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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501화 (728/857)

외전 501화

레시듀가 선택한 진화의 방식은 무척이나 과격했고, 그러한 강행은 대체로 고통이 되어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니 레시듀에겐 전혀 나쁜 일이 아니었다.

전신의 피부가 새까맣게 타고, 잿더미가 되어 내려앉고, 다시 생살이 돋아나고─ 그러한 과정이 0.1초 동안 수백 번 반복됐다.

물론 신경 써야 할 건 껍데기만이 아니다.

근골이나 혈관… 무엇보다 내장이 중요하다. 그러나 몸속 부품들을 연마하는 과정은 단순히 겉을 강화하는 것보다 수백 배는 까다로웠다. 과격하게 굴릴 수는 없다. 자칫 실수라도 하면 내성을 기르기는커녕 한 줌 핏물이 되어 주저앉을 테니.

레시듀는 육체내부의 내성을 아주 천천히 끌어올리며, 좀 더 속도를 높일 방법에 대해 고민했으나 아직까지도 뾰족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느리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진행하는 한편, 의식의 일부분으론 좀 더 나은 방법에 대한 고찰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겉과 속의 강화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레시듀는 주변이 어스름하게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착각일 것이다. 지금 레시듀의 오감은 세상과 완전히 차단되어 있으니.

그러니 이것은 심상세계의 풍경이다. 제법 멋진 광경이다. 만약 태양이 존재하고 있는 세상이라면, 날이 저물고 있는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곧 주변이 캄캄해졌다. 조금 당황한 순간 확 밝아졌고 다시 어두워졌다가…….

‘으음…….’

스스로도 정확히 어떤 상태에 놓인 건지 알 수 없으나, 레시듀는 속으로 침음했다.

이 감각, 마치 시간의 흐름을 아주 빠른 속도로 느끼고 있는 것 같다. 극소시간대의 반대 상황이랄까─ 의식이 다른 의미로 폭주해서, 사물이나 시간이 휙휙 지나가고 있는 듯한…….

…이것이 심상세계에서만 느껴지는 착각이어야 한다. 실제로도 시간이 이만한 속도로 흘러가고 있다면, 레시듀가 급조한 계획들은 순식간에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

‘…….’

그 상태로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이 상태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지 않았다. 여전히 레시듀는 일순을 반복하는 세상의 중심에 서 있었고, 형체조차 불분명한 것들은 눈 깜빡할 사이 스쳐 지나갔다.

그제야 슬그머니 인상이 써졌다.

가만히 있으면 끝나려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리 단순하게 생각할 게 아닌 듯하다.

왜 이런 상태가 되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 스쳐가고 있는 이 풍경에 좀 더 주목해 봐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리하여 레시듀는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려 스쳐가는 풍경을 눈에 담았으나, 이번에도 그 실체를 명확히 파악할 수 없었다.

‘허 참.’

두 번 정도 실패하자 이젠 오기가 치솟았다. 훨씬 진지해진 자세로 다시 한번 풍경을 주목했다.

이번엔 결코 놓치지 않는다.

놓친다 하더라도 저게 뭔지에 대한 실마리쯤은 얻어내겠다.

─라는 결심이 무색하게, 이번에도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다.

‘…….’

레시듀는 두 눈을 깜박였다. 눈썰미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감을 갖고 있었기에 이런 전개가 심히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몇 번이고 봤는데도 깨달은 게 없다는 것은, 앞으로 계속 반복해서 보아도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했다.

‘가능한 일인가?’

레시듀는 그 점에서 순수한 의문을 느꼈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현상들 중에서 레시듀가 이해하지 못할 것들은 손에 꼽을 만큼 적다. 하물며 몇 번을 반복해서 눈에 담았는데 그 종류조차 알 수 없는 현상이라니.

그러는 도중에도 ‘빛’, ‘그림자’, ‘폭발’, ‘무언가의 번짐’ 같은 건 다시 한번 레시듀를 지나쳤다.

‘으음…….’

