도나 위력이 아닌, 단순히 인식하느냐, 인식하지 못하느냐의 문제란 것인데…….
그 말은 반왕을 상대로 장거리에서 공격을 펼치는 건 오히려 악수가 된다는 의미였다. 이런 멍청이가, 그것도 모르고 길쭉한 봉을 휘두르며 압박하려 했다니.
‘승기를 잡으려면 오히려 거리를 좁혀야 한다.’
한 걸음 남짓, 반왕의 영역까지 말이다. 물론 그곳에 진입한다고 공세가 약해지는 건 아니고, 오히려 몇 배는 더 거세지겠지만 이것 외에 뾰족한 수단은 없다.
초근접전에서 난타전을 펼치는 것만이 유일한 공략법이다.
그것이 결론이라서, 레시듀는 그리했다.
…….
…….
얼마나 지났나.
얼마나 싸웠나.
한 걸음.
단 한 걸음이 아직까지 좁혀지지 않았다.
시야는 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육체 대부분에서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공격을 하고 있는 건지 단순히 몸뚱이를 흔들고 있는 건지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무엇이 문제일까? 어떤 게 해법일까.
레시듀는 전례가 없을 만큼 거칠게 움직이며, 두뇌 또한 그에 못지않게 굴렸지만 문제점과 해법, 무엇 하나 뚜렷하게 알 수 없었다.
그때 갑자기 반왕이 말했다.
“허와 실을 나눠서 공격해도 내겐 통하지 않는다.”
“…….”
“수 싸움에서 나를 이기려 들지 말도록. 나는 강자의 집대성, 가장 완전한 초월자, 4기사의 주인이자 십이허주의 주인, 네 군림자의 적대자로서 만들어진 존재. 하늘 아래 존재하는 모든 무학武學과 전투방식은 나의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으나.
반왕이 지금 레시듀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반왕 또한 반쯤 멍해 보이는 낯짝을 하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큰 경험치를 얻고 있는 건 레시듀만이 아닌 듯하다.
“어디까지나 정직하게 맞서 싸우라는 것인가?”
레시듀가 어눌한 발음으로 묻자, 반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충고대로 해봤다.
허수를 버리고, 모든 공격에 진심을 담아서, 진력을 다해 쏟아냈다.
번개.
수십, 수백, 수천 갈래로 찢어지는 번개처럼 몰아치며─ 어느 순간.
“…….”
“…….”
양측은 동시에 멈췄다.
레시듀는 물끄러미 자신의 손을 보았다.
이걸 한 대 때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주먹이 정수리에 툭 부딪친 듯한 느낌인데.
아무렴 뭐 어떤가.
“…뒤지게 힘들군.”
더 이상 움직일 기력도 없어서, 레시듀는 그 자리에 대자로 뻗어 버렸다.
“…….”
빨갛게 물든 시야가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오며, 레시듀는 기계로 이뤄진 하늘을 눈에 담았다. 철골과 전선 따위가 거미줄처럼 얽혀 강철로 된 정글을 보는 것만 같다.
미래도시의 하늘이었다. 그 아래에 온갖 창의적인 형태의 날 것들이 비행하고 있고…….
“이것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군.”
반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시듀는 대꾸할 기력도 없어 시선만을 보냈다.
잠깐 머뭇거리던 반왕이 옆으로 오더니 조심스레 앉았다.
“이제 말해 줄 수 있나? 나의 머리를 때리려던 이유 말이다.”
레시듀는 잠시 혓바닥을 굴리며 입안을 확인했다. 치아는 재생이 되고 있고, 찢긴 볼 안쪽도 그럭저럭 메꿔졌다.
슬슬 말하는 데 무리가 없을 것 같아서 입을 열었다.
“엄청난 바보를 한 명 보았는데.”
“…뭐?”
“그 고집불통의 바보는 머리가 단단히 굳어 있어서, 누가 무슨 말을 지껄여도 제대로 귀담아듣질 않더군. 그저 부모가 해준 말을 세상의 진리인 것처럼 믿고 따랐지. 심지어 적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게 강하기까지 했다. 불행한 일이었지.”
잠깐 침묵하던 반왕이 물었다.
“…어마어마하게 강한 것이 왜 불행한 일인가?”
“한 대 때려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소리지.”
