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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98화 (725/857)

외전 498화

경월鏡月.

술잔에 비친 달,

그 말을 들었을 때 자연스레 떠오른 풍경이 있다.

사실 ‘떠올랐다’는 말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른다. 애초에 양인현은 그 풍경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람이 좋은 날, 기분 좋은 어둠이 가슴을 들뜨게 했던 날. 귓가에 들리던 아이들의 작은 고함마저 모두 기억한다……. 은하수가 수놓인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웠던 여인과 그 눈동자에 담긴 색은, 눈을 감을 때에도, 감지 않을 때에도 언제나 선명했다.

스르르…….

뻗은 칼이 미끄러지듯 흐른다. 칼끝으로 공예품을 깎아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조심스럽고 절제된 동작이었다.

그림 한 폭을 눈에 담으며 예술가의 심정을 짐작하거나,

시의 구절을 읊으며 화자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듯.

양인현은 경월을 직접 선보이며, 레시듀가 목격한 ‘양인현’의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직접 느낄 수 있었다.

만족이다.

잔잔하고도 조용한 만족감이 이 초식 전반에 묻어나왔다.

즉.

‘이 [양인현]은 반왕을 만나지 않았다.’

확실한 근거가 되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경월은 매상검 최후초식에 걸맞게 아주 강력한 절기였으나, 반왕에게 유효한 타격을 입힐 만한 수준은 못 됐다. 물론 이것은 반왕의 비정상적 강함이 원인으로, 경월이란 초식에 부족함이 있는 건 아니다.

두 번째 이유는 첫 번째 것과 이어지는데, ‘이 양인현’이 경월에 담은 것은 몇 번이고 말했듯 만족감이다.

그러나 양인현은 스스로를 알고 있다.

반왕 같은 존재를 목도하고, 자존심이 걸레짝처럼 찢겼는데 만족감을 느낀다는 것.

그것은 이미 양인현이 아니다.

…그렇다곤 해도 이 초식이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실마리는 찾았고, 나아가야 할 방향도 언뜻 보인 듯한 기분을 느꼈다.

신기한 느낌이었다.

고개를 들면 언제나 펼쳐져 있던 수많은 길,

그것들 중 고작 하나가 선택지에서 제외됐을 뿐인데 막연했던 기분이 거의 사라졌다.

‘나는.’

지금부터 만들어 갈 매상검 최후초식에,

무엇 하나 담지 않을 것이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정확히 모른다.

아마 그리 길지도 짧지도 않을 것이다.

초식의 대체적인 형形과 변화, 각 상황에 따른 대처법을 정해 뒀을 때쯤, 양인현은 조용히 눈을 떴다.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진 탓이다.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왔는가, 미카엘.”

“예정이 바뀌었다.”

“……?”

양인현은 우선 의아함을 느꼈다.

들려온 목소리가 낯설었기 때문이다. 기척은 미카엘인데, 목소리는 그의 것이 아니다.

뒤를 돌아보자 금발의 미청년이 멀뚱히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뭐지?”

“이런 모습이 보기 좋다더군.”

“누가.”

“루카스 트로우맨이.”

“…….”

묘한 취향이군. 하지만 관여할 바는 아니었다.

양인현은 대충 넘어간 다음 물었다.

“예정이 바뀌었다는 말은?”

“용의 처형이 결정 났다. 앞으로 약 3시간 뒤, 최소한의 준비가 끝나면 꼭대기 우주에서 처형이 시작되겠지.”

양인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왜 갑자기 일정이 당겨진 거지?”

“그건 나도 모르겠지만… 아마도 꼭대기 우주의 대표들에게 심적 변화가 생기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다.”

“…….”

심적인 변화가 일어났다는 건 그럴 만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이고, 양인현은 가장 최근 꼭대기 우주에서 사건을 벌인 게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결국 루카스가 일으킨 변화 중 하나인가.’

…3시간이라.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하던 양인현이 다시 말했다.

“루카스의 상태는 어떤가?”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다. 이미 무아無我의 영역으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대화를 할 수 있는 상태도 아니지. 굉장히 깊게 몰입해 있기 때문에, 섣불리 건드렸다간 영영 정신을 잃을지도 모르고.”

“즉 스스로 일어나기 전까지 깨울 방법이 없단 뜻이군.”

