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67화
왜 오해하고 있었던 거지?
루카스는 강하다. 그건 진작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놈이 가진 굳건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무엇을 토대로 세워졌는지에 대해서 집중하지 않았다.
오직 결과만을 주목했다.
한 명의 인간이 절대자가 되고, 다시 격락하고, 더욱 강해지고, 또 다시 좌절하고, 극복하고─ 그렇게 멸망이 되었다.
고작 몇 줄로 정리할 수 있는 삶이었으나 그 과정은 어떠했나?
한순간이라도 수월한 적이 있었나? 여유 부릴 틈은 있었나? 진정으로 평화를 느낀 적은?
“…이것이.”
레시듀가 목소리를 냈다.
“내게 보여 주고 싶은 광경이었나?”
으스러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레시듀는 스스로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단 사실을 처음 알았다.
“너는 이 몸을 힐난하고 싶은 건가? ‘나는 너보다 훨씬 힘든 상황에서도 잘 헤쳐나갔다’, ‘그런데 넌 고작해야 그 정도로 엄살을 부리는 것이냐’,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거냐?”
스스로 말하고도 아니란 걸 알았다. 루카스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이 광경을 보여 준 것엔 분명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 이유, 이유…….
그 엿 같은 이유.
레시듀는 지금 그 이유란 녀석을 찾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건 놈이 남긴 전언을 가장 편하게─ 즉 악의적으로 왜곡시켜, 해석하는 것뿐이었다.
어느새 레시듀는 다시 한번 멜타운의 폐허, 그 중심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눈앞엔 프레이 블레이크가 있었다.
쏴아아-
당연하게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빗소리가 더욱 커졌다.
꽉 문 입술에선 이제 핏물이 흘러나왔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 얕봤던 건 아니지만, 이 몸은 약해졌다. 어처구니없을 만큼 작고 미약한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그것을 알고, 인정하는 과정이었지.”
줄곧 품속에 처박아 두기만 했던 본심이었다.
하지만 이걸 털어놓는다고 말할 수 있나? 상대가 없지 않나. 시체 앞에서 청승 떠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꼴이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최선을 다했다. 할 수 있는 데까진 해봤는데 그래도 안 되더라.”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무너진 둑에서 물이 넘치듯, 스스로를 통제하는 게 어려웠다.
레시듀는 이제 씁쓸한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너의 발버둥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경외, 그리고 무력감이었지. 일전의 나였다면 품지 못했을 감정이다. 루카스. 난 네가 아니야. 너처럼은 될 수 없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달라. 난 지금 이 순간까지도 도무지… 절망을 익숙하게 여길 수가 없어.”
…이게 루카스가 아니란 걸 안다.
녀석의 명령을 받은 멸망의 일부였고, 심지어 이미 생체기능은 정지했다.
오히려 그걸 면피로 삼을 수 있어서 약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레시듀는 이 순간까지도 자존심을 지키려 계산적이게 구는 스스로가 역겨울 만치 싫었다.
더 이상 마주볼 수조차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돌렸다. 철퍽, 그러나 몇 발자국 떼지도 못한 채 넘어지고 말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빌어먹을 몸뚱이.
도시 외곽에서 중심부까지 걸어오면서, 다양한 인간 군상을 목격했다. 그걸 보며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 느낀 점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알기 위해 스스로의 내면을 들여다보자, 신기하게도 몸 상태가 조금 나아졌다.
지금은 어떻지?
다시 육체가 말을 듣지 않았다. 맞물리지 않은 채 삐걱대고 있다.
정신이 크게 흔들리고 있단 증거였다.
“…….”
그래도 이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레시듀는 기어갔다. 흙탕물의 맛을 입술로 느끼며 기어갔다.
기어가고, 기어가다가.
“부족하겠지.”
“──.”
…목소리를 들었다.
잊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레시듀의 몸이 멈췄다.
사납게 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이제 그는 손가락 하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들려선 안 될 목소리였고, 기대조차 품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그럴 수도 없었다.
전신이 굳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론 한참 부족할 거야.”
