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82화 (709/857)

외전 482화

레시듀는 목적지가 띄워진 홀로그램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좋군. 그럼 이제 이곳의 정확한 좌표를 말해라.”

“말하면 알긴 하나? 대은하연합의 좌표 규격에 대해 알고 있진 않을 것 같은데.”

“틀만 가르쳐 주면 어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지. 이 몸은 천재거든.”

“그레이트 월드 이후로 세상 지형은 완전히 변했다. 그 때문에 규격을 아예 새로 만들었는데도 알아볼 수 있단 것인가?”

“…….”

레시듀는 침묵했다.

혼돈스런 세상에 맞춰 새로 만든 좌표. 그렇다면 정형화됐을 확률도 낮고, 다시 말해 규칙을 모르는 자가 알아보기도 힘들단 뜻이다.

당연히 레시듀의 지식으로도 완전히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을지도 몰랐다. 해석하라면 할 순 있겠지만, 그딴 거에 아까운 시간을 투자하고 싶지는 않다.

짧은 고민 후에 말했다.

“가이드라인 같은 게 있다면 같이 받을 수 있겠나? 잠시면 돼. 금방 외울 수 있다.”

“그보다 나은 방법이 있지.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암달은 행성의 대기권 내에서도 충분히 기동할 수 있다.”

이 말의 속뜻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직접 태워다 주시겠다.”

“부담스런 호의인가?”

“흐음.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생각이 좀 깊어지는 순간이긴 하다.

방금과 같은 이유였다.

누구보다 합리적인 키옐이니 무상의 호의 같은 건 바라지도 않는 편이 옳다. 그렇다면 이건 빚을 만들기 위한 계산된 행동이란 것인데, 키옐 같은 타입에게 빚을 지는 건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다.

“어렵게 생각할 이유는 없어. 자네와 대화를 좀 더 나눠야 될 것 같은 기분이 든 것뿐이니까.”

은근슬쩍 키옐의 호칭이 바뀌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도 작지는 않다.

레시듀는 키옐을 바라보다가, 더 생각하기 귀찮아져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다. 짧은 동행이 되겠군.”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그때 해결하면 되겠지.

“글쎄. 그건 어떻게 될지.”

─그리하여, 레시듀의 당초 계획과 달리 키옐 말로굴과의 협상은 무척이나 평화로운 형태로 이뤄졌다.

* * *

키옐은 지저도시까지 최소 이틀에서, 길면 일주일까지 시간이 소모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틀에서 일주일? 너무 불분명한데.”

“당연한 일이다.”

“이 함선의 기동력이 원래 좀 불규칙적인가?”

“자네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군. 현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가? 바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릴수록 위험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지.”

키옐이 툭툭 스스로의 손등을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작금의 세상에서 이동은 ‘탐험’이나 ‘모험’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그것에 낭만 같은 건 없지. 매순간 아주 위험한 미지의 대륙을 떠돌아다니는 셈이다. 우주 바깥에 위성 수십 대를 띄워도 파악할 수 있는 것엔 한계가 있지. 참으로 불편한 세상이 되었어.”

“괜히 도시에 사는 인간들이 불합리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꾹 참던 게 아니었군.”

“그렇다.”

“그럼 행성에 비하면 오히려 우주가 안전한 편이란 건가?”

키옐은 새까만 구멍을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생각했지. 일주일 전까지는.”

레시듀는 납득함과 동시에, ‘피스파인더 암릿’과 연결고리를 만들어 둔 게 옳은 선택이라 생각했다.

현 세상에서 피스파인더 암릿이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유는 역시 이리스 피스파인더의 능력 덕택이었다. 이런 혼란스런 세상에서 신속하고, 확실하며, 광범위한 기동력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능력이다.

“흐음.”

레시듀는 힐끗 내부를 둘러봤다.

암달의 제어실, 최소 수십 명의 승무원이 자리를 지켜야 하는 장소였으나, 지금 이곳엔 레시듀와 키옐밖에 없었다. 루카는 함선 내부를 탐험하고 있다고 했다. 한정된 공간이라 잃어버릴 일도 없으니 그러라고 했다.

아무튼.

최소 수십 명은 갖춰져야 조종할 수 있는 이 함선을, 키옐은 느긋하게 커피까지 마시며 컨트롤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로 재주가 많은 녀석이다.

“그 몸뚱이는 계속 쓸 거냐?”

바드로그의 육신을 가리키며 그리 묻자 키옐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네와 함께 움직일 때는 당분간 그럴 생각이지. 왜. 얼굴이 마음에 들지 않나?”

“이왕이면 미녀가 좋긴 하지.”

“…….”

“농담이니까 인상 펴라.”

레시듀가 킬킬 웃으며 키옐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키옐이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시간도 남아도는데 총수님의 사견이나 들을까 해서.”

“무엇에 대한.”

“세상살이.”

“…….”

레시듀는 웃음기를 지우며 말했다.

“너는 의식을 분리하는 법에 대해 알고 있다.”

“…….”