“…어떻게 할 생각이지?”

“…….”

양인현은.

패배감에 절여진 채 지저도시로 왔다.

일생을 걸고 연마한 칼날이 반왕의 피부 한 겹조차 뚫지 못했던 때, 양인현은 어떤 심정이었는가. 무엇을 느꼈고, 어떻게 하고 싶었는가.

어떻게든 이겨낼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다음 경지로 이어지는 실마리를 얻어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반왕과 조우한 이후 생긴 것이 아니었다. 항상 함께하고 있었다.

이 낯선 세계에 처음 떨어졌을 때도,

전 화산파의 장문일을 꺾었을 때도,

화산의 제자들을 굽어살필 때도,

운해각에서 조용히 찻잔을 들 때도.

─그러니 양인현은, 결국엔 무인武人이었다.

“…….”

양인현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렇다. 결국 나는 무인이다.

그토록 혐오하고, 역겹고, 창자가 끊어질 만큼 거북해도.

화산이란 이름은 여전히 따라다녔고, 어딜 가도 강호江湖의 하늘이 보였다.

“루카스가 깨어나면.”

양인현이 검을 갈무리하며 말을 이었다.

“먼저 간다고 전해 두게.”

“어디로 갈 생각인가.”

“꼭대기 우주로.”

“…….”

“적기사는 나 혼자 막아 보겠네.”

그러자 거절하거나, 혹은 조금 더 기다리자고 말할 것 같았던 미카엘이 불쑥 말했다.

“함께하겠다.”

“괜찮겠나? 그대가 당하면 이 지저도시의 주민들도 무사하지 못할 텐데.”

“새롭게 터득한 힘으로, 그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길 수 있게 됐지. 더 이상 얽매일 게 없다는 뜻이다.”

“…….”

양인현은 반사적으로 거절하려다, 미카엘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보단 확실히 달라진 게 느껴졌다. 아마도 무언가 계기가 될 일이 있었고, 그것을 어느 정도 소화하는 데 성공한 것 같다.

그렇다고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단적으로 말해서, 미카엘은 적기사와 양인현의 전투를 못 따라올 테니까.

“루카스에게는 어떻게 기별을 둘 텐가.”

“지면에 글자를 적어 두겠다.”

미카엘이 먼눈을 하며 덧붙였다.

“그러한 방식을 선호하는 것 같았으니까.”

“맡기도록 하지.”

“미리 확보해 둔 통로가 있다. 그곳으로 나가는 게 가장 안전할 거다.”

양인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카엘의 뒤를 따랐다.

* * *

넓은 호수엔 물고기가 한 마리도 없었다. 거의 밑바닥까지 잠수했는데도 어류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왜일까? 이토록 맑고 예쁜 호수인데.

“그러고 보니 너무 맑은 물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고 했었나?”

루카는 쪼그려 앉은 채 물을 찰박이며, 어디선가 주워들은 지식을 중얼거렸다. 아무튼 더 뒤져 봐도 성과가 있을 것 같진 않아서, 빈손이지만 암달로 돌아가야겠다.

뚝뚝 물방울을 떨어뜨리며 길을 걸어가다가, 문득 뒤를 돌아 성채도시를 눈에 담았다.

밤의 장막으로도 온전히 가릴 수 없을 만큼 하얗고 높게 뻗어져 있는 성벽. 그것을 보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의문이 있었다.

레시듀는 왜 자신을 데리고 가지 않은 걸까.

내가 아직은 못 미더워서? 폭주할 것을 염려했기 때문에?

아니. 루카는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이 꼬마는 달리 써먹을 구석이 있다. 고작 도시를 침입하는 데 그 힘을 낭비할 순 없지.

레시듀의 말을 기억한다.

…써먹을 구석, 힘을 낭비할 수 없다.

그 애매모호한 말을 믿고, 루카는 최대한 힘을 온존하고 있었다. 절대자를 내쫓을 때도 최대한 아꼈다.

그때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리 머지않았단 생각이 들었다.

쿠웅!

그때 성채도시에서 묵직한 폭발음이 났다.

“응?”

루카가 의아한 목소리를 낸 순간에도 폭발음은 끊이지 않고 계속 울렸다. 큼지막한 눈동자가 살짝 좁혀졌다.

“…….”

