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84화
최소 이틀, 최대 일주일의 시간이 확보됐다. 아니, 하루가 이미 지났으니 최소 하루, 최대 엿새 정도인가?
아무튼.
이 시간은 결코 허투루 낭비해선 안 된다. 차분하게 앞으로 해야 될 일들을 명확하게 파악한 뒤 우선순위를 매기도록 하자…….
“뭐 해요?”
“시체놀이.”
“…….”
…따위는 루카스나 할 만한 일이었다.
레시듀는 생각했다.
계획을 짜는 게 반드시 상황을 좋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백에 아흔아홉의 경우는 앞일에 대해 생각하는 편이 낫긴 하지만, 그렇다고 나머지 하나의 경우를 무시할 텐가? 소수의 의견이란 왜 항상 무시받아야만 하는가. 그런 폭거는 하늘이 용납해도 이 레시듀가 용납하지 못한다…….
“그만 일어나 봐요.”
“밥 먹을 시간까진 아직 좀 남았으니까 누워 있으련다.”
“허어.”
루카가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눕든, 앉든, 물구나무서든.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 우선 함장실에 좀 가 볼래요?”
“거긴 왜.”
“함장님이 불렀으니까.”
바드로그가?
귀찮지만 별일 아닌 걸로 호출할 녀석은 아니었다. 레시듀는 자리에서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겨울잠에서 깬 짐승 같은 몰골에 루카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레시듀는 못 본 척 루카를 지나쳐 함장실로 향했고, 노크도 하지 않은 채 벌컥 문을 열었다.
그러자 함장실에 앉아 있던 바드로그.
“제법 나태한 나날을 보내고 있더군.”
─가 아닌, 키옐 말로굴이 그리 말했다.
레시듀는 따분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아주 신선하고 유익한 시간이었지. 그걸 방해한 죄는 커. 무슨 볼일인가?”
“사담을 나누는 것도 귀찮아 보이는군.”
키옐은 이틀 전을 기점으로 레시듀에게 제법 호의를 느끼게 된 듯했다. 그것이 꾸민 것이든 혹은 계획적인 것이든 당장 이쪽과 적대할 생각은 없단 뜻.
초거대 단체 수장의 호감을 사는 건 물론 나쁜 일이 아니었으나, 지금의 레시듀에겐 시큰둥한 일이다.
“자네는 제법 원한을 사고 다니는 타입인가?”
뜬금없는 질문이었으나 이쪽이 바라던 대로 곧바로 본론부터 꺼내 준 것이다.
레시듀는 의아함을 나타내기 전에 곰곰이 생각해 봤다.
“호의를 사고 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 왜?”
“그렇다면 직접 보는 게 낫겠군.”
키옐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밀어내듯 검지를 슥 그었다. 그러자 미리 준비해 둔 것처럼 보이는 홀로그램 화면이 빙판 위를 달리는 것처럼 레시듀 앞으로 왔다.
“음…….”
화면 속 인물을 확인한 순간 레시듀는 자신도 모르게 침음을 흘렸다.
“역시 아는 얼굴이었나? 아니, 이건 좀 멍청한 질문인가. 애초에 모르는 이에게 원한을 살 일은 거의 없지.”
“…….”
“지난번엔 이 여자의 모습을 목격하곤 반사적으로 뇌격을 날렸었지?”
기억하고 있었던 건가.
레시듀는 스스로의 추태를 떠올리자 불쾌함을 느꼈다. 그것을 숨기지 않으며 말한다.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이 여자를 수소문한 건가? 경고하는데, 관여해서 좋을 존재가 아니야. 이건 목줄 풀린 광견에 가깝다. 마주쳤다간…….”
“물리는 걸론 끝나지 않겠지. 4기사는 확실히 그럴 만한 존재다.”
이미 거기까지 파악했나. 대은하연합의 정보력이라면 이상한 일도 아니지만.
레시듀는 계속 말하라는 듯 턱짓했다.
“무언가 오해하고 있는 듯하군. 대은하연합 내부에선, 이미 반드시 충돌을 피해야 될 존재들의 목록이 존재한다. 이 여자 또한 그중 하나고… 덧붙이자면 자네의 인상착의도 얼마 전 추가해 뒀지.”
“…….”
“알겠나? 우리가 먼저 이 여자를 찾아낸 게 아니었다. 이 여자 쪽에서 우리를 추적하고 있던 걸 지금에서야 눈치챈 것이다…….”
키옐의 눈가가 살짝 좁혀졌다.