“지금 나와 대화를 하고 있는 ‘키옐 말로굴’은 그 분리된 의식 중 하나지. 최소 수천 갈래로 의식을 찢을 줄 알고, 그것을 응용할 줄도 안다……. 필멸자치고는 정말 대단한 기예구나.”

키옐은 또 이 남자가 무슨 말을 지껄이려고 자신에 대해 떠벌대는지 의아함이 들었다. 그가 의식을 나눌 수 있단 걸 아는 존재는 극히 드물었지만, 완전히 감춰진 건 아니었다. 갑작스레 그것에 대한 얘기를 꺼내도 크게 놀랄 일은 없단 뜻이다.

“당연히 너도 가능한 일이니 군림자, 천둥우레의 뇌존에게도 쉽게 가능하겠지.”

레시듀의 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

“네놈도 잘 알다시피 그렇게 분리된 의식은 분신, 혹은 만들어진 것 따위로 취급할 수는 없다.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힘의 단위는 작아도, 그 정체성만큼은 분명 천둥우레의 뇌존 그 자체라는 거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한 가지 가정해 보지. 그렇게 의식을 분리시킨 이후 모종의 사건으로 본체와 잔념의 연결이 끊어지게 된다면? 잔념의 행방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

“바로 사라질까? 천천히 사라질까? 아니면 완전히 독립된 존재가 될까? 그렇다면 그 존재는 본체와 다른 존재로 봐야 하나?”

키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남자의 이해력에 대해선 충분히 알고 있다. 두서도, 맥락도 없는 얘기를 갑자기 지껄여대도 본질부터 파악할 수 있는 두뇌를 갖춘 자였다.

“그것이 자네란 말인가?”

“그런 이유로, 우선은 레시듀라고 자처하고 있다.”

“…하아.”

키옐은 한숨인지 조소인지 모를 목소리를 내뱉었다.

레시듀는 더 이상 그런 태도가 기분 나쁘지 않아 히죽 웃었다.

“그것은 자네가 감춘 중요한 비밀 중 하나가 아닌가.”

“딱히 숨길 생각은 없지만, 알고 있는 자가 거의 없긴 하지.”

“그걸 내게 밝힌 이유는?”

“상대의 속내에 대해 듣고 싶으면 이쪽부터 터놓으라더군.”

“누가.”

“나의 벗이.”

키옐이 복잡한 얼굴이 됐다.

선뜻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나, 레시듀의 주장을 참으로 치면 여럿 설명되는 부분이 많았다. 저 묘하게 뇌존을 연상케 하는 말투나, 희미하게 느껴지는 뇌류,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던 이유까지.

하지만 이 말이 전부 사실이라면, 천둥우레의 뇌존과 다를 바 없이 고고하고 오만했던 자아가, 지금 목격하고 있는 모습으로 바뀌었다는 것인데.

키옐은 군림자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변화를 쉽게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살아가기 위해선 목적이 필요하단 말이 있는데, 실제론 순서가 잘못됐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편이 훨씬 좋다. 또 한 가지 가정해 볼까? 만약에 반왕 정도의 존재를 네가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치자.”

레시듀는 기억 속 반왕의 모습을 떠올리며 말했다.

“엄청난 존재지. 틀림없이 역사를 거슬러도 단일개체로선 적수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때문에 이 몸은 그녀를 감히 최강이라고 부른다. 그런 존재를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으니 분명 성취감이 느껴지겠지. 하지만 그 이후엔?”

키옐은 웃었다.

다만 레시듀의 예상과 달리 조소보단 냉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짙은 허무함에 시달릴 것이다?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에?”

목소리엔 질린 기색도 들어 있었다.

몇 번이고 들었던 잔소리를 또 들을 걸 예감한 듯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시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사람에 따라 다른 거고. 이후를 상정하면 더욱 좋다는 거다 네놈의 숙원엔 ‘다음’이 없으니까.”

“무슨 뜻이지.”

“가령 뇌존이었던 이 몸이 강자를 만들고 싶어 했던 이유는 싸울 상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왕을 만든 자들은 ‘멸망’에게 대항할 존재가 필요해서. 하지만 너는 어떻지? 네 목적은 제조 그 자체에 있다. 그 차이를 무시하면 안 돼.”

“…….”

키옐이 침묵했다.

“네가 숙원을 이루기 위해 투자한 시간과 노력에 대해 알고 있다. 대단한 집념이지. 때문에 반작용도 더욱 클 거란 말을 하고 있는 거다. 말이 좀 길어졌는데, 이 몸이 네게 하고 싶은 얘기는 하나다. 지금부터라도 이후를 상정하도록. 그만한 강자를 만든 다음에, 그 녀석을 어떻게 써먹을 것인지.”

“…….”

“그리고 이쯤에서 이 몸의 목적에 대해 밝혀두자면, 다름 아닌 세계평화다.”

뜬금없는 선언에 키옐이 황망한 시선을 보냈다.

“세계평화?”

“그래. 세계평화.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 부차적인 목적도 몇 개 있긴 하지만, 저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혼자선 역부족인 게 현실이지. 그래서 계속 조력자들을 구하고 있는 참이다. 도움이 될 놈들과 닥치는 대로 인연을 맺고, 써먹을 구석이 있는 녀석들은 머리 한구석에 박아뒀지. 네놈도 물론 포함되어 있다. 키옐 총수.”

