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07화
뜬금없는 것도 정도를 벗어나지 않아야 유쾌한 법이다. 거인의 말에 즐거움보다 언짢음이 앞서는 걸 보니, 이놈의 무례함이 도를 넘은 건 분명하다.
‘이봐, 거인. 네놈은 루카스 트로우맨에 대해 알고 있지 않나?’
[물론 알고 있다. 한때 우리 군림자가 눈여겨봤던 절대자였지.]
‘그래. 그런데 그놈이 가졌던 사정에 대해 자세히는 모르는 모양이군.’
[무슨 말이냐?]
‘필멸자의 수련법은 다양하다. 그중에선 오욕칠정五慾七情을 억제하여 스스로의 내면을 되돌아보고, 만물에 대한 성찰 따위를 행하는 것도 있지.’
[물론 알고 있다.]
‘무시할 건 못 된다. 제법 실효적이니까. 실제로 욕구를 거세하며 수련에 힘쓴 자들이 재능을 뛰어넘는 성과를 거둔 적을 빈번히 보았지.’
욕구를 죽인다는 건 결국 스스로에게 제한을 둔다는 것이고, 제한을 둔다는 건 주어진 환경을 억지로 바꾼다는 것이다.
즉 본질적인 의미에선 스스로 고통 길로 몰아넣는 것이기 때문에 수련이란 정의로 귀결된다.
[다 알고 있는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루카스 트로우맨이 그런 경우다?]
‘조금 다르지만 뭐… 스스로가 원하든, 원하지 않았든. 결국 그쪽 분야 최대 권위자가 된 사내지.’
레시듀는 대충 나오는 대로 떠들어댔다.
‘루카스 트로우맨이 그토록 강해질 수 있었던 건 생명체라면 응당 가져야 할 최대 욕구가 결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셀 수도 없을 만큼 죽을 위기에 처했지만, 단 한 번도 자손을 남기겠단 생각은 하지 않았지.’
[성불구자라는 것인가?]
‘조금 순화한 표현을 써주면 좋을 것 같군.’
[고자.]
‘그게 아니라.’
레시듀가 말을 이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기능엔 이상이 없으나 이 억제된 욕구를 해방한 순간 쌓았던 모든 게 허깨비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어차피 너와 루카스 트로우맨은 다른 존재일 터. 그 녀석이 쌓아 둔 성취가 사라지는 것이 네게 큰 문제가 되나?]
‘나는 놈에게서 육체를 이어받았다. 그렇게 쉽게 맺고 끊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거인은 잠깐 침묵했다.
[그렇군. 알겠다. 그럼 이 건에 관해선 확답을 주지 않아도 되는 걸로 하지.]
한숨 돌렸나 싶은데, 거인이 묘하게 자신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차피 네가 거절하여도 그렇게 될 테니까.]
‘딸이 아주 예쁜 모양이야.’
[객관적으로 보아도, 미색이 아주 뛰어난 편이지.]
‘…….’
레시듀는 이제 아예 질린 얼굴이 되어서 말했다.
‘네놈도 곱게 미치지 않은 건 분명하군.’
[어째서?]
‘제정신이 박혀 있다면 이 몸에게 자식을 보낼 생각을 하진 않을 텐데.’
[혼례를 올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식만 낳으면 된다. 너는 이 차이를 모르겠는가?]
‘…….’
이 순간 레시듀가 떠올린 건 죽음벌레였다.
사상최강의 자손을 만들기 위해, 청기사 페일에게 구애하던 미친놈.
레시듀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너의 지능이 벌레와 동급일 줄은 몰랐군.’
[뭐?]
‘됐고. 볼일 다 끝났으면 이제 이 몸을 현실로 보내라. 이미 너무나도 많은 시간을 끌었다.’
[…그러도록 하지.]
의식이 다시금 흐려지며, 몸속에서 날뛰던 힘이 점차 안정되는 게 느껴졌다. 레시듀는 앞으로 있을 일전에, 남겨진 이 힘들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궁리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었다. 흐름상 이렇게 떠나려는 순간엔, 상대 쪽에서 뭔가 충격적인 한마디를 꼭 덧붙이던데.
클래식 클리셰라고 할까.
[레시듀.]
역시나.
[내가 남긴 힘을 어떻게 쓸지는 너의 자유다. 하지만 되도록 쓰지 않고 보존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특히 이번에는.]
‘…….’
힘을 어떤 순간에 쓸지 결정하는 것은 나다. 이것은 곧 책임과 이어지는 것으로, 레시듀의 삶을 관통하는 절대논리 중 하나였다.
거인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진 않을 터.
