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62화
육십아홉의 지배자가 한자리에 모였던 적이 있었나?
없다.
적어도 레시듀가, 과거의 뇌존이 알기로는 그랬다. 저만한 존재들을 전부 아우를 수 있는 우주는 몇 없으니까. 고작해야 ‘꼭대기 우주’에서 전 우주적 영향을 끼칠 만한 안건을 다룰 때, [절대자 의회]의 일원 전원이 출석한다면 저것에 버금가는 숫자가 모이긴 할 것이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레시듀는 지금, 어쩌면 의회의 전원출석보다 희귀한 광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이 도시,
기껏해야 100만 명도 수용할 수 없는 작은 도시에, 한눈에 담을 수 있을 만큼 밀집한 절대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고정이라도 된 듯 레시듀를 향해 있었다. 레시듀도 그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시메트라는 이곳에 모인 지배자의 총수가 육십아홉이라고 했으나, 우선 레시듀가 파악한 수는 총 오십이었다.
그렇다면 나머지 열아홉은 모습을 감추고 있는 건가? 애초에 육십아홉이라는 숫자가 거짓말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더 많은 인원이 숨어 있는가, 아니면 숫자를 부풀려 허세를 부린 것인가…….
…익숙한 얼굴이 제법 있었다.
애초에 지배자 정도의 절대자라면 뇌존 시절의 레시듀도 한 번은 주목했던 존재들일 테니 당연하다.
하나 그중엔 분명 처음 보는 얼굴도 더러 있었다. 단순히 외관을 바꾼 것일지도 모르나……. 글쎄. 좋은 일은 아니다. 레시듀는 얼굴을 모르는 자들의 권능까지 알 수는 없었다.
“후우…….”
시메트라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한숨이 아닌 심호흡이다.
동시에 그녀의 한쪽 무릎이 꿇렸다. 눈꺼풀이 안구를 서서히 덮었고, 뒤이어 그녀의 몸에선 달빛과 같은 위광이 흘러나왔다.
정수리에서 뻗어 나온 빛의 줄기 같은 게 절대자들을 향해 뻗어 나갔다. 그들은 익숙하다는 듯 그 연결을 받아들였다.
“…….”
시메트라의 권능 중 하나인 ‘감각공유’임이 분명하다. 원래라면 자신이 기르는 신수神獸들에게나 쓰는 권능이다.
레시듀는 그걸 절대자에게 사용하는 시메트라에게 한 번,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공유를 받아들인 절대자들을 보고 한 번 또 놀랐다. 뒤이어 그녀의 역할을 깨닫는다.
이번 싸움에서 시메트라는 직접 나서지 않을 것이다. 전황 파악 및 지휘에 총력을 기울이겠지.
그 순간 절대자 오십 중 절반의 기척이 사라졌다. 레시듀가 그들의 위치를 정밀히 파악하려는 순간 나머지 절반은 스스로의 존재감을 더욱 끌어올렸다.
콰아아!
최소 열 명 이상의 절대자가 레시듀를 향해 들이닥쳤다. 그 기세는 육안으로 직시하기 힘들 정도였다.
그들은 육신의 틀을 버린 채, 초월체로서 레시듀에게 부딪치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놈들의 돌격은 체계적이기도 했다. 시야를 꽉 채운 열댓 명의 절대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마치 정돈된 기마병처럼 돌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상하기 힘든 광경이 연이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레시듀는 표정에 변화를 주지 않고 하나밖에 남지 않았던 손을 뻗었다. 살짝 뒤로 물러나며 절대자들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정확히 열한 명이었고, 그들 중 얼굴이 익은 자는 여섯이었다.
‘인형, 폭풍, 바닷물, 오물, 채찍, 유리.’
파악한 여섯 절대자의 상극이라 할 수 있는 물질, 혹은 개념이 레시듀의 손바닥에서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은 서로의 존재감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맞물리며 절대자들을 향해 쏘아져 나갔다.
레시듀가 방출한 권능과 초월체가 충돌했다.
“……!”
다음 순간, 레시듀는 뻗었던 손을 움츠리고 말았다. 기껏 신경 써서 조합한 권능은 바위에 부딪힌 바람처럼 허망히 부서져 흩어진 것이다.
효과가 없는 건가? 아니. 틀리다.
“초월체의 공유……?”
“그렇습니다.”
시메트라의 냉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웃음기가 조금 섞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꽈앙!
