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70화
데미갓.
삼천세계에서 반신半神이란 이름을 가졌던 존재는 여럿 있었으나, 이 종족은 그들 중에서도 제법 특이한 축에 속했다.
종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여 있으나 그들 개개인의 특성은 무척 독자적이었다. 특징이나 습성은 물론이고 약점과 지닌 능력까지 모두 제각각이다. 전 개체를 돌연변이로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레시듀는 이곳에 오기 직전 그들이 가졌던 권능에 대해 좀 더 심층적으로 탐구했다. 그는 현재 존재했던 모든 데미갓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다. 기능적으로는 그렇다.
하나 그것들을 완벽히 다룰 수는 없었고, 여러 가지 해결 못 한 문제점도 남아 있었다.
아직까지 감이 제대로 오지 않은 공간의 권능은 물론, 나머지 권능들 또한 레시듀에게 어울리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게 있다.
이른바 적성이라는 것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데미갓의 개체 수는 127체다. 그들은 각기 다른 권능을 다뤘으니, 레시듀가 쓸 수 있는 권능도 일단 127개라는 것이 된다. 이것들 중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권능 그 자체만으로 우열을 매길 수는 없다.
가령 검의 데미갓인 리키 이외에도 무기를 권능으로 삼았던 데미갓은 존재했으나 그들 중 오직 리키만이 자신의 권능을 극한까지 갈고닦아, 공간의 권능을 가진 로드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수준까지 발전시켰다.
…가장 중요한 건 숙련도라는 것이다.
데미갓이 가진 권능은 우주적인 관점에서도 발전 가능성이 높은 힘에 속했다.
그리고 레시듀는 거기서 재밌는 사실을 하나 발견했다.
최소 ‘하나’의 권능을 완벽히 이해하고 다루는 존재들.
─절대자.
그중에서도 ‘지배자’들과 제법 흡사하지 않은가?
‘백스물일곱.’
레시듀는 속으로 그 숫자를 되뇌었다.
루카스는 데미갓의 힘을 의도적으로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
삶을 살아가며 신마력이란 힘을 손에 넣었고 절대자 시절에도 그 몇 가지 힘을 다뤘으나, 결과적으로는 마도학이란 학문의 양분이 되었을 뿐이다.
레시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그와 다르다.
데미갓이 가졌던 모든 권능을 완벽히 이해해서 제 것으로 삼고 싶었다.
이때 레시듀가 말하는 ‘완벽하게 이해함’이란 데미갓의 잣대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가 원하는 곳까지 수준을 끌어낸다면─ 레시듀는 최소, 백스물일곱의 권능을 가진 지배자가 될 테니까.
* * *
[…그럼 지금 당신께선 백스물일곱의 권능을 가진 지배자인 겁니까?]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촉수 나무와의 거리를 좁히며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주로 레시듀의 강함, 전투력에 대한 얘기였다.
레시듀는 지금 떠벌대고 있는 정보를 뇌존이 엿듣고 있거나, 혹은 머지않아 알게 될 거란 걸 알고 있다.
그래서 뭐.
크게 개의치 않는다. 오히려 이게 더 공평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레시듀는 뇌존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지만, 놈은 지금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를 테니까. 뇌존 입장에선 코웃음이 나오겠지만, 레시듀 입장에서 그들은 이제 동격이었다.
한편 레티프는 백스물일곱 개의 권능을 가진 지배자가 역사상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게다가 상대는 절대자의 꼭대기에 서 있던 존재, 127개의 권능을 단순히 사용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겠지. 127명의 지배자가 한데 뭉친 것 이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고작 그걸로 저것과 싸우기엔 많이 부족할 텐데요.]
“큭큭.”
레시듀는 음흉하게 웃음을 흘렸다.
“역시 너는 쓸 만한 놈이구나.”
[무슨 뜻입니까?]
“지배자 중에서 너 같은 녀석이 흔치는 않다. 군림자가 아닌 존재의 강함도 인정할 수 있는 녀석. 머릿속이 조금은 유연하다는 거지.”