그런데도 굳이 조언하는 이유는─
그가 생각하기로, 반드시 ‘거인의 힘’을 써야 할 순간이 머지않아 온다는 뜻이다.
* * *
깔끔하게 눈이 떠졌다. 잠에서 깨어난 게 아니라, 잠시 눈을 꾹 감고 있다가 뜬 듯한 느낌이다. 몸뚱이도 거의 재생을 마친 상태고.
다만 머리만큼은 어질어질하다. 두통도 조금 있는 것 같고.
여긴 어딜까.
설마 벌써 몇 날 며칠이 지났고, 여느 때처럼 또 어딘가로 잡혀온 건 아니겠지.
‘다행히 그건 아니고.’
깨어난 곳은 여전히 신시티 내부다. 처참할 만큼 박살이 나 있어서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이 꼴로 만든 본인이 가질 감상은 아니었다.
그러나 레시듀는 그 황폐화된 풍경에 오래 집중하지 못했다.
“…….”
앞에 청기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이쪽을 보고 있지 않고 등을 돌린 채였는데, 마치 다른 누군가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레시듀가 정신을 차린 걸 아직 모르는 기색이었다. 기습이라도 할까. 아니면 도망?
생각을 정리하며 살짝 일어나려고 했는데.
“음…….”
근골이 비명을 질렀다.
어마어마한 고통에 순간적으로 시야에 불꽃이 튈 정도였다.
가만히 있을 땐 몰랐는데 재생을 깔끔하게 마쳤다고 해도 몸뚱이가 정상은 아닌 것 같다.
그러자 침음 소리를 들은 청기사가 시선을 돌려 이쪽을 바라봤다. 그 낯짝을 본 순간, 레시듀는 내심 놀라고 말았다.
몇 번이고 보았던, 특유의 공허한 시선을 보낼 줄 알았는데─ 휘어져 있는 눈매는 그믐달을 연상케 했다. 그 속에 있는 청색 유리구슬엔 기이한 열기 같은 게 아른거리고 있었고.
“잘 잤나요?”
“…….”
숨과 말문이 턱 막혔다. 심지어 목소리엔 능글거리는 기색까지 있었다.
레시듀의 표정이 단숨에 불쾌해졌다. 비틀거리면서도 우선 억지로 일어나 자세를 잡았다.
“…빌어먹을. 골 아파 죽겠군.”
혼잣말 하는 척 다시 청기사의 안색을 살펴봤다.
싱글거리는 얼굴을 보니 뭔가 심정의 변화라도 생긴 것 같은데… 내가 기절한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그러다 레시듀는 페일이 방금 전까지 바라보던 곳을 눈에 담았다.
그곳에 누군가 쓰러져 있었는데 익숙한 형체였다.
잘못 볼 것도 없이 루카였다.
“…….”
죽었나? 그건 아니다. 희미하게 호흡이 들려온다.
즉 살아 있고 상처도 없다. 주변에 전투의 흔적도 없고……. 그렇단 건 청기사와의 싸움으로 정신을 잃은 것도 아니란 건데.
…그렇다면, 끝멸망인 저 꼬마가 의식을 잃을 만한 일이 달리 뭐가 있지?
“루카.”
그때 페일이 소녀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왜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아마도 분위기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겠죠.”
“…….”
“하지만 난 알 수 있어요. 세상 모든 사람이 깨닫지 못해도 나만큼은 그 흔적을 느낄 수 있어요.”
“너, 뭘 기대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만둬라.”
레시듀가 차갑게 말했다.
“이미 떠난 놈이다. 언젠가 돌아오겠지만 아직까지는 막연하지. 적어도 현시점에서 꺼내도 될 이야기는 아니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으니까.”
“해야 할 일이라? 그건 멸망을 죽이는 것을 말하는 건가요? 아하하. 그건 제 소임이 아닌데요.”
“4기사가 된 것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거냐?”
그 말에 청기사는 얼굴의 미소를 지웠다.
이리 표현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방금 발언으로 완전히 지뢰를 밟은 느낌이었다.
“그딴 것에 이유는 없어요. 만약 있다고 해도 내가 거기 따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고. 나는 한 번도 이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
이 순간 레시듀는 군림자와 4기사의 결정적인 차이에 대해 이해한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군림자들은 모두 선천적으로 타고난 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것에 아무런 불만을 품지 않았고 자부심까지 가지고 있었다.
‘…4기사는, 다르다.’
그들 모두에 대해 깊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여태껏 레시듀가 만난 기사들은 모두 스스로에 대해 긍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군림자 천둥우레의 뇌존’이라면 이런 4기사를 보며 한심하다고 비웃음을 터뜨리겠지만.
이 자리에 있는 레시듀는…….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뭐냐.”