레시듀는 초월체와 거칠게 부딪쳤다. 사실 그의 입장에선 치인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일반적인 몸통박치기와는 차원이 다른 위력이었다. 지금 그들의 형상은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권능의 실체화라서, 접촉을 허용한 순간 놈들이 관장하는 다수의 개념이 레시듀의 정신과 육신을 걸레짝으로 만들었다.
레시듀의 신형이 허공을 향해 치솟았다. 눈을 까뒤집은 채 핏물을 뱉어냈다. 정신을 잃은 건 물론, 곧 목숨이 끊어질 듯한 모습이었으나 절대자들의 공세는 끝나지 않았다.
열하나의 초월체들은 다시 진형을 갖춘 채, 한 바퀴 크게 돌아 또다시 레시듀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적절한 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들은 원거리 공격을 쏟아냈고, 여태껏 숨어 있던 절대자들도 모습을 드러내 레시듀의 급소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한 몸인 것처럼 펼쳐지는 연계공격이다.
레시듀가 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쏘아냈다. 허공은 아니었다.
모습을 감추고 있던 절대자, 은닉을 관장하는 절대자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과 함께, 간신히 몸을 비틀어 그 공격을 피했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아직 남은 수가 있습니까?”
은닉의 절대자가 입을 비틀었다.
레시듀는 대꾸하지 않고 뻗었던 손을 억세게 움켜잡으며 중얼거렸다.
“흩어져라.”
“……!”
뒤이어 후방에서 거대한 굉음이 일어났다.
절대자들은 놀라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상 밖의 전개, 커다란 소란에도 사전에 내려진 작전대로 움직였다. 다만 시선만으로 폭발의 근원지를 흘겨볼 뿐이었다.
병장구의 비雨였다.
폭발이 일어난 곳에서 온갖 병장구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감히 셀 수 없을 만큼 많고 다양한 무기들이었고, 그것들 하나하나에 무시할 수 없는 권능이 일렁이고 있었다.
무시하고 뚫어낼 만큼 만만히 볼 게 아니다. 아마도 이 기술은 레시듀 비장의 수단 중 하나일 것이다.
절대자들은 하는 수 없이 병장구의 비를 피해 조금 둘러갈 수밖에 없었다. 원거리에서 쏟아지는 공격 또한 저 심상치 않은 금속무기에 대부분 가로막혔다.
그때 레시듀가 눈을 떴다.
파팟!
하늘에서 떨어지던 단창과 소검小劍 한 자루가 그의 손에 들렸다. 레시듀는 허공을 박차며 가장 가까이에 있던 지배자의 목을 그었다. 콰직! 지배자의 목이 떨어진 순간 무기도 박살이 났다. 애초에 내구도를 생각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휘둘렀으니 감수해야 할 결과였다.
상관없었다. 사방에 무기가 쏟아지고 있지 않나?
철과 빗물이 섞여 폭우처럼 쏟아지는 가운데, 레시듀는 피투성이로 싸워 나갔다.
그 자신이 만들어 낸 무기라고 해도 안전한 건 아니었다. 이것에 베인다면 레시듀 또한 상처를 입는다.
그런데도 레시듀는 쏟아지는 병장구의 비를 종이 한 장 차이로 모두 피했다. 뿐만 아니라 때때로 발판으로 삼고, 걷어차서 상대를 명중시키거나, 적절한 순간 방패처럼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했다.
“…….”
그 모습을 시메트라는 할 말을 잃은 채로 바라봤다.
대체… 이게 무슨 전투방식이지?
필멸자에겐 영겁이나 다름없는 세월을 살아온 그녀도 눈앞에 펼쳐진 전투법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전율이 일었다.
상대는 조무래기가 아니다.
지배자다. 지배자란 말이다.
최소 수십 개의 우주를 구했고, 다섯 이상의 우주를 관리하는 자들.
가장 어린 자도 수만 년을 넘게 살아온 존재.
그 지배자 수십을 상대로, 저 약하고 볼품없는 권능들로 대등 이상으로 싸우는 존재.
…마지막 의심이 사라진 기분이다.
저자는, 정말 군림자였던 존재다.
푸화악!
또 한 명의 지배자가 목이 잘렸다. 벌써 다섯이었다. 수십 명이 완벽하게 협공하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섯이나 되는 지배자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리고 그게 레시듀가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성과였다.
