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56화
비는 그치지 않았다.
그리고 레시듀가 악몽을 꾸는 주기도 점점 잦아지고 있었다.
꿈속을 헤맬 때는 그저 끔찍했다. 이 고통이 나의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제발 빨리 끝나줬으면 하는 모순적인 심정이 공존했다.
그러나 식은땀에 범벅이 된 채 일어날 때면 항상 웃음이 흘러나왔다.
1분, 1시간, 하루…….
어찌됐든, 지금 이 순간에도 시간은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순간 또한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했다.
─이리스 피스파인더.
터커의 집무실에서 그녀의 이름을 듣게 됐을 때, 레시듀는 자신의 최후가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떠올랐다.
가령 레시듀가 그녀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면 어떻게 될까? 뻔하다.
이미 ‘루카스’를 기대하던 자들이 레시듀를 목격하고 어떻게 반응했는지, 숱하게 보았지 않나. 특히 이리스와 루카스의 관계는 어떤 의미로 페일보다도 깊었다.
십중팔구 이리스 피스파인더는 자신을 죽이려 들겠지.
레시듀란 불순물이 루카스의 육신을 더럽히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서, 용납할 수 없어서─ 그래. 그 정도 자격은 갖추고도 남을 존재였다.
레시듀는 마지막 휴가를 고통 속에서 만끽하고 있었다.
“신문 봤어요? 피스파인더 총장이 멜타운에 직접 온대요! 세상에나!”
…이 꼬맹이만 없었다면 더욱 그랬을 것이다.
레시듀는 루카의 순진무구한 얼굴을 바라보며 쓴소리를 내뱉으려다, 불쑥 내민 물병에 입술을 닫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풀어진 입술로 헤헤 웃는다. 묘한 곳에서 눈치 빠른 꼬맹이다.
최근 레시듀는 일어날 때마다 땀에 흠뻑 젖은 채라서, 24시간 수분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뚜껑을 열고 들이키니, 딱 좋을 정도의 차가운 냉수가 식도를 훑고 지나갔다. 이 방에 냉장고나 얼음 같은 건 없으니, 아마 베란다 쪽에 보관하여 차갑게 식혀둔 거겠지. 이런 대처도 센스가 좋다.
“배 안 고파요? 우리 외식이나 할까요? 요즘 벌이가 쏠쏠해서 하루 정도는 괜찮을 것 같은데.”
“…….”
“그날 이후로 일거리가 잘 들어오더라고요. 뭔가 좀 더 대우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고. 원래 일터는 이사를 갔는지 사람이 안 보이긴 한데…….”
UMC에서 잡혔던 걸 구해준 이후로, 루카는 더 귀찮게 엉겨 붙게 됐다.
레시듀에게 있어 좋은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 소녀의 머리카락 색은 레시듀가 꾸는 악몽의 근원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얼굴이나 성격은 영 다르지만…….
루카에겐 일방적인 무시나 닥치라는 겁박도 통하지 않아서, 이제 남은 방법은 몇 없었다.
물리력을 행사하여 강제로 입을 다물게 만들 순 있겠지만…….
“…….”
레시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래서 저번 건수는 북쪽 지구의 폐허를 뒤지는 거였는데요. 거기서 주운 장갑이…….”
빗소리가 차츰 흐려진다…….
깨어 있을 때도, 잠들 때도 사라지지 않던 빗소리가, 루카가 목소리를 낼 때면 아주 조금 흐릿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레시듀가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남장은 왜 한 것이냐.”
“……!”
그러자 루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설마 정말 들키지 않을 거라 여긴 걸까.
“어, 언제부터…….”
“처음 봤을 때부터.”
“왜 말 안 했어요?”
“네 녀석이 묻지 않았잖느냐.”
“…….”
“거기에 비밀을 지키려고 발버둥 치는 꼴이 좀 우스워야지.”
“와… 그거, 두 번째 꺼가 진짜 이유죠?”
레시듀는 대답하지 않고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루카는
루카는 우물쭈물하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저번에 형도 말한 것처럼… 이 도시가 원체 쓰레기 같잖아요? 힘없고 예쁘장한 소녀가 살아가기엔 각박한 곳이죠.”
“거울 본 적 있나?”
“있죠! 나도 나 안 예쁜 거 알거든요!”
