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60화
바깥으로 나온 게 옳은 선택일지 모르겠다. 여전히 빗물 쏟아지는 우중충한 날씨에 기온은 더욱 낮아졌다. 문득 세상이 날이 갈수록 추워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늘은 태양을 잃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지금 인간들이 느끼고 있을 이유 모를 막막함이나 암울함은 그곳에서 기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후우.”
레시듀는 로브를 헐겁게 풀며 빗물 고인 웅덩이를 내밟았다. 철벅, 물방울이 튀기며 질척질척하게 고여 있던 빗물이 부츠로 스며들었다.
그로 인해 느끼는 불쾌감보다 쉽게 가라앉지 않는 스스로의 내면이 더 거슬렸다. 빗소리는 그러한 거슬림을 더욱 부추기듯 세차게 쏟아졌고─
아. 문득 구름을 지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레시듀는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떻게 지우지? 방법은 여럿 있다.
화염으로 모조리 불살라 버릴까.
광풍으로 흔적도 없이 갈라 버릴까.
아예 베어 버린다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레시듀는 뻗었던 손을 다시 거뒀다. 그럴 수 있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인내한 것인가, 포기한 것인가? 레시듀는 그것마저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으니까.
성난 걸음으로 회색빛 거리를 걸었다. 조금이라도 빗소리가 덜 들리는 곳으로 걷다 보니, 점점 도시의 깊고 음침한 곳으로 진입하게 됐다.
우중충한 하늘 아래 오랜 기간 방치된 콘크리트 건물들은 부서지고 갈라진 채 한때의 높이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었다. 멍하니 그 광경을 올려다보자니, 높게 치솟은 건축물들이 마치 무성히 자란 거목들을 연상케 했다. 그런 의미에서 콘크리트 정글이란 표현은 언뜻 모순적으로 들리면서도 적절했다.
레시듀는 그 정글 속을 걸었다.
앞서 언급했듯 건축물엔 관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으나, 이 거리에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 곳곳에 웅크리고 있던 자들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지난번의 짧은 외출에서도 느꼈으나, 이곳에서 이방인이란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었다.
“안녕, 친구.”
“길을 잃었나?”
그렇다고 배척받는 존재도 아니었지만.
한 무리의 떨거지들이 레시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손에 들린 나이프나 허리에 걸린 총기류 따위를 의도적으로 노출시키며 웃고 있었다. 빗물 속에서도 선명히 보이는 누런 이빨이 역겹다.
거슬리기 짝이 없었으나, 아직 이 머릿속에 울리는 빗소리까지는 아니었다.
그래서 레시듀는 보기 드문 자비를 발휘했다.
그대로 지나치려 한 것이다.
“아아, 잠깐. 잠깐.”
“뭐 그리 바쁘게 가시나. 이 앞엔 아무것도 없는데.”
“얘기나 좀 하자고.”
하지만 세상엔 얼간이들이 많다.
간발의 차이로 화살을 피한 주제, 그 사실조차 깨닫지 못하고 다시금 전장으로 몸뚱이를 던지는 멍청이들.
결코 두 번의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자들.
“신기하게 생긴 우의인데.”
“좀 벗어 봐. 자세히 보자.”
“큭큭.”
물론 이들에게 잘못은 없었다.
아니. 있는 건가?
“너희는 왜 살아가고 있나?”
반쯤 충동적으로 물었다.
내뱉고 보니 정말로 궁금해지기도 했다.
세상이 망한 걸 알고 있다. 더 망해갈 거란 사실도 알고 있겠지.
그런데도 이놈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미친놈은.”
레시듀는 본능적으로 반문한 남자의 이마를 향해 손을 뻗은 다음, 손가락에 힘을 주고 튕겼다.
흔히 딱밤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파앙!
그러나 일반적인 딱밤이 낳는 결과와는 사뭇 다른 현실이 펼쳐졌다. 남자의 얼굴이 수박처럼 터진 것이다.
레시듀의 예상대로, 든 게 없는 가벼운 머리였다.
“어?”
“방금 무슨…….”
“세상이 혼란스러울수록 무지無知는 죄가 된다. 알고 있나? 알 턱이 없지. 이 무지한 떨거지들아.”
“미친 새끼가……!”
“뭔 개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그제야 남자들이 전투태세를 갖추며 달려들었으나 너무나도 늦었다. 그리고 사실 건들대던 때와 큰 차이가 없기도 했다.
“오늘 네놈들의 죽음에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파파팡.
그리고 남자들의 얼굴이 일제히 터져 나갔다. 다시 보니 두 명 정도 여자가 섞여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레시듀에게 있어 큰 흥미는 없는 사실이었다.
다시 한번 거리를 걸었다.
반갑지 않게도, 시비는 계속 걸려왔다.
그들은 웃으며 다가왔고, 웃지 않으며 사라졌다.
