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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0년 만에 귀환한 대마도사 외전-455화 (682/857)

외전 455화

그 순간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

터커는 레시듀를 바라보더니, 한숨을 깊게 내쉬며 낮게 읊조렸다.

“들어오게.”

한순간에 평정심을 되찾았다. 갑작스레 팔이 짓이겨졌는데도 흘러나온 목소리엔 거의 떨림이 없었다. 제법 인상적인 평정심이다. 동시에 놈의 행동원리 일정 부분이 이해 가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반항조차 못한 채 한쪽 팔을 뺏겼다. 무리의 우두머리로선 용납받을 수 없는 실책이고, 추태다. 방 바깥에 있을 부하들에게 그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겠지.

터커의 그러한 판단은 그가 만든 환경의 핵심을 정확히 짚고 있었다.

보스의 위신이 무너진 조직은 붕괴한다.

특히 이 남자처럼, 공포정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 자라면 더욱.

달칵.

문이 열리며 두 명의 군인과 한 명의 소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터커의 부하들, 그리고 루카.

“형?”

루카는 방 안에 있는 레시듀를 보고 흠칫 놀란 기색이었다. 레시듀는 루카의 전신을 한번 훑어보며 간단히 상태를 진단했다.

좀 야위긴 했지만,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와 차이가 없다. 폭행의 흔적 같은 것도 없었고. 정중히 다뤘다는 말은 거짓부렁이 아닌 모양이다.

“시, 시장님……?”

“팔이…….”

군인들이 시선이 비로소 터커의 짓이겨진 팔에 놓였다.

터커는 안색이 파리했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게 전부였다. 부하들을 오히려 진정시키며 부드러운 미소까지 짓는다.

“별거 아닐세. 협상이 잘 풀리지 않으면 언성이 높아지고, 때로는 다툼으로까지 번지는 법이지.”

다툼이라.

일방적으로 팔을 잃은 주제에 잘도 허세를 부린다. 물론 레시듀는 굳이 그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지 않았다. 터커의 위엄을 지켜 주기 위해서가 아닌, 그딴 것에 아무런 흥미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자.”

레시듀가 루카를 보며 짧게 말했다.

루카가 잠시 망설이다가, 말없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로브 끝자락에 무게감에 느껴졌다. 그 손을 쳐내려다 관두기로 했다.

그대로 방을 떠나려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잠깐만, 연락은 어떻게 할 거요?”

“때가 되면 내가 오겠다.”

“무책임한…….”

“한 가지 경고하겠다. 감시하지 마라.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모르겠지만.”

“…….”

레시듀는 말문을 잃은 듯한 터커를 두고 방을 떠났다. 시선을 돌리기 직전, 그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보았다. 마지막에서야 놈의 본질을 본 것 같았다.

몇 발자국이나 걸었을까.

타앙… 타앙…….

등 뒤에서 총성이 두 발 들렸다.

과연 철저하시군. 레시듀가 냉소를 지었다.

* * *

UMC를 완전히 벗어날 동안, 둘 사이엔 말이 오가지 않았다. 레시듀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빗물의 기세가 조금 약해진 것 같기도 하다. 적어도 천둥번개가 칠 기색은 더 이상 없는 것 같아서, 조용히 한시름을 놓았다.

“방에서 나오는 게 가능했네요?”

“뭐?”

“혹시 형이 그 방에 씐 건 아닐까 생각했거든요.”

“…씌다니, 넌 이 몸을 뭘로 본 거냐?”

“유령요…….”

신기한 해석이었으나, 순순히 사실만을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유령이 아니라 악령 같은 걸로 치부했을지도 모르겠다.

“음식을 먹는 유령도 있더냐?”

“그건 그런데… 음. 그걸 감안해도 너무 수수께끼적인 부분이 많았잖아요.”

방금도 그랬고요. 살짝 덧붙인 순간, 레시듀가 발걸음을 멈췄다.

“그래. 그 정도 눈치는 있는 꼬마렷다.”

뒤를 돌아보자, 모자를 눌러쓴 채 꾸물대고 있는 루카의 모습이 보였다. 갑작스런 레시듀의 태도 변화에 조금 놀란 듯했다.