못난 건 아니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나 빵모자로 인상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어서 그렇지.
“그래. 수컷들이 네게 욕정을 품을까 봐 두렵단 거지.”
“…그런 이유도 있긴 한데, 좀만 순화해서 말해 주면 고맙겠네요.”
레시듀는 루카가 가진 문제점을 해결해 줄 수 있었다.
“화상 자국이라도 내줄까? 되도록 추한 느낌이 들게 설계할 수 있는데.”
“하하, 그것 참 좋은 생각…….”
거기까지 말한 뒤, 루카는 멈칫했다.
“…농담이 아니군요?”
“이 몸은 허언을 입에 담지 않아.”
웬만해선 그렇지. 사족 같은 뒷말은 삼켰다.
그러자 안색이 하얗게 질린 루카가 양손으로 격하게 의사를 표현했다.
“아뇨, 아뇨. 됐어요. 괜찮습니다.”
“그런가.”
“…….”
대화가 한순간 끊겼다.
쏴아아-
그러자 빗소리가 다시 크게 다가왔다. 레시듀가 흐릿한 눈동자로 바깥을 바라본 순간이다.
“또 잘 건 아니죠?”
“방금 일어났다.”
“음, 그럼 얘기나 좀 해요.”
다시 무시하려다가, 문득 오늘이 닷새째 저녁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이제 레시듀에게 허락된 시간은 이틀 정도였고, 루카는 아직까지 자신의 부탁을 말하지 않았다.
슬슬 억지로라도 들어야 될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레시듀는 여전히 침대에 누운 채, 굼뜨게 말문을 뗐다.
“무슨 얘기?”
“음, 뭐. 이것저것…….”
루카는 웅얼대듯 중얼거리고선, 빵모자를 벗었다.
“후우, 이제 좀 개운하네. 빨리 좀 말해 주지 그랬어요.”
긴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렸다. 레시듀는 한순간 말문을 잊고 그 모습을 바라봤다.
…역시, 좀 닮은 건가?
그 시선을 눈치챈 루카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포즈를 취했다.
“형, 그렇다고 나한테 반하면 안 돼요?”
“…….”
“노, 농담.”
말없이 바라보자 무안해진 루카가 볼을 붉히며 목소리를 깔았다.
레시듀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름은 부모가 지어 줬느냐?”
“네? 어… 아뇨.”
“그럼 누가?”
“그건… 아참. 그러고 보니 형은 이름이 뭔데요?”
“…….”
“지난번에 없다고 했는데, 세상에 이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제법 많다.
생명 이외에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존재들,
그저 태어나기밖에 못한 자들에겐 이름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 탄생하여 누구에게도 기억되지 못한 채 죽어간 이들은, 이 어린 소녀가 상상조차 하지 못할 만큼 많았다.
“레시듀.”
“레시듀? 그게 이름이에요?”
“그렇다.”
“음, 멋진, 이름인데요. 뭔가 깊은 뜻이 있을 듯한…….”
루카는 거짓말을 잘 못 하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남장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다.
“그런데 형은─”
“계속 그렇게 부를 거냐?”
“어? ‘형’이요? 갑자기 왜… 아하.”
루카가 음흉하게 웃었다.
“다르게 불리고 싶어요? 하긴. 남자들은 죄다 그렇게 불리는 걸 좋아한다고 들었어요.”
“…….”
“그럼 오빠─”
“편할 대로 불러라.”
레시듀는 루카의 농담을 단호하게 막았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언제부터 이렇게 재미없는 성격이 되었지?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렇게 진지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은데.
역시 이 몸뚱이 자체에 마가 낀 게 분명하다.
“그것보다, 이제 슬슬 말할 생각이 드느냐?”
“뭐를요?”
“부탁 말이다.”
“음… 네. 결정했어요.”
결정했다.
가장 기다렸던 말이었으므로 레시듀는 기껍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보단 상당히 늦어졌으나 아직 이틀이나 남아 있었다.
이 필멸자가 무엇을 바라든, 레시듀가 능히 이뤄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웬만한 것들은 10분 이내에.
그러나 루카의 ‘부탁’은 레시듀가 예상한 범주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 계속 있어 줘요.”
“…….”
“혀, 형은 그냥 지금처럼 계속 있으면 돼요. 먹을 거랑 마실 거, 귀찮은 거, 다 제가 할 테니까.”