거리는 순식간에 핏물로 물들었다. 레시듀는 자신이 몇이나 죽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처 없이 거리를 걷다가, 문득 웅덩이에 맺힌 스스로의 모습을 보게 됐다. 피투성이가 된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루카스의 얼굴이 보였다.
“…….”
그러자 어디로 도망치든, 아무리 오래 눈을 감든, ‘나’에게서만큼은 결코 도망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떠올랐다.
저 눈동자는 어딜 가든 나를 쫓아다니며, 쭉 저렇게 바라볼 테지. 하지만 질문엔 무엇 하나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결국 죽음만이 유일한 해방인가?
“하하하…….”
레시듀는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벌레들을 계속 죽였다. 어쩌면 벌레만도 못한 자들일지도 모른다.
비가 쏟아지는 날엔 날벌레들도 날갯짓을 멈추고 때를 기다리는데, 이 쓰레기들은 미물에게도 찾을 수 있는 신중함이 결여되어 있었다.
얼마나 오래 거리를 핏물로 물들였을까.
슬슬 이곳에서 정말로 인기척이 사라지려고 하던 때.
“…….”
레시듀는 처음으로 쓰레기가 아닌 자들을 봤다.
그 두 명은 과거 도시의 광장으로 쓰였던 듯한 탁 트인 공간에 있었다. 거기서도 흙탕물이 채워져 있는 분수대, 그 중앙에 세워진 넓적한 석판 위에 앉아 있었는데 쏟아지는 빗물에도 꼼짝도 하고 있지 않아서, 순간 석상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저 석판 위엔 원래 석상이 있었을 것 같고.
철벅-
그러나 레시듀의 걸음은 처음과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급하지도, 느긋하지도 않은 속도로 십여 초를 걸었다. 그렇게 분수대에 이르자, 일남일녀가 입을 열었다.
“호오.”
“확실히…….”
놈들이 흐릿하게 웃으며 감탄했다. 레시듀는 그 꼴을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귀찮은 놈들이다.
방금 전에 껄떡대던 버러지들은 물론, 이 도시의 지배자인 터커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존재다.
레시듀는 이들이 풍기는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이깟 도시에 대체 어떤 벌레가 있어서 우리를 불렀나 싶었는데.”
“생각보단 괜찮은 쓰레기로 보이는군. 시간 죽이기는 되겠어.”
아니, 그것만이 아니다.
레시듀는 이들의 얼굴까지도 알고 있었다.
신선한 경험이다.
항상 내려다만 봤던 두 조무래기가 오히려,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현실이란.
“원망은 말도록 해라, 필멸자.”
“고통은 좀 있을 테지만… 운이 좋다면 빨리 죽을 수 있겠지.”
“아. 몸뚱이는 괜찮지만 얼굴 형상은 유지해야 되겠군. 그 필멸자에게 가져가서 보여 줘야 되니까.”
레시듀는 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티안, 그리고 볼캐스트.”
“……!?”
두 절대자가 움찔하더니, 크게 경악했다.
“넌 누구냐?”
“우리 이름을 어떻게…….”
“그래. 머저리 듀오. 오랜만에 봐도 반가운 낯짝은 아니군.”
기이한 인연이다.
한때 자신이 거둬들였던 자들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번쩍!
그 순간 레시듀의 양손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고, 두 절대자가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레시듀는 이들에 대해서 모르는 게 없었다. 당연히 놈들의 외력外力과 근원에 대해서도 상세히 꿰뚫고 있다.
칠흑에서 태어난 조무래기들, 때문에 강렬한 빛에 거부감을 품고 있다.
물론 이것만으로 쓰러뜨린다든가 할 수는 없지만, 빈틈이 생기는 것까진 어쩔 수 없겠지.
그리고 이 빈틈은 레시듀가 놓치기엔 너무 치명적이었다.
스걱-
두 절대자의 목이 베였다.
하지만 썩어도 절대자, 초월체를 가진 족속들이라 이걸로는 절명시킬 수 없다. 레시듀는 일전에 사용했던 ‘칼바람’을 응용했다. 무언가를 벨 수 있는 권능을 돌풍에 싣는 것이었다.
콰오오-
돌풍이 거칠게 휘몰아쳤고, 두 절대자는 부릅뜬 눈동자로 레시듀를 노려봤다. 놈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적대표현이기도 했다.
잠시 후엔 그저 핏물이 되어 주저앉아, 분수대에 고인 흙탕물과 뒤섞였다. 그렇게 두 절대자는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다.
“…….”
레시듀는 그들의 시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과거에 거둬들였던 두 수하를 죽였는데도 딱히 감흥은 없었다.
이건 ‘뇌존’이었을 적에도 마찬가지였지.
“─만만하게 볼 자는 아니로군.”
새로운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을 때, 레시듀는 놀라지 않았다.
원래가 그렇다.
벌레를 치워도, 그 자리엔 또 다른 벌레들이 채운다. 그 사실 또한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 등장한 자들은… 벌레가 아니었다. 그렇게 취급할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에 대해선 누구에게 들었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엔 두 명의 여인이 서 있었다.