“…그렇게 처음엔 생각했으나, 조금 더 관찰하니 뭔가 이상하더군. 대은하연합 소속이 확실한 자들과 몇 번 부딪쳤는데도 딱히 적대감을 드러내진 않았고 오히려 무시하듯 지나쳤어. 결정적인 건 암달의 진로에 따라 그녀의 이동 방향도 바뀐다는 점이었지.”
키옐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함선 내에 청기사와 안면이 있는 존재는 없지. 즉, 그녀가 추적하고 있던 건 처음부터 자네였다.”
레시듀는 부정하지 않았다.
단지 갑자기 목이 좀 타는 느낌을 받고, 탁자 위에 얹어져 있던 물병에 손을 뻗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청기사가 쫓는 게 ‘뇌존’인지 ‘레시듀’인지에 대해서인데…….”
“그건 너의 개인적인 의문인가?”
“꼭 그런 것만은 아니지. 만약 쫓는 것이 뇌존이라면 대화로 오해를 풀면 되고, 그게 아니라면… 우리 또한 대응책을 생각해야겠지.”
“무슨 대응책.”
“자네의 정체에 대한 함구라든지, 청기사와 대적하는 걸 피할 수 없을 때를 대비한 강령이라든지. 뭐 그런 것.”
이건 좀 놀라웠다.
키옐은 만약 레시듀가 청기사와 적대 관계일지라도, 여전히 동맹을 끊을 생각이 없다고 간접적으로 말한 것이다.
청기사의 힘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수록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둘 다라고 대답해 둬야겠군.”
“무슨 뜻이지?”
“4기사란 족속들은 군림자에게 맹목적인 증오심을 품고 있다. 당연히 뇌존의 잔념인 나에 대해서도 호의적이지 않지. 거기에 더해 청기사는 ‘이 몸’과 복잡한 인연을 맺었었고.”
“흐음…….”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진실도 말하지 않는다. 레시듀는 이러한 화법에 대해 능통했다. 군림자였을 적 즐겨 썼던 방식이기 때문이다. 하나 키옐 말로굴을 상대로 얼마나 먹힐지 모르겠다. 이 남자는 협상의 전문가였으니까.
“…좋아. 당분간은 한배에 탄 걸로 치지.”
이윽고 나온 키옐의 선택은 보류였고, 그건 레시듀도 만족할 만한 합의점이었다.
“청기사가 어떤 방식으로 자네를 추적하고 있는지 모르겠군. 그녀의 방향은 단 한 번도 엇나가지 않았어. 확실한 추적 수단을 갖췄다는 뜻인데, 혹시 짚이는 게 있나?”
“글쎄…….”
“그럼 따돌릴 방법도 없는가. 흠.”
키옐이 턱을 쓰다듬었다.
“청기사는 그레이트 월드 이후의 지리에 대해 무지한 것 같더군. 물론, 그녀는 자네가 있는 곳으로 일직선으로 다가오고 있긴 하지만 현 세상에서 직진은 반드시 최단 거리를 뜻하는 건 아니지.”
“언젠가 이 몸을 따라잡을 테지만 제법 시간이 걸릴 것이다. 우선은 그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는 것인가.”
그리 말하면서도 레시듀의 얼굴엔 큰 위기 의식이 떠오르지 않았다.
키옐은 담담함을 넘어서 알 수 없는 자신감까지 느껴지는 그 태도가 이해되지 않았다.
“무언가 작전이라도 짜 뒀는가?”
“아니.”
“그런 것치고는 너무 속편해 보이는데.”
“머리를 쥐어짜도 뚜렷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을 걸 알기 때문이다. 마음 편히 먹고 있다가 그때 가서 생각하면 될 일이지.”
레시듀는 그리 말하며 픽 웃었다.
“아무튼 조언은 담아 두도록 하지.”
“…….”
“아, 그리고 여기까지 온 김에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도 듣고 싶은데.”
그러자 키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드로그가 말해 주지 않던가?”
“그 말은…….”
“재미없는 우주의 풍경도 곧 끝날 거야.”
“호오.”
확실히 감회 깊었던 우주의 풍경도, 그 신선함이 퇴색될수록 처음의 강렬함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지저 도시엔 곧 도착하겠지. 하지만 여기서부턴 주의가 필요할 거다.”
“왜?”
“그야─.”
꽈앙!
목소리가 끊겼다.
돌연 느껴진 거대한 충격과 함께 함장실 내부의 가구나 물건 따위가 위아래 구분 없이 날뛰었다.
“습격? 암달의 스텔스 기능을 간파했다고?”
