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10화
백기사 아골렛.
4기사의 일원이자, 그들 중 표면적으로는 가장 온건하고 이성적인 존재로 알려진 남자다. 레시듀는 몇몇 허주나 허의 세계의 주민들이 이 남자를 ‘기사단장’이라 불렀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과거엔 4기사 중 가장 강한 발언권을 가졌다는 것도.
즉 정신 나간 4기사 중에선 그나마 정상적인 인물이라는 뜻인데, 적기사의 반전을 막 확인한 직후라 딱히 신뢰가 가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레시듀는 이 남자의 숨겨진 이면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한때 삼천세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힐 만큼 거대한 우주─ 군림자 넷을 모두 담을 수 있을 만큼 컸던 초우주가 있었다.
그곳을 불과 수백 개체로 지배했던 정복자, 퍼펙트 원(Perpect One).
이제는 기억하는 자들이 남아 있지 않은 역사 이전의 종족… 선천적인 절대자이자, 종족의 격만큼은 태양거인의 거신족에 버금갔던, 하지만 내면의 욕구를 통제하지 못한 채 결국 자멸한 종족.
백기사가 그 잊힌 종족의 일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쿨럭, 쿨럭.”
레시듀는 죽은피를 게워내면서도 시선을 앞으로 했다.
새삼스레 스스로가 상당히 귀중한 광경을 눈에 담고 있단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4기사 중 무려 세 명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광경을 보니 아주 감개가 무량하다.
대체 이런 자리가 얼마 만에 만들어진 것일까? …생각해 보니, 회담이 끝나고 지하에 감금당했을 때 청기사, 적기사, 흑기사가 모인 것 같았지만, 레시듀는 이 순간의 감동을 위해 그때의 기억을 지우기로 했다.
이야기를 되돌려서.
가까이 보면서 느낀 4기사는 군림자 이상으로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한데 묶여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접점이 거의 없었다. 그나마 청기사와 적기사는 서로 어느 정도의 친분이 있는 것처럼 느꼈으나, 방금 전 적기사가 자신과 함께 페일을 날려 버리는 꼴을 보고는 그러한 생각도 바뀌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왔다.
4기사 중에서 가장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남자가 있는 장소로.
“어딘가 했더니.”
청기사가 피에 절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입가를 비틀었다.
“여기 당신 집이었군요. 아골렛? 이게 얼마만이야. 신을 처형한 이후엔 처음인가.”
“검부터 내려놓으시지요.”
“아. 그럴까요?”
푹.
청기사는 검을 지면에 꽂으며 도발적으로 웃었다. 백기사의 시선이 가라앉았다.
“당신의 칼집은 허리춤에 있을 텐데요.”
“물론 그렇죠.”
“도발이 당신의 목적입니까?”
“…….”
청기사가 잠시 소리 없이 웃었다.
“당신은 나를 싫어했죠.”
“해명할 가치가 없는 오햅니다. 한마디 말해 두자면, 저는 당신에게 아무런 유감이 없습니다.”
“흥……. 입씨름할 시간도 없으니까 짤막하게 말할게요. 뒤에 있는 새끼 내놔요. 그건 내 사냥감이니까.”
“…….”
“내놓으면 여기선 깔끔하게 물러나도록 하죠.”
레시듀는 이쯤에서 백기사의 시선이 이쪽을 한번 향할 거라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앞쪽을 향해 있었다.
이윽고 백기사가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청기사. 오랜만에 보아도 여전히 당신은…….”
잠시 침묵했다.
반쯤 열린 입술은 적절한 단어를 찾는 것처럼 멈췄다가, 잔잔히 말을 이어나갔다.
“…두뇌 회전이 느리군요.”
멍청한 거겠지.
레시듀는 백기사의 우아한 화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무래도 이 장소의 단 한 가지 규칙을 잊은 듯하니 다시 말해 주겠습니다. 여긴 안식과 평온의 땅이고, 제가 허락한 존재 이외엔 누구도 그것을 깰 권리가 없습니다. 이것은 선왕 폐하는 물론, 같은 4기사인 그대들도 인정한 규율이지 않습니까.”
“아. 원래 규율이란 건 깨라고 있는 법이지요. 그리고 당신 말은 항상 너무 길어요.”
청기사가 졸린 듯 눈가를 비볐다.
“그냥 확실히 말해요. 협상은 결렬이에요?”
“결렬조차 되지 못하겠지요. 전 애초에 테이블에 앉은 적도 없으니.”
“그럼 너부터 죽어.”
레시듀가 내심 놀랐다.
말을 마친 청기사가 짐승같이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설마 저 몸뚱이 상태로 백기사에게 선공을 펼칠 줄은 몰랐다.
빠악!
그러나 뒤이어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청기사가 뒤로 튕겨져 날아갔다. 백기사가 휘두른 방패에 안면을 얻어맞은 것이다.
‘아프겠구만.’
레시듀는 코피를 흘리는 미친년을 보며 새삼스레 그리 생각했다.
하지만 통쾌하다. 좀 더 두들겨 패줬으면 좋겠다.
“흐흐흐…….”