“…….”
그러는 도중에도 나지막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레시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반쯤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 상태로 두 눈을 감고 한참이나 가슴을 진정시켰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떨어지는 빗방울이 조금 선명하게 보이는 것 같았다. 물에 푹 젖은 머리카락 너머로, 피부를 두드리는 비의 감촉이 느껴졌다.
차갑다.
“…그럼.”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럼, 이 이상 어떡하란 거냐?”
“사력을 다해 봐. 죽음을 각오하고.”
“내가 그러지 않았을 것 같나?”
“그래. 그래도 계속 실패할 거다.”
목소리에 희미한 웃음기가 섞였다.
“삶은 쉽지 않으니까. 예상할 수 없는 일투성이니까. 견딜 만하다, 이제는 괜찮다, 할 수 있다, 희망찬 마음을 먹는 순간엔 항상 더 큰 고난이 밀려오더군.”
아니야. 그건 아니야.
모든 삶이 그런 건 아니야.
인생이란, 삶이란, 네놈에게만 특히 더 가혹했다.
“그럼 어떡하면 되나.”
“떨쳐내고 다시 일어서야지.”
“언제까지? 이길 때까지?”
“아니.”
그 순간 확연히 그려졌다.
목소리의 주인이 미소 짓는 모습이.
“네가 만족할 수 있을 때까지.”
“──.”
대마도사의 삶을 알고 있다.
고통과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이다.
루카스는, 강하지 않았다. 완벽하지도 않았다.
약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
부서지고, 주저앉고, 한심하게 발버둥 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뇌존이었을 때와, 레시듀였을 때. 모두.
물론 루카스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존경과 경애가 항상 꼬리표처럼 뒤따라왔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그 결은 다를지라도, 그토록 많은 인물에게서 사랑받는 건 분명 축복이었다.
동시에 저주라는 걸 레시듀는 알고 있었다.
루카스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경애와 기대를 배신할 수 없는 저주에 걸려 있었다.
“네놈은… 대단할 게 없었어.”
시작은 특출하지 않았다.
“고작해야 인간들에게 천재란 소리를 들으며 각광받는 정도였다. 군림자가 보기엔 그저 평범한 인간보다 조금 뛰어나고…….”
그리고.
“…남들보다 훨씬 무거운 책임감을 가진 남자였을 뿐이다.”
하지만 루카스는 사람의 기대를 한 번도 배신하지 않았고─ 마지막 순간이 오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도망치지 않았다.
그랬던 남자에게 세상이 바란 마지막 역할은, 멸망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다.
“너만 알고 있는 거지.”
“…….”
“앓는 소리나 포기하고 싶을 때의 절규, 한심함에 범벅이 된 얼굴과 방황들. 너는 모두 보았다. 드러내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결과적으론 그렇게 됐지. 그리고 난 세상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
“그러니까 네게 맡길 수 있었던 거야.”
“…틀린 선택이 아니었나?”
“내 모든 선택이 옳았던 건 아니야.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의 생각엔 흔들림이 없다.”
이 꼴을 보고 있을 텐데도,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쓰레기처럼 방황하는 모습을,
흙탕물을 마시며 기어가는 꼬락서니를 눈에 담으며,
루카스는 말했다.
“그때 네게 맡긴 게 최고의 선택이었어.”
“…….”
─먹구름이 있었다.
머릿속에 도저히 개이지 않는, 개일 수 없는 먹구름이 있었다.
청기사 페일과 만나고, 세디 트로우맨에게 비난받고, 베니앙 아르젠토에게 동정받았던 그날.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부터, 레시듀의 머릿속엔 줄곧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빗물은 쉴 새 없이 쏟아졌고 천둥번개가 끊임없이 내리쳤다.
그게 싫었고, 두려웠다.
정신이 있는 매순간 고통스러워서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도망치고 싶었다.
왜 그랬던 거지?
난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거냐?
루카스의 지인에게 차가운 눈총을 받는 것? 혹은 원색적인 비난을 받는 것?
아니.
