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11화
육체를 가진 자들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문제점이 바로 생리적 욕구다.
레시듀에겐 큰 관계가 없는 얘기였다. 그까짓 욕구쯤 몸뚱이가 부리는 투정쯤으로 치부할 수 있었으니까.
딱히 음식에 영양분을 얻지 않아도 되고, 번식 욕구에 지배당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금.
레시듀는 처음으로 무시할 수 없는 생리적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피곤한데…….’
눈꺼풀이 무겁다는 게 이런 거였군. 조금이라도 마음을 헐겁게 하면 정신이 끊어질 것 같다.
4기사를 앞에 두고 있는 상황인데도 그렇다. 외면할 수 없는 나른함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 어딘가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레시듀는 봄나무 아래에서 춤을 추고 있는 기분이 되어서, 반쯤 감긴 눈으로 백기사를 바라봤다.
머리카락도, 눈동자도, 입고 있는 갑옷이나 휘두르는 검까지 휘황찬란하다. 어쩌면 눈꺼풀이 무거운 이유가 이놈의 생김새나 복장 때문은 아닐까?
“음…….”
레시듀는 잡생각을 털어 버리고 좀 더 상대와 상황에 집중했다.
퍼펙트 원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었으나, 그들에 대한 모든 걸 꿰고 있는 수준은 아니다. 애초에 허공록에도 기록되지 않았던 역사 뒤편의 종족들이다.
뇌존도 아주 우연한 경로로 알게 된 자들이었고, 강자의 제조라는 목적이 없었다면 끝내 몰랐을 거다.
아무튼 레시듀는 그들에 대해 무지한 것과는 별개로 백기사를 본 순간 한눈에 퍼펙트 원이란 걸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과거 놈들이 가졌던 특이한 외력, 특징에 대해선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특징은 퍼펙트 원이란 종족이 자멸한 이유와도 연결된다.
물론 저것들이 멸종한 구체적인 원인, 역사에 대해 설명하려면 두꺼운 책 수십 권으로도 부족하겠지만…….
한마디로 정리하면, 놈들이 스스로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한 탓이다.
‘얼간이들.’
퍼펙트 원이 있던 초우주. 그들이 처음부터 그 우주의 주인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릇이 크다는 건 용량도 크다는 뜻, 그들과 자웅을 겨루기에 부족함이 없는 종족들이 그곳에 산재해 있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초우주의 정복자는 퍼펙트 원이 되었다.
이는 그들이 가진 두 가지 특징에 기인한다.
하나는 욕망, 그중에서도 정복욕……. 그러나 퍼펙트 원의 정복은 지저분했다. 그들은 무릎 꿇은 피지배자 계층을 짓밟고, 유린하고, 욕보였다.
또한 정복하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가장 비열한 수단, 치졸한 양상으로 전투를 몰고 갔고 결국엔 흙투성이로 승리했다.
한마디로 품격이 갖춰져 있지 않다는 것인데, 그들이 태생부터 지니고 있는 힘을 생각하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장점이기도 했다.
덕분에 퍼펙트 원은 적은 개체수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방법으론 이길 수 없는 우주의 강자들을 차례대로 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정복할 상대가 없어졌을 때─ 그들의 눈동자가 서로에게 향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을 것이다.
‘이 몸이 아는 퍼펙트 원의 역사는 여기까지.’
레시듀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백기사를 보았다.
그렇다면 이놈은 어떤가? 상잔하는 동족들 사이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뻔하지. 눈앞의 남자가 퍼펙트 원에서 으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녀석을 어떻게 설득해야 될까.’
4기사 중에서 공략 난이도가 가장 높은 편이라 말하긴 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다르다. 이놈은 그냥 철벽이 너무 굳건한 것뿐이다. 그 벽만 허물 수 있다면 이후엔 일사천리고, 일시적인 형태로나마 휘하에 둘 수도 있을 것 같은데…….
“…….”