“쉽게 보기 힘든 얼굴들이군.”
레시듀가 조용히 중얼거리자, 그녀들의 눈동자가 훨씬 더 날카로워졌다.
“…티안, 볼캐스트. 방금 네가 죽인 절대자들처럼, 우리에 대해서도 알고 있나?”
“이름에 대한 질문인가? 물론 알고 있다. 시메트라. 어여삐 여기던 ‘사냥행성’의 관리는 누구한테 맡긴 채 이곳까지 행차하셨나.”
여자, 시메트라의 안색이 굳은 순간 한 발자국 뒤에 서 있던 또 다른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 생김새, 들은 적이 있지. 우리의 주인께서 자주 말씀하셨다. 회유하고 싶은데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 절대자가 한 명 있노라고.”
“…….”
“묻겠다. 네가 ‘미치광이’인가?”
미치광이라.
그래. 그러고 보니 루카스 트로우맨을 최초로 그렇게 불렀던 게 뇌존이었다.
“크큭, 크하하…….”
레시듀는 속 빈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 예측하지 못했던 일이다.
자신이 지어 줬던 이명이 돌고 돌아서 결국 스스로에게 돌아온 꼴이라니.
“그래.
“그래… 너희 자매가 이곳에 있다는 건, 내게 불온한 가능성을 하나 상기시켜 주는군. 레티프도 이 근처에 있겠어.”
이 말에 그녀들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으나, 곧 안색을 바꾸며 차갑게 대꾸했다.
“네겐 상관없는 일이다.”
“너는 여기서 우리 손에 죽을 테니까.”
“아니, 그건 아니야.”
레시듀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희들은 나의 죽음이 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앞서 치러진 싸움처럼 몸 성히 이길 수는 없겠지.
뇌존이 거둬들였던 절대자 중에서도 최상단에 위치한─ 지배자급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두각을 드러냈던 이들이 있었다.
수는 모두 열하고 셋이었으며, 뇌존은 그들 모두에게 각각 열세 개의 우주를 하사했다. 또한 뇌존은 그들을 일반적인 지배자와 구분하기 위해 따로 십삼운雲參雷雲이란 이름으로 칭하였다
레티프, 뇌존의 오른팔격이었던 남자가 십삼운의 수장 격 위치에 앉아 있었지.
시메트라와 세라,
이들도 십삼운이었다.
“그래. 싸워 보자꾸나.”
머리가 하얗게 물들 만큼, 빗물의 감촉이 사라질 만큼,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격렬히.
또한 궁금하다.
지금의 레시듀가 한때의 정예 하수인,
그중에서도 두 개의 구름을 상대로 어디까지 싸울 수 있을지.
* * *
“…….”
이리스는 문득 눈을 떴다.
그리고 자신이 졸았단 사실에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짧게라도 눈을 붙인 게 얼마 만이지?
‘…나태해진 걸까.’
긴장이 조금 풀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비록 직접 재회한 건 아니지만, 그의 흔적을 발견한 걸로.
아니, 그것보다도.
한시도 지체할 시간은 없어서 급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보다 15분 정도 더 지나 있었다.
다행히 오래 존 건 아닌 것 같지만… 이리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흐리멍덩한 정신을 깨우기 위해 커피라도 한잔하려는 순간이었다.
“잘 자더군.”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흠칫 떨며 뒤를 돌아봤다.
치렁치렁하게 기른 머리카락에 거칠게 기른 수염, 선글라스를 착용한 포악한 인상의 중년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푹 자는 것 같아 깨우지 않았지.”
“…언제부터?”
“글쎄……. 한 시간쯤 됐나.”
이리스는 겨우 내색하지 않았으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한 시간 전이라면, 이리스가 아직까지 서류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다.
즉 졸고 있을 때가 아닌, 정신이 온전했을 때에도 이 남자의 존재를 깨닫지 못했다는 건가?
이 이리스 피스파인더가?
“너무 자괴감 가질 필요 없어. 내 형제 중에서 기척을 감추는 데 탁월한 아이템을 가진 자가 있거든. 그 기물의 힘을 좀 빌렸지. 알고 있는가? 원래 투구의 형태였는데, 너무 번거로워서 선글라스로 새로 만들었다.”
“…퀴네에(Kynee).”
“과연 허공록의 관리자. 모르는 게 없군.”
남자가 히죽 웃었다.
이리스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그 말대로, 이리스는 모르는 게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남자의 정체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여긴 무슨 볼일로 왔습니까, 레티프.”
“겸사겸사 볼일이 있어서 왔는데……. 갑자기 나의 주인께서 새로운 명을 하달하셔서 말이지. 내키지 않지만 내 개인적인 용무는 자식들에게 맡기고, 떨어진 명령부터 수행하기로 했지.”
레티프가 목 관절을 풀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목소리로 말한다.
“우선은 널 좀 죽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