…끝없이 쏟아질 것 같았던 병장구의 비가 그쳤다. 그에 따라 절대자들의 행동에도 제약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또 다른 지배자의 죽음에 당황하지도 않았다.
정해진 대로, 작전대로.
천천히 상대를 압박하며, 궁지로 내몰 뿐이었다.
“…….”
레시듀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은 그 자신이 흘린 핏물로 처참할 만큼 물들어 있어서, 멀리서 보면 단순한 핏덩이로 보일 지경이었다.
이제 더 이상 무기가 없다. 손에 들린 게 전부다. 그가 메이스를 휘두르려는 순간, 갑자기 팔에 힘이 쭉 빠졌다. 마치 썩어가듯, 팔뚝부터 새까맣게 변색되는 게 느껴졌다.
‘─저주의 지배자.’
레시듀가 원인을 깨닫는 순간, 코앞까지 접근한 지배자가 레시듀의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커헉…….”
‘근력’의 지배자의 전력이 담긴 일격에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레시듀는 입으로 창자를 쏟아낼 것처럼 쿨럭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복부에 꽂힌 손목을 움켜잡았다. 상대를 노려보는 순간, 갑자기 한쪽 시야갸 흐려졌다. 왼쪽 눈동자가 진물처럼 흘러내렸다.
‘용해의 지배자…….’
무릎에 더 이상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레시듀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끝난 건가?”
“아니. 방심하지 마. 아직 몇 가지 수단이 더 남아 있어도 이상할 게 없는 분이다.”
“…….”
레시듀는 그들을 올려다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그래. 바로 맞췄다.
몇 가지씩이나 있지는 않지만, 일단 하나는 있다.
그그극!
레시듀를 중심으로 주변 공간이 뒤틀리기 시작했다. 심상치 않은 전조를 감지한 절대자들이 표정을 굳힌 채 뒷걸음질 쳤다.
“물러서!”
“말려들면 죽을지도 모른다!”
일그러진 공간은 이윽고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소용돌이의 형상을 만들었다. 레시듀의 육신은 그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공간의 뒤틀림이 끝났을 때, 그는 더 이상 이곳에 없었다.
“사라졌다…….”
“어떻게?”
“죽은 것인가.”
“아니. 그건 아닌 것 같군.”
절대자들 사이에서 조용한 동요가 일어났다.
그들 중 한 명이 시메트라를 보았다. 어찌됐든 상황을 가장 정확히 파악하고 있을 자였다.
“시메트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공간지배.”
시메트라는 놀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러한 힘까지 숨기고 있었나? 놀랍지만… 그뿐이다. 곧 그녀는 빙긋 웃었다.
“하나 불완전하기 짝이 없군요. 방금의 불안전함을 봤을 때, 사용하는 것만으로 상당한 부담이 갔을 겁니다. 또한 멀리 도망치지도 못했군요. 그분은 아직 이 도시에 있습니다. [표식]을 새겨뒀으니 급하게 굴 필요는 없겠죠.”
“위치는?”
“공유해 드리겠습니다.”
시메트라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말씀드렸다시피, 죽이진 마십시오. 해야 할 것이 많이 남았으니까.”
* * *
철벅철벅─
레시듀는 빗물이 쏟아지는 거리를 달렸다. 의식이 흐릿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렀나? …만약 지금 기절하면, 여태까지완 다른 결과가 기다릴 것이다. 지금 정신을 잃으면 목숨도 잃는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은,
따지고 보면 레시듀에겐 그리 나쁠 게 없는 상황이었다.
그토록 바라던 죽음이 목전까지 치달았으니까.
…그럼 왜 나는 도망치고 있는 거지?
나는 왜 이러고 있는 걸까.
무엇을 하고 있나.
이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달린다.
이제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몸에 엉겨 붙은 로브마저 무겁다. 쏟아지는 빗물의 무게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무겁다.
빗줄기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무겁다.
콰직-
그 순간 발목에서 화끈한 고통과 함께, 무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선가 날아온 곡괭이 같은 게 발목을 깔끔하게 절단 낸 것이다.
레시듀는 다음 발걸음을 내딛지 못하고 넘어지고 말았다. 우당탕, 빗물이 만든 웅덩이에 얼굴부터 처박고 말았다.
“쿨럭.”