“그런데 왜 날 받아들인 거냐?”

“그건… 사람이 사람을 돕는 데는…….”

“이유가 필요 없다. 우선, 그딴 위선적인 태도는 우리가 이야기를 진행하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것부터 일러두지.”

“…….”

“네 녀석은 충분히 혼자서 앞가림을 할 수 있는 녀석이다. 이 오물로 범벅이 된 도시에서, 하루 밥 벌어 먹을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는 건 제법 쓸 만한 놈이란 거지.”

루카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레시듀는 몸을 돌린 다음 다시 걸어가기 시작했다.

철벅, 약간의 간격을 두고 한 발짝 늦게 루카가 뒤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내가 물으마. 이런 쓰레기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뭐라고 생각하느냐?”

“…힘이요.”

“틀린 말은 아니군.”

“정답도 아니란 거예요?”

레시듀는 우뚝 솟은 폐건물로 고개를 돌렸다. 위태롭기 짝이 없다. 우중충한 하늘을 배경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지금 당장이라도 빗물에 쓸려나갈 것만 같았다.

“압도적이지 않고 어중간하게 갖춘 힘은, 오히려 문제를 야기하는 원흉이 된다. 자만심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강하다는 건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는 것이고, 이 도시처럼 여럿 음모가 얽히고설키는 곳엔 늘 일손이 부족하지.”

멀리 찾아볼 필요도 없이 터커만 봐도 알 수 있다.

그 남자는 레시듀를 ‘막강한 존재’ 정도로만 취급했다. 아마 이 도시의 누구보다 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쯤은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레시듀의 강함이 놈의 예상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가진 힘이나 의도와 상관없이 터커의 의도대로 움직였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터커의 예상은 틀렸다.

레시듀는 분명 처절할 만큼 약해졌으나, 필멸자의 음모 따위에 휩쓸릴 만큼 격이 떨어지진 않았다. 여전히 그에겐 손가락 하나로 이 도시를 짓누를 만한 힘이 있었다.

“그럼 힘보다 더 필요한 게 뭐예요?”

“의심과 경계.”

레시듀는 건물 내부로 들어서서 계단을 향했다.

“첫 대면에 의심하고, 안면을 튼 이후에도 그것을 거두지 않고, 상대가 신뢰를 보낸 이후에도 긴장을 풀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네 녀석은, 이 몸이 보기에 그 정도 경계심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

다름 아닌 루카가 살아 있단 사실이 그 최대증거였다. 한순간이라도 방심했다면, 치밀하지 못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레시듀가 모순을 느끼는 것도 그 부분이었다.

“다시 묻겠다. 어째서 나를 받아들인 거냐?”

아무 의심도 없이, 왜 첫 대면부터 긴장을 푼 거냐?

레시듀는 뒷말까지 내뱉진 않았으나 그 뜻만큼은 충분히 전해졌으리라.

“…….”

또각, 또각…….

당연히 엘리베이터가 가동되지 않는 곳이라서, 그들은 계단을 올라갔다. 루카의 집은 22층이었다.

루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1층에서 22층까지,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를 동안 단 한 마디도.

레시듀도 마찬가지였다.

이윽고 22층에 이르렀을 때도 복도를 걷고, 문을 열고, 비에 흠뻑 젖은 로브를 순식간에 말린 다음 메고 있던 배낭을 탁상에 올려뒀다.

탱그랑─

헐겁게 묶인 매듭이 풀어지며 통조림이 몇 개 삐져나왔다.

루카의 의아한 시선이 향하자, 레시듀는 침대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한 달분의 식량이다. 성인 기준으로 두 사람 몫을 요구했으니, 너 혼자 아껴 먹는다면 세 달은 거뜬하겠지.”

“네?”

“이것이 이 몸이 네게 주는 도움은 아니다. 겸사겸사 챙겨 온 거지. 네 녀석을 구한 것도 마찬가지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잘…….”

“일주일이다, 꼬맹이.”

“뭐가요?”

레시듀는 두 눈을 감으며 대꾸했다.

“그 사이에 바라는 걸 생각해 둬라.”