[…….]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네겐 경험이 필요하다. 그걸 위해선 필연적으로 다음 단계에 대해 설명해야겠지. 레티프, 우리가 저 촉수 나무와 싸워서 이길 가능성이 몇이나 될 거라 생각하나?”
[최대한 희망을 싣는다면… 0.0001퍼센트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군요.]
생각보다 후했다.
레티프가 자신을 제법 높게 평가하고 있다는 증거기도 했다.
“우리가 일으킬 시너지를 고려하면 그쯤 되려나. 멸망이 상대라면 어쩔 수 없는 결과겠지만.”
[어떻게 하실 겁니까? 손톱만 한 확률에 목숨을 걸어 보시렵니까?]
“…….”
슬슬 목적지와의 거리가 많이 좁혀졌는지 촉수들의 공세가 점차 거세졌다. 여태껏 어디 숨어 있었는지 모를, 역겨운 형상을 한 멸망들도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마치 여왕을 지키려는 벌레들 같다. 이놈들에게 그런 습성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레소드를 휘둘러 그것들을 찢어발긴다. 츠즈즛, 검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창백한 뇌전이 아지랑이처럼 남았다.
“네가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이 싸움에서 모험을 하는 건 이 몸 혼자면 돼.”
그건 작전 설명을 한 순간부터 레시듀가 강조하던 사항이기도 했다.
[그럼 다른 걸 묻지요. 이 검을 휘두르는 능력도 데미갓의 권능입니까? 평범한 검술 같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확실히 대답해 주시면 안 됩니까?]
“따지기는……. 좋다. 지금 이 몸이 주력으로 삼고 있는 힘은 너의 첫 질문과 이어진다.”
첫 질문, 백스물일곱의 권능에 대한 얘기인가?
[그럼 역시 데미갓의 권능에 뇌전을 곁들인 게 아닙니까.]
“반대다. 원래라면 뇌전을 베이스로 두고, 데미갓의 권능은 보조로 적재적소에 활용하며 싸웠다. 그런데 이제 관두기로 했지. 귀찮아졌거든.”
[무슨 뜻입니까?]
“생각하면서 움직이는 건 이 몸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는 거다.”
돌연 레시듀가 슬픈 표정을 지었다.
“알고 있나, 레티레티? 이 몸뚱이엔 몇 가지 저주가 있다. 아무리 대단한 작자도 이 몸에 빙의憑依하거나 얽히게 되면, 그야말로 개똥밭에서 처절하게 구르는 꼴을 면치 못하지. 또한 매사에 과할 정도로 신중하게 굴고 싶어지고.”
[…….]
“이외에도 몇 가지 저주가 더 있는데 그건 다음 기회에 설명하기로 하고……. 좌우지간, 이 몸은 골몰히 생각한 뒤 움직이는 게 성미에 맞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서 앞으론 뭐든 저지른 다음에 생각하기로 했다.”
저지른 다음에 생각하기.
이건 앞으로 레시듀의 좌우명이 될 것이다.
“데미갓의 모든 능력에 번개를 적용시키기로 했다. 화염보다 뜨거운 번개, 바람보다 날카로운 번개, 얼음보다 차가운 번개……. 휘두르는 칼날에도 번개를 묻히기로 했고, 미래나 과거를 읽는 건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듯 번뜩이는 영감으로 대체했다. 공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몸이 이동했을 때 뇌전이 잔상처럼 남는 걸 보았지?”
[예.]
“이 몸은 번개처럼 재빨리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이름을 붙일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조금 촌스럽군요.]
“그 또한 지독한 저주 중 하나지.”
[애초에 번개는 그렇게 빠르지 않습니다만.]
“다분히 절대자적인 관점이군. 머리가 유연하단 말은 취소하마.”
[…….]
여태까지 이런 식으로 싸우지 않았던 이유가 있다.
뇌전雷電을 베이스로 두지 않고, 굳이 데미갓의 모든 능력을 하나하나 파고들어 전투수단으로 삼으려고 했던 이유.
순전히 뇌존 때문이다.