“당신을 죽이는 데에 망설임이 사라졌어요.”
다시 깔깔대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울증이라도 걸린 것처럼 감정 기복이 오락가락하다. 그러나 정말로 아찔한 사실은, 지금 저 정신 나간 상태가 청기사 본래의 모습에 가깝다는 것이었다.
‘우라지게도 좋은 소식이군.’
그런데 원래 망설임이 있기는 했나? 아까 눈이 마주쳤을 때도 거두절미하고 칼부터 빼들은 주제.
…우선 루카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럴 여유는 없을 것 같다.
싸움을 피할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적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청기사는 만전이 아니다. 그러기는커녕 만신창이에 가까운 꼬락서니라 할 수 있겠다. 시공일보를 정면으로 맞았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것은 레시듀도 태양거인의 심장을 소모품으로 삼아 사용할 수 있는 일회성 필살기, 오히려 소모값에 비해 너무 멀쩡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적기사 때문에 대미지가 분산된 건가? 확실히 4기사 둘을 동시에 제압하려 들었던 건 욕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청기사의 상태가 좋지 않다고 해서 이쪽의 승률이 올라가는 건 아니다. 만신창이인 건 똑같기 때문이다.
한 가지.
지금 상황에서 확실히 우위에 설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태양거인의 잔력을 끌어다 쓰는 건데…….
‘…이래서 거인이 그런 말을 했던 건가?’
놈의 조언을 순순히 들을 생각은 없지만… 아예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니.
“이 몸을 죽이겠다고.”
“기분이 좋으니 고통 없이 일격에 보내 드리겠습니다. 반항하면 서로 피곤해져요.”
“꼴같잖은 허세군. 지금 네 상태로 날 쉽게 죽일 수 있을 것 같나?”
“그래서 반항하면 서로 피곤해진다고 말했잖아요. 병신이세요?”
…이 새끼, 말빨이 거의 돌아왔잖아?
레시듀는 ‘정신이 망가졌고 몸뚱이는 정상인 청기사’와 ‘정신은 온전하지만 몸뚱이는 걸레짝이 된 청기사’ 중 어느 쪽이 더 까다로운 상대인지에 대해 고민했다.
결론은 어느 쪽이나 비슷하게 위험하다는 쪽으로 나왔다.
‘피차 극소시간대에 진입할 컨디션은 아니고.’
그 순간이다.
하늘에서 금속이 맞닿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칼과 칼이 격렬히 마주칠 때 터져 나오는 소리였다. 뒤이어 어떤 형체가 튕겨 날아와 레시듀 옆에 처박혔다.
흙먼지가 부스스 일어났고, 그 속에서 누군가가 벌떡 일어났다.
매상검 양인현이다.
“아직 살아 있었군.”
“…퉷.”
양인현은 대꾸하지 않고 피 섞인 침을 내뱉었다. 절제된 기도를 보이던 평소와 전혀 다른 모습이다. 마치 길들이지 않은 짐승 같다고 할까?
왜 이런 상태가 되었나 싶더니.
탓.
맞은편에 또 한 마리의 짐승이 안착했다.
적기사.
부서진 갑옷을 입고 있어서 잘 보지 못했던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는데, 뜻밖에도 페일과 비슷하거나 좀 더 어려 보이는 얼굴이었다. 잿빛 머리카락과 구릿빛 피부는 태양 아래 펼쳐진 사막을 연상케 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서로 색이 다른 눈동자였지만… 레시듀는 그보단 세로로 좁혀진 동공에 더 주목했다.
짐승을 상대하기 위해 짐승이 된 거군. 양인현한텐 색다른 싸움 양상이었을 것이다. 아마 다음 단계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잡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적기사도 중상을 입은 꼴이었으나, 이상하게도 다치기 전보다 기세가 몇 배는 거칠어져 있어서 약화됐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레시듀는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이 몸이 처음 계획한대로 2 대 2 형식이 되는 건가?”
적기사의 합류는 거슬렸으나, 매상검이 건재하다면 아예 승산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양인현이 무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그럼 잡을 수…….”
그러고는 비틀대며 홀로 몇 발자국 옮기더니 그대로 털썩 쓰러지고 말았다.
“…….”
“…….”
“…….”
좌중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가운데,
레시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매상검?”
“…….”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다.
죽은 건 아닌 것 같고, 정신을 잃은 듯하다.
레시듀에겐 어떤 것이든 동일한 의미지만.
슬쩍 앞을 바라보자, 청기사가 아주 상쾌함 터지는 낯짝으로 미소짓고 있었다.
“이 대 일?”
“…음.
레시듀는 침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뇌류를 끌어올려 한 줄기 번개가 된 다음,
─그대로 도망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