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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16화 (743/857)

외전 516화

아무튼 혓바닥을 잘 굴려서 죽음벌레를 끌어들이긴 했으나, 그렇다고 레티프의 전력이 무슨 급진적인 발전을 이룬 건 아니었다.

여전히 상대해야 될 적은 강대하고, 그에 비하면 이쪽의 전력은 초라하다.

“…….”

레시듀는 지면에 새겨진 탄 자국을 보았다. 멸망이 있던 곳이다.

이상하게도 피어오르는 연기마저 거슬려서 손으로 휘저어 없앤 다음,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집행자는 갑작스레 이탈한 죽음벌레를 멍청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다가, 레시듀의 손짓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정돈된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데……. 이 녀석은 웬만한 상황으로는 냉정함을 잃지 않거나, 그렇다 하더라도 금방 침착해질 수 있는 성격 같았다.

굳이 흡사한 부류를 찾는다면 이리스 피스파인더가 있을 것이다.

즉, 놀리기 좋은 타입이란 뜻이다.

집행자도 이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죽음벌레보단 훨씬 까다롭겠지.

레시듀는 속내를 감춘 채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 아무튼. 이만한 인물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쉽지는 않은 일인데 가슴을 터놓고 좀 솔직하게 얘기해 보는 건 어떤가?”

“무슨 얘기요.”

“사람이 여섯인데 화젯거리가 없지는 않겠지. 우선 거기 너. 네놈은 이름이 뭐냐?”

레티프 옆에 있는 절대자를 보며 물었다.

그제야 녀석이 대꾸했다.

“아르쿠온사이드.”

레시듀가 싫어하는 이름이었다. 쓸데없이 길다는 뜻이다.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알, 쿠온, 이드 중에 무엇으로 부르는 게 좋나?”

“쿠온으로 해라.”

이 개자식은 말이 좀 짧군.

레시듀는 딱히 기분이 나쁘진 않았으나, 우선 눈앞의 인물이 싸가지가 없단 사실을 이해했다.

“너는 ‘일곱 이빨의 용’ 밑에 있었던 절대자인 것 같은데. 아골렛에겐 무슨 볼일로 왔나?”

거의 기대 없이 물어본 것이었는데 뜻밖에도 대답이 돌아왔다.

“이빨을 찾고 있다.”

“이빨이라면… 용의 이빨?”

“그렇다.”

“무슨 이유로.”

“주군을 부활시키기 위해서지.”

버릇없는 것과는 별개로 묻는 말에는 술술 대답해 줬다. 그러고 보니 레티프가 직접 물어보라고 했었지.

이런 의미였나? 은근히 순순한 놈이라?

레시듀는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군… 그것은 용의 명령인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모호한 질문이었으나, 레시듀는 그 의미를 곧장 이해했다.

“용의 인격 중 하나가 내린 명령이라는 것이군. 아마도 다른 인격은 모르는 일이거나, 반대했던 일이고…….”

그러자 쿠온이 묘한 눈으로 레시듀를 보았다.

“…뇌존의 잔념이라고 했던가. 확실히 전 군림자란 말이 거짓은 아닌 모양이군.”

그 말에 레시듀의 얼굴이 구겨졌다.

“뭐냐. 레티프. 이 몸의 정체가 무슨 세간의 상식마냥 퍼진 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이지?”

“군림자분들께서 많이 퍼뜨렸습니다. 특히 마왕께서 아주 열정적이시더군요.”

기절한 일주일 사이에 그딴 일이 있었군.

‘치졸한 놈.’

뒤통수 맞은 걸로 복수하는 건가? 레시듀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전 군림자? 당신이 말입니까?”

집행자가 당황한 얼굴로 레시듀를 보더니, 아골렛의 눈치를 봤다. 백기사의 폭주를 염려하는 듯한 기색이다. 물론 이럴 때를 대비해서, 레시듀는 모든 진실을 밝혀 뒀다.

역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땐 기만이 섞여선 안 된다. 남을 속이는 건 아주 나쁜 행위란 걸 새삼스레 깨달았다.

그때 옆에 멀뚱멀뚱 서 있는 죽음벌레가 보였다.

“…….”