그딴 쓰레기들이 자신을 어떻게 여기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놈이 전가한 책임, 정체성에 대한 불안, 멸망에 대한 근원적인 공포.
‘아냐.’
그런 게 아니야.
그딴 건 모두 뇌존이었을 때 겪었지 않나.
책임을 수도 없이 전가시켰고,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찰했다. 자신보다 더 강한 존재가 있다면, 그 개자식을 굴복시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상상까지 펼쳤다.
그러니 레시듀에게 유일하게 경험이 없던 건─ 친구를 실망시키는 것이었다.
루카스가 실망하는 것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녀석의 눈치만을 보았다.
레시듀가 바라봤던 녀석의 삶은 완벽해서─ 그야말로 무결한 모범답안이어서. 하지만 그로선 아무리 흉내 내도 그렇게 될 수 없어서, 그 엇갈림에 쭉 괴로워했다.
그래서 루카스의 인연을 만나는 게 힘들었다.
그들이 자신에게서 위화감을 발견한다는 건, 레시듀의 역할수행이 완벽하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큭.”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소도 냉소도 아닌 웃음을 흘리는 게 얼마만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휩쓸렸다.
아니, 휩쓸리기만 했었다.
회의에 참석했을 때,
반왕과 마주했을 때,
멸망이 급습했을 때,
이윽고 감금됐을 때,
4기사를 보았을 때,
…그리고 루카를 만났을 때.
항상 선택지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속으로 되뇌었다.
아직은 아니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시간은 촉박했고, 어떤 상황에서든 가진 힘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보다 웅크렸다.
루카스는 항상 그랬으니까.
놈은 준비가 되지 않았을 땐 항상 웅크린 채 때를 기다렸다. 침착하게 내면을 다스리며 힘을 길렀다.
─그래선 안 됐다.
다른 인물이었고, 다른 삶이었다.
그렇다면 정답마저 달라야 했다.
헛웃음이 나올 만큼 당연한 것이었다. 우습게 여기던 인간 조무래기들조차 진작 알고 있던 해답, 그러나 레시듀가 그걸 체감하기까지 이토록 오래 걸렸다.
이토록 오래 방황했다.
“이만 일어서.”
목소리에 대꾸하듯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먹구름을 무서워하는 건 너답지 않잖아.”
너덜너덜하던 정신이 다시금 이어졌다. 뇌존 시절이었을 때도 느낀 적 없는 거대한 환희 같은 게 몰려왔다.
마치 누군가가 잡아 일으켜 준 것처럼 레시듀는 똑바로 섰고, 멸망을 바라봤다.
대지에 깊게 뿌리내린 거목.
온 세상의 적이자 재앙인 존재.
하지만 레시듀만큼은 도저히 그렇게만 여길 수 없는 존재를 바라봤다.
“아직도 망설이나?”
“…어쩌면.”
툭.
등을 떠밀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꺼운 로브 너머로도 그 감촉은 생생히 느껴졌다.
“보여 주도록 해라. 네가 누군지, 이 세상 모든 천둥과 번개가 누구로부터 만들어진 건지.”
“…이 몸은 천둥우레의 뇌존이 아니다.”
“알아.”
씨익 웃는 듯한 목소리로, 루카스가 말했다.
“넘어설 거잖아.”
“──.”
머릿속에 천둥이 치는 것 같았다.
있었다.
그래, 그런 목표도, 분명 있었다.
레시듀는 루카스의 책임만 짊어진 게 아니었다. 그 자신이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도 분명히 있었다.
돌연 머릿속이 확 맑아졌다. 반대로 더 엉켰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루카스의 말대로, 비바람과 먹구름은 레시듀의 두려움이 아니었다.
“큭큭…….”
레시듀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리며 한 발자국을 내딛었다. 두 번 다시 쓰러질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전신에 뇌전이 꿈틀댔다.
“하하하……”
쿠르릉…….
그에 감응하듯 하늘의 먹구름이 요동치며 천둥번개가 번쩍거렸다.
“하하, 크하하하…….”
뇌광이 번뜩이며 유쾌한 광소가 폐허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