아무리 자신이 뇌전을 갈고닦아도 놈이 다루는 우레 수준까지 끌어올릴 자신이 없었다. 그러니 여태껏 레시듀는 도망치고 있었던 게 된다. 복제품, 열등품 취급을 받기 싫어서 자신의 진짜 적성을 외면했다.
미련하고 부끄러운 행동이었다.
탓.
나무에 거의 접근한 순간, 레시듀가 도약했다. 착지 지점은 촉수 나무의 겉면이다. 착지한 레시듀는 마치 겉면에 세로로 달라붙은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물론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상태로 일어선 다음 질주하며 촉수 나무를 맹렬한 속도로 오르기 시작했다.
콰자자작!
레소드를 나무에 푹 박아 넣은 채 질주하는 것이라 껍데기가 난폭하게 갈라지며 진물 같은 게 흘러나왔다. 비명 소리 같은 게 들리기도 했다.
[으음…….]
레티프는 불쾌한 느낌에 침음했다.
그사이 레시듀는 순식간에 나무 꼭대기에 이른 뒤 다시 한번 뛰었다. 파직, 뇌류만을 남기며 사라진 몸뚱이는 까마득한 상공에 다시 나타났다.
레시듀는 거대한 촉수 나무를 한눈에 내려다보며 말했다.
“준비됐나, ‘레’?”
레티프가 준비됐던 대사를 기계적으로 읊었다.
[…물론이지, ‘레’.]
하하하하!
레시듀가 천둥이 울리는 듯한 웃음을 터뜨리며 레소드를 두 손으로 잡았다. 츠즈즛! 칼날에 뇌전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쿠르릉…….
먹구름이 몰려오며 레시듀를 감쌌다. 이제 레소드에선 천둥번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완전히 응축되지 못한 채 새어 나온 뇌류가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갔고, 그 잔재는 낙뢰가 되어 사방에 떨어졌다.
이 정도 여파는 예상했다. 그래서 인간들이 모두 도망칠 때까지 늦장을 부린 거고.
레시듀는 전신에 들끓는 뇌력雷力을 도첨에 집중시켰다.
“천둥우레의 일격이다─!”
레티프는 그 네이밍 센스에 경악했으나, 직후 자신의 몸뚱이에 충만했던 힘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레소드로 끝에서 낙뢰가 떨어졌다.
꽈아앙!
지금 그들이 낼 수 있는 최대 파괴력의 일격이 촉수 나무를 내려쳤다. 태양이 직접 떨어진 것처럼 강렬한 빛이 사방을 뒤덮었다.
쩌억! 촉수 나무에 커다란 상흔이 새겨졌다. 상흔은 마치 괴수가 아가리를 벌리는 꼴을 하고 있었다.
레시듀는 그 내부를 들여다봤다.
예상대로 나무 속살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지는 않았다. 저 안쪽은 별세계로 보아도 무방할 만큼 독립적인 공간이었다.
“수고했다, 레티프.”
레소드를 허공에 던지듯 놓아주자, 칼날은 곧 레티프의 모습이 되었다.
“…도움이 됐다면, 영광이군요.”
레티프가 숨을 헐떡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레시듀도 슬쩍 마주 웃어 준 다음 말했다.
“검은 마녀.”
기다렸다는 듯 이리스가 나타났다.
“…준비는 됐습니다.”
“수고했다.”
“흥. 제 역할은 이걸로 끝났다는 걸 알아두시길.”
싸늘한 목소리를 내뱉으며 손을 휘젓자, 허공에서 시메트라가 나타났다.
레시듀는 허공에 나타난 시메트라의 목덜미를 낚아챘다.
“으겍.”
“물론. 그럼 좀 있다 보지.”
‘천둥우레의 일격’으로 만들어 낸 상처는 어느덧 재생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레시듀는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몸을 던졌다. 이리스가 보조하듯 양손을 비틀었다. 좌악! 막 닫히려던 상처가 다시 억지로 벌어졌다.
그사이 레시듀는 상처에 몸을 집어넣어 나무 내부에 진입하는 것에 성공했다.
…이걸로 작전은 끝이다.
“…조심하십시오.”