청기사는 피와 함께 실성이라도 한 것처럼 웃음소리를 흘렸다. 지면에 꽂은 검을 뽑고 다시 공격하려고 할 때, 그녀를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적기사였다.
페일보다는 훨씬 차분한 눈동자가 백기사를 향했다.
“…아골렛.”
“말하십시오.”
“그 남자는 위험하다. 되도록이면 빨리 죽여야 돼.”
“그것은 당신의 새 주군이 내린 명령입니까?”
대답하지 않자 백기사가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제가 따를 의무는 없습니다. 이 남자가 어떤 문제를 안고 있든, 이 땅에 들어온 이상 판단은 저의 몫이니까.”
“…….”
“떠나십시오. 엘. 아니면 저는 오늘 두 명의 기사와 싸워야 합니까?”
도발의 의도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의 표정은 굳었다.
“자만하지 마라. 정말 혼자서 우리 둘을 몰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나?”
“그럼 반대로 묻지요. 지금 그 상태로 나를 뚫어낼 자신이 있습니까? 당신 둘이 만전일 때도 칠주야 동안 나를 뚫어내지 못했습니다.”
“…….”
거짓말이 아니다.
백기사는 승부의 결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엘의 시선이 천천히 미끄러져, 그의 손에 들린 방패를 향했다.
오직 방어에 전념한 백기사는 그야말로 철옹성이며, 부서지지 않는 방패다.
득실을 저울질하던 적기사가 잠시 후 한숨을 내쉬었다.
“…페일,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당신이야 그렇겠죠. 볼일 다 봤으면 먼저 꺼지던가. 난 저놈 목을 딸 때까지…….”
빠악!
“……!”
레시듀가 눈을 크게 떴다.
엘이 갑자기 손에 들린 검을 세게 휘둘러 페일의 뒤통수를 후려친 것이다. 당연히 검의 면 부분으로 후려친 것이긴 하지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저런 짓을 저지를 줄이야. 기절시키려 한 건가? 확실히 저 여자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청기사였다. 잠깐 고개가 45도 정도 기울어지긴 했지만, 다시 원상복귀 했다. 그 동작이 툭툭 끊겨서 고장 난 인형을 연상케 했다.
청기사가 서늘한 눈으로 적기사를 보았다.
“…한 번도 아니고, 이제 두 대 빚졌네요? 엘.”
“음.”
“아까는 저 남자를 함께 죽이기 위한 거여서 그냥 넘어갔는데, 이번 공격은 내가 무슨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까요?”
그러자 엘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꾸했다.
“머리에 피 좀 빼주려고 했지.”
“그걸 변명이라고…….”
페일이 일그러진 얼굴로 몇 발자국 내딛더니, 갑자기 풀썩 쓰러졌다.
눈을 까뒤집은 걸 보니 기절한 것 같았다.
“…이제 효과가 든 건가. 정말이지 터프하군.”
적기사가 낮게 한숨을 내쉬더니, 청기사를 어깨에 둘러메고 백기사를 바라봤다.
“나는 이만 물러가겠다. 하지만 페일은 정신이 들면 다시 이곳으로 올 테지.”
“아쉽지만 그녀에게 그럴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기는 한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적기사가 문득 레시듀를 보았다.
“그리고 너.”
“…이 몸 말이냐?”
“그래.”
묘한 눈동자가 레시듀를 향했다.
왜인지 느끼하게 느껴져서 마주 보고 싶지 않은 눈빛이었다.
“또 보자.”
“…아니. 싫은데.”
반사적으로 대꾸하자 적기사가 픽 웃었다. 그녀는 입가 쪽이 느슨해진 것만으로 인상이 바뀐 듯한 느낌을 받았다.
뒤늦게 레시듀는 적기사의 미묘한 말투나 태도에서 4기사의 맹목적인 증오와는 다른 무언가를 느꼈으나, 곧 착각임을 깨달았다. 만약 그랬다면 죽일 듯이 추적해 오지도 않았겠지.
적기사는 검을 휘둘러 공간을 베어 내고는 그대로 떠났다.
레시듀는 둘의 형체가 사라진 이후에도, 그곳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그리고 한참 뒤에야, 드디어 지긋지긋한 기사 놈들을 따돌렸음을 확신했다.
“후우.”
아주 커다란 폭풍이 지나간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아직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었다. 하나의 고비가 더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두 기사를 따돌리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기도 하다.
“…그럼.”
백기사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무슨 일로 이곳에 왔습니까?”
* * *
“듣기 좋은 목소리인데?”
레시듀는 본론을 꺼내기 전 슬며시 밑밥을 깐 뒤, 다시 몇 번 기침했다. 이제 더 이상 피가 나오지 않았다. 몸 상태가 호전됐다는 증거다.
재생능력.
편리한 힘이긴 하지만, 언제까지 유지될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몸을 험하게 굴리는 습관은 좀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당신은 누구입니까?”
그 질문에 레시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매만졌다.
분명히 ‘루카스 트로우맨’의 얼굴이고, 이 남자는 한때 루카스를 만난 적이 있다. 그런데도 정체를 묻고 있다.
이런 적은 처음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쪽의 정체를 간파당한 듯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우리 구면이지 않나?”