물론 모든 일엔 예외란 게 존재하는 법이지.

아무튼 이 녀석은 레시듀가 전 군림자란 얘기를 듣고도 딱히 동요하는 기색이 없었는데, 만사에 무던한 녀석이라 그런 것 같다.

“그래. 너희들도 이름을 말해 줬으니 이쪽도 밝히는 게 예의겠군. 이 몸은 레시듀. 전 군림자 천둥우레의 뇌존의 잔념이자 당대 비기닝 위저드─ 꼭대기 우주의 주인이자 끝멸망의 조련사이며, 백기사가 충성을 맹세한 유일무이한 왕이기도 하다.”

“그것이 폐하입니다.”

아골렛이 살짝 덧붙이며, 호응을 유도하듯 갈채를 보냈다.

그 흐름엔 레티프만이 편승해 줬다. 자칫 잘못하면 분위기가 싸해질 뻔했는데. 기특한 녀석.

“이 몸의 최종 목표는 물론 멸망을 막는 것인데, 바깥에서 설치고 있는 얼간이들과 같은 취급은 하지 말아 줬으면 하는군.”

“어째서입니까?”

“내겐 뚜렷한 계획이 있다.”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을 갖고 있긴 합니다.”

집행자가 이어서 말했다.

“정말로 중요한 건 계획의 실현 가능성과 이룰 만한 역량이 뒷받침되는가입니다.”

“잘 말했다. 그래서 지금 이 몸이 가진 세력은 어떻지? 삼천세계를 아우르는 강력한 단체 ‘피스파인더 암릿’의 2인자이며 수십만 명이 주거하는 꼭대기 우주의 주인이기도 하다. 거기에 4기사 한 명을 부하로, 허주 두 명을 친구로 뒀으며 이 몸 스스로도 십이허주지. 게다가 끝멸망까지 나를 따르고 있다.”

“…대단한 세력의 주인인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반왕의 세력이 그대보다 더 강대합니다.”

“그건 틀린 말이다.”

“반왕을 따르는 4기사만 둘이고, 십이허주는 여섯인데도 말입니까?”

“따르는 세력만 보면 그렇지. 하지만 반왕과 그 휘하세력의 관계는 묘하다. 철저히 구분하는 게 옳다는 뜻이지.”

“무슨 뜻입니까?”

“반왕이 위험해졌다고 휘하세력이 도울까? 반대로 휘하세력이 위험해졌다고 반왕이 도울 것 같은가.”

집행자는 침묵했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반왕 세력의 강령綱領은 애초에, ‘이 세상에 퍼진 모든 멸망을, 반왕 홀로 처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휘하 세력의 역할은 반왕을 돕는 게 아니라─ 오히려 반왕을 도우려는 자들을 무력을 써서라도 막는 것이다.

새삼스레 정리하니 참으로 맛이 간 지도자와 단체였다.

아무튼 그 때문에 반왕 세력은 조직 특유의 유기적인 움직임, 끈끈한 관계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는데 특히 각 허주나 4기사 간의 접점도 거의 없었다. 반왕 이하는 모두 점조직으로 치부해도 좋을 정도.

서로의 역할이나 병력, 사상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고 기껏해야 형식적으로 덕대하지 않는 게 전부일 것이다. 사실상 하나의 세력이 아닌 연합으로 보는 게 더 올바를 정도다.

“반왕이 죽으면 자연스레 와해될 세력이지. 그다음에야 흡수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겠지만…….”

레시듀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될 말이지. 반왕은 그렇게 낭비해선 안 될 핵심 전력이다. 아, 그러고 보니.”

두 명의 허주를 보며 물어보았다.

“반왕이 멸망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한 것 같다는 소문을 들었다. 너희 둘은 그 정보의 진위 여부를 알고 있나?”

“우주에서 벌어진 전투 말이군.”

죽음벌레가 대답했다.

“나는 자세히 모른다. 알고 있는 건, 그 전투에 십이허주 세 명이 따라나섰다는 것뿐이지.”

“따라나섰다? 반왕이 허주와 협력했단 뜻이냐?”

