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57화 (684/857)

외전 457화

“프레이, 블레이크.”

호흡이 가빠서, 고작해야 두 어절의 이름조차 제대로 내뱉기가 힘들었다.

그러자 무기질적인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당신은─”

분석하듯 가늘게 좁혀지는 눈동자, 이윽고 프레이의 고개가 살며시 끄덕여졌다.

“기억에서 가장 뚜렷한 얼굴 중 하나군요.”

“…무슨 뜻이지?”

“말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서늘한 목소리에도 레시듀는 쉽게 진정할 수 없었다.

“여긴 무슨 일로 왔나.”

“한참 찾았다고 말했지 않았습니까. 비록 혼잣말이었지만 계속 이어가자면, 예. 전 찾는 게 있어서 이곳에 왔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설마 프레이는 루카스가 보낸 감시자인가?

이 몸이 얼마나 제대로 일을 수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보낸…….

그런 의혹이 드는 순간, 레시듀는 생전 처음으로 어떤 감정에 휩쓸렸다. 이 자리에 서 있는 게 불편하고 껄끄러우며, 당장이라도 문을 부수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

수치심.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느낄 수 없는 나약한 감정이, 루카스 본인과 대면한 것도 아닌 순간 느껴지고 말았다.

“…너, 이 몸에게 할 말이라도 있는가.”

그러니 오히려 그런 식으로 되물을 수 있었던 건, 레시듀에게 아직까지 자존심의 찌꺼기가 남아 있었던 덕분이다.

그러자 프레이─그렇게 부르는 게 올바른지 아직 모르겠지만─는 의문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당신에게 할 말? 제가 말입니까?”

그러더니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없습니다.”

“그럼 왜 이곳에…….”

그 순간, 레시듀는 프레이가 등장한 직후 줄곧 주목했던 존재가 자신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 근방에 있다는 건 느껴졌습니다만 세세한 위치는 모르겠더군요. 그래서 인근에 있는 도시들을 하나씩 모두 찾아보기로 결정했는데, 설마 첫 번째 도시에 있을 줄이야. 이런 상황을 속된 말로… ‘얻어걸렸다’고 합니까?”

필멸자의 속언 따위 알 바가 아니었다.

레시듀는 긴장감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네놈은 누구지? 목적은…….”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보시다시피 저는 입도 혀도 하나기 때문에, 다수의 질문에 동시에 대답할 능력은 없습니다.”

“…….”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첫 번째 멸망의 사도인… 흠.”

잠깐 고민하다가, 프레이가 말을 이었다.

“프레이 블레이크라고 합니다.”

까끌까끌한 모래 알맹이를 혓바닥으로 굴리는 것처럼, 묘하게 거슬리는 표정을 짓는다. 그는 지성체로선 다소 어색한 반응을 보였다. 바로 스스로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게 익숙지 않은 듯한 태도였다.

“그런데 저는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됩니까? 본명本名? 아니면 그 육체가 가진 이름? 혹은 당신이 과거에 가졌었던 이름이나, 지금 쓰고 있을 또 다른 이름도 괜찮습니다. 요청이 있다면 받아들이죠.”

“편할 대로 불러라. 그것보다 네놈이 누군지, 그리고 목적에 대해서나 말해.”

그 순간 레시듀는 자신의 옷소매가 떨리고 있단 걸 깨달았다. 그 자신이 떠는 게 아니었다.

루카의 얼굴이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혀, 형. 도망가야 해요.”

“뭐?”

“저 남자는 위험해요.”

“흠…….”

프레이가 턱을 쓰다듬으며, 관찰하듯 루카를 훑어봤다.

“위험도에 대한 측정을 어떤 기준으로 수행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신이 제게 할 말은 아닌 것 같군요.”

이 둘은 아는 사이인가?

레시듀의 표정을 읽었는지, 프레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콰앙!

그 순간 프레이의 허리가 꺾이더니, 무언가에 치인 것처럼 거세게 날아갔다. 얼마나 빠르고 맹렬한지, 레시듀가 세운 아스팔트 벽은 물론 복도 벽마저 모래성처럼 부서졌다.

레시듀의 시선이 루카를 향했다.

“네가 한 것이냐?”

“…….”