레시듀는 흙탕물을 마시며 콜록댔다.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서, 흐릿한 시야에 의지해 손으로, 무릎으로, 몸뚱이로 기어 나갔다.
푹.
등에 무언가가 꽂혔다.
단검인가, 화살인가, 혹은 다른 무언가인가. 잘 모르겠다.
확인할 겨를도 없이 억지로 치켜세우고 있던 고개가 다시 흙탕물에 처박혔다. 힘이 다한 게 아니다. 갑자기 뒤에서 강한 악력이 느껴진 것이다. 누군가 레시듀의 머리채를 잡은 다음, 다시 한번 물웅덩이에 처박아 넣었다.
레시듀는 호흡조차 이어가지 못한 채 발버둥 쳤다.
“그만.”
서늘한 목소리가 들렸을 때, 레시듀는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아. 이제… 대화를 할 준비가 됐군요.”
“…….”
레시듀는 한쪽 눈을 감은 채 여인, 시메트라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폭우 너머로 가면 같은 낯짝이 보였다.
그녀뿐만이 아니다. 사방을 절대자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쿨럭.”
레시듀가 빗물과 흙, 피가 섞인 토사물을 게워냈다.
그리고.
“푸흐.”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푸큽, 푸핫. 아. 실례. 그런데… 도무지…….”
시메트라였다.
그녀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굴었으나, 결국 인내하지 못하고 크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광소에 가까운 웃음이 하늘 너머로 울려퍼졌다.
“하하하… 아하하하…….”
웃음은 순식간에 전염됐다.
주변을 둘러싼 절대자들 또한 얼굴이 일그러질 만큼 크게 웃으며 레시듀를 내려다봤다.
“재밌군요. 재밌어. 뭡니까. 뭐란 말입니까. 그 꼴은. 하하하…….”
“…….”
“그래도 한때 군림자였는데, 만물의 위에 군림했던 존재였는데.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예? 흙탕물에 얼굴을 처박고, 마시고, 다시 토해내고… 하하하……. 꼴사나워…….”
콰직.
머리를 짓밟혔다. 레시듀는 재차 흙탕물에 처박힌 채 쿨럭거렸다.
다시 한번 머리채를 잡혀 고개가 들렸다. 마치 물고문을 반복하고 있는 듯하다.
시메트라가 바짝 다가와 레시듀를 보았다. 서로의 숨결이 닿을 만큼 근접한 거리에서, 시메트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이보십시오. 살려 달라고 빌어 보십시오.”
“…….”
“제발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하고 빌어 보란 말입니다. 비굴한 얼굴을 할수록 좋습니다. 설마 죽고 싶은 건 아니겠지요? 만약 그랬다면 필사적으로 도망치지 않았을 테니.”
그래. 나의 의문도 그것이다.
레시듀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 말 못 들었습니까? 목숨 구걸이 싫다면 다른 걸 하겠습니까? 이마에 머리를 찧으며 사죄하는 건 어떻습니까? 감히 덤벼서 죄송하다고 말하면서요. 아니면 이 흙탕물을 모두 마시는 건? …그 잘난 군림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잘 생각해 보십시오. 비참함이 돋보일수록 효과가 좋을 테니까.”
“…리다.”
“네?”
“빗소리다.”
레시듀가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계속, 줄곧. 네놈들의 비웃음 따위보다 이 빗소리가 훨씬 더 거슬렸단 말이다.”
시메트라의 표정이 굳었다.
“네가 이렇게 말이 많은 성격인 줄은 미처 몰랐군. 할 말이 있다면 더 들어주도록 하마. 어디 한번 실컷 지껄여 보도록 해라. 오히려 좋구나. 네놈의 개소리가 빗소리를 희미하게 만들어 주니까. 개똥도 쓸데가 있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렷다.”
“…….”
“이 몸을 더럽히고, 욕보이는 것에 기분 나쁜 집착을 보이고 있구나. 생각이 얕아 훤히 보인다. 그딴 짓거리로 군림자에 대한 두려움을 꺾으려는 것이더냐. 과연 버러지나 할 법한 생각이다. 기가 차서, 말도 안 나와.”
“…그건 해봐야 알겠지요.”
시메트라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확실히 흥미로운 실험이 되겠군요. 전 군림자의 정신을 깨부수는 건.”
“…….”
레시듀가 죽은 눈동자로 그들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빗물 쏟아지는 거리에서,
가장 잔인하고 집요한 폭행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