“그렇지는 않다. 그 전투는 반왕 혼자서 치렀으니까… 아마도 보조하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전투 환경을 보다 원활하게 조성하기 위함이라든지.”

“…….”

죽음벌레는 그리 말했으나, 레시듀의 생각은 달랐다.

말했다시피 반왕은 고작해야 수백의 멸망 따위에 다칠 인물이 아니었다. 양인현의 매상검으로도 그자의 피부 한 겹 뚫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반왕을 따라 나선 세 명의 십이허주 중에 ‘하이드’가 있을 확률이 높다.

‘가장 시급히 처리해야 될 놈들이지.’

레시듀가 다시 물어보았다.

“그 세 명의 허주는 누구인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자연스레 시선이 집행자에게 향했다.

이 여자가 순순히 대답해 줄까 싶었는데, 의외로 선뜻 입을 열었다.

“추방자와 퓨처릭스, 마지막으로 골든아이. 제가 파악하기로는 이 셋입니다.”

“집행자. 너, 의외로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군.”

거리낌 없이 정보를 밝혔다는 게 그걸 의미했다.

“예.”

집행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들 중 한 명은 아마도 하이드겠지요.”

“취소. 아직 머릿속에 꽃밭이 피어 있구나.”

“예?”

“이 몸의 생각대로라면.”

레시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셋 모두 하이드다.”

* * *

휘오오-

바람이 한차례 불었다.

레시듀는 주변을 둘러봤다.

백기사가 머무르던 땅, 죽은 대지. 이제 떠날 순간이 됐으나, 전혀 아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레시듀의 생각이고, 아골렛은 어떨까?

그래도 제법 오래 이곳에 머물렀던 것 같으니, 녀석에겐 나름대로 정든 땅일지도 모른다.

“이만 출발하시지요.”

그러나 들려온 목소리는 모래사막처럼 건조했다. 아쉬움, 절절함같이 촉촉한 감정은 한 방울도 담겨 있지 않았다.

슬쩍 돌아보니 딱히 준비한 것도 없어 보였다.

아골렛은 평소대로의 갑옷차림에 검은 허리에, 방패는 등에 걸친 채 이쪽을 보고 있었다.

“…너 설마 그 꼴로 내 옆에 있을 거냐?”

“어떤 때라도 호위에 전력으로 임하는 게 기사의 마음가집 아니겠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폐하. 이 아골렛이 있는 한 누구도 폐하께 긁힌 상처 하나 입힐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그 말이 아니라. 너무 눈에 띈단 뜻이다. 사방에다 백기사라 광고할 것도 아니고.”

“아, 은밀하게 움직일 생각이십니까? 이해했습니다.”

아골렛이 고개를 끄덕인 순간 갑옷은 입자 조각이 되어 사라졌다. 아골렛은 평범한 가죽옷을 입은 채로 그 자리에 서 있었는데, 사실 갑옷을 벗었어도 낯짝 때문에 여전히 이목을 끌고 있었다.

그렇다고 얼굴 가죽을 벗길 수는 없으니 억지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폐하. 방금 하신 말씀이 사실입니까?”

“뭐 말이냐.”

“추방자와 퓨처릭스, 골든아이가 하이드일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전개상 그럴 확률이 높다는 것이지.”

“증거가 있으신 건 아니고, 단순히 직감이란 거군요.”

아골렛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이놈이 비웃는 건가 싶어 자세히 들여다보려는 순간, 표정은 호수에 가라앉은 것처럼 사라졌다.

‘쉽지 않은 놈.’

레시듀는 몇 번 떠올렸는지도 모를 생각을 또 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가령 너희들 4기사가 모두 힘을 합쳐도…….”

“…합쳐도?”

“반왕을 이길 수는 없겠지.”

“…….”

아골렛이 침묵했다.

“반왕이 강한 것도 있지만, 애초에 네놈들의 협력엔 아무런 시너지가 없기 때문이지.”

“이해했습니다.”

속 좀 긁으려고 한 말인데, 아골렛은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무리 수백 마리의 멸망과 싸우던 도중이라고 해도, 허주 한 명의 배신, 기습이 반왕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까? 이 몸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 반왕이 정말로 중상을 입은 것이라면…….”

레시듀가 손가락을 펼쳤다.