키옐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린 순간, 두 번째 충격이 다시 한번 함선을 덮쳤다.
꽝, 꽈광…….
앞선 것보다 다섯 배는 거대한 충격이었다. 이번 공격은 훨씬 심각했는지 함실 내부를 밝히던 기계 장치들이 일순간 작동을 정지했다. 무언가 터지고, 부서지는 소리… 비명 같은 것도 섞여 들려왔다.
“……!”
뒤이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암달이 추락했다.
* * *
콰아아…….
암달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어느 초원의 한가운데에 추락했다. 강렬한 먼지가 사방을 뒤덮었고, 흙과 풀, 금속조각이 한데 섞여 세차게 흩날렸다.
고요했던 초원의 밤에 일어난 커다란 소란이었다.
“두 번 공격한 건가?”
레시듀는 언덕에 선 채로 초원에 지울 수 없는 상흔을 남긴 암달을 내려다봤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키옐이 대꾸했다.
“그런 것 같군. 암달의 내부 구조를 파악하고 있던 것일까. 고작 두 번의 관통 공격으로 함선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시켰다.”
“…….”
레시듀는 잠깐 암달 안쪽을 바라봤다. 저곳 어딘가에 루카가 있긴 하겠지만 큰 걱정은 들지 않았다. 지금은 내숭 떨고 있지만 루카는 끝멸망이다.
힘을 다루는 법을 깨우친다면 지금의 자신보다 더 강할 터다. 그 외에도 목숨을 건진 수감자, 승무원들도 있는 듯했지만 레시듀는 그들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총수, 지저 도시까지의 거리는?”
“이미 도착했다. 이 일대의 지면 아래 자네가 찾던 지저 도시가 있을 것이다.”
“흠.”
예상했던 대답이었으나 바라던 대답은 아니었다.
레시듀는 주변 풍경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일찍이 사막이었던 장소엔 드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엔 거대한 호수가 있었는데, 언덕 꼭대기에서도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거대했다.
그 호수를 감싸듯 거대한 석상들이 세워져 있었다. 모두 여섯 개였고, 석상 하나하나가 작은 산만큼이나 크고 높았다.
마지막으로 호수의 중간엔 도시가 있었다. 그것은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인 성채 도시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호수가 만드는 물안개 때문에 언뜻 봐선 내부의 모습을 전혀 확인할 수가 없었다.
“…….”
레시듀는 그 꺼림칙한 도시보다, 그것을 감싸듯 세워진 여섯 개의 석상을 오래 주시했다.
석상은 제법 깊어 보이는 호수로도 무릎 언저리까지밖에 잠그지 못할 만큼 거대했다.
“이 일대에 진입하기 전까지 이곳의 풍경은 단지 사막이었다.”
키옐이 말했다.
그는 완전히 박살 난 암달의 모습에도 전혀 당황한 얼굴이 아니었다.
“즉, 이곳을 점거한 단체는 대은하연합의 이목을 숨길 정도의 은닉 기술을 갖췄다는 뜻이지.”
“별로 놀라진 않는군.”
“이미 말했지 않나? 우주에서 파악할 수 있는 정보는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고.”
“…….”
“하지만 저 도시의 주민들, 만만찮은 자들은 아닌 듯하군. 바깥에서 보기에 도시의 규모는 별로 크진 않지만…….”
“바깥에서 관측하는 것보다 훨씬 크겠지. 이 몸의 예상이 맞는다면, 성채 도시 내부의 실질적인 밀도는 웬만한 대우주에 비견될 정도일지도 모른다.”
“음?”
키옐은 대우주란 단위에 익숙하지 않아서 레시듀를 올려다봤다.
“암달을 꿰뚫은 건 가장 우측에 있는 석상이다. [이즈톤의 활]. 저것들은 거신병巨身兵이자 도시를 수호하는 가디언 역할을 수행하고 있지. 방금 전의 공격은 아마 반사적인 종류일 터. 도시 내부의 존재들은 이제야 암달에 대해 깨닫고, 추살대를 꾸리려 들고 있을 거다.”
“알고 있는 세력인가?”
“[절대자 의회]. 설마 꼭대기 우주의 늙은이들을 여기서 보게 될 줄.”
“꼭대기 우주를 관리하는 절대자 집단…….”
그들의 존재를 소문으로만 접했던 키옐이 놀란 목소리를 냈다.
“저놈들과 지저 도시의 관계에 대해선 아직 모르지만… 큭큭큭. 역시 무계획으로 움직이길 잘했군.”
레시듀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재밌는 생각이 끊이지 않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