이리스는 레시듀가 사라지고 난 이후에야 낮게 중얼거렸다.
* * *
묘한 감촉이다.
나무 내부로 진입한 순간, 점액질로 된 어떤 덩어리에 몸이 잠기는 듯한 감촉이 들었다. 아주 느릿하지만 일정한 속도로 심해를 유영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레시듀는 자신이 하얀 공간 한복판에 서 있는 걸 깨달았다.
“흠.”
우선은 그렇게 보이기는 하는데.
손가락을 쥐었다 펴거나 목 관절을 풀며 몸 상태부터 체크했다.
“여, 여긴 어딥니까?”
같이 끌려온 시메트라가 벌벌 떨며 물었다.
“말했지 않나. 멸망의 안쪽에 진입할 거라고.”
“여기가 그 거목의 내부란 말씀입니까?”
“네 녀석은 뻔한 걸 묻는 못된 습관이 있구나.”
레시듀는 그리 말하며 휘적휘적 먼저 걸어 나갔다. 시메트라가 급히 일어나서 그 뒤를 따랐다.
“내부에 접촉한다는 게 이런 의미였습니까? 전 틀림없이 멸망의 정신과 접촉한다는 뜻인 줄…….”
“그것도 계획의 일부긴 했지. 음.”
레시듀는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딱히 눈에 들어오는 건 없었다.
눈을 몇 번 깜박여도 풍경은 달라지지 않는다.
“떨거지. 뭐가 보이나?”
“네? 어, 레시듀 님이 보입니다.”
“…….”
“그, 그것 이외엔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하얀색으로 된 공간입니다!”
슬그머니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시메트라가 급히 변명했다. 레시듀는 부쩍 멍청해진 떨거지의 정신머리를 보니,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걱정이 우러나왔다. 한때의 상사로서 묵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여길 나간 이후엔 밑바닥부터 철저히 교육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보이는 광경은 거의 동일하단 뜻이렷다.
레시듀는 뻗었던 손가락을 내리고 다시 걸었다. 잠깐 눈치 보던 시메트라도 금세 바짝 붙어 쫓아왔다.
“그런데… 정말 이 방법이 효과가 있을 것 같습니까?”
“불안한가?”
“예. 전 멸망의 정신과 접촉해 봤지 않습니까. 비록 그것들이 정체를 숨기고 있을 때긴 했지만…….”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다시 한번 공포가 차올랐다. 시메트라는 심호흡하며 억지로 가슴을 진정시킨 뒤, 이어서 말했다.
“…그건 파악할 수 있거나, 대화가 통하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건 네 녀석이 멍청해서고.”
“…….”
“그리고 아마 모든 개체가 그런 건 아니겠지. 멸망에게도 개성은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루카’나 ‘프레이 블레이크’ 같은 존재가 있을 리도 없으니.
그리고 그 둘은, 서로를 적대했다.
루카는 분명 프레이를 죽였다. 그렇다면 멸망의 입장에서 반란자는 프레이인가? 모든 멸망이 프레이를 적대하는가? 그리 단순하게 여길 수만은 없다. 멸망의 특징이나 습성은 일견 불가해의 것으로 비쳤으나 – 실은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튼 레시듀는 프레이의 정신과 교감한 것이다.
멸망임이 분명한 존재의 기억을 엿봤고, 그의 상념을 이해했다.
이해.
멸망을 이해하는 게 가능하다면, 놈들의 공략법 또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해질 것이다.
레시듀는 목걸이를 살짝 움켜쥐었다.
“그래서 이곳에 온 겁니까? 대화로 풀어나가기 위해?”
“대화일 수도 있고 협상일 수도 있고 협박일 수도 있지. 만나 봐야 확실해질 거다.”
시메트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만약 실패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건 왜 묻나?”
“그냥… 최악의 상황은 대비해야 되지 않습니까.”
“음. 걱정할 건 없다.”
시메트라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멸망과 하나가 되어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리거나, 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을 영원히 배회하거나, 그러다가 정신이 버티지 못하고 아예 미쳐 버리거나, 아니면 죽기밖에 더 하겠나?”
…괜히 물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