다시 한번 백기사를 바라봤다. 이놈은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입을 우묵하게 닫은 채 칼만 휘둘러대고 있었다. 그 흔한 기합조차 내지 않는 모습을 보니 새삼스레 재미없을 만큼 과묵한 녀석이란 게 느껴졌다.
과묵한 놈을 상대론 어떤 설득 방법이 효과적일까?
우선 이쪽의 정체를 순순히 밝혔는데도 상황은 악화됐다. 최악이란 말로도 부족하나… 그렇다고 레시듀의 첫수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다. 당장은 이 모양 이 꼴이지만 원래 큰일은 장기적으로 봐야 하는 법.
기만으로 시작된 관계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좋은 관계로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다 해도, 거짓말이 발각당한 시점에선 높이 올라간 만큼 낙폭이 커질 뿐이다.
반면 지금은 어떤가?
애초에 관계를 최악으로 시작했으니 더 떨어질 곳도 없지 않나.
이른바 밑바닥 중의 밑바닥, 최악 중의 최악. 이제부턴 평범한 행동만 저질러도 이쪽의 호감도가 수직 상승할 것이다.
아니면 최악인 상태로 계속 유지되거나…….
핏.
어깨 쪽이 살짝 베였다. 서늘한 감촉이 살결을 갈랐는데도 노곤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백기사와 노곤함, 두 적과 동시에 싸우며 말문을 어떻게 뗄지 고민하는데,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백기사의 얼굴이었다.
느끼한 낯짝을 둘째 치고, 아무리 그래도 표정 변화가 너무 적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처음부터 줄곧 무표정이었지. 눈빛엔 서늘함만이 가라앉아 있었고, 어조엔 변화가 없었다.
이런 꼴을 자주 봤었다.
다름 아닌 백기사의 눈동자에 비치는 녀석에게서.
“너, 욕구 불만이군.”
표정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휘두른 검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억지로 막아 내느라 어깨뼈가 탈골될 뻔했으나, 상대의 단조로운 패턴에 변화가 생겼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레시듀는 벽에 대고 떠드는 취미가 없기 때문이다.
“뭐냐? 설마 네놈 수행하고 있는 것이었나?”
“…….”
“그런데 방식이 너무 형편없군. 산골에 처박혀 성찰하는 종교인도 아니고, 외부와 단절된 장소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원초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있다니……. 푸하하. 이거 직접 말하니 더 구린데. 도무지 4기사에게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야.”
노골적으로 이죽대자 드디어 대꾸가 돌아왔다.
“당신은 말이 너무 많군요.”
“음. 이 몸의 장점 중 하나지.”
“웬만해선 죽지 않는 육체를 가졌으니, 조금 심하게 부숴도 될 것 같습니다.”
백기사는 그리 말하며 방패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공격 일변도로 가겠다는 것인가? 방패 하나 내렸다고 얼마나 달라질지 모르겠지만─
─하는 순간, 시야에서 백기사가 사라졌다.
빠르다!
파츠츳!
레시듀는 뇌류를 몸에 휘감으며 억지로 고개를 비틀었다. 그러나 칼날을 완전히 피하지 못해 왼쪽 귀가 베이고 말았다. 철철 흐르는 핏물을 왼손으로 감싸며 허세를 담아 웃었다.
“조금 망가뜨리긴 개뿔이……. 죽일 생각이 가득하지 않나?”
“머리 좀 꿰뚫렸다고 당신이 죽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
확실히 그럴 확률이 높긴 하지만, 별로 시험해 보고 싶지는 않았다. 뇌수가 헤집어지는 건 분명 좋은 기분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레시듀도 입을 꾹 닫고, 당분간 모든 집중을 방어와 회피로 쏟아붓기로 했다. 어차피 이놈을 이기자고 싸우는 것도 아니고, 설득하는 게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사실은 싸우면서가 아니라 느긋하게 차라도 마시며 얘기할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겠지만 첫 단추를 난폭하게 꿴 건 이쪽이니 불평할 수가 없다.