“그러다가 한 번 잡혔지 않느냐.”
“그건 일이 좀 꼬여서… 암튼, 그런 실수는 이제 안 할 거예요.”
역시 루카가 자신에게 보이는 호의와 집착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그래도 안 된다.”
차가운 말에 루카가 움찔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요?”
“난 곧 죽으니까.”
“…무슨 병에 걸린 거예요? 불치병 같은 거.”
“아니.”
“그럼요? 형이 누군가한테 죽을 리는 없잖아요. 엄청 강하니까. 터커의 건물에 당당히 들어가서, 상처 하나 없이 나올 만큼!”
“그게 대단한 일이라 생각하느냐?”
“네?”
관점이 너무 다르다.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란다, 꼬맹아. 이 몸이 보기엔 너와 터커라 불린 남자는 큰 차이가 없어. 두 녀석 다 미성숙하고, 연약한 애송이일 뿐이지.”
미성숙에, 연약한 애송이.
루카는 터커와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을 연속으로 들은 듯한 기분이 되었다. 심지어 자신과 큰 차이도 없다니?
“그럼, 그냥 나랑 있기 싫은 거예요?”
“이 몸의 의중이 그렇게 궁금한가?”
“…….”
“몇몇 인간은 상호 간의 신뢰를 쌓기 위해, 서로의 비밀을 털어놓는 극단적인 방식을 선호하더군. 어떠냐?”
“무슨 뜻인지 잘…….”
“이 몸의 진의를 알고 싶다면 네 녀석이 숨기고 있는 것부터 먼저 밝히라는 뜻이다.”
“…….”
그 말에 루카는 침묵했다.
아주 오랫동안, 침묵했다.
쏴아아-
다시 한번 빗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레시듀는 피곤한 눈으로 루카를 바라봤다. 비밀을 내뱉기를 강요하는 건 아니었다. 여전히 루카에 대해선 흥미 반, 무관심 반이다.
그녀가 여기서 끝까지 침묵을 지킨다면, 레시듀로서도 끈질기게 닦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더 높다 생각했다.
루카는 자신이 숨기고 있는 비밀에 대해 굉장히 조심스럽고 민감한 태도를 보여 줬다. 만나고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레시듀에게 순순히 밝힐 거라 생각하는 건, 너무 형편 좋은 해석이 아닐까.
“저는…….”
그러나 예상을 깨고, 루카는 입을 열었다.
“기억이 흐릿해요.”
“뭐?”
“그러니까 기억이…….”
레시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루카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돌발적인 행동에 루카의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
그녀가 똑바로 목소리도 내지 못한 채 굳어 있을 때, 레시듀는 루카를 그대로 지나쳤다. 그가 향한 곳은 베란다였다.
도시의 풍경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곳에 서서, 레시듀는 빗물이 쏟아지는 도시 끝자락을 바라봤다.
“…….”
공간이 천천히 일그러지고 있었다.
대융합의 여파가 만든 현상 중 하나인가? 조금 다르다.
좌악-
이윽고 공간이 갈라지며 그곳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까만 머리카락에 반듯한 이목구비, 피로에 잠긴 듯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여자.
“이리스 피스파인더…….”
레시듀가 바랐던 얼굴이 그곳에 있었으나, 아직 이르지 않나? 터커는 그녀가 이틀 뒤에나 이 도시에 올 거라고 말했는데.
심지어 모습을 드러낸 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아마도 ‘피스파인더 암릿’의 중진으로 보이는 이들 몇몇과 동행하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한 명의 얼굴이 이리스 이상으로 레시듀의 시선을 끌었다.
“저 남자가 어째서…….”
“형?”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난 루카가 조심스럽게 베란다를 향해 걸어왔다. 레시듀가 짤막하게 경고했다.
“물러나라.”
그리고 다시 도시 너머를 바라봤다. 레시듀는 곧바로 위화감과,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남자가 사라져 있었다.
“아. 여기 있었군요.”
“흐악!”
문득 들린 목소리에 루카가 비명을 내질렀다.
목소리는 방 안에서부터 들려왔다. 여전히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레시듀는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봤다.
축축하고 어두운 방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회색 머리카락의 남자.
과거 루카스의 아바타(Avatar)였던 존재가 말했다.
“한참 찾았습니다.”
프레이 블레이크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