“…….”

루카가 다시 한번 침묵했다.

불안함에 차오른 눈동자가 탁상과 레시듀를 번갈아 보았다.

“…왜 일주일이죠?”

레시듀의 스산한 시선이 소녀를 향했다. 놀랍게도, 루카는 이번에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역시 굳센 생명체다.

아니, 내가 약해진 건가?

어느 쪽이든 나쁘지 않았다.

레시듀는 루카가 숨기고 있는 비밀이나, 현재 놓인 상황을 떠나서, 이 소녀가 생각보다 마음에 든다는 걸 인정했다.

그렇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일주일 뒤에, 나는 죽을 테니까.”

* * *

터커는 자신의 장단점을 명확히 알고 있다.

장점은 치밀성, 침착함, 권모술수, 암투……. 스스로 말하기도 뭐하지만, 종이 한 장을 빼곡하게 채울 수 있을 만큼 많다.

그럼 단점은 어떨까?

인간은 자신의 단점을 파악하기 힘든 종족이다. 스스로 좋을 대로 해석하는 편리한 두뇌가 자기객관화를 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점을 고려해도 자신의 단점이 장점보다 많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단점들 중 가장 최악의 것을 하나 꼽으라면, 그럴 수 있다.

터커는 원한을 잊지 않는다. 잊을 수 없다.

여태껏 몇 번이고, 몇십 번이고, 항상 그래왔다.

스스로 세운 계획에 균열이 일어났다는 것, 통제할 수 있을 거란 대상의 행동을 전혀 읽지 못했다는 점, 그로 인해 팔 한쪽을 잃는 굴욕까지.

하나여도 그를 미치게 만들 일이 세 번이나 동시에 일어났다.

인정한다.

지금 터커는 냉정한 상황이 불가능해졌다.

그러니까 이 남자를 부른 거겠지.

“나를 부르는 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지는 않을 텐데.”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터커는 방금 전까지 분노와 흥분으로 거칠게 맥동하던 심장이 싸늘하게 식는 걸 느꼈다.

이 괴물은 방금, 불과 10초 전만 해도 멜타운과 수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어느 도시에 있었다.

“예. 물론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다행히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제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가장 강한 분을 찾을 수밖에 없었지요.”

“그렇게 강한가? 그 외부인이.”

“강합니다.”

“어느 정도로?”

“제 안목을 속일 정도의 실력자니까, 최소한으로 잡아도 절대자급이겠죠.”

그러자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고작 절대자급이라면, 내가 이 도시를 대신 지우겠다.”

“…….”

도무지 웃을 수 없는 그 농담에 억지로 입 끝을 올렸다. 역시 ‘닐 플란드’와 커넥션을 만들어 둔 건 잘한 일이었다.

터커는 잠깐 남자의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당신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

그 말에 남자의 고개가 조금 들렸다.

“나와 비슷한 느낌?”

“제 직관直觀적 느낌이긴 합니다만…….”

“가장 믿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 그자의 이름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가.”

남자가 웃음을 흘렸다.

“축하한다, 필멸자. 너는 나의 흥미를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 말씀은…….”

“도와주겠다. 흥미로운 여흥거리가 될 것 같군.”

“가, 감사합니다. 뇌주雷主시여.”

“흠. 그 호칭은 영 들어도 적응이 되질 않는군.”

그러나 터커는 이 남자의 이름을 몰랐다.

때문에 변명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십이허주, 허의 세계를 지배하는 절대자들. 맹세코 제가 살아오며 보았던 가장 끔찍한 절망. 그리고 당신이 가진 힘은 그들에 비해 아무런 손색이 없습니다. 뇌주라는 이름은…….”

“유래 정도는 알고 있다. 내키지 않을 뿐이지.”

“그럼 당신을 뭐라고…….”

그제야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왔다.

비로소 어둠 속에 숨어 있던 형체를 희미한 조명이 비추기 시작했다.

“제우스(Zeus), 조우브(Jove), 주피터(Jupiter), 유피테르……. 이름은 여럿 갖고 있지만.”

남자는 새까만 선글라스를 내리며 웃었다.

“지금은 레티프(Retip)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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