아무튼 공격에 대한 생각을 아예 포기하자, 백기사의 빠른 움직임에도 그럭저럭 반응할 수 있게 됐다.
대충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피할 수 있게 된 순간부터 레시듀는 다시 나불거렸다.
“수련이 아니었나? 이 몸이 잘못 짚은 것인가. 그렇다 해도 여기 처박힌 이유가 있을 거 아니냐. 네놈은 대체 무엇이 목적이냐? 왜 누구와도 연관되지 않으려는 거지? 다가올 멸망을 순순히 받아들이려는 이유가 무엇이냐. 보아하니 4기사란 놈들은 죄다 세상에서 스스로를 제일 불행하게 생각하는 것 같던데, 네놈은 어떤 비련의 소설의 주인공이지?”
“…….”
“얘기나 좀 해보라고. 네놈의 굼뜬 칼날이 이 몸에게 닿으려면 며칠은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입 꽉 닫고 검만 휘두르는 건 피차 지루한 일 아니겠나.”
그런데도 대답이 없었다.
대단히 질긴 놈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레시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추측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이 몸의 생각은 이러하다. 너는 퍼펙트 원 중에서도 돌연변이 같은 존재로, 태생적으로 그들보다 훨씬 강했을 것이야.”
“…군림자였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군요. 나의 종족에 대해 알고 있다니.”
레시듀는 잠깐 멈칫할 뻔했다.
뭐야, 이놈.
아직까지도 이쪽이 군림자가 아닌 가능성에 대해서 고려하고 있었던 건가? 그럼 죽일 듯이 칼을 휘둘러댔던 건 연기?
만약 분노에 이성을 잃은 척 돌격하며 이쪽 반응을 분석하고 있던 것이라면… 생각했던 것보다 배는 음험한 놈이었다.
내심 놀라고 말았으나, 레시듀는 내색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너 혼자 퍼펙트 원을 전부 합친 것보다 더 강했겠지. 그것만이 아니다. 본성적인 면에서도 그들과 차별점이 있었을 거다. 때문에 동족이 상잔을 시작했을 때 네놈은 오히려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겠지. 어느 쪽을 편들어야 할지 알 수 없었을 테니까. 갈등하는 중에도 그들은 서로의 등에 칼을 꽂으며 멸종을 향해 착실히 나아갔고……. 결국 네가 나서려는 시점에선 이미 한발 늦었겠지. 결국 너는 스스로의 손으로 동족의 명맥을 끊을 수밖에 없었고─”
레시듀는 아골렛의 표정을 주의 깊게 분석하며 말을 이었다.
“…그것으로 끝날 줄 알았는데, 다음이 있었지.”
어쩐지 서서히 백기사의 공세가 무뎌지고 있었다.
그것이 놈의 공격이 점점 눈에 익기 시작해서인지, 혹은 지금 입에 담고 있는 말이 백기사의 마음을 흔들고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레시듀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동족들을 죽이는 과정이 제법 즐거웠던 것이야. 느껴 본 적 없는 쾌감이 밀려왔겠지. 하지만 네놈은 그걸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족들을 멍청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그 미련한 놈들과 자신이 동일한 수준이란 걸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지. 이른바 본성과 이성의 대립이랄까?”
추리는 여기까지였다.
결국 레시듀의 추리는 퍼펙트 원과 백기사, 그들에 대해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걸 임의로 배치하고, 사이사이 빈 공간은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헛다리를 짚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살아온 세월에서 나오는 감이라는 게 있으니.
“…….”
그때쯤 백기사는 공격을 멈췄다.
숨을 헐떡이지도 않고, 흐트러지지도 않은 얼굴로 이쪽을 쳐다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서, 레시듀는 그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백기사가 말했다.
“틀렸습니다.”
“뭐가 틀렸나?”
“말해 준다면 그 입을 좀 닥쳐 줄 겁니까?”
말투가 살짝 거칠어졌다. 평정심이 깨지고 있다는 증거다.
이것도 연기일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단조로웠던 여태까지의 반응보단 재밌어서 레시듀는 히죽 웃었다.