그제야 지금 상황이 생각 이상으로 심각하단 걸 깨닫고 말았다. 자칫 잘못하면 이 현상 속에 영영 갇히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절망이나 공포 따위를 느끼진 않았으나, 막막함 정도는 있었다.

반복되는 현상 속에서 레시듀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이것은 훈련이다.

그러는 도중에 문득 목소리가 들렸다.

레시듀는 흠칫한 채 고개를 들었다.

─네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이지.

‘루카스?’

목소리는 대답하는 대신, 무미건조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훈련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정의하면 익숙지 않은 것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이다. 네게는 좀 낯선 개념이겠지.

‘…….’

또 다시 일방적으로 지껄이는 것인가.

레시듀는 김이 새버렸다.

떠날 거면 곱게 떠날 것이지, 가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내니 가슴이 싱숭생숭하다.

그보다 이 목소리는 왜 갑자기 들리는 것인가? ‘프레이 블레이크’와 접촉했을 때 놈이 남겼던 흔적이 아직 지워지지 않았다는 것인가?

─이 현상은.

‘…….’

─수십 번, 수백 번을 반복해서 본다고, 혹은 집중력을 최대한 끌어올린다고 깨달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우선은 의식의 스위치를 바꿔야겠지. 우선은 알아두도록 해라. 훈련에 가장 바탕이 되는 건 이해력이고, 이해란 분석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내게 이 현상을 분석하란 말인가?’

레시듀는 저쪽에 목소리가 닿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 물었다.

─하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현상이란 너무도 많고 난해하다. 그것들 모두를 처음부터 분석하는 게 불가능할 때도 있지. 그러니 때때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접근해야 한다. 가정부터 써내려 가는 것이지.

‘…….’

─내키지 않을 것이다. 가설부터 세우는 건 네게 어울리는 방식이 아니니까. 그래도 어쩌겠나. 다른 방법이 없는데.

그리고 목소리는 끊겼다.

혹시 남은 말이 더 있을까 싶어서 한동안 가만히 있어도,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다. 레시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또다시 너는 나를 돕기 위해 나타났군.’

답이 보이지 않은 순간, 예고도 없이 존재감을 드러낸 그 모습은. 마치 대본을 달달 외운 베테랑 배우의 등장처럼 극적이었다.

구원자,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슬며시 힌트를 주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난다. 그게 루카스 트로우맨의 방식이란 걸 알고 있다.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난 너의 제자가 아니다, 루카스.’

그러니까, 가르침은 필요 없다. 조언에 따르지도 않겠다.

네겐 이미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받았지. 그것 한 번이면 충분하다.

레시듀는, 누군가에게 의존하는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 대상이 루카스라면 더욱 그렇다. 이것은 효율 이전에 자존심의 문제였고, 그것은 현재의 레시듀를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였다.

그러니 존경하는 친우의 조언은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가장 틀린 선택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어쩌면 지름길을 못 본 척 지나가는 미련한 놈이 될지도.

어쩌면, 어쩌면…….

레시듀는 쓸데없는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이딴 가정들은 선택을 마친 순간 쓸모없어지기 때문이다.

대신에 미소를 지었다.

가장 쉬운 길을 외면했으니, 이제부턴 더 힘들어질 것이다.

* * *

과거의 레시듀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았다.

가령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현상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 문제점이 자신이 아니라, 현상 그 자체에 있을 거라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지금은 다르다.

멸망이나 4기사, 반왕 같은 존재들을 보며, 스스로에게 틀린 점, 개선해야 될 점이 있을지 모른단 사실을 인정하게 됐다. 그들의 존재에 영감을 받게 된 건 아니다. 그저 최강이 아니게 된 순간부터,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 것뿐.

‘육체의 진화는 순조롭다.’

근골이나 내장 따위도, 바깥에 비하면 느리지만 일단 저항력이 길러지곤 있다.

하지만 레시듀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다.