만약 그렇다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레시듀는 방금 벌어진 일을 예측하지 못했다. 즉 정말로 루카의 소행이라면, 그녀가 공격의사를 갖고 표출한 그 순간까지 레시듀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는 게 된다.

“도망쳐요.”

대답할 틈도 없이 루카는 손을 잡은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시듀는,

왠지 모르게 그 손길을 마다할 수 없었다.

* * *

빗물 떨어지는 거리를 내달렸다. 그들의 질주는 어느 건물의 내부에 진입할 때까지 계속됐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을 타지 않은 건물이었다.

균열이 간 바닥, 그 사이에 사납게 자라난 풀잎, 깨진 창문…….

투두두둑-

그러나 가장 독특한 건 천장이 유리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폭우를 막는 데에 무리는 없어 보였으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소음은 훨씬 컸다.

“하아, 하아…….”

루카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었다. 빗물과 땀으로 흠뻑 젖은 꼴은 처량하고 가련했으나, 레시듀는 차가운 어조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도망친 거냐?”

“…….”

루카가 입을 꾹 닫았다.

추위 때문인지, 혹은 공포 때문인지. 그녀는 아직까지 떨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방금 그 남자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이더냐.”

“…몰라요.”

“모른다면 왜 도망쳤나.”

“…….”

레시듀는 쉽게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가능성을 입에 담았다.

“너는 이 몸을 속인 것인가?”

그러자 루카가 고개를 홱 쳐들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눈망울로 레시듀를 바라본다.

“아니에요.”

“그럼 왜?”

“그냥… 그냥 그래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레시듀는 침묵했다. 눈물에 속지 않는다. 그러기엔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 너무 깊었다. 감정이 절절하게 섞인 목소리도 마찬가지다.

루카는 거짓말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아마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 사실을 깨닫자,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냉소가 흘러나왔다.

완전히 파악했다고 여겼던 필멸자조차, 실은 이 몸을 농락하고 있었다는 것인가.

“너의 주장이 얼마나 허황되어 있는지 모르진 않겠지. 납득을 바란다면 최소한의 설명이라도 해라.”

투두둑…….

빗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순전히 침묵 탓이었다.

루카는 고개를 들었다.

빗소리가 울리는 유리 천장을 바라보는 듯했으나, 그녀의 눈동자는 그 너머로 향해 있었다.

떨어지는 빗물, 어두운 먹구름, 낮을 잃은 하늘을 넘어,

새까만 구멍으로.

“형은… 스스로가 어떤 존재인지 확신할 수 있어요?”

“……!”

또다시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만 두 번째였다.

하지만 프레이를 대면했을 때 느낀 놀라움보다 이번이 더 컸다.

설마하니 이런 순간에, 루카에게서, 자신이 안고 있는 고민의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무슨 소리를.”

“전 기억이 없어요.”

“…….”

“이름을 물었죠? 몰라요. 그냥… 그냥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이름이 있었죠. 가장 뚜렷했던 이름. 그래도 그건 내 이름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래서…….”

레시듀는 루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따왔다고.”

“…….”

“그 이름은.”

“루카스 트로우맨.”

쿠르릉.

먹구름은 이제 뇌운이 되어 천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레시듀는 번뜩이는 자연적인 조명 아래서 극적인 두통을 느꼈다. 단지 천둥소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낙하하던 순간을 가장 처음 기억해요. 저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어요.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아주 오랫동안 떨어지다가, 그러다가 어떤 아이와 충돌하게 됐어요.”

루카가 자신의 머리를 잡았다.

아핫, 아하하. 부서진 웃음소리 같은 게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정신을 잃은 그 아이를 먹었어요. 그 아기가 갖고 있던 성격과 말투, 기억, 인격까지 모두 훔쳐서 제 것으로 만들었어요. 그렇게 ‘루카’가 탄생했어요.”

“…….”

“형도 알죠? 세상 사람들이 나 같은 존재를 뭐라고 부르는지.”

그랬나.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루카가 레시듀에게 친근감을 표한 이유.

초면의 존재라면 누구든 의심하는 경계심을 갖춘 주제에, 하늘에서 떨어진 레시듀에겐 오히려 마음을 놓은 이유.

보통 사람이라면 의심부터 느낄 ‘하늘에서 떨어진’, 그리고 ‘수상한 차림새’란 특징이, 오히려 루카에겐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하이드(Hide)’.