“청기사의 제안도 무시한 백기사께서, 이 몸에게 제안을 해주는 건가? 이거 영광이로군.”
“그때의 선택이 후회되고 있던 참이었죠.”
“하하. 그러도록 하지.”
고개를 끄덕였으나, 입을 닥칠 생각은 없었다.
레시듀는 슬슬 거짓말에 재미가 들리고 있었는데, 이대로 가다간 숨만 쉬어도 거짓말만 내뱉게 될지도 모른다. 딱히 그게 잘못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이러다가 나중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 못 하는 순간이 오면 혼란스러울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우선 저는 돌연변이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음?”
“나머지 동족을 모두 합친 것보다 강하다? 턱도 없는 얘깁니다. 오히려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약자였고, 그보단 병자였습니다. 나의 동족들은 물론이고, 일반적인 필멸자……. 가령 인간보다도 훨씬 약한 존재였지요. 홀로선 거동하는 것조차 큰 힘이 들어 식기를 올바르게 들 수 있을 때까지 무던한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
“그리고 나의 동족들은 약자를 살피는 자들이 아니었지요. 악의 섞인 행동은 없었으나 보살핌도 없었습니다.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죠. 그들에게 나는 없는 것과 다름없는 존재. 잊힌 존재였습니다.”
“음…….”
마지막 말을 들으니, 레시듀는 자신이 한 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원래는 퍼펙트 원이 역사 너머로 사라졌기 때문에, 일족의 유일한 생존자가 허의 세계로 온 것이라 여겼는데 이것은 잘못된 전제였을지도 모른다.
눈앞에 남자가 ‘퍼펙트 원’이라서 허의 세계로 간 게 아니라,
그저 동족에서도 잊힌 존재인 ‘아골렛’이라서 허의 세계로 간 것이었다면.
‘이편이 더 자연스럽군.’
그 순간 아골렛이 무시할 수 없는 말을 했다.
“퍼펙트 원이 정복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특성인 흡력吸力. 우리는 정복한 존재의 힘과 특성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식기를 들 수 있게 된 이후에, 저는 두 발로 걷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지요. 때마침 그때 주변엔 두 명의 동족이 있었고… 나는 그들 중 한 명에게 문득 이렇게 말하고 있더군요.”
─네 친구가 너를 죽이려고 해.
갈라진 혓바닥으로 말하는 것처럼 끈적한 목소리였다.
“물론 그자는 처음부터 믿지 않았습니다만, 나는 어떻게 하면 신뢰감을 심어 줄 수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습니다. 예전부터 습득하고 있던 지식처럼.”
“…….”
“결국 그들은 서로 죽일 듯 싸우다가 공멸했지요. 이것은 아직 우주에 정복할 거리가 많이 남아 있을 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고향 행성에서 벌어진 퍼펙트 원 최초의 상잔이었던 셈이죠.”
무겁고, 슬픔이 가득 담긴 어조였다.
“…내가 퍼펙트 원을 뒤에서 조종했습니다. 그들이 서로를 공격하게 만들어 멸종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나의 존재를 노출시키지도 않았고─ 그들은 죽은 그 순간까지도 진실을 알지 못했죠. 단 한 명도.”
하지만 얼굴은 전혀 달랐다. 백기사의 눈동자는 뱀처럼 휘어져 있었고, 입가엔 기분 좋은 추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팔뚝에서 소름 비슷한 게 돋아났다.
두렵다기보다는 이러한 표정을 누군가의 얼굴에서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검은 가시의 마왕이 오래된 계획을 성공시켰을 때의 낯짝이 딱 저랬다.
이 순간 레시듀는 온몸으로 성스러운 기운을 뿜어대는 이 남자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물리력은 전혀 쓰지 않고, 오직 음모와 모략만으로 초거대우주를 멸망시켰다는 것인데.
이런 놈을 부하로 삼을 수 있을까?
삼을 수 있다고 해도, 그게 과연 잘하는 일일까?
레시듀의 눈가가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