“반왕 전하, 충고란 건 내뱉는 쪽보다 들어먹는 쪽의 마음가짐이 훨씬 중요하다. 머저리 짓을 하고 있는 놈에게 백날 잔소리를 늘어놔 봤자, 그놈이 들을 생각이 없으면 벽에다 대고 떠드는 셈이지. 그럼 그 말귀 못 알아듣는 머저리의 눈을 뜨이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쯤 반왕은 살짝 넋이 나간 얼굴로 되물었다.
“한 대 때리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는구나.”
“…아니. 난 모르겠다. 말에 담긴 뜻을 파악할 수가 없군. 그 단순한 폭력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나?”
반왕이 무척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어서, 레시듀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친절히 설명해 줬다.
“머리통을 후려치는 행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무례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아주 무례하고 모욕적인 행동이지. 만약 되도 않는 잡놈이 그딴 짓을 저지른다면, 이 몸은 그 녀석의 머리 위에 벼락을 떨어뜨릴 것이다.”
“…….”
“하지만 방금 네가 날려 보낸 녀석, 백기사 아골렛. 혹은 이 자리엔 없지만 매상검 양인현 같은 남자가 같은 짓을 저지르면, 이 몸은 당황하며 생각하겠지.”
“어떤 생각을.”
“내가 모르는 사이에 무슨 실수를 했나, 하고.”
레시듀가 반왕을 보며 말을 이었다.
“문제의 원인을 상대가 아닌 나에게서 찾는다는 뜻인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그 둘 모두, 이 몸과 대등한 존재로 인정하기 때문에 피어나는 생각인 것이다. 아골렛이나 양인현 정도의 사내라면 허튼짓을 저지르지는 않는다는 신뢰가 깔려 있는 거지.”
반왕의 눈동자가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이게 머리통을 후려치는 이유다. 다짜고짜 머리를 한 대 때릴 수 있는 사이. 머저리 짓을 할 때면 앞뒤 안 가리고 저지를 수 있는 관계. 네가 헛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신하들이 그러겠나?”
“아니.”
“아니면 너의 적들이 그러겠나.”
“…….”
“그것도 아니지. 둘 모두 아니야. 잘 듣도록 해라, 이 머저리 녀석아. 사람은 종종 얼간이 같은 짓을 저지르는데, 스스로는 그게 아둔한 짓이란 걸 인식하지 못한다. 그럴 때면 옆에 있는 놈이 친히 뒤통수를 후려쳐 그 정신을 일깨워 줘야 하지. 그런데 나보다 약하거나, 모르는 낯짝이라든가, 혹은 눈엣가시 같은 놈이 그러면 싸우자는 얘기밖에 더 되겠나? 그게 아니더라도 귀담아듣지는 않겠지.”
“…….”
“그럼 어떻게 그 무례한 짓을 납득시키는가. 우리 같은 놈들에겐 단순한 해결법이 있지. …결국 상대를 인정하는 데에 있어 최대 기준점은 무력이다. 이 몸을 봐라. 반왕. 네놈의 영역 안까지 친히 진입해서, 노도와 같이 쏟아지던 공격을 뚫고, 결국 머리를 한 대 때려 줬다. 지금 내가 내뱉는 말, 아까 내가 내뱉는 말. 그 무게가 같을까?”
레시듀가 고개를 저었다.
“다르겠지. 봐라. 벌써 이런 궤변 섞인 개소리를 늘어놔도 어느 정도는 집중하고 있지 않나.”
반왕은 말문이 막힌 듯 침묵하다가, 물어보았다.
“고작 그런 걸 위해서 나와 싸웠다는 것인가? 몇 번이고 죽으면서까지?”
“가치판단의 기준은 이 몸이 한다. 오히려 너는 스스로를 너무 폄하하는 구석이 있군.”
“…그렇다면 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반왕이란 존재를 그토록 고평가하면서, 왜 내 제안을 거절했는가.”
레시듀는 어쩐지 이 개소리 아닌 개소리를 모두 끝내면 곧바로 정신을 잃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지금도 뒤늦게 피로가 몰려와서 눈꺼풀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반왕은 아직까지 말귀를 못 알아듣고 어영부영한 기색을 보이니, 슬슬 짜증과 귀찮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반왕 전하, 난 너의 부모가 될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다. 지금 이 상황에서 그딴 관계론 득 될 게 하나 없어. 그러니 이것이 내 최후의 권고다.”
“…….”
“상하관계 없이, 언제든 서로의 뒤통수를 칠 수 있다는 조건으로, 대등하게.”
반쯤 흐릿한 의식 속에서 레시듀가 말을 마쳤다.
“함께 가시밭길을 걸어 보지 않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