혼자선 역부족, 조력자, 도움이 될 놈들.

군림자라면 결코 꺼내지 않을 말이 연속으로 나오자, 키옐의 머리는 더욱 엉켰다.

“자네의 목적에 협력할 걸 권하고 있는 것인가?”

“그럴 필요도 없이 그렇게 될 것이다.”

“어째서?”

“만약 네놈이 최강자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그게 정말로 최강最强인지 시험해 봐야 되지 않겠나? 그 대상으론 멸망만한 게 없지.”

레시듀가 킬킬 웃으며 말했다.

“그러니 네놈은 싫든 좋든, 이 몸의 계획에 협력할 수밖에 없는 거야.”

“멸망이 아니라 반왕과 싸우는 걸 택한다면?”

“음.”

그러자 레시듀가 침음했다.

“그건 좀…….”

키옐은 고개를 가로 젓고 말았다.

구멍투성이 논리를 쭉 듣고 있자니 이쪽까지 혼란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냥 해본 말이다. 애초에 반왕과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을지도 몰라.”

“무슨 근거로?”

“이것까진 모르나 보군. 약 2주일 전, 반왕은 우주에서 수백 마리의 멸망과 전투했었다.”

키옐이 패드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제어실에 있는 기기들로는 함선조작밖에 하지 못할 텐데, 무슨 수작을 부린 걸까. 곧 한 개의 동영상이 재생됐다.

화질도 좋지 않고 노이즈도 심했지만, 그건 둥둥 떠다니는 멸망의 시체조각 사이에 오연히 서 있는 반왕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보이나?”

“피를 많이 흘린 것 같은데.”

“그렇다. 붉은 데다, 면적이 넓은 옷 때문에 잘 보이진 않지만 반왕은 이 시점에서 치명상을 입었고 그대로 사라졌다.”

“움직일 여력이 거의 없어 보이는데……. 십이허주가 회수한 건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내가 뿌려둔 센서를 피할 수 있는 자들은 몇 없으니까.”

“으음.”

레시듀가 턱을 쓰다듬으며 눈썹을 찡그렸다.

비록 반왕과 적대하고 있긴 했으나, 그녀는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현시점에서 벌써 망가진 건 예상 밖의 일인데.

“멸망에게 패배했다는 것인가.”

“반왕의 전투력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고작 멸망 수백 마리한테 당할 자가 아니야.”

“그럼?”

“글쎄… 무언가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끼어들었다고밖에는.”

그제야 레시듀는 한 가지 가능성에 생각이 미쳤다.

“십이허주군.”

“십이허주가? 그들은 반왕의 가장 충성스런 신하가 아닌가?”

“전부 그런 건 아니다. 그리고 이 몸이 말한 건 그런 의미도 아니고.”

“무슨 뜻이지?”

“십이허주 중에 멸망, 하이드(Hide)가 숨어 있다. 최소 셋, 누군지는 아직 가려내지 못했다.”

“셋.”

키옐이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과연. 반왕이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면 불시의 기습을 당했을 테고, 저 정도 대미지를 입은 게 불가능한 얘기도 아닐 거야.”

레시듀는 금이 간 목걸이를 잠깐 내려다봤다.

십이허주 안에서 하이드를 추려내는 건 선행해야 할 일 중 하나였다. 하지만 급하게 마음먹을 이유는 없다.

하이드를 찾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그 이후, 십이허주의 탈을 쓴 하이드와 싸울 것도 가정해야 되는데 지금의 레시듀로선 준비가 부족하다.

그러니 지저도시로 가는 건 둘러가는 게 아닌, 장기적인 의미에서 가장 지름길이다.

“자네는 나에 대해선 잘 알지만, 의외로 현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선 잘 모르나 보군.”

“한 달 정도 백수 생활을 하긴 했지. 벌써 그 시절이 그립긴 하다.”

“그럼 이건 알고 있나?”

키옐이 다시 패드를 조작했고, 다시 한번 동영상이 띄워졌다.

아까보단 훨씬 선명한 화질이었다.

그리고 레시듀는 영상 속 장소가 눈에 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불과 일주일 전에 떠난 도시, 멜타운이었다.

“멸망들이 서로 싸우는 것? 이건 이미 알고 있다. 오히려 상당히 가까이에서 보았지.”

심지어 키옐이 의도치 않게 한번 보여 줬던 영상이기도 했다.

“그건 나도 파악했다. 자네는 이 도시에 오래 머물렀더군. 내가 보여 주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야.”

화면이 돌아가며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

마치 겁화가 폭우에 꺼진 직후의 광경 같았다. 그러나 다시 보니, 그 풍경은 그저 아주 거대한 존재의 시체였다.

그건 타오르기를 멈춘 숯이나, 바람 불기 전 간신히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잿더미처럼 보였다.

잔불이 아직 남아 있긴 했으나 얼마 안 가 완전히 꺼질 게 분명했다.

키옐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림자, 태양거인이 죽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