바로 의식意識이었다.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의식, 즉 정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기 때문에 깨닫는 것도 늦었다. 항상 육체의 출력이 정신적인 부분을 따라오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니.

하나 이번엔 아니었다.

지금 레시듀가 추구하는 경지는 전前 군림자의 정신력보다 상위에 있었다.

그럼 정신의 단계를 보다 높게, 성숙한 경지로 이끌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승처럼 스스로의 내면에 대한 성찰 따위라도 해야 하는가? 아니면 만물의 이치와 해답에 대하여 머리 깨지게 고민이라도 해야 하나?

모두 틀렸다.

레시듀는 그딴 따분한 방식을 택하지 않고, 스스로의 정신 그 자체를 표적 삼아 뇌류를 흘렸다.

파직!

‘……!’

그리고 순간적으로 의식이 끊어질 뻔했다.

정신 그 자체에 뇌류를 흘린다는 건 자신의 본질에 타격을 입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완전히 정확한 비유는 아니지만, 심장을 단련하기 위해 그곳에 전기충격을 가하는 꼴이어서 조금만 삐끗해도 기절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 상태에서 의식이 끊기면… 죽거나, 죽느니만 못한 꼴이 될 확률이 높았다.

생살이 익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통 또한 느껴졌는데, 덕분에 정신이 확 각성한 느낌도 들었다.

어찌 보면 이제 깨달은 게 미련할 정도로 단순한 것이었다.

몸뚱이만 빠르게 움직인다고 될 게 아니었다. 내장을 보호한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다.

가장 중요한 건─ 그토록 빨리 움직이는 만큼, 레시듀의 의식도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다면 결국 레시듀가 사용할 수 있는 힘은 전체의 10분의 1밖에 되지 못한다.

그 순간 다시 한번 풍경이 지나갔다.

‘…….’

레시듀는 크게 뜬눈으로 다시 한번 풍경을 눈에 담았고, 여태까지 봤을 때와 다른 점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한 가지 착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주체가 잘못됐다.

지나간 것은 풍경이 아니라─ 바로 레시듀 본인이었다.

진상은 그 스스로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어떤 길을 지나간 것이었다. 그 속력이 너무 빠른 데다, 응당 느껴져야 할 육체의 부담이나 저항 같은 게 없어서 착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레시듀는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스쳐가듯 지나가는 풍경은, 진화를 끝마친 자신이 보고 느껴야 할 세상의 단편일지도 모른다.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자]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세상의 예고편 같은.

…신기하게도 그렇게 인식이 바꾸니,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풍경의 잔재도 눈동자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레시듀가 가장 처음 확인한 건 누군가의 죽음이었다.

‘…….’

베니앙 아르젠토.

적기사의 검의 그녀의 가슴을 꿰뚫고 있었다.

베니앙은 허망한 눈동자로 피를 울컥 쏟아내다가 그대로 절명했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다시 한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곧 일어날 일이지.

‘…….’

─나는 과거에 한 번 그 아이를 지키지 못했다. 내게 있어서 가장 뼈아픈 실수 중 하나였지.

나지막하게 목소리가 이어졌다.

─부탁하겠다. 부디 같은 상처를 그 아이에게 새기지 말아다오.

한편 레시듀는 베니앙의 죽음과 동시에 다른 풍경 또한 눈에 담고 있었다.

거의 같은 시간대의 다른 장소에서,

루카가 페일의 칼날에 육편이 되어 부서지는 모습이었다.

‘또 이건가.’

두 비극을 눈에 담으면서도 레시듀는 시큰둥했다.

양자택일.

둘 중에 오직 한 명만을 구할 수 있는, 누군가의 악의가 개입한 듯 절망적인 상황.

그런데 이제 좀 전개에 변화를 주어야 하지 않을까?

천편일률적인 것에도 정도가 있지.

아무튼 지겹도록 겪었던 상황이 또다시 들이닥친다면, 레시듀 또한 지겹기 짝이 없는 선택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언제나 그랬듯, 둘 모두를 구하는 선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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