무슨 일이 일어났다.

우선 그 사실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설마 레시듀가. 그런 생각이 들자, 루카는 반사적으로 성채도시를 향해 뛰어갈 뻔했다.

그 순간 머리 한구석이 갑자기 차갑게 식었다. 이렇게 충동적이게 움직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후우…….”

심호흡과 함께 뜨거워진 머리를 가라앉히고, 상황을 최대한 냉정히 분석한다.

‘뭐부터 해야 하지?’

짧게 생각했고, 금방 결론이 나왔다.

레시듀는 약하지 않고, 쉽게 당할 남자도 아니다. 그러니 지금 루카가 해야 할 일은 그를 도우러 달려가는 게 아니다.

루카는 빠르게 암달로 돌아갔다.

성채도시와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우주교도소 암달은, 물론 성채도시의 공격과 이어진 추락으로 원래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살아남은 승무원은 선체조각으로 원시적인 형태의 움막 따위를 세워서 지내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이 또한 절대자의 습격이 끊긴 시점부터 할 수 있던 일이고, 그전까진 추락한 암달 내부 중 비교적 멀쩡한 곳에서 지냈다.

“…….”

루카가 말하고 싶은 건, 현재 승무원들은 초원 바깥에 나와 있는 상태라는 것이다. 당연히 인원이 제법 되는지라,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북적거리는 느낌이 들었고.

저 멀리 암달의 모습이 보이게 됐을 때, 루카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부서진 선체 자체는 떠나기 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인공적인 불빛도, 모닥불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적막했다.

타닥, 탁…….

암달에 도착했을 때, 그 적막함은 이제 분명할 만큼 확실해져 있었다. 임시 야영지엔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으나, 사람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바드로그는 물론이고, 승무원들까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바드로그?”

조용한 목소리로 함장의 이름을 불렀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키옐.”

훨씬 조용한 목소리를 낸 순간이다.

텅…….

금속에 무언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루카는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부선 암달 선체 내부로부터 들려온 소리다.

“키옐. 거기 있어요?”

텅…….

대답 대신 다시 한번 같은 소리가 돌아왔다.

이 순간 루카의 직감은 확신이 되었다. 무슨 일이 벌어졌다.

설마 성채도시의 절대자와 엇갈리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습격일까. 혹은 수감자들의 폭주…….

텅…….

상념을 이어가게 두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번 소리가 들려왔다.

루카가 마른침을 삼키며, 부서진 선체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선체 내부는 캄캄했다. 끊긴 전선은 죽기 직전의 지렁이처럼 꿈틀댔고, 찌그러진 환풍구에선 늙은이의 길쭉한 트림 같은 소리가 났다.

복도 구조상 발을 내디딜 때마다 소리가 과할 정도로 크게 울리기도 해서, 루카의 걸음은 점점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쿠웅…….

의문의 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제 거의 가깝다.

그렇게 생각할 때쯤, 루카가 발걸음을 멈췄다.

“…….”

복도 끝에 두 명이 서 있었다.

워낙 어두워서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둘 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수감자였다. 루카는 승무원들의 얼굴은 모두 외웠으니까.

그런데 어쩐지 상태가 이상해 보였다.

둘 모두 얼굴이 너무 창백하고…….

“반갑습니다.”

불쑥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까뒤집고 있는 수감자가 말했다고.

…처음엔 그리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목소리는 그 수감자보다 조금 더 뒤쪽에서 들려왔고, 무엇보다 여인의 것이었다.

발소리와 함께, 두 수감자의 모습이 그제야 온전히 드러났다. 사실 드러날 것도 없었다. 그들의 목 밑엔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도중에 끊어진 척추만이 피에 절여진 채 늘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수감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있는 하얀 손이 있었다.

루카는 그 너머에 있는 창백한 눈동자를 마주 봤다.

“내 이름은 페일이고, 가로막는 새끼들은 전부 죽이고 있어요.”

“…….”

“그러니 이들과, 앞서 만난 모든 사람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에게도 경고하겠습니다.”

쿠웅…….

두 머리가 바닥에 떨어진 순간, 바닥에 깔린 전선에서 스파크가 튀며 선체 내부가 잠깐 밝아졌다.

그리고 루카는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여인의 뒤엔 목 없는 수감자들의 시체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내 앞길을 막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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