“한번 본 얼굴이긴 하지요. 알맹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단언하는군.”
“…….”
백기사는 레시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말했다.
“당신이 모방하고 있는 그 인물은 청태자였지요.”
청태자라…….
청기사가 선택한 허왕 후보를, 이 남자는 그런 독특한 호칭으로 불렀던 것 같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청기사에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다퉜을 수도 있지 않나? 모종의 갈등이 빚어졌다든가.”
“그럴 리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은 아니지만, 청기사에겐 우직한 면이 있습니다. 거기에 그녀 또한 기사. 한번 충성을 바친 상대에게 다시금 검을 겨눌 일은 없지요. 청기사는 외강내유의 표본 같은 존재기도 합니다. 믿음을 준 이에게 배신을 당했다면 검을 뽑는 대신, 스스로의 목을 내놓거나 아예 자결을 택하겠지요.”
“…….”
“충성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몹시 까다롭겠지만, 한번 아군으로 삼는다면 결코 배신하지 않는 인물이 그녀입니다.”
레시듀가 히죽 웃었다.
과연 기사단장 나리. 속세와 동떨어져 있는 주제에 다른 기사에 대해 제법 정확히 파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루카스를 상대로도 만만치 않은 심리전을 펼쳤던 음험한 놈이었다.
아무튼 이 사실이 읽힌 건 큰 상관은 없는 일이다.
어차피 계속 정체를 숨길 생각도, 루카스를 연기할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청승 떠는 건 즐겁나? 백기사.”
“제겐 무슨 볼일입니까?”
“네놈이 가진 힘이 필요해졌다. 이 몸을 도울 수 있도록 해줄 테니 따라와라.”
“…….”
백기사는 여전히 무관심한 얼굴이었다.
그가 짧은 침묵 후에 다시 입을 열었다.
“상처를 완치할 때까지 이곳에 머무는 걸 허락하겠습니다.”
초탈한 듯한 표정에 말투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는 자신의 진짜 정체는 물론이고, 청기사가 폭주하게 된 이유나 두 기사에게 추적당한 경위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바깥이 어떻게 돌아가던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태도였다.
“사막도 이곳보다는 덜 황량하겠군. 지루하기 짝이 없는 장소가 아닌가? 이런 곳에서 뭘 얻을 게 있다고 머무는 것이지?”
“얻을 게 없으니 이곳에 있는 겁니다.”
“이봐. 둘러가는 말투는 그만 두고, 서로 좀 솔직해져 보자고. 나는 네 사정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래선 대화가 성립되지 않지.”
“예. 그리고 앞으로도 모를 테죠. 그리고 전 당신과 대화할 생각이 없습니다.”
“…….”
철벽이 만만치가 않다. 괜히 방패로 무장한 게 아니었다.
이쯤에서 레시듀 자신의 목적을 말하자면, 당연히 백기사에게서 충성을 받아내는 것이었다. 4기사 중 한 명의 조력이 더해진다면 지금보다 선택지가 몇 배는 넓어질 테니까.
하지만 청기사와는 사이가 이미 틀어졌고 흑기사는 따르는 왕이 있다. 남은 건 적기사와 백기사였는데, 꼭대기 우주에서 벌어진 소동으로 적기사와의 관계도 끝장났다.
자연스레 남은 선택지는 백기사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만만치가 않단 말이지.’
그러고 보니 루카스의 기억 속 백기사는 허왕의 존재에 대해 무척이나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멸망에 대해 사전에 알고 있기도 했고─ 세상이 맞이할 최후에 대해서도 짐작하고 있는 듯했는데, 딱히 그걸 막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설마 하니, 4기사 중에서 가장 공략하기 어려운 게 이 남자인가?
“으음.”
레시듀는 본능적으로 품을 더듬었다.
로브 안쪽에 넣어뒀던 한 권의 책, 베니앙에게서 빌려온 책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리저리 구르는 도중에 잃어버렸거나 공격에 휩쓸려 사라진 모양이다.
어쩔 수 없이 그 내용을 한번 떠올려봤다.
‘시한부 악역은 성기사단장의 비밀친구’에서, 주인공과 성기사단장이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거기에 루카스가 청기사를 꼬신 방법도 한번 떠올려봤다.
그리하여 나온 결론은, 좋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선 우선 속을 터놓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레시듀가 아골렛을 보며 말했다.
“실은 이 몸은 군림자였던 존재다.”
“예?”
아골렛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반문하다가, 곧 정색했다.
“질 나쁜 농담이군요. 당신은 강하지만 나와 동등한 격이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지. 나는 원래 천둥우레의 뇌존이었고, 그것에서 분리되어 나온 사념체였으며, 이제는 존재로서의 독립성을 띠게 되었다.”
“…….”
“그 증거로 뇌류를 다룰 수 있지. 봐라. 뇌존의 우레와 좀 흡사한 느낌이 나지 않나?”
파직.
천둥우레의 뇌존의 권능을 흉내 낸 순간, 백기사가 검을 휘두르며 덮쳐왔다.
“어이쿠.”
이게 아닌가?
갑작스럽게 백기사와의 싸움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