그렇게 불리는 멸망들은, 모두 하늘에서부터 떨어졌으니까.

어느 누구보다 수상한 존재였으니까.

하지만 루카는 일반적인 하이드와는 무언가가 달랐다.

놈들은 지능이 있고, 어쩌면 자아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행동에 주관성이 철저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기계 이상으로 인공지능적인 면모를 가졌기 때문에, 눈앞에 있는 루카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

자아自我를 위한 고찰 같은 걸, 놈들이 할 리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레시듀는, 강한 자아를 갖고 있었다. 적어도 그런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일반적인 멸망과는 다르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 모른다.

아예 잘못 짚었는데도, 불행히도 루카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형, 나는, 내 소원은…….”

“…….”

“내 소원으으, 으으으으은…….”

목소리가 늘어지기 시작했다.

주르륵…….

그리고 루카의 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문자 그대로였다. 마치 진흙으로 이뤄진 몸뚱이가 뜨거운 햇볕을 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레시듀는 움직일 수 없었다.

또다시 선택의 기로에 놓인 것만 같은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또.

이제는 아무와도 관여되고 싶지 않았는데.

“그녀가 당신을 속인 건 아닙니다.”

그때 한 명의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왔다.

프레이 블레이크는 상처 하나 없는 모습이었다. 그는 어깨에 묻은 빗물을 툭툭 털며 말을 이었다.

“모든 것엔 예외가 있고, 자의식을 갖춘 멸망도 존재할 수가 있죠. 가령 저와 같은.”

“…네놈도 멸망이었단 거냐?”

“글쎄요. 완전히 동일하다곤 볼 수 없지만… 생물적으로나 개념적으로나 당신들보단 그들과 더 가깝겠죠.”

“…….”

프레이는 스스로의 가슴에 손바닥을 얹으며 말했다.

“조금 늦었지만 제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전 자아를 갖춘 유이唯二한 멸망 중 하나입니다. 가장 처음 나타난 멸망, 때문에 이리스 피스파인더는 저를 ‘퍼스트폴(Firstfall)’이라고 부르더군요.”

…그렇다면 루카는.

“알고 계셨습니까? 이제 첫 번째 멸망의 공세는 막바지입니다. 종사終師께서 예상하신 것보다 훨씬 빠르고, 적은 피해군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프레이의 눈이 일순간 기이한 빛을 띠었다.

“예상보다 인간들의 저항이 거셌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들이 이뤄낸 화합이 기적 같은 결과를 만들어냈다…….”

“…….”

“…라는, 극적인 전개가 일어난 건 아니죠.”

물론 그럴 거라 생각했다.

레시듀는 기적이 어디까지 통용되는지, 그 한계점에 대해서도 알고 있으니.

“이 모든 건 반왕, 그녀 덕분입니다.”

“무슨 뜻이냐.”

“모릅니까? 그녀 혼자서 99퍼센트 이상의 멸망을 홀로 물리쳤습니다.”

레시듀의 몸이 멈칫했다.

“뭐?”

“다시 말해서 이곳 지상에 닿은 멸망은 고작해야 전체의 1퍼센트에 불과했단 것이죠.”

“…….”

레시듀는 두 가지 이유로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반왕이 홀로 첫 번째 멸망을 거의 막아 냈다는 것에 한 번,

그리고 지금 온 세상을 휩쓸고 있는 혼란, 모든 인간들이 다시없을 재앙으로 여기고 있는 이 사태가, 실상 그들이 겪었어야 할 절대 재앙의 총량의 고작 1퍼센트에 불과하다는 것에 또 한 번.

…이토록 약했는가? 자신이 군림하던 세상이란.

고작 첫 번째 멸망의, 1퍼센트의 전력에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을 만큼.

“하지만 첫 번째 멸망의 공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죠. 이유는 하납니다. 마무리가 이뤄지지 않았으니까.”

“마무리?”

“모든 멸망 중 오직 ‘처음’과 ‘끝’만이 자아를 갖출 수 있습니다.”

‘처음’인 게 분명한 남자는 그리 말하며.

“당신의 목적에 관해선 알고 있으니, 우리의 이해관계는 일치할 것 같군요. 협력을 요구합니다, 레시듀.”

루카를,

‘끝’을 가리켰다.

“저와 함께 ‘첫 번째 멸망’을 끝맺으시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