“최소 셋. 결정적인 빈틈에, 허주 세 명이 합심하여 동시에 공격했어야 한다. 그래야 일의 아귀가 맞아 떨어지지.”

“그렇군요.”

“…뭐, 솔직히 말하면 이 몸도 이번 예상은 빗나갔으면 한다.”

“그건 또 어째서입니까?”

“추방자와 퓨처릭스는 대체할 수 없는 기술의 소유자들이다. 둘 중 하나만 잃어도 치명적인 손해인데, 최악의 경우엔 둘 모두 죽여야 한다.”

그럼 레시듀의 계획에도 커다란 구멍이 하나 뚫리는 것이다. 특히 퓨처릭스. 이놈을 끌어들인 뒤 대은하연합과 엮어서 할 일이 있었는데…….

“그럼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폐하.”

아골렛이 다시 그리 물어봤다.

단순히 의중을 묻는 것처럼 혹은 심려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글쎄. 이놈의 음흉한 속을 알기 때문일까. 왠지 모르게 이쪽을 시험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답 없는 상황을, 너는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패는 충분히 갖춰졌다.”

레시듀는 낄낄 웃으며 걸어 나갔다.

“그러니 슬슬 판을 크게 벌여야지.”

그러기 위해서 레티프를 군림자에게 돌려보냈고,

집행자와 죽음벌레는 왕성으로 보냈다.

“우리 모두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자리가 필요하지 않겠나? 한 번쯤은.”

“‘모두’라 하심은?”

“말 그대로.”

레시듀가 빙긋 웃었다.

“반왕.”

“…….”

“군림자.”

“…….”

“4기사, 십이허주, 절대자들…….”

아골렛의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그 밖에도 현 상황에 영향력을 끼칠 수 있거나 한정된 다섯 자리에 도전할 만한 역량을 갖춘 자들.”

이 발언엔 아골렛도 당황한 얼굴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들 모두를, 한자리에 말입니까?”

“한자리에.”

“그렇다면 그건…….”

적절한 단어를 찾던 아골렛이 답지 않은 태도로 중얼거렸다.

“…전무후무한 자리게 되겠군요.”

“그렇지. 그건 그렇고 전무후무란 단어는 항상 가슴을 떨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단 말이야.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

잠깐 생각하던 아골렛이 덧붙였다.

“헌데 그자들이 순순히 응할 것 같습니까?”

“어려울 것도 없지. 군림자와 4기사. 사실 이놈들의 사고방식은 단순하니까. 떡밥만 잘 던지면 한자리로 모으는 것 자체는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지.”

“…그리 모인 자들이 평화롭게 대화를 할 수 있을지.”

레시듀가 고개를 끄덕였다.

“최악의 상황은 그 자리가 전쟁터가 되는 것이지. 그러니 이 사상최대의 회담이 열리기 전, 가장 먼저 찾아가야 할 존재가 있다. 4기사와 군림자에게 억제력이 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존재지.”

레시듀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이봐. 아골렛. 음모와 계략에 그렇게 능하면 머리 한번 잘 굴려 봐라. 그 정신병자 왕을 어떻게 설득할지 말이야. 수단과 방법 따위는 가리지 않아도 돼. 지저분한 수법이라도 전혀 상관없으니 한번 마음껏 설쳐 봐라.”

그 말을 들은 순간, 아골렛은 멈칫하고 말았다. 뭔가 이상한 감각이 가슴을 어지럽혔는데, 그것이 당혹이라는 걸 조금 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한 명이라도 있었던가? 나한테 마음껏 활개 치라고 말했던 존재 말이다.

“…….”

아골렛이 실소를 터뜨리며 레시듀의 뒤를 따랐다.

딱 한 발자국의 간격을 유지하며.

“반왕이 만약 제 계략에 휘둘리게 되면, 제가 그녀를 삼켜도 됩니까?”

“재미없는 농담이군.”

“농담이 아닙니다만. 만약 그런 기회가 제게 오면 이 아골렛이 어찌 하면 되겠습니까?”

“참아라. 너와 반왕은 아직 분리되어 있는 편이 쓸데가 더 많으